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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마음이 완악해질 때 (삼상 15: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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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완악해질 때 (삼상 15:17-23)
 
사울 왕은 지위에 걸맞은 성품을 지니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적인 법칙이 있습니다. “크고자 하면 내려가야 한다. 높고자 하면 낮아져야 한다. 많고자 하면 나누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숙한 성품을 요청하십니다. 지위가 높아지고 책임이 많아질수록 우리에게 겸손한 성품을 요구하십니다.
 
이스라엘의 왕이며 지도자였던 사울은 한 나라의 왕이 되는 명예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두려움이 엄습할 때 그는 쉽게 추락하고 맙니다. 그의 마음속에 질투가 생길 때 미움이 커지게 되었고 왕으로서의 품격과 품위를 상실하고 맙니다. 사울의 생애를 보면 성공한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남이 다 부러워하는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 올라갔습니다.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부족한 것이 있었다면 그 지위에 걸맞은 성품이었습니다. 

이런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재능은 선물이다. 그러나 성품은 선택이다.” 재능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성품은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 매일 스스로 연마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성품이 됩니다. 그리하지 아니하면 많은 재능이 하루아침에 무용지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엄청난 성공을 했는데 그것을 지탱하는 성품이 뒤따라가지 아니하면 그 모든 성공은 물거품으로 바뀌고 말 것입니다. 

사울 왕이 그런 위기에 봉착했습니다. 사무엘상 13장 1절을 보면 사울이 왕이 될 때 나이가 사십 세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십이라는 나이가 어떤 나이입니까? 요새 한창 잘 나가는 나이가 사십입니다. 사회에서 지도자적인 역할을 하는 나이가 사십입니다. 공자는 자기 나이 사십 세를 불혹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일에도 흔들림이 없는 나이입니다. 멋진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십 세까지 열린 마음으로 배우고 준비하고 훈련받은 사람이 사십 세에 불혹의 나이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저기 기웃거리지 않고 독자적인 자기 생을 이끌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와 반대로 준비하지 아니하고 열린 마음으로 자신을 훈련시키지 아니하고 사십 세가 되고 나면 불혹의 나이가 되었을 때 듣는 귀가 막히기 시작합니다. 보는 눈이 희미해지기 시작합니다. 깨닫는 능력이 줄어들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열린 마음은 점점 사라지고 목은 꼿꼿하게 굳고 마음은 완고하게 될 때가 사십이라는 나이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 나이가 몇이십니까? 사십 세가 왜 중요할까요? 자기를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가, 아니면 정체되거나 뒷걸음질 칠 수밖에 없는 시기인가를 결정할 때가 사십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나가 인생의 성공을 원하며 달려왔습니다. 돈과 재물을 향해서 달려온 사람도 있습니다. 세상의 지위와 명예를 위해서 달려온 사람도 있습니다. 무언가 남을 움직이는 권력을 향해서 달려온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 가지고 있다고 여길 때에 자기 삶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나의 지위, 내가 갖고 있는 모든 풍성함과 풍요, 내가 갖고 있는 직분과 직업, 내가 그것에 걸맞은 성품을 지니고 있는가를 확인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내속에서 훈련시키지 아니하면 우리의 모든 것이 급전직하로 추락하게 되고 맙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아브라함의 성품, 모세의 성품, 베드로의 성품, 바울의 성품을 닮으려고 합니다. 무엇보다 주님이신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갈 당위성을 요청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많은 것을 가졌어도 우리가 성공했다고 사람들이 얘기해도 이 성품이 뒤따라가지 아니하면 그 성공은 참된 성공으로 지속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바로 사울 왕이 그러했습니다. 

성공한 사람들이 무너지는 4가지 요인이 있습니다

미국 하버드 심리학자인 스티븐 버글래스(Steven Berglas)가 「성공증후군」이라는 책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쉽게 무너지는 요인을 다음과 같이 꼽았습니다. 그는 위험한 바이러스가 그들을 붙잡았는데 4A 바이러스가 있다고 지적을 합니다. 

첫째입니다. Arrogance입니다. 교만입니다. 오만하고 방자한 것입니다. 안하무인적인 마음자세입니다. 자기 혼자 이렇게 된 것으로 착각하는 마음입니다. 그것은 모든 성공을 무산시키는 가장 위험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두 번째입니다. Painful feeing of Aloneness입니다. 혼자 있는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는 지도자가 되면 여지없이 추풍낙엽처럼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본래 지도자가 되는 것, 자기 직분을 받는 것은 외로운 길입니다. 그 길을 내가 가겠다고 작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외로움의 고통을 극복하지 못하면 지도자이기를 포기하거나 때로는 자기의 생명을 스스로 끊어버립니다. 이것은 소극적인 모습이기도 합니다. 세 번째입니다. Destructive Adventure Seeking입니다. 파괴적으로 모험을 찾아나서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도 상처를 받고 남에게도 상처를 주면서 모험을 추구하는 태도이기도 합니다. 수많은 성품이 갖춰지지 않은 악한 지도자들이 이런 역할들을 했습니다. 네 번째입니다. Adultery. 성적인 쾌락을 통해서 자기의 불만을 위로하고 해소하려는 아주 위험한 태도입니다. 

