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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유와 자유인 (민 14: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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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와 자유인 (민 14:20-25)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땅에서 참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오랜 기간 동안 견디기 힘든 고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그렇게 고생하는 모습을 보시고 400년의 노예생활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열 가지 재앙을 내려가면서 큰 기적으로 애굽을 치고, 완악하고 강퍅한 바로의 마음을 꺾어서 이스라엘을 건졌습니다. 

홍해를 가르는 큰 기적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왔을 때에 감격의 노래, 자유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러나 유감된 것은 본문에 나타난 바와 같이 이렇게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은 태반이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그리고 남은 이스라엘은 이제 요단강만 건너가면 가나안인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요단강을 건너가지 못하게 하고 다시 광야로 들어가게 하십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40년을 훈련시킵니다. 그 훈련을 거치고 난 다음에야 요단강을 건너가게 하셨습니다. 

여기에는 엄청난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그 세대나 오늘 우리들에게나 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자유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유란 어떻게 누리는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진정한 자유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물리적 자유, 경제적 자유, 정치적인 자유, 그것만 주어지면 모든 것이 다 잘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정말 중요한 것은 자유와 자유인의 문제입니다. 자유가 주어졌다고 다 자유가 아닙니다. 자유인이 되어야 자유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자유가 주어졌다는 한 가지만 가지고는 절대로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온전하게 인격적으로, 도덕적으로 그리고 종교적으로 자유인이 되고 나서야 비로소 자유가 자유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에게 자유는 없다하여 힘쓰고 애써서 가난을 벗어났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돈에 노예가 되어 있습니다. 이건 자유가 아닙니다. 얼마든지 마음대로 먹고 마시고 즐기며 무엇이든 하면서 살 수 있는 자유로운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죄를 짓고 도망 다닙니다. 이게 자유입니까? 정치적인 자유란 것도 우리에게는 주어졌습니다. 어디엔가 소속이 될 수도 있고 조직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조직의 방향이 싫습니다. 어디를 가도 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불평이고, 시간이 지나도 불만하면서 마음이 여전히 방황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자유이더냐 말입니다. 

여러분, 어떤 환경에서도 내가 자유인이 되기까지 자유는 자유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자유는 환경이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자유인이라고 하는 자기 존재의 정체가 먼저 세워져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신앙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신앙적 자유란 무엇입니까? 내가 믿을 수도 있고, 안 믿을 수도 있고, 교회 나갈 수도 있고 안 나갈 수도 있다는 그런 초등적인 자유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자유의 참뜻을 모르고는 자유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은총적인 계획과 자유하게 하시는 목적과 궁극적인 승리를 주시는 그 숭고한 뜻을 헤아리지 못하는 사람은 자유인이 아닙니다. 

신앙 안에서 자유하지 못하게 하는 여러 가지 요소들이 있겠습니다만 특별히 원망하는 것은 자유가 아닙니다. 원망하는 자의 마음에는 자유가 없다는 말입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원망하는 사람은 자유로울 자격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의 그 지긋지긋한 노예생활에서 벗어나서도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죄목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바로 원망 죄입니다. 왜 원망이 죄가 된 것입니까? 그 원망의 일차적인 대상은 모세를 향한 원망이었습니다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의 원망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불신입니다. 자기들에게 주어진 엄청난 자유가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권능이요,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하는 그 귀중한 믿음, 그리고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현실 속에서 조그마한 어려움을 당하면서 버릇처럼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오늘 본문 22절에도 보니까 열 번이나 하나님의 권능을 시험하고 하나님께 불순종했던 저들입니다. 그러면서 지금까지도 하나님을 원망하는 그런 불신앙이 그들에게는 있었습니다. 그 열 번이라는 게 실제로 ①홍해에서, ②마라에서, ③신 광야에서 그리고 ④,⑤만나를 주셨을 때 두 번, ⑥르비딤에서, ⑦호렙산에서, ⑧다베라에서, ⑨기브롯 핫다아와에서, 그리고 ⑩가데스에서 일어난 일들입니다만 열 번이라는 숫자는 완전하고 가득찼다는 의미로서 이루 말할 수 없이 원망했던 이스라엘의 모습을 꼬집는 말입니다. 지금까지 원망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원망에 대해서 생각할 때 또 하나의 문제가 무엇이냐 하면 어떤 원망이든지 원망 뒤에는 무책임이라고 하는 것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 원망의 동기는 자기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내가 오늘 못 사는 건 옛날 그 사람 때문이고, 내가 잘못된 것도 다른 누구 때문이라는 겁니다. 내가 오늘 이 모양 이 꼴로 사는 데는 전적으로 다른 사람의 영향이 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를 이 꼴로 만든 그 사람이 책임을 져야하고 이렇게 된 나에게는 아무런 책임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원망하는 것을 보면 딱 이렇습니다. 모세가 책임이 크다는 것입니다. 책임을 지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사람은 자유인이 아닙니다. 자기 자유를 다른 사람에게 스스로 반납해 버린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책임을 물을 자격도 이미 없어진 사람입니다. 

