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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의 열매 2. 기쁨 (갈 5: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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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열매 2. 기쁨 (갈 5:22-23)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성령의 두 번째 열매는 희락 곧 기쁨입니다. 요즘 여성 그룹 카라가 일본에서도 인기 인데 헬라어로 기쁨이 ‘카라’입니다. 열매로는 두 번째 이지만 그 성격상 모든 성령의 열매를 맺을 때마다 필요한 열매입니다. 인내도 충성도 절제도 본질적으로 기쁘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는 이유는 그 일이 즐겁거나 만족감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기쁨은 윤활유와도 같습니다. 기쁨 없이 해야 하는 일처럼 힘든 것도 없습니다. 기쁨이 있으면 힘든 일도 수월하게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인임을 드러내는 표식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기쁨일 것입니다. 사람은 얼굴 표정에서 그 안에 무엇을 담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 안에 만족할 만한 어떤 것이나 숭고한 어떤 것을 담고 있는 사람은 그 눈에서 그리고 그 표정에서 빛이 나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모든 죄로부터 자유케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우리 안에는 성령님께서 살아계십니다. 그러면 그 빛의 광채가 밖으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기쁨입니다. 처음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 천사들이 목동들에게 나타났습니다. 그때 그들은 이렇게 찬양했습니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눅2:10) 그냥 기쁨이 아니라 ‘큰 기쁨’입니다. 복음은 큰 기쁨의 소식입니다. 마치 사랑하는 애인의 편지를 받은 사람과 같습니다. 마치 최종 합격 통지서를 받은 수험생과 같습니다. 마치 로또 복권에서 1등으로 당첨된 사람의 벅차오름과 같습니다.

『팡세』를 썼던 파스칼이 하나님을 만났을 때의 체험이 그렇습니다. 파스칼은 ‘걸어 다니는 병원’이라고 할 정도로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고통을 겪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던 그가 성령을 받자 그 마음에 기쁨으로 가득합니다. 그가 성령의 불을 체험하던 순간을 『팡세』의 마지막 편 「메모리알」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1654년(31살) 11월 23일 밤 10시 반부터 12시 반까지.
‘불’ 이었다.
철학자와 식자의 하나님이 아닌,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확신, 확신, 느낌, 기쁨, 평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기쁨, 기쁨, 기쁨, 기쁨의 눈물.“

파스칼은 기쁨이라는 단어를 수없이 반복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안에는 이 기쁨이 있습니까? 신앙인의 가장 기본적인 감정이 바로 이 ‘기쁨’입니다. 신앙인들은 우울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상복과 같은 검은 옷으로 두르고 다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한번은 중세의 성자 프란치스코가 우울한 표정을 하고 슬픈 기색을 보이는 어느 형제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형제여 사람 앞에서 슬픈 기색을 하며 낭패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하나님의 종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항상 품위를 잃지 않도록 하십시오. 죄는 당신의 방에서나 반성하십시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하나님 앞에서 울고 신음하십시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십시오. 슬픔을 없애고 다른 형제들과 함께 어울리십시오.” 

우리들의 표정은 어떻습니까? 지옥에서 출장 나온 사람처럼 불만과 분노로 가득 차 있습니까? 세상의 모든 고민은 혼자 싸짊어진 사람처럼 우수와 고뇌로 가득 차 있습니까? 신앙인의 얼굴은 지옥의 문 앞에서 고민하고 있는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의 모습이 아닙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기쁨으로 가득 찬 얼굴입니다. 괴테의 파우스트가 최고의 순간에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 하고 외치던 가슴 벅찬 환희가 우리들에게는 합당합니다. 

기쁨이 없는 이유

현대인들은 기쁨을 잃고 있습니다. 모두가 화나고 불만이 가득한 사람들처럼 보입니다. 물질적으로는 옛날보다 더 부유해졌는데 우리 마음은 오히려 더 가난해진 것 같습니다. 더 여유도 없이 쫓기는 것 같고 염려로 가득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 중 하나는 우리가 물질의 논리에 말렸기 때문입니다. 기쁨을 우리 내면에서 찾아야 하는데 마치 더 많은 물질을 얻어야 행복한 것처럼 착각한 것입니다. 사탄에게 속은 것입니다.

