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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르심과 택하심 (벧후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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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심과 택하심 (벧후 1:3-11)


어느 날 밤 한 남자가 마더 테레사를 찾아와 말했습니다.
“아이들이 여덟 명이나 되는 가정이 있습니다. 그들은 너무 가난해서 벌써 여러 날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했습니다.”
마더 테레사가 그 남자와 함께 그 집을 찾아갔을 때 아이들은 오랜 영양실조로 얼굴에 뼈만 남아 있었습니다. 그들의 얼굴에 슬픔이나 불행 같은 건 없었습니다. 단지 배고픔의 깊은 고통만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마더 테레사는 그 집의 어머니에게 쌀을 주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쌀을 두 몫으로 나누더니 절반을 들고 밖으로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녀가 돌아 왔을 때 마더 테레사가 물었습니다.
“어딜 갔다 왔습니까?”
그녀는 간단하게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웃집에요. 그 집도 배가 고프거든요!”

마더 테레사는 그녀가 쌀을 나눠준 것에 그다지 놀라지 않았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실제로 더 많이 나눌 줄 아니까요. 하지만 마더 테레사가 놀란 것은 그녀가 이웃집이 배가 고프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대개 우리 자신이 고통을 받고 있을 때는 자신의 고통만을 생각하느라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대해서는 마음을 돌릴 여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는 나 자신조차도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무엇 때문에 살아가고 있는지조차 잊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우리를 잘 아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내가 무엇 때문에 힘들어하는지 잘 알고 계십니다. 내가 무엇 때문에 슬퍼하는지 무엇 때문에 피곤해하고 좌절하기도 하는지 잘 아십니다. 아니 내게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도 잘 알고 계십니다. 내가 기뻐하는 일이 무엇인지도 잘 알고 계십니다. 어쩌면 나보다도 나를 더 잘 알고 계신 분입니다. 아니 알고 계실 뿐 아니라 내게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을 우리들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바로 우리의 아바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속 깊은 것까지도 다 알고 계십니다. 남들 앞에서 속으로 꽁꽁 숨겨둔 그런 마음까지도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그분이 또한 우리를 눈동자와 같이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아들딸을 키우는 부모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자녀들을 위해서 모든 것을 해주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을 다 해주지는 못하기에 마음 아파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아바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는 못하실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면 모든 것을 다 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먼저 우리는 그분을 힘써 알아가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후서를 시작하면서 무엇보다 먼저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이 우리의 신앙성장을 위하여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1:2절에서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로 시작하여 3절에서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라고 했습니다. 
또 5절에서도 “지식”에 이르라고 하였고, 8절에서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말라”고 했습니다. 

바울도 에베소서 4:13절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야” 우리의 믿음이 그리스도의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게 된다고 했습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우리의 구주되신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예수를 다 아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 때문에 그분이 이 세상에 오셨는지 그것도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왕중 왕이 되시는 그분이 오히려 가장 가난한 사람 가장 힘없는 사람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신 이유가 무엇인지 죽을 때까지 배워도 예수 그리스도를 완전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베드로 사도는 예수를 조금 더 알기를 힘쓰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를 알아야 합니까?

