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추석] 서로 사랑합시다 (요일 4:)

첨부 1


‘서로 사랑 합시다’.com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8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9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10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11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요한1서 4:7-11)

오늘은 요한일서 4장 7절에서 11절 말씀을 통해서 ‘서로 사랑 합시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선포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에 성령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은혜를 주셔서 깨달음과 사랑이 넘쳐나기를 소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지난 한 주간 평안하셨습니까?  아마도 평안하시고 잘 지내셨으리라고 생각합니다. 한가위 아닙니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하는 일 년 중 가장 풍요로운 계절입니다.  

*한가위 때 우리는 햅쌀밥과 신선한 과일을 즐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햅쌀을 먹을 수 있도록 농사를 지은 농부와, 과일을 재배한 사람, 농사에 비료를 공급한 사람,  수확물을 우리 집 밥상까지 운반해준 운전기사, 운반할 자동차를 만든 엔지니어, 자동차가 다닐 수 있도록 도로를 닦은 기술자, 이들 모두가 우리가 가을의 열매들을 즐길 수 있게 도와준 고마운 분들입니다.   또 우리에게 일할 수 있는 직장이 있어서 열심히 일한 대가로 햅쌀과 과일을 살 수 있는 것도 감사합니다. 무엇보다 함께 식사를 할 수 있는 가족이 있으니 이 또한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보살핌입니다. 참 감사합니다.  

“명절을 지킨다”는 말은 그 시대가 평화의 시대라는 의미입니다. 전란 시 때에나 나라가 환란을 당할 때에는 백성들이 명절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일제 때에 우리민족에게 가장 슬프고 속상한 날이 명절날이었습니다. 명절을 지키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나라를 빼앗긴 민족이 무슨 명절이겠습니까. 명절을 지킨다고 즐거움과 행복이 있겠습니까. 6․25때에는 피난 중에 불안한 마음으로 피난처에서 모두 명절을 보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유대인들은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가 살아가다가 명절날이 되면 강변으로 나아가 버드나무에 수금을 걸어놓고 울었습니다. 자신들의 현재의 삶이 처량하고 미래가 불투명하여 그들은 사람들을 피하여 호젓한 곳에 가서 눈물을 흘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타락한 백성들에게 이렇게 경고합니다.  “내가 안식일과 명절을 뺏으리라.” 명절은 국가의 재난시에나 환란 때에는 지킬 수가 없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명절을 지킨다는 것은 오늘 이 시대가 평화의 시대라는 뜻입니다.  

사실 오늘 이 시대가 얼마나 평화로운 시대입니까. 우리나라가 오늘 같은 평화로운 때가 일찍이 없었습니다. 실제로 우리민족은 수백 번의 크고 작은 외침을 받은 나라입니다. 지금도 전쟁이 완전히 끝나지 않은 상태의 나라입니다.   그런데 제가 군에 갈 때까지 살아계셨던 저의 할머님은 1906년 생이셨습니다. 13살에 3.1. 독립만세 운동을 직접 보았습니다.  

6년 전에 소천하신 저의 아버님은 1933년 생이셨습니다. 17살 때 6.25를 겪으셨습니다. 지금 제 나이가 50이 넘었는데... 아직은 한 번도 난리를 겪지 않았습니다.  광주민주화운동같은 지역적인 아픔은 있었지만 전체적인 아픔이 없이 반세기를 지납니다.  아마 역사상 가장 평화를 누리는 때이고 가장 풍요로운 때가 아닌가 합니다.  이 평화의 상징이 저 들판에서 익어가는 곡식입니다.  가는 곳 마다 누렇게 다 익은 곡식들이 추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과수원들을 보면 열매들이 탐스럽게 익어가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복을 받은 나라입니다. 복을 받은 민족입니다. 감사해야 할 일 아닙니까?  평화는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전 세계 곳곳에서 전쟁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마땅히 모두 감사해야 합니다.      

