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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으로 모세는 (히 11:2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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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모세는 (히 11:24-26)


믿음이란 무엇인가. 구약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은 장차 나타날 그리스도에 대해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내용을 굳게 신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나타나지 않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믿음이란 하나님께 자기의 실존을 완전히 맡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약성경에서의 믿음은 하나님을 믿는 것과 예수를 믿는 것이 결합되어 있습니다. 믿음은 예수를 주 그리스도로 신앙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인격화(人格化)되고 행동화(行動化) 된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고 했습니다. 
따라서 믿음의 내용은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한 확증이며 믿음의 생활은 그리스도가 주가 되신다는 고백입니다.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한 자의 삶은 자기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것이므로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살아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현실에 메이지 않고 장차 우리에게 주어질 하나님의 구원의 세계를 지향합니다. 

사도행전 19장 2절에 『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고 했습니다. 
바나바는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자라고 했습니다(행 11:24). 제자들이 기쁨과 성령이 충만했습니다(행 13:52). 성령이 충만한 생활은 믿는 것을 행동화(行動化)하는 것을 말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입니다(약 2:17).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된다고 했습니다(약 2:22).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했습니다(약 2:26).
믿음대로 행하는 것이 성령이 충만한 사람입니다. 모세는 자신의 믿음을 행함으로 나타냈습니다. 

Ⅰ. 모세는 자신의 명예보다 하나님의 영광 을 선택했습니다. 

본문 11장 24절에 『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라고 했습니다. 
출애굽기 2장 10절에 『 그 아이가 자라매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니 그의 아들이 되니라 그가 그 이름을 모세라 하여 가로되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 내었음이라 하였더라 』고 했습니다. 
여기 『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라는 말은 어머니 요게벳을 통하여 모세가 양육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출애굽기 2장 9절에 『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이 아이를 데려다가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 내가 그 삯을 주리라 여인이 아이를 데려다가 젖을 먹이더니 』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했습니다. 
모세는 자신의 정체성(正體性, identity, 변하지 않는 존재의 본질을 깨닫는 성질을 가진 독립적 존재)에 충실했기 때문에 그가 내린 결단은 신중했습니다. 모세가 자신이 히브리인인 것을 자신과 주위 사람들에게 공적으로 자처(自處, 자기 스스로 어떤 사람인 것을 나타냄)하는 행위가 곧 자기 백성을 괴롭히는 애굽 사람을 쳐 죽이는 것이었고 그것은 동시에 바로의 공주의 아들 됨을 거부하는 행위입니다.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서 지위와 명성이 보장되어 있지만 믿음으로 그 모든 것을 포기했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주신 믿음이 시각적이고 감각적인 것보다 그의 마음을 움직이는 강력한 지배 이데올로기(독, Ideologie : 어떤 사회집단의 사상 행동을 근본적으로 제약하거나 이끄는 관념이나 믿음의 체계) 가 되었습니다. 
모세는 이때 이미 사회적 지위와 명예의 허무한 것을 분별할 줄 알았습니다. 마음이 진실로 하나님에게 있다면 세상의 부귀나 쾌락에 미혹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마음이 그런 것에 위축되거나 고무되지도 않을 것입니다. 
로마서 10장 17절에 『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고 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만남에서 절대 순복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들었고 믿었고 그것을 실행했습니다. 
모세의 믿음은 성령으로 충만했습니다. 모세의 믿음은 온전한 믿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포기하기 힘든 자신의 명예와 자신의 유익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Ⅱ. 모세는 자신의 안락함보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택했습니다. 

본문 11장 25절에 『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라고 했습니다.
모세에게는 바로의 왕궁에서 왕자가 누릴 수 있는 쾌락과 모든 권한이 주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스라엘 백성"을 뜻하는 민족주의적 개념이 아니라 "영적인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즉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의미하는 종교적 개념이 내포된 표현입니다. 여기 "죄악의 낙"은 모세가 바로의 왕궁에서 도덕적으로 타락한 생활을 하였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은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깨닫고도 그대로 왕궁에 머물러 있었다면 그 자체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죄악입니다. 
본문에 "더 좋아하고"의 헬라어 "말론 헬로메노스"( )는 "…보다…을 택하다"라는 뜻으로 모세가 그 일을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최우선 추구하는 신앙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왕궁에서 일시적인 안락함을 누리는 것을 원치 아니했습니다. 
선택이란 것은 하나 외에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잘 선택하는 지혜가 있어야 하고 과감하게 포기하는 결단력이 있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미 포기한 것을 아쉬워하는 나머지 전진을 방해하는 미련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모세가 애굽인이 되는 것을 포기하고 이스라엘인이 되려할 때 아브라함의 자손은 선망의 대상이 아니라 극도로 천한 상태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하나님이 족장들과 맺은 언약을 실언(失言)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모세 앞에 놓여 있는 나일강변의 비옥한 땅을 기꺼이 포기하고 고난의 길을 더 좋아한 것은 바로 그의 믿음입니다.
모세가 히브리인들과 함께 능욕과 고난 받기를 선택한 것은 히브리인들이 자신의 민족이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모세가 선택한 것은 하나님이지 히브리 민족이 아닙니다. 