그것은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도 더욱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2절에서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 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주 예수를 믿음으로 은혜와 평강이 우리들에게 주어집니다. 우리가 주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먼저 하나님의 은혜요 죄 가운데 태어나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되었으니 평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다가 아닙니다. 예수를 조금씩 더 깊이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은혜도 더 풍성해지고 마음의 평화도 더욱 넘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은 본래 어떠한 분이시며, 예수님은 나를 위하여 무엇을 했으며, 지금은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를 알고 믿어야 합니다. 지금 예수님이 나를 통해서 가장 기뻐하시는 일은 무엇인지 내가 지금 무엇을 하기를 예수님이 기뻐하시는지를 알고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그 일을 해야 됩니다. 그렇게 예수를 알고 믿으므로 예수께서 주신 은혜를 바로 깨닫게 되고,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를 더 확실히 앎으로 우리의 마음속에 그리고 우리의 삶에 평화가 더욱 넘치게 될 것이요 적극적으로 화해하고 화목하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계속해서 본문 3절은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 하면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분이십니다. 그러니까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영광이 되게 하고 덕이 되도록 부르셨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고생만 지지리 하도록 부르신 분이 아닙니다. 뭇 사람들의 손가락질이나 받도록 우리를 부르신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를 영광이 되고 덕이 되도록 부르셨습니다. 당연히 우리는 그 부르심을 따라 하나님과 사람 앞에 영광이 되고 모든 이웃들에게 덕이 되도록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내게 뭐가 있어야 영광이 되고 덕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뭘 보여주려도 보여줄 것이 있어야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누군들 영광이 되고 싶지 않겠고 덕이 되고 싶지 않겠습니까? 한데 네게 그럴만한 힘도 능력도 지혜도 사랑도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영광과 덕이 되도록 부르신 이를 알아가게 되면 당연히 영광이 되고 덕이 되도록 내게 있어야 할 것으로 내게 있도록 하시는 분임을 또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3절을 다시 살펴보면 그의 신기한 능력 즉 신적인 능력을 가지고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가진 자로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도록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앞으로 주실 것이 아니라, 이미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나 같은 것이 무엇을 할 수 있느냐고 하지 마십시오. 이미 예수님께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지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는 힘과 능력이 전능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우리들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의 믿음의 주요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기에 마땅하도록 우리 가운데 함께 계신 예수님을 날마다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오늘 더 이상 내가 뒤로 미루지 말고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하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그 일을 서슴지 말고 실천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는가 하면 그럴 때 우리가 행복하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는 내 생각을 앞세우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지만 주님 이건 아닙니다. 어떻게 이게 가능합니까? 나는 못합니다. 아니 결코 하고 싶지 않습니다.” 또는 “나로서는 불가능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큰일을 내가 할 수 있단 말입니까?” 또는 “어떻게 그렇게 보잘 것 없는 일을 나보고 하라고 하십니까?”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주님께서는 이미 신적인 능력 전능하신 주님의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주님이 나를 낮추시는 것도 또 세우시는 것도 다 주님이 우리에게 유익하도록 다시 말해서 은혜와 평강이 더욱 넘치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우리는 날마다 깨달아야 합니다. 

계속해서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씀한 지극히 큰 역속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들을 하나님의 아들, 딸로 삼아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생복락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또 영원히 버리지 않고 날마다 눈동자와 같이 우리를 지키시겠다고 하는 약속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우리 모든 쓸 것을 채우시겠다고 하는 약속입니다. 끝까지 참고 선을 행하며 충성된 자에게 영광의 상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이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할 수가 있고, 이 약속 때문에 세상의 정욕을 물리칠 수가 있고, 이 약속 때문에 세상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고, 이 약속 때문에 세상의 모든 욕심을 참아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약속 때문에 그 어떤 어려움도 참아낼 수 있고, 이 약속 때문에 네게 있는 것으로 족한 줄 알며, 먼저 섬기고, 먼저 베풀고, 먼저 나누고, 먼저 격려하며, 먼저 손을 내미는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한다는 말씀은 성령의 능력으로 혹은 신적 능력으로 새 사람을 만들어서 의와 진리로 거룩해짐을 의미합니다. 바울 사도이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 하신 말씀처럼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요 새롭게 빚어진 사람이 되었습니다. 전에는 흙더미에 불과했으나 이제는 하나님이 아름다운 도자기로 빚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 보배로운 백성이 되게 만드셨습니다. 여전히 죄 가운데 살아가는 우리를 예수님의 보혈로 씻어주시어 거룩한 백성 삼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우리도 거룩한 삶을 살아가도록 날마다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를 깨우치시고 인도하시며 우리에게 새 힘을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온전하심 따라 우리도 온전해지도록 이끌어주시고 하나님의 자비하심 같이 우리도 자비를 베푸는 사랑의 사람이 되도록 이끌어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이렇게 중요한 까닭에 바울은 빌립보서 3:8절에서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그 당시로서는 최고의 학교를 다니며 최고의 선생에게서 배운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어떤 지식보다도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귀하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얻기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하고, 모든 것을 투자했다고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를 더 확실히 알려고 하면 배워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배우기 위해서 시간도 투자해야 합니다. 땀을 투자해야 하고, 때로는 물질도 우리의 정열도 투자해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기도해야 하고 예수님처럼 이웃을 돌아보아야 하며 예수님처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야 하고 끊임없이 베풀며 마지막에는 우리 목숨까지도 주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따라 우리들로 하여금 하늘과 땅에 속한 모든 것을 누리도록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보는 자마다 천국 백성의 삶이 무엇이며 천국을 누리는 삶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주님 앞으로 나아오는 사람들이 날마다 더하여 지는 귀한 역사가 우리 모두에게 있어지기를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는 더욱 힘써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로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신적인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주님께로부터 받은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누리는 자요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기 위하여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건 마치 우리가 퍼즐 조각을 맞추듯이 탑을 쌓아 나가야 하는데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믿음, 하나님이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을 믿는 믿음, 하나님께서 자녀된 우리들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날마다 더해주신다는 것을 믿는 믿음, 보배롭고 지극힌 큰 약속을 주사 신의 성품에 참여하게 하셨다는 것을 믿는 믿음, 이 믿음 위에 덕을 쌓아야 합니다. 흔히 듣는 말처럼 믿음은 좋은데 삶은 개차반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당연히 믿음의 사람은 덕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덕스러운 삶은 바로 믿음의 실천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우리의 삶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당연히 믿는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 안에서 천국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천국백성답게 살아야지 세상 사람처럼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우리만 손해라고요? 무엇이 손해입니까? 하나님께서 더 큰 상급이 주시는데 당장 눈앞만 보고 손해니 뭐니 그런 말 하지 마십시오. 