특히 사람이 나이가 들면서 늘어나야 하는 것이 감사입니다. 전에는 그냥 지나치던 것들이 나이가 들수록 감사와 감격으로 다가와야 합니다.  전에는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이제는 보면 볼수록, 생각하면 할수록, 그 의미가 깊게 느껴지고, 귀하게 느껴지고, 다 하나님의 선물로 느껴집니다.   “귀가 있는 자는 들을 지어다. 눈이 있는 자는 볼 지어다. 머리가 있는 자는 생각 할 지어다. 영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을 찬양 할 지어다”  이 추석에 많이 감사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 *추석은 휴식(休息)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똑같은 일상을 반복하다가 추석을 맞아 모든 일을 놓고 좋은 휴식의 시간을 가지게 되니 얼마나 좋습니까.   열심히 일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휴식이 별 의미가 없겠지만, 열심히 일한 사람에게 휴식은 큰 축복입니다.  자기의 재능을 쏟아 열심히 일하고 가족과 교회와 직장을 섬기며 산 사람들에게는 이 휴식이 보통 축복이 아닙니다. 마음껏 휴식하시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허리 띠 풀어놓고 실컷 먹는 것만 하지는 마시고, 가족이 손잡고 같이 엑스포도 가시고, 주방일도 분담하셔서 명절에 더 고생하는 여자분들도 같이 휴식하도록 하시면 더 좋을 것입니다. 함께 휴식하시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여러분, 무엇보다 추석은 가족을 사랑하고 돌아볼 수 있는 계절입니다.  고향에 가느라 많은 시간이 걸려도,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과 가족과 친척들을 만나서 짧은 시간이지만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회복하는 소중한 시간입니다. 

어느 화가가 ‘아름다운 그림’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무엇이 가장 아름다운 것일까 생각하던 그는 목사님을 찾아가서 물었습니다. “목사님,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무엇입니까?” “말할 것도 없이 믿음이지요. 믿음은 하늘을 바라보게 합니다. 믿음은 절망을 이기게 하는 힘을 가졌고 죽음도 정복하게 만드는 생명력입니다.”  화가는 방금 결혼한 신부를 만나 물었습니다. “무엇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합니까?” “말할 것도 없이 사랑이지요. 사랑은 가난도 부유하게 만들고 눈물도 달콤하게 만들고 작은 것도 크게 만들어 주기 때문입니다.” 어느 군인에게 또 물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은 평화입니다. 전쟁이 없는 평화는 인류가 안식과 평안을 누리게 하지요”라고 대답했습니다.   화가는 무엇이 가장 아름다운 것인지 고민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집에 들어서자 어린 아들이 “아빠!”하고 달려오면서 품에 안깁니다. 항상 아빠를 믿고 아빠의 품에 덥석 안기는 아들의 모습에서 화가는 목사님이 말했던 믿음을 보았습니다. 아들과 아버지가 서로를 안고 반기는 모습을 저쪽에서 바라보며 미소 짓는 아내의 얼굴에서 가족에 대한 사랑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을 느끼는 순간 화가의 마음에는 큰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그는 믿음과 사랑과 평화를 가정에서 한 번에 느꼈습니다. 그는 ‘가정’이라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그림으로 그렸습니다.  그렇습니다. 가족들 간의 사랑, 아름다운 가정이 이 세상에서 최고입니다. 이번 추석이 우리 모두가 가족 서로에 대한 믿음, 사랑, 평화를 회복하는 좋은 계기가 되기를 원합니다.

가정에서 가장 중요한 관계는 누구와의 어떤 관계일까요? 유교(儒敎)에서는 부모와 자녀의 관계라고 합니다. 아내는 옷과 같아서 갈아입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유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가장 중요한 관계는 부부(夫婦)라고 합니다.  성경이 옳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모와 자녀를 만드시기 전에 남편과 아내를 먼저 만드셨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있기 때문에 자녀가 생겨서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만들어집니다.  “아내를 얻는 자는 복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받는 자니라”(잠18:22)  “집과 재물은 조상에게서 상속하거니와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느니라”(잠 19:14)  결혼하여 아내를 얻으신 분들은 ‘하나님의 은총을 얻은 자’인 줄 새롭게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이번 추석에는 이미 좋은 관계이지만 더욱더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가까워지고, 더 아름다워지는 축복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소원합니다. 

또한 형제간에 서로 화목하는 추석이 되기를 바랍니다.

