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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요일 2: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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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요일 2:15-17) 

  
말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단어보다 문맥이 더 중요하다. 단어가 문맥에서 어떤 의미로 쓰이느냐가 중요이다. '엿 먹어라'고 했다. 그렇다면 왜 이런 말을 했느냐를 살펴보아야 한다. 부모님이 흔들리는 이빨보고, 엿을 주시면서, 엿 먹어라 하셨다. 이빨을 뽑자는 말이다. 

엿을 먹다보면, 이빨에 엿이 달라붙어서 빠지는 경우가 있다. 따라서 '엿 먹어라'는 말은, 이빨을 뽑자는 말이다. 그런데 한번 경험하고, 무조건 '엿 먹어라'를 이빨 뽑으려는 행동이라고 하면, 얼마나 잘못된 이야기가 되고, 우스운 말이 되는지 모른다. 엿은 끈적끈적하고 달콤하다. 

'엿 먹어라'는, 상황에 따라서, 피곤함을 풀라는 이야기도 되고, 꼭 시험에 합격하라는 격려도 된다. 또 다투고서, 하는 욕도 된다. 이단 신천지는, 성경의 단어만 연결하여, 엉뚱하게 해석하면서, 우리를 유혹한다. 따라서 지금 상황에서, 왜 그런 말을 하는지가 중요하다.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고 하였다. 그런데 본문에는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였다. 상반되는 뜻이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사랑하는데, 왜 우리는 이 세상을 사랑하면 안 되는가? 성경이 모순되기 때문인가? 아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사랑하는 세상과, 우리가 사랑해서는 안 될 세상의 의미가, 서로 다르게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세상'이라는 단어가, 191번 사용되었다. 그런데 같은 단어라고, 똑같은 의미를 나타내지는 않는다. 성경에서 '세상'은, 크게 3가지 다른 의미로 사용된다. 

(1)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뜻할 때가 있다(요1:10上).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라고 했다. 이때 사용된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 세계, 곧 온 우주만물을 의미한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엿새 동안에, 온 세상을 창조하셨다. (창1:31上)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하셨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을, 우리는 사랑하며 아름답게 가꾸고, 보존해야 한다. 

(2) 세상에 사는 사람들을 뜻할 때가 있다(요12:19下).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 도다."하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다는 의미다. 이때 사용된 '세상'은,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뜻한다. 

하나님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세상 사람들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셨다. 따라서 우리도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사랑해야만 한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람은 우리의 원수까지라도 사랑해야 한다.  

(3) 마귀의 지배 아래 있는, 세상을 뜻할 때가 있다(요일5:19下).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라고 하였다. 악한 자는, 마귀, 곧 사탄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때의 '세상'은, 마귀가 다스리는 영역을 뜻한다. 여기서 '세상'은 바로, 세 번째 의미에 해당한다. 

(딤후4:10上)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다…"고 했다. 이 세상을 사랑하면, 마귀에게 삼킴 당하고 만다. 그러니 얼마나 안타까운 인생인가?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확실히 알고,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1. 세상은 마귀가 지배하기 때문에, 세상을 사랑하면 안 된다(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세상은 헬라어로, 코스모스(      )이며, 뜻은 "질서, 조직체"라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세상은, 이미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세계를 말하지 않는다. 또한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말하지도 않는다. 마귀를 우두머리로 하는, 질서의 조직체, 사람의 도리를 벗어나게 만드는, 악하고, 음란한 타락한 세상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은, 사람의 도리를 벗어나게 만드는, 악하고 타락한 세상을 사랑한다. 그들은 마귀에게 종노릇을 하기에, 마귀가 다스리는 세상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으며, 따라서 하나님에게서, 사랑을 받지도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아버지는 자녀를 사랑하고, 자녀도 아버지를 사랑한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한다. 그래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귀가 다스리는 이 악한 세상을, 우리는 사랑할 수 없다. 

사탄은 이 이치를 부인한다. 사탄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사랑하지 말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다만 하나님과 함께, 세상도 사랑하라고 유혹한다. '그게 뭐, 어떠냐?'고 유혹한다. 그래서 많은 성도들이, 여기에 걸려 넘어지는 경우가 많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세상을 사랑하려고 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동시에 세상도 사랑할 수는 없다. 이는 선과 악을 동시에 사랑할 수 없는 이유와 같다. 선을 사랑하면, 악은 미워할 수밖에 없다. 악을 사랑함은, 그 안에 선을 사랑함이 없다는 뜻이다. 

빛과 어두움은, 함께 있을 수 없다. 빛이 임하면, 그 곳에 있던 어두움은, 절로 사라진다. 반대로 어두움이 있으면, 그 곳에는 빛이 없다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않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도 못한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여전히 마귀에게 종노릇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을 사랑하면서도, 자기 안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고 말하면, 그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약4:4)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이처럼 하나님과 원수로 살고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 세상 것들을 사랑하며 자기에게 있는 인간적인 것들(지식, 가문, 학벌 등)을, 대단하게 여겼다. 