농부는 추수를 바라고 봄에 밭 갈고 씨를 뿌립니다. 열심히 김을 매주고 물을 대주기도 하고 빼주기도 합니다. 비료도 주고 김도 매줍니다. 그래도 병충해가 있기도 하고 가뭄이나 홍수로 피해를 보기도 합니다. 그런다고 그들이 다 포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음해 다시 또 심습니다. 어떻게 하면 피해를 보지 않고 풍성한 추수를 할 수 있을까를 연구하죠. 그것이 진짜 농부입니다. 지난번 태풍에 과일이 다 쏟아진 농장이 있었습니다. 웁디다. 어찌 울지 않겠어요? 그러면 해마다 태풍은 계속해서 불어올 텐데 어떻게 해야 되죠? 그럼 바람에 영향을 받지 않도록 바람에도 날아가지 않는 덮개를 씌우면 됩니다. 
그러기에 무엇보다 믿음 위에 덕을 세우십시오. 말 한 마디를 해도 덕이 되도록 하고 같은 것을 보고도 항상 긍정적으로 보고 긍정적인 삶을 살아가십시오. 

덕에 더할 것은 지식입니다. 바른 지식이 없으면 엉뚱한 데로 빠질 수가 있습니다. 여기 지식이란 세상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지식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아야 덕 된 삶을 살 수 있고 참된 천국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식에는 절제가 필요합니다. 절제를 해야 하는 이유는 모든 것이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해도 지금 해야 할 일이 있고 나중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음식의 맛을 내기 위해서 양념을 넣는다고 해도 적당히 넣어야 합니다. 