혈육 사이에는 도저히 끊을 수 없는 사랑이 있습니다. 제가 결혼 하는 젊은이들에게 ‘결혼을 하면 배우자의 가족에 대해서 비판하거나 좋지 않은 말을 절대하지 말라’ 는 충고를 합니다. 자기 피가 섞인 사람을 좋지 않게 말하면 남편이나 아내라도 용서가 안 됩니다.  남편과 아내는 피가 섞이지 않았기 때문에 결혼해서 살다가도 원수가 될 수 있습니다. 부부의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많은 기도와 노력이 필요하지요.  하지만 부모가 자식을 사랑 하는 것은 그런 노력이 필요 없습니다. 자식이 아무리 부모를 고생시켜도 부모는 그런 자식을 사랑할 수밖에 없어요. 피가 섞였기 때문입니다. 피가 섞인 사람은 본능적으로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서 아름다운 것이 형제간의 사랑입니다. 형제가 서로 사랑하는 것을 보는 부모에게는 그 이상의 행복이 없습니다. 사이가 좋지 않은 자식들의 모습을 보는 부모의 가슴은 미어집니다. 

혹시 형제간에 우애가 좋지 않은 분이 있다면 이번 추석에 회개하고 돌아서시기를 바랍니다.  모처럼 명절을 맞아 한 가족이 모였습니다. 그 기간에 마침 큰 딸의 생일이 들어있었습니다. 보통 생일이 아니고 40세 생일이에요.  가족들은 본인 몰래 계획을 세워서 그 생일을 재미있고 멋지게 만들어주었습니다. 그 중에 가족들이 돌아가며 큰 딸에게 한 마디씩 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둘째 딸이 언니에 대한 사랑을 표현했습니다. 언니가 자기에게 얼마나 소중하고 언니에게 얼마나 큰 격려를 받았는지 말하면서 눈물을 뚝뚝 흘렸습니다. 피가 섞인 형제간의 사랑을 고백하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면서 온 가족이 감격과 행복이 뒤섞인 눈물을 흘렸습니다. 특히 그 부모님들이 너무 행복했습니다.  여러분, 형제간에 서로 사랑하는 모습보다 부모에게 더 아름다운 것이 어디 있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증거가 사랑입니다.  형제지간의 사랑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피를 나눈 혈육도 있지만 영적인 형제들도 있습니다. “한 피 받아 한 몸 이룬 형제여 자매들이여” 하는 찬송처럼 여러분 옆에 있는 분들이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같이 살 형제자매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받아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영원한 영적 생명을 받은 여러분의 형제자매들입니다.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11절)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받은 사랑과 은혜를 나누며 영적인 형제 자매들이 우리들이 서로 사랑을 다시 확인하고 회복하는 추석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제 오늘 본문 말씀이 있는 요한 일서의 배경을 살펴봅니다. 요한 일서는 예수님의 제자인 사도 요한이 쓴 사랑의 편지입니다.  요한이 이 글을 기록한 이유는 당시 진리를 위협하며 교회를 혼란에 빠뜨렸던 영지주의 이단을 경계하기위해서, 그리고 구원의 유일한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주제는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창조주 하나님과 사귐을 갖는 존재인데... 그 방법이 십자가로 나타난 그리스도의 사랑에 관한 바른 지식을 소유하고, 그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받아들여서 이 땅의 형제 자매들에게 그 사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당시 초대교회에 큰 영향을 미쳤던  靈知主義 이단은 靈은 거룩한 것이며, 物質과 肉體는 악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육체로,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것을 부인하였습니다. 그리고 어차피 물질과 육체는 악한 것이니  육체로 범죄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몸으로는 온갖 죄를 지으면서도 영만 깨끗하면 된다는 이상한 주장을 하여 기독교의 윤리를 근본적으로 파괴했고 성도들은 유혹을 받았습니다.   

성도여러분, (약2;15-16)“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하였습니다. 그래서 (요일3;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하시는 것입니다.  ‘물질도 악하고 육체도 악한 것이니’ 하면 어떻게 우리가  물질을 나누어 형제. 자매를 돕겠습니까?  악한 물질로 어떻게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요한 사도는 (요일3;16)“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물질을 나눔으로 형제를 사랑하고, 육체의 목숨을 버려서 자매를 사랑하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의 가장 주요한 특징은 사랑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믿는 사람의 특징은 사랑이요, 이 사랑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증거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과거에 없었던 ‘사랑’이 생깁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도여러분 ‘사랑’에 대하여 말씀을 드립니다.  
  