우리는 ‘조금만 더’에 속고 있습니다. 조금만 더 벌고, 조금만 더 높은 자리에 오르고, 조금만 더 아파트 평수를 넓혀가고, 조금만 더 좋은 차를 뽑으면 행복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살아왔는데 이 조금만 더는 끝이 없습니다. 이루었다 생각했는데 다시 부족해 보입니다. 어느 때는 빼앗기기도 합니다. 그래서 다시 그것을 채우려고 아등바등합니다. 물질은 잠깐은 우리에게 기쁨을 가져다주지만 오래 가지는 않습니다. 요즘은 전자 기기들이 워낙 빠른 속도로 발달하기 때문에 어떤 분은 새로운 스마트폰, 카메라, 아니면 더 사양이 좋은 컴퓨터나 소프트웨어를 구입하기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이들의 기쁨은 남들보다 최신 기종을 소유하고 끊임없이 업그레이드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어느 순간에 보면 평범하게 되어 있고, 방금 나온 것에 비하면 마치 고물처럼 보입니다.

이처럼 밖으로만 지향하는 우리 욕구를 그쳐야 우리 안에 참된 기쁨을 찾을 수 있습니다. 신앙인이 갖는 기쁨의 본질을 가장 극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 바로 선지자 하박국이 누렸던 기쁨입니다. 하박국 3장 17, 18절입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하박국 선지자의 지금 형편은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하고 고통스럽습니다. 열심히 농사를 했지만 무화과나무나 포도나무나 감람나무에 열매가 없습니다. 밭에는 먹을 식물이 없습니다. 한 해 농사를 망친 것입니다. 구제역 때문에 그랬는지 우리나 외양간에는 양이나 소가 없습니다. 실제 하박국이 겪었던 상황은 매우 비참했습니다. 바벨론이 이스라엘을 침략해서 온 국토가 폐허가 되어 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의 자기 심정을 하박국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무리가 우리를 치러 올라오는 환난 날을 내가 기다리므로 내 뼈에 썩이는 것이 들어왔으며 내 몸은 내 처소에서 떨리는도다”(합3;16)

그런데 바로 여기서 신앙의 역설이 일어납니다. 하박국은 오히려 기뻐합니다. 기쁨의 이유는 바로 하나님 때문입니다.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그가 기뻐했던 이유는 하나님이 주신 소망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침략자 바벨론을 심판하시고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세상에 가득한”(2:14) 나라를 세울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삽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기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때문에 기뻐합니다. 우리 기쁨의 근원은 현실에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박국이나 우리의 여유는 바로 여기에서 나옵니다.

성 어거스틴은 참된 기쁨이 어디에 있는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이여! 세상을 두고 기뻐하지 말고 주님 안에서 기뻐하십시오. 죄 안에서 기뻐하지 말고 진리 안에서 기뻐하십시오. 허영의 꽃을 두고 기뻐하지 말고 영원의 희망 안에서 기뻐하십시오.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이 어디에 있든 얼마나 오래 살든 간에 주님께서 가까이 계시니 아무 걱정도 하지 마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기쁨의 근원입니다. 이는 밭에서 보물을 발견한 농부의 기쁨과 같은 것입니다. 어느 날 농부가 밭을 갈다가 보물을 발견했습니다. 농부는 그 밭이 자기 밭이 아니므로 모든 돈을 들여서 그 밭을 샀습니다. 밭을 샀지만 사람들에게 드러내질 못합니다. 사람들은 그가 아무 쓸모도 없는 밭을 샀다고 그 어리석음을 탓합니다. 그러나 농부의 얼굴에는 항상 기쁨이 가득합니다. 자기 밭에 보물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을 부러워하거나 자기 옷차림이 허름하다 하여 기가 죽지 않습니다. 자기 밭에 보물이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보물입니다. 