듬뿍 넣어서 좋은 것이 있고 조금만 넣어야 되는 것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만 있어도 되는 것을 두 개 세 개 가지려고 하지 말아야 하고 주님을 본받기 위해서는 때로는 하고 싶은 일도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새벽 기도를 위해서는 밤에 하고 싶은 일도 절제를 해야 하고 내 힘에 지나도록 하지 않도록 하는 절제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절제한다고 하는 것이 결코 쉽지가 않습니다. 더 먹고 싶은데 멈추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것도 아주 맛난 음식이 쌓여 있다고 하면 적당량만 먹고 멈추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래서 인내입니다. 참고 견뎌야 합니다. 어떤 때는 오래 참아야 할 때도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인내해야 할 부분은 우리들의 급한 성격입니다. 상대방이 말할 때 끝까지 들어줄 수 있어야 하고 화부터 내려고 하지 말고 왜 상대방이 그렇게 했는지를 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생각과 다르다고 내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고 화를 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나를 내려놓는 훈련이 그래서 필요합니다. 어떤 사람은 또 너무 속을 드러내지 않아서 상대방을 답답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다그칩니다. 말 좀 해 보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도 참아야 합니다. 성격에 따라서는 다그치면 오히려 더 입을 다무는 사람 오히려 말을 더 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 상대방이 말할 때까지 참고 기다리는 것도 중요합니다. 왜 말 안했냐고 하지 말고 이제라도 말해주니 고맙다고 하십시오. 이제라도 알게 됐으니 다행이라고 하십시오. 화를 낼 수는 있어도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고 했습니다. 절제를 위해서는 정말 오래 참아야 합니다. 인내가 없이는 절제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럼 무작정 참고만 있는 것이냐? 아닙니다. 그래서 경건입니다. 경건이란 모든 것을 기쁨으로 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변함없이 중보하며 축복하는 것이요 끊임없이 베푸는 것입니다. 주고 또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항상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수 있어야 하고 나갔다가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합니다. 한 마디로 경건은 주님의 마음을 따라 실천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런 경건의 삶을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로 설명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 앞에 예배하기를 힘쓰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부르짖기를 힘쓰되 감사함으로 아뢰는 우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요즘 말로 경배와 찬양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경건에 더할 것은 필리아의 사랑 곧 형제 우애입니다. 이웃 사랑의 실천입니다.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다고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믿음 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성도들을 내 몸처럼 사랑해 주십시오. 내 목숨만큼이나 귀하게 여겨주십시오. 나도 배고프지만 나만큼이나 배고픈 이웃을 돌아볼 줄 아는 마음, 그들을 위해 하나라도 더 챙겨주는 이런 모습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마지막으로 필요한 것은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흔히 누구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누구를 이야기할 것 없습니다. 모든 문제가 다 어디서부터 오느냐 하면 내게서부터 옵니다. 내 딴엔 내 할 도리를 다 했다고 생각합니까? 결코 아닙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셋은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이 사랑이라고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랑은 하나님 나라까지 이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는 믿음 안에서 하늘나라까지 같이 갈 사람들입니다. 

지금 함께 할 수 없다면 그럼 둘 중 하나는 하나님 나라에 같이 있을 수 없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러므로 누구와는 함께 할 수 없다고 하는 마음이 있거든 회개하십시오. 사실은 그 마음을 심어주는 이가 있는데 바로 악한 마귀입니다. 악한 마귀는 우리를 어떻게 할 수는 없으니 자꾸 부정적인 생각을 우리 마음에 심어주려고 하고 나만 위하는 마음을 심어주려고 하고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 우리로 하나 되지 못하게 만들려고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마지막 다락방 기도를 통해서도 저희로 하나 되게 하기 위해서라고 거듭 거듭 기도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주님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 되도록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기도하고 계신데 누가 우리를 갈라놓으려고 하고 무엇이 우리를 갈라놓으려고 한단 말입니까? 속지 마십시오. 주님의 사랑과 용서하심이 없었다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데 그렇다면 나도 은혜 아래 살아가는 것처럼 다른 사람도 은혜를 누릴 수 있도록 우리가 서로 소중하게 여기며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나만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닙니다. 내가 도무지 함께 할 수 없다고 하는 그 사람을 위해서도 예수님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온 천하보다도 귀한 생명입니다. 그 생명을 건져 구원하여 하나님 나라에 이르도록 이끌 책임이 내게 주어져있다고 할 때 그렇다면 나는 나의 모든 것을 내려놓을 뿐 아니라 내 목숨까지도 내어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아가페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바로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셨고 오늘 그 마음을 품어 세상을 살라고 하십니다