그 하나님은 모세의 조상을 택하신 하나님이시고 그들에게 진리와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백성과의 교제에는 필연적으로 고난이 따르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3장 16절에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했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 12절에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안주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미가서 2장 10절에 『이것이 너희의 쉴 곳이 아니니 일어나 떠날찌어다 이는 그것이 이미 더러워졌음이라 그런즉 반드시 멸하리니 그 멸망이 크리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나그네와 행인 같은 삶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11절에 『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고 했습니다. 
야곱은 내 나그네의 길의 세월이라고 했습니다(창 47:9).

여기 죄악의 날은 바로 궁정의 보화와 재물을 향유하고 쾌락을 일삼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자손과 맺은 언약을 능욕하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축복이 우리의 사명을 게을리 하게 되면 저주로 바뀝니다. 
많은 사람들이 영적인 것보다 육적인 것에서 그들의 행복을 갈구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잠언 15장 16절에 『가산이 적어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크게 부하고 번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Ⅲ. 모세는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그리스도 를 위해 받는 능욕을 선택했습니다.

본문 11장 26절에 『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 』고 했습니다. 
모세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능욕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가 신약시대뿐만 아니라 구약시대에도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하고 있었다는 사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야곱이 얍복강변에 홀로 남았을 때 나타난 어떤 사람(창 32:24), 야곱의 환도뼈를 친 그 사람(창 32:25), 날이 새려 하니 나로 가게 하라고 한 그 사람(창 32:26), 야곱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묻는 그 사람(창 32:27),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개명(改名)해준 그 사람(창 32:28), 야곱이 이름을 물을 때 어찌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야곱을 축복한 그 사람(창 32:29), 야곱의 환도뼈 큰 힘줄을 친 그 사람(창 32:32)은 바로 신약에 나타난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풀무불 속에 있을 때 신의 아들과 같은 네 번째 사람은 신약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십니다(단 3:24-27).

고린도전서 10장 4절에 『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동행 하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모세가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것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 받는 것과 동일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한 분이십니다. 
히브리서 13장 8절에 『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고 했습니다. 

시대를 초월하여 구약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과도 함께 하셨기 때문에 모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능욕(凌辱, 남을 없신 여겨 욕보임)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모세가 그리스도를 위해 능욕을 기꺼이 받은 이유는 하나님께서 보상해주심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그 상은 바로의 궁전에 있는 온갖 보화들보다도 더욱 고귀한 하늘나라에서 받게 될 영원한 상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능욕이 무엇입니까?
택함 받은 자들은 아벨에서부터 장차 나타날 메시야 그리스도에 대해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8장 56절에 『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고 했습니다. 
창세기부터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였고 자신의 거룩한 인격체 안에서 자기 백성을 인도하셨고 언약의 사자라는 이름으로 백성들 가운데 임재 하셨습니다.
이사야 63장 9절에 『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 자기 앞의 사자로 그들을 구원하시며 그 사랑과 그 긍휼로 그들을 구속하시고 옛적 모든 날에 그들을 드시며 안으셨으나 』고 했습니다. 
스가랴 2장 8절에 『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를 노략한 열국으로 영광을 위하여 나를 보내셨나니 무릇 너희를 범하는 자는 그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이라 』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9장 4절에 『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라고 했습니다. 
계속해서 35절에서 46절까지 나타나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능욕이란

①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백성과 함께 동일시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② 그리스도와 교회는 창세전부터 신비스러운 몸으로 생각되었습니다. 전자(그리스도)가 겪은 것과 동일하게 후자(그의 백성)도 겪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3장 16절에 『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고 했습니다. 
로마서 8장 17절에 『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이신칭의(以信稱義)는 진리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에는 믿어야 할 의가 있고 행해야 될 의가 있습니다. 앞서간 신앙의 조부들은 믿은 대로 행했습니다. 그래서 신행일치(信行一致)를 강조했습니다. 
성령은 우리의 믿음을 온전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곧 충만케 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십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온전한 믿음은 온전한 행함입니다. 
지금은 우리 교단에 훌륭하신 목사님이 되셨지만 그분이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고시를 칠 때 설교 강도(講道)가 창세기 22장이었습니다. 

본문은 아브라함의 순종장이 아니라 메시야장입니다. 그 목사님은 아브라함의 행위를 너무 강조한 나머지 본의 아니게 행함으로 구원받는다는 설교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그 분은 목사고시에 떨어졌습니다. 본인은 억울했지만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 해에야 합격했습니다.

믿음과 행함이 반반씩이 아닙니다. 믿음이 먼저이고 행함이 그 다음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믿음이 우위에 있고 행함이 열등한 것도 아닙니다. 그 반대 경우도 아닙니다. 
믿음과 행함은 시간적으로 동일하고 공간적으로 같은 위치와 같은 가치를 가집니다. 
따라서 전부가 믿음이고 전부가 행함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은 하나님이 자기 피로 값주고 사신 주님의 몸된 교회 운동에서 그 열매를 봅니다.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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