우리에게 기쁨이 없는 주된 원인 중 하나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보물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골로새서는 말씀합니다.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골2;3) 예수 그리스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는데 사람들은 엉뚱한 데만 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참된 보물인 줄 알았기에 사도 바울은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3:7-9)라 고백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가장 고상한 것이 되었기에 사도 바울은 더 이상 가난하거나 부하거나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4:12)

일체의 비결은 어떤 처세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가장 고상한 존재가 되어 물질로부터 자유로워졌기에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기쁨은 바로 여기에서 발생합니다. 요새 목회자들은 그 반대가 된 것 같습니다. 물질이나 권력이나 명예에 취해서 그리스도를 버리고 맙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겠다고 하며, 배설물처럼 여기겠다고 하는데 우리는 반대로 배설물과 같은 그것들을 신주단지 모시듯 끌어안고 삽니다. 물질이나 권력에 매인 마음에서는 기쁨이 나올 수 없습니다. 탐욕에 찌든 얼굴만 남을 뿐입니다. 

로마의 시스티나 성당에 가면 걸작이란 불리는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 그림이 있습니다. 미켈란젤로가 이들 그림을 그릴 때의 일입니다. 미켈란젤로는 하나님의 인자하고 거룩한 모습을 그리려고 모델이 될 만한 인물을 찾아 나섰습니다. 1년여를 여행하다가 한 목동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15,6세가량의 양을 치는 목동이었는데 그 순진무구한 모습에 매료 되었습니다. 이에 영감을 얻어 그 목동을 모델로 스케치를 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그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20여년이 지났습니다. 최후의 심판 벽화의 최종 단계로 지옥의 악마 상에 필요한 모델을 찾아서 다시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러다 어느 빈민가에서 술에 취해 추하게 일그러지고 험상궂은 얼굴의 거지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아! 내가 바라던 그 모습이다.”하고는 돈 몇 푼 쥐어주고 즉석에서 스케치를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스케치가 끝났을 때 그 거지가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합니다. “미켈란젤로 선생님. 나를 몰라보시는군요. 내가 바로 24년 전, 선생님께서 성당 천장화의 하나님을 그리실 때에 모델로 썼던 그 목동입니다.”

한 사람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얼굴도 나오고 악마의 얼굴도 나왔습니다. 우리 안에 무엇을 담고 있느냐에 따라 그렇게 됩니다. 하나님으로 시작했다가 악마로 끝날 수도 있고 악마로 시작했다가 하나님으로 마칠 수도 있습니다.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라는 진리를 담고 있으면 우리는 갈수록 천사의 얼굴이 되어갈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 세속에 찌들고 탐욕으로 가득 차 있으면 어느 새 악마의 얼굴로 변해 갈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의 모습이 그렇게 변해가고 있지 않나 안타깝습니다. 기쁨은 세속에 매이지 않는 데서 나옵니다. 그 중심이 하나님만을 향하고 있을 때 우리는 세속의 욕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중국의 요 임금님 때의 일입니다. 요 임금이 자기 자리를 소부라는 사람에게 선양하려 하였습니다. 이 소리를 들은 소부가 자기 귀를 더럽게 했다고 해서 강가에 가서 그 귀를 씻었습니다. 허유라는 사람이 소를 끌고 왔다가 이 모습을 보았습니다. 허유가 소부를 나무라며 말하기를 “자네가 그런 욕심이 전혀 없었다면 어떻게 사람들이 자네를 찾아 여기까지 왔겠는가?” 하고는 귀 씻은 물도 더럽다고 하여 상류 쪽으로 올라가서 소에게 물을 먹였다고 합니다. 물질이나 권력에 쉽게 넘어가는 것이 인간들의 모습인데 그것에 초연한 선비들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할 것입니다. 

요즘 우리 시대 사람들은 이런 여유를 찾지 못하며 그 마음에 기쁨이 없습니다. 욕심 때문입니다. 이익이 되는 자리라면 마치 불빛을 보고 몰려드는 나방들처럼 셀 수 없이 몰려듭니다. 요즘 한국교회 목회자들의 모습이 그렇게 보입니다. 물질을 향해 권력을 향해 몰려드는 불나방 같습니다. 그런 마음에는 더 이상 기쁨이 자리할 수 없습니다.