사울 왕은 교만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 왕이 겸손한 줄 알고 직분을 맡겨 주셨습니다. 그런데 점점 교만해집니다. 여러분, 직분을 맡으면 맡을수록 겸손해져야 합니다. 그것이 살아가는 길입니다. 남도 살고 나도 사는 길입니다. 그런데 직분을 맡고서 교만해지면 그 직분이 파괴적인 직분이 되고,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수없는 상처를 주는 직분이 되고 맙니다. 사울은 바로 이 교만이라는 바이러스에 걸려들었습니다. 그러면서 그의 인생이 서서히 망가지고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본래 사울이 교만했을까요? 그가 부르심을 받았을 때는 겸손했습니다. 자기를 스스로 작은 자로 여길 줄 알았습니다. 사무엘상 9장 21절은 자기를 낮추고 있는 사울 모습을 기록해 주고 있습니다. 

“사울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이스라엘 지파의 가장 작은 지파 베냐민 사람이 아니니이까 또 나의 가족은 베냐민 지파 모든 가족 중에 가장 미약하지 아니하니이까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이같이 말씀하시나이까 하니” (사무엘상 9:21)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 그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겠다고 말씀하실 때 그는 깜짝 놀랐습니다. “저는 못합니다. 제가 어떻게 그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가문의 전통을 보세요. 연약한 백성이고 연약한 가문입니다. 나도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그때 오히려 사무엘은 사울에게 축복하고 왕의 기름을 부어주었습니다. 그런데 왕이 되고 나서 마음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본문을 보면 사무엘의 꾸중이 나옵니다. “네가 부르심을 받았을 때 가지고 있던 모습, 초심을 잃어버렸구나. 처음의 두렵고 떨리던 겸손한 마음을 잃어버렸구나.” 그렇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이 이르되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 여호와께서 왕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으시고” (사무엘상 15:17) 

“당신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었습니다. 첫 출발을 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거룩함을 위해서 아말렉 백성을 다 멸하고 모든 소유물도 다 버리라고 말씀하셨는데 당신은 아말렉 왕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아말렉 백성이 가지고 있던 좋은 것들을 탐했습니다. 좋은 소, 기름진 양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면서 사무엘은 사울을 향해서 탄식하고 있습니다. 겉으로만 순종한다는 것입니다. 형식만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속에는 다른 꿍꿍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해서 자기 욕심을 채우는 자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형식적인 신앙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어찌하여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고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여호와께서 악하게 여기시는 일을 행하였나이까.” (사무엘상 15:19) 

사무엘은 사울 왕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왜 악한 일을 행했습니까? 왜 하나님 말씀을 청종하지 않고 욕심을 부렸습니까?” 이 말씀을 들었을 때 어떻게 해야 했을까요? 그냥 무릎을 꿇어야 했습니다. “맞습니다. 내가 그리했습니다. 내가 잘못했습니다. 내 속에 탐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울 왕은 회개하기를 원하지 아니했습니다. 변명하기 시작했습니다. 자기 잘못을 뉘우칠 마음이 결코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20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나는 실로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여 여호와께서 보내신 길로 가서 아말렉 왕 아각을 끌어 왔고 아말렉 사람들을 진멸하였으나” (사무엘상 15:20)

사무엘이 당신은 청종하지 아니했다고 하는데 나는 청종했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면서 여호와의 뜻대로 비슷하게 행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비슷하게 형식적으로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마음을 보십니다. 말씀의 본질을 깨닫기 원하십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 같으면서 기회가 되는 순간에 자기의 욕심을 채우기 원했습니다. 