여러분, 내 책임은 내가 지는 겁니다. 특별히 자유에는 엄청난 책임이 따르는 것이요, 내가 선택하고 내가 결정한 일에는 내가 책임까지 지는 겁니다. 더 나아가서 내 책임 내가 지고, 남의 책임까지 내가 질수 있을 때, 나라고 하는 존재의 영역이 그만큼 넓어지는 겁니다. <자유>가 먼저가 아니라 내가 먼저<자유인>이 되고야 자유가 있단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떠했습니까? 애굽에서 나와 좀 지내면서 오늘 조금 어렵다고 해서 곧 하는 말이“그 옛날에 애굽에서 비록 노예생활을 하긴 했지만 고기 가마 옆에 앉아서 갈고리로 고기나 훔쳐 먹던 그때가 좋았는데…….”그랬습니다. 이게 말이나 되는 얘기입니까? 정말 그렇습니까? 그들의 형편에서 나와야할 제대로 된 말은“거기서 배불리 먹기보다는 여기서 굶어 죽는 게 났다.”그래야 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자유가 어떤 자유입니까? 애굽에서의 몇 세대가 종으로 살던 그 과거를 청산할 수 있는 정말 가치 있는 자유 아닙니까? 이렇게 정말 소중한 자유였는데 그들이 스스로 자유인이 되지 못해서 이 자유를 하찮은 물질과 하찮은 정욕에 빼앗기겠다는 겁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에서의 삶을 보면 걸핏하면 모세를 죽이겠다고 협박했습니다. 물론 모세가 나오자고 해서 나온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나오기 싫은 사람은 나오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데 다 따라 나선 것은 스스로 선택한 일들입니다. 그렇다면 그 책임마조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야합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좀 고생스럽다고 한다는 소리가“모세, 너 왜 우리들 데리고 나와서 다 죽게 하느냐! 애굽에 공동묘지가 모자라더냐? 왜 여기까지 데리고 나와서 죽이려 하느냐?”고 원망하면서 자유하지 못했던 그 시절을 동경하는 어리석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노예적 과거, 노예적 상처, 노예적 성격, 노예적 세계관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는 모습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것 때문에 자유인이 되지 못했고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노예적 과거는 잊어야 합니다. 노예적 상처는 잊어야지요. 노예적인 가치관 노예적인 세계관을 버리고 이제는 진정한 자유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 큰 자유가, 그 위대한 자유가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결정적으로 오늘 본문은 이제 가나안을 정탐하고 돌아 온 정탐꾼들의 보고를 듣고 현실적인 자신들의 형편에 낙심한 나머지 하나님의 약속마저도 까맣게 잊어버리고 제 살길을 찾아야겠다고 아우성치면서 차라리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않겠냐고 목소리를 높입니다. 

전형적으로 자유는 있으되 자유인이 되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원망이 있고, 불만이 있고, 불평이 있습니다. 이것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었기 때문에 오늘 본문에 하나님께서는 진노하셨습니다. 그리고 불순종하고 원망만 일삼았던 그들을 결단코 가나안에 들여보내지 않겠노라고 단호한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시면서 24절을 보면 갈렙만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하나님을 따랐기에 그들의 자손에게 가나안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자유와 자유인! 여러분, 우리는 이 둘 다 누리고 있습니까? 자유를 소유한 자유인으로 살아가고 있느냐 말입니다. 자유인은 자유의 가치를 압니다. 자유의 소중함을 압니다. 현재가 아무리 어려워도 자유가 있는 한 그건 소중한 것입니다. 여러분, 노예적인 번영이 좋은 것입니까? 자유적인 가난이 좋은 것입니까? 죄와 더불어 향락을 누리기보다는 차라리 의와 함께 고난을 선택 하는 것이 신앙 안에서의 자유인의 모습입니다. 

[사도바울]은 갈5:1절에서 절실하게 우리에게 가르칩니다.“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죄로부터 자유 했다면 자유인으로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불평과 원망으로부터 자유 했다면 자유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자유인으로 사는 길은 원망보다는 감사하는 삶이요, 절망하기 보다는 찬송 하는 삶이요, 불만하며 찡그리기 보다는 기뻐할 줄 아는 삶이 자유인의 삶입니다. 자유가 주어졌지만 자유인이 되지 못해서 오늘도 원망하고 불평하고 살아가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모든 것을 은총 적 은혜로 만들어 가는 자유인으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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