우리 또한 그리스도 한 분만을 소중히 여겨 유혹이 되는 다른 것들은 버릴 수 없습니까? 우리가 둘 다를 잡으려 하니 버나드 쇼와 같은 무신론자가 “신앙인이 무신론자보다 행복한 것은, 술에 취한 사람이 취하지 않은 사람보다 행복한 것과 같다는 점에 불과하다.”며 비웃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쁨이 단지 술 취한 것에 불과합니까? 단지 주일에만 술에 취한 듯 행복해 하다가 월요일이 되어서는 술에 깬 듯이 감사도 기쁨도 모르며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이 아니라면 그 이상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들이 기쁨을 잃고 있는 이유는 그 안에 하나님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누는 기쁨

기쁨을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을 나누면 반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기쁨은 주요하게는 내면에서 생기지만 또한 관계에서도 생깁니다. 관계에서의 기쁨은 나누는 기쁨입니다. 주님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행20:35)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또한 인간처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의 기쁨의 근원은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있습니다. 인간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진리의 길을 갈 때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기뻐하십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모습을 여러 번 소개하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양을 찾듯이 잃어버린 영혼을 찾고 집을 나갔던 아들이 돌아올 때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누가복음 15장 7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15장 10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15장 32절입니다.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방황하던 인간이 제자리를 찾을 때 하나님은 기뻐합니다. 

우리의 기쁨도 다른 사람을 위하여 많이 베풀고 나눌 때 주어집니다. 평생을 인색하게 사는 사람에게는 기쁨이 없습니다. 돈이란 것은 모으는 재미도 있지만 쓸 때 더 기쁩니다. 잘 베풀면 더욱 더 기쁩니다. 부모는 자식들이 잘 먹는 모습만 보아도 배가 부릅니다. 전도라는 것도 결국 사람을 살리는 일입니다. 그를 구원의 길로 이끌 뿐만 아니라 올바른 삶을 살게 하는 일입니다. 그에게 외로울 때 함께 할 수 있는 하나님을 소개시켜 주는 가장 보람된 일입니다. 이 일은 하나님도 기뻐하실 뿐만 아니라 전도자 자신에게도 기쁨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하는 일이 기쁨이 되는 이유는 그것 자체가 기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배로 갚아 주시기 때문입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눅6:38) 이것이 기쁨을 나누면 배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앞에서 언급했던 무신론자 버나드 쇼가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인생에서 참된 기쁨은 이런 것이다. 내가 가장 고귀하다고 여기는 목적을 위해 사용되어지는 것. 세상이 자기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기울이지 않는다고 불평하면서 괴로워하고 슬퍼하는 열에 들뜬 이기적인 바보가 되기보다 대자연 속에 녹아들어 그 힘의 일부가 되는 것. 나의 인생은 전체 공동체에 속해 있는 것이며, 내가 살아있는 한 그 공동체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하는 것은 나의 특권이라고 생각한다. 죽음을 맞이했을 때 나는 내 자신이 철저하게 다 소진되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더 열심히 일을 하면 그만큼 나는 더 많이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인생을 그 자체로 즐긴다. 인생은 나에게 있어서는 곧 꺼져버릴 촛불이 아니다. 인생은 당분간 내가 들고 있게 된 찬란한 횃불이다. 나는 그 횃불을 가능한 한 휘황찬란하게 타오르게 하고 싶다. 그 횃불을 미래의 세대들에게 건네주기 전까지.” 

무신론자이기는 하지만 옳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자꾸 자기 세계 안으로만 들어가면 기쁨이 없습니다. 기쁨의 샘물이란 것은 밖으로 퍼줄수록 신선한 물이 다시 솟아나는 것과 같습니다. 퍼주지 않고 고여 있는 물은 썩고 맙니다. 주님은 말씀합니다.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요15:10-11). 주님은 사랑의 계명을 말씀하시면서 기쁨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이 둘을 연결하면 인간은 사랑할 때 기쁨이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이 사랑하며 기쁨을 느꼈듯이 이제는 그 제자 된 여러분이 다른 사람을 사랑함으로 주님의 기쁨으로 충만하기를 원하십니다. 

기쁨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성령의 첫 열매인 사랑의 열매를 맺은 사람에게 주어지는 사랑의 열매의 열매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기쁨이라는 선물이 주어집니다. 우리 모두 사랑함으로 기쁨 충만한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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