우리는 왜 기도할까요? 우리는 자녀들을 키우면서 뭐라고 말합니까? 아들아, 딸아, 네가 어려운 것이 있으면 내게 얘기해라. 자녀의 권리로써 부모에게 구하고 요청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도하라고 하는 것도 다른 이유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기도를 의무로만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예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배하는 자를 찾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함으로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른 생각이 머릿속이 가득 차있어도 성전 뜰만 밟으면, 성전 안에서 잠깐이라도 있으면 그것이 예배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도 외면적이고 형식적인 신앙의 모습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마음의 중심을 보십니다

“다만 백성이 그 마땅히 멸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길갈에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양과 소를 끌어 왔나이다 하는지라.” (사무엘상 15:21)

그것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사울 왕은 백성들 탓을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돌립니다. “백성들이 욕심이 많아서 저렇게 했습니다. 가장 좋은 것을 남긴 것은 사실 하나님께 드리기 위함입니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께 핑계를 댔습니다. 하나님께 제사하려고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모습을 기뻐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보시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간절한 기도를 듣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속의 상한 마음, 통회하는 마음을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분명히 확인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돈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예배드리는 이 시간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드리는 우리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복을 넘치게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완악해지면 신앙의 생명력이 끊어지기 시작합니다. 또한 불순종하고 악을 행하면서도 잠깐 와서 예배드리고, 잠깐 기도하고, 잠깐 헌금하면 모든 것이 탕감된다는 보상심리도 우리에게 있습니다. 이것은 아주 위험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을 설레는 가슴으로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형식적으로 만들고 종교로 만들어버리는 위험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사울에게 이렇게 가르칩니다.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사무엘상 15:22) 

재물을 많이 갖다놓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마음이 훨씬 좋은 것입니다. 숫양의 기름보다 하나님의 말씀듣기를 사모하는 열망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것입니다. 

순종을 상실한 풍요는 독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세상에 나아가 살면서 더 많이 갖고 싶어 합니다. 세상에서 더 큰 전리품을 얻고 싶어 합니다. 인생에서 더 큰 축복을 받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더 높이 날아가고 싶어 합니다. 그때 우리가 조심해야 합니다. 성장 자체만을 위해서 성장을 추구하는 것은 위험한 것입니다. 때로는 암적 세포와도 같은 존재로 변모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에서 가장 성장하는 힘이 강한 세포가 무엇입니까? 암세포입니다. 정상적인 세포는 옆의 세포가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돌아보고 균형과 조화를 이루면서 자라납니다. 그러다가 자기 역할이 끝나면 죽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상세포입니다. 

그러나 암세포는 옆의 세포가 어떻게 자라는가를 전혀 고려하지 않습니다. 오직 자기가 성장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끌어들입니다. 그리고는 마지막까지 죽지 않습니다. 주인의 몸이 죽을 때까지 버티고 있습니다. 그것이 암입니다. 그래서 무서운 것입니다. 무조건 성장하겠다는 것입니다. 무조건 내가 차지하겠다는 것입니다. 혼자 독식하려는 성장은 남을 죽입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도 죽습니다. 그래서 모든 풍요가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모든 성장이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말씀이 사라진 풍요, 순종을 상실한 교만한 풍요, 이것은 엄청난 재앙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습니다. 목적을 잃어버린 풍요, 방향을 잃어버린 성장은 잘못된 것입니다. 

축복받기를 원하면 왜 축복받기를 원하는지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건강하기를 원하면 왜 건강해야 하는지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높은 지위와 권력을 갖기를 원한다면 이 권력을 왜 취해야하는지 하나님 앞에서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가진 권력, 내가 가진 재물, 내가 가진 능력이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죽이는 것이 되고 맙니다. 

마음의 완악함을 버리고 주님의 성품을 닮아가십시오

사울왕은 교만함의 바이러스에 걸리게 됐습니다. 그러면서 서서히 외로움의 고통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에게 가까이 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파괴적인 시도를 하기 시작합니다. 사무엘의 대제사장권을 무시하고 자기가 제사를 드립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그로부터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 (사무엘상 15:23)

거역하는 것은 무당에게 가서 점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해서 마음이 딱딱해지는 것은 우상에게 절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하나님께서 당신을 버리실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다시 되돌아보셔야 합니다. 우리가 많이 가졌습니까? 세상에서 지위를 누리고 있습니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삶이 풍성합니까? 그에 걸맞게 성품이 바뀌어져야 됩니다. “하나님, 내안에 주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사모하는 성품을 주옵소서. 주님의 성품을 닮아가려고 하는 열망을 제게 주옵소서. 그래서 제가 갖고 있는 직책, 제가 갖고 있는 직위, 제가 갖고 있는 힘, 제가 갖고 있는 영향력에 걸맞은 참된 성품으로 변화되게 하옵소서. 결코 마음이 완악해지지 않게 하옵소서.” 그때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에 감사하면서 “하나님, 내게 이만큼 주셨으니 이제는 주님을 위해서 내 삶이 쓰임 받고 싶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겸손하게 그 일을 행하기 원합니다.”라고 고백하며 한 걸음씩 나아가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김지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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