이러한 것들에, 강한 긍지와 자부심을 느끼며 살았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될 때는, 완전히 달라졌다. 자신이 과거에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수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과거에 자신이 사랑하며, 자랑했던 세상적인 것들을, 모두 다 배설물로 여겼다. 

세상 것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해가 될 뿐임을 깨달았다. (갈6:14) 바울은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죽었다는 말의 강한 표현이다. "세상은 내게 죽었고, 나도 세상에게 죽었다. 그러므로 이제 나와 세상은, 전연 상관이 없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 전심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녀가 되자!  

2. 세상은 우리를 유혹하기 때문에, 세상을 사랑하면 안 된다(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악하고 타락한 세상은, 마귀가 지배한다. 

마귀가 지배하는 세상에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만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세상을 사랑하면 안 된다. 악하고 타락한 세상은, 우리가 죄를 짓도록, 그럴 듯하고, 아름답게 포장하여, 우리를 유혹한다. 마귀는 언제나 우리를 유혹하는 법을 잘 알고 있다. 

'율브린너'라는 영화배우가 있었다. '왕과 나'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은 사람이다. 카리스마 넘치는 눈매와 연기로, 세계를 사로잡았다. 담배를 멋있게 피웠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독한 담배를 피었다. 그런데 그는 이런, 공익광고를 남겼다. 

"무엇을 하든지, 담배만은 제발 피우지 마세요. 여러분이 이 광고를 보고 있을 땐, 저는 폐암으로 죽었을 겁니다." 코미디언의 황제 이주일 씨는 "담배 맛있습니까? 그거 독약입니다."라고 하였다. 또 선전에서 술을 멋진 모습으로, 타는 목마름을 술을 마시면 해결되는 것처럼 선전을 한다. 

또 '저렇게 술을 먹을 줄 알아야, 진정한 남자이고, 깨어있는 여자다.'라는 무언의 메시지를 주고 있지 않는가? 그러나 담배와 술이 가져오는 폐해에 대하여는, 단 한 마디 언급도 없다. 사탄은 항상 이런 식으로 접근해서, 하나님의 백성을 속이고 넘어뜨린다. 

마귀는 자신이 다스리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 곧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통하여, 사람들을 유혹해서, 죄를 짓게 만든다. 그러니까 이들 세 가지는, 마귀가 사람들을 유혹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방법이다. 

(약1:13)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이처럼 하나님은 사람이 죄를 짓도록 시험하시지는 않는다. 따라서 이런 유혹들은 다, 마귀가 지배하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다. 

(1) 육신의 정욕이다. 이는 부패한 육신 때문에 생기는, 잘못된 욕망을 말한다. 
우리가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따르려 하지만, 육신은 우리를 죄의 법 아래로 끌어내리려 한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은 약하다. 육신은 죄로 인해 부패했기 때문이다. 

(2) 안목의 정욕이다. 이는 눈으로 보기에 생기는, 잘못된 욕망을 가리킨다. 
우리는 탐해서는 안 될 것들이 있다. 그런데도 우리 눈에 보기가 좋다고, 어떤 것을 탐하여 그것을 내 것으로 삼으려는, 소유욕이 생길 수 있다. 그 때 생기는 욕망이, 바로 안목의 정욕이다. 

(3) 이생의 자랑이다. 이생은 이 땅에서 사는 삶을 뜻한다. 여기서 자랑은 부정적의미로 사용되었다. 이 땅에 살면서 나를 내세우며, 과시하고 싶은, 잘못된 욕망이 생길 수 있다. 이때 생기는 허영심이 바로 이생의 자랑이다. 악하고 타락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바로 이들 세 가지다. 

마귀는 이 3가지를 이용해서, 사람들을 유혹했다. 죄를 짓게 만들어, 자기 종으로 삼으려고 한다. 에덴동산에서, 뱀은 하와를 유혹했다. (창3:6上)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하와가 마귀의 말을 듣고, 선악과를 보자, 

① 먹음직했다. 육신의 정욕이다. ② 보암직했다. 안목의 정욕이다. ③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웠다. 이생의 자랑이다. 이렇게 사탄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하와를 유혹했다. 하와는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선악과를 따먹었다. 그리고 남편 아담에게도 주었다. 

그 결과 그들은 죄짓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사탄은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할 때도 마찬가지다. "이 돌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고, 육신의 정욕으로 시험했다. "네가 내게 절하면, 천하만국을 네게 주리라." 안목의 정욕으로 시험했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 이생의 자랑으로 시험했다. 사탄이 광야에서 예수님을 시험할 때도 똑같은 3가지 방법,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예수님을 넘어뜨리려고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매번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탄의 시험을 물리치시고 승리하셨다.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즉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은, 마귀가 유혹하는 대로, 세상을 사랑하면서 살아간다. 육신의 정욕에 자신을 내맡긴다. 안목의 정욕을 좇아서 산다. 이생의 자랑을 따라 산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장차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마귀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우리를 유혹하여 넘어뜨리기에, 세상을 결코 사랑할 수 없다. 성도는 (골3:2)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땅의 것을 생각한다는 말은, 세상을 사랑한다는 뜻이다. 땅의 것을 생각하다 보면, 죄를 짓고 만다. 