첫째, 사랑은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증거입니다. 

본문 7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속한 것이니’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믿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내게로 오는 것입니다.  내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움트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났다는 증거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참된 사랑을 알게 되었다면 전에 없었던 사랑이 우리 가슴 속에 있을 줄 압니다. 이것이 하나님 자녀의 특징입니다.
  
둘째, 사랑은 주고 받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3장 34절에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서로 주고받아야 합니다. 한쪽만 일방적으로 사랑을 주고 상대방은 반응이 없다면 사랑이 지속될 수 없습니다. 서로 사랑을 주고받는 것이 예수님의 제자 된 증거입니다. 특별히 부모만 자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형님 누나만 동생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녀도 부모를 사랑하고, 동생들도 형님누나를 진심으로 사랑하여 자기의 사랑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13:35)  

다른 사람들이 우리가 예수를 믿고 따르는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무엇을 보고 알겠습니까?  믿는 사람들끼리 서로 사랑하는 것을 보고 안다는 것입니다.  2세기에 프리미드 영거라는 한 영주가 로마 황제에게 ‘크리스천들은 형제도 아니면서 형제보다 더 서로를 사랑하는 이상한 사람들입니다.’  라고 편지를 썼습니다.  기독교를 안 믿는 불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인들은 남들끼리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로 보였습니다.  남을 사랑한다니 이상하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원수인데도 사랑합니다.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신자 된 증거입니다. 2세기 기독교인들의 이 모습이 21세기의 우리 교회 성도들의 모습이 되길 소원합니다. 
  
셋째, 사랑은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는 증거라고 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12절)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인줄 아나요? 우리의 사랑의 모습을 보고 ‘저분 안에 하나님이 살아 계시구나!’ 하고 알게 됩니다.  예수를 믿고, 영적인 사람이 되면 사람을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예전에는 아직 어린 사람,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을 보면 야단치고 속상해했는데  이제는 그 사람이 불쌍해 보입니다. ‘얼마나 힘들면 저렇게 문제를 일으키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줄까?’  생각이 바뀝니다.  어려운 사람들, 장애가 있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안아주고 싶고,  하나 하나가 소중하고 귀하게 여겨집니다. ‘나도 옛날엔 저랬는데, 아니 나는 더 심했는데... 저분도 예수를 믿으면 변할 수 있어.’ 이런 희망을 가지고 그를 위해 기도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신 증거가 사랑입니다.
  
넷째, 사랑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했다는 증거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14절) 

우리는 “내가 예수님을 보았다, 만났다, 체험했다, 나는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정말 안다, 그것을 내가 직접 체험했다”는 말입니다. 무엇으로 증거 합니까? 사랑입니다. 결국 사랑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 놀라운 사랑의 축복이기를 원합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요한일서 시대의 초대교회 성도들은 평화의 시기를 보내지 않았습니다. 로마의 식민지시대였고, 사람의 평균수명이 40정도 되는, 지금의 절반 정도 밖에 되지 않는 험난한 시대를 살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그들은 예수님을 믿는 다는 이유로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현실을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그 사람들은 ‘서로 사랑’ 하였습니다.  가족을 사랑했고, 피를 나눈 형제만이 아니라, 영적인 형제자매들을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핍박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면서 그들을 예수님의 사랑 안에 들어오게 하려고 노력을 하였습니다. 그 노력이 뭐냐... 그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물질로 그리고 온몸으로 그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절을 주시고 평화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이 명절과 평화를 마음껏 즐기시기 바랍니다. 마음껏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주신 것을 우리는 누릴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서 하나님이 주신 이 평화와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이 이것을 알게 되도록 노력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가진 물질이 있으면 그 물질로, 때로는 온몸으로 수고를 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사랑하면 좋겠습니다. 그런 추석이 되시기를 바라면서 감사와 찬송이 모든 성도님들의 가정에 넘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