아직 주님을 믿지 않는 가족, 친척, 이웃을 주 앞에 인도하기 위해 우리는 정말 가슴을 치며 그들을 위하여 울며 기도해야 할 것이요 그 배후에서 그들을 조종하여 죄 가운데 살게 하고 주님 앞에 나오지 못하게 하는 악한 마귀를 예수 이름으로 날마다 묶어야 할 것이요 또한 우리 마음에 그를 외면하고자 하는 마음을 심어주는 악한 마귀를 예수 이름으로 묶고 물리치며 오직 사랑의 하나님 성령의 능력으로 내 마음을 가득히 채워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이런 것이 없는 자는 맹인이라 멀리 보지 못하고 그의 옛 죄가 깨끗하게 된 것을 잊었느니라 이같이 함으로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얻게 되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다 하나님 나라에 우리가 소망하는 천국에 넉넉히 들어갈 뿐 아니라 모든 영광의 면류관을 받아 누리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헨리 포드가 경영하고 있는 공장의 발전기가 고장이 나서 공장의 가동이 중지되었습니다. 수리공들을 다 불러댔지만 고장 난 발전기는 꼼짝도 하지 않습니다. 공장의 손해가 커지자 사장인 헨리 포드는 이 발전기를 제작하여 설치한 유명한 찰리 스타인메츠를 초빙했습니다. 스타인메츠는 몇 시간 동안 이리보고 저리 보며 가끔 모터를 여기 저기 두드리고는 스위치를 올리자 요지부동처럼 보였던 그 발전기는 다시 요란한 소리를 내며 힘차게 돌아가 공장이 다시 정상가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며칠 후 무려 만 달러나 되는 청구서를 받고 놀란 헨리 포드 사장은 “찰리, 이 청구서의 금액은 당신이 그 모터를 두드리며 몇 시간 일한 것에 비해 너무 비싼 금액이 아닌가? 명세서를 다시 보내 주게”라는 내용의 편지를 동봉하여 만 달러짜리 청구서를 돌려보냈습니다. 다시 며칠이 지난 후 찰리 스타인메츠로부터 “모터를 두드리며 일한 공임 : 10달러, 어디를 두들겨야 할지를 알아낸 것 : 9.990달러, 합계 : 10,000달러”라고 쓴 쪽지와 함께 만 달러짜리 청구서가 날아왔고, 이를 본 헨리 포드는 머리를 끄덕이며 그 만 달러를 지불했다고 합니다.

발전기를 만든 찰리 스타인메츠만큼 그 발전기를 잘 아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잘 모르는 사람이 망치를 가지고 100년을 두드린다 해도 고장 난 발전기는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점점 더 고장이 심해질지도 모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흙을 가져다 빚어서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그분이 우리 모두를 속속들이 잘 아십니다. 우리의 마음 깊은 곳까지 다 들여다보십니다. 그분 앞에서 오늘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돌아보십시오. 우리들의 목적지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천국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천국백성답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나는 지금 천국을 누리고 있습니까? 그렇지 못하다면 그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내가 온전한 사랑의 사람이 되지 못한 까닭은 아닙니까?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베드로 사도는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내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아니 그렇게 하려고 하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편안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학생들은 지금 컴퓨터 게임이 즐겁습니다. 컴퓨터 게임도 나쁜 것은 아닙니다. 단지 절제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절제가 어렵습니다. 왜요? 그렇게 만들어놓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당장은 게임 하는 것이 편합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시험 볼 때 후회합니다. 그런데 후회는 잠깐뿐 또 다시 거기에 휩쓸립니다. 

공부는 지겹다고요? 그게 누구 말입니까? 사실 나이 먹고 나서 보니까 공부만큼 재미있는 것이 없어요. 그런데 젊어서 그걸 몰랐어요. 그래서 후회해요. 그때 좀 더 할 것을……. 이게 바로 마귀의 전략입니다. 지금은 그냥 내지르면 편할 것 같아요. 아뇨. 잠깐은 그렇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그것이야 말로 지옥을 겪게 될 것입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성령 하나님이 계속 우리 마음을 두드리시기 때문입니다. 결국 사랑은 결단입니다. 믿음이 결단이듯이 사랑 역시 결단입니다. 내가 그 사람도 사랑하리라. 왜냐하면 나도 그런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나를 위해서 죽으신 것처럼 그 사람을 위해서도 죽으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차피 우리는 흙으로 지어진 존재입니다. 성령께서 붙잡아주시지 않으면 비가 오지 않은 흙이 먼지로 풀풀거리는 것처럼 우리 역시 온갖 추한 모습으로 가득할 뿐입니다. 거기에 기쁨이 없습니다. 거기에 평안이 없습니다. 후회로만 가득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내 안에 주께서 신적인 능력으로 주신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능력 다시 말해서 주님의 사랑으로 아가페의 사랑으로 모두를 감싸 안으십시오. 그래서 이 사랑으로 승리하며 기쁨과 평강을 누리는 삶을 우리 모두가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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