위의 것을 생각하자. 예수님이 마귀의 모든 시험을 이기셨기에, 우리도 예수님 안에서 얼마든지, 마귀의 모든 시험을 이길 수 있다. 내 모습 이대로 주님께 드리면, 예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고, 그대로 받아주신다. 그리해서 나는 예수님 안에 있게 되고, 예수님은 내 안에 계시게 된다. 

(요일4:4) "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그들을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 우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자보다 크심이라고 했다. 내 안에 계신 이는 예수님이다. 그리고 세상에 있는 자는, 이 악한 세상을 다스리는 마귀를 가리킨다. 

예수님은 마귀보다 크다. 따라서 내가 예수님 안에 있으면, 마귀보다 크신 예수님이, 나를 보호해주신다. 또한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면, 마귀보다 크신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싸우신다. 나는 예수님 안에서 늘 승리할 수 있다.  

내가 예수님 안에, 또한 예수님이 내 안에 계셔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이, 사시는 것이 되기를 바란다. 우리 모두 예수님으로 충만해서, 날마다 마귀를 이기며, 세상을 이기며, 죄에 대한 유혹을 이기기를 바란다. 

3. 세상은 지나가기 때문에, 세상을 사랑하면 안 된다(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이 세상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 곧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도 지나간다. 

그것들은 영원하지 못하다. 그저 일시적일 뿐이다. 하늘에 구름이 흘러가듯이, 시냇물이 흐르듯이, 공중에 새가 날아가듯이, 이 세상과 그 안에 있는 것들은, 다 스쳐지나갈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덧없이 지나가는 이 세상을, 사랑할 수가 없다. 

사람이 태어날 때는, 손을 쥐고 태어난다. 마치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움켜쥘 것처럼, 손을 꼭 쥐고서 태어난다. 그러나 사람들이 죽을 때는, 손을 펴고 죽는다. 그 동안에 움켜쥔 것을, 남김없이 다 내려놓고서, 완전히 빈손으로 가야만 한다. 

(벧후3: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장차 하늘은 떠나가고,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물질도, 다 불에 타버릴 것이다. 

처음 하늘과 땅은, 완전히 없어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와야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을 사랑한다는 것은 잠시잠깐이면 없어질, 일시적인 것에 집착해서 산다는 뜻이다. 믿음의 사람 모세는 (히11:25)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했다." 

그는 땅의 것, 세상의 것, 일시적인 것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위의 것, 신령한 것, 영원한 것을 생각했다. 우리도 영원을 사모하면서, 살기 바란다. 그러면 영원히 사는 사람은 누구인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한다고 하였다(17). 

하나님의 뜻은 무엇을 가리키나? 본문을 기록한 사도 요한은, (요6:40)에서 다음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게 밝혔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믿는 것이다. 

그러면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진다. 그리고 그에게는, 영생이 주어진다. 그래서 그는 영원히 살게 된다. (롬8: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하였다. 천국은 지극히 영광스러운 곳이다. 

그러나 이에 비해, 이 세상의 것들은 너무나도 보잘것없다. 이 땅에 있었던 나라들을 보라. 있다가 없어졌다. 그러나 천국은 영원하다. 이 세상은 잠시잠깐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덧없이 사라질 이 세상을 사랑할 수가 없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겠다. 본문은 매 절마다, 서로 상반되는 두 가지를 대조하고 있다. 
15절은 세상을 사랑함과,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서로 대조한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은, 마귀가 지배하는 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고, 하나님을 사랑해야 마땅하다.  

16절은 세상으로부터 온 것과,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을 서로 대조한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다. 우리는 죄를 짓도록 유혹하는, 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고, 하나님은 거룩하게 우리를 만들어, 진정으로 멋있는 살도록 만든다. 

17절은 이 세상이 지나간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가, 영원히 거함으로 대조한다. 우리는 덧없이 지나가는, 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영원을 사모하면서 살아야 할 것이다. 오늘 우리는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씀을 받았다.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1) 세상은 마귀가 지배하기 때문이다. (2) 세상은 우리를 유혹하기 때문이다. (3) 세상은 지나가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인생을 즐겁게 살자. 그러나 마귀가 지배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 우리를 유혹해서 죄 짓도록 만드는 세상, 

영원하지 못하고, 잠시 잠깐 지나면 지나가는 세상을, 사랑하지는 말자.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령충만함으로, 경건한 성도들이 되어서, 어디서나 예수님의 향기가 되자. 늘 예수님의 증인으로서, 아름다운 인생을 살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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