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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석] 때와 기한을 정하신 하나님 (전 3: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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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와 기한을 정하신 하나님 (전 3:1-11) 

이제 내일이면 우리나라 고유의 명절인 추석입니다. 이미 명절을 보내기 위해 고향으로, 부모님이 계신 곳으로 떠나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오늘 주일을 맞이하여 주의 전을 지키며 이 자리에 함께 예배하시는 모든 분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며 환영합니다.

달력을 보게 되면 절기라는 것이 있습니다. 
절기는 1년을 15일 간격으로 24등분하여 계절을 구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 신기하게도 때가 되면 어떻게 그렇게 잘 맞는지 모릅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는 일상에서 때에 관한 말들을 참 많이 사용합니다.

집에서도 일어날 때, 밥 먹을 때, 출근할 때, 공부할 때에, 또 나이가 들어 결혼할 때, 그러다가 이 세상을 떠나게 될 때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쩌면 우리 인생은 이러한 때와 늘 떼어 놓을 수 없는 관계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도 ‘때’ 라는 말이 무려 29번이나 나오는데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시킬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있고 꿰멜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했습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많은 때와 기한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거기에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의도가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때에 관해 말씀하심은 세상의 모든 때를 정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우리로 잊지 않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창1:14-16 ‘하나님이 가라사대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 주야를 나뉘게 하라 또 그 광명으로 하여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 이루라 또 그 광명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에 비취라 하시고(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두 큰 광명을 만드사 큰 광명으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으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이렇게 해와 달과 별들을 만드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다른 누가 아닙니다.

이것은 다시 말해 일년 365일, 사시사철, 낮과 밤의 때를 정하신 분은 창조주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살아 계셔서 세상만사를 섭리하시고, 지배하시며, 운영하시는 전지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주의 생명과 소멸의 모든 과정과 인간 만사의 때와 시기를 자신의 주권대로 정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시는 전지하신 분이기 때문에 만사를 미리 정해 놓으실 수 있고,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정해 놓으신 계획을 한 치의 오차 없이 실현시킬 수 있는 분이신 것입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하나님이십니다. 
 

두 번째로 이를 통해 때와 기한은 하나님의 권한에 속한 일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보이시고 마지막 승천하시려고 할 때에 제자들이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가 아니라” 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대로 하나님께서는 사45:7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 말씀으로 우리 인생의 모든 생사화복의 때와 기한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권한에 달려 있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때와 기간에 대해 강조한 것은 인간은 시간적 존재라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함입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잘 나가고 많은 재물이 있다 하더라도 그 순간은 자신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가지고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지나가는 시간은 붙잡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깨닫고 붙잡으려고 하면 시간은 더 빨리 도망쳐 버립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그만큼 인간은 시간의 틀 속에서 살아가는 유한한 존재라는 말해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월이 얼마나 빠릅니까?
새해가 시작된지 엊그제 같은데 벌써 9월입니다. 정말 세월이 유수와 같습니다. 

그런가 하면 우리 인생은 또한 어떠합니까? 예부터 인생의 짧음을 가리켜 ‘草露人生’이라고 했습니다. ‘인생이란 마치 풀잎 위의 한 방울 이슬 같다’ 는 뜻입니다. 

약4:14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고 했습니다. 

새벽에는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안개가 자욱하게 끼었다가도 아침에 태양이 떠오르면 순식간에 없어지는 것이 안개입니다. 

이 안개라는 말은 연기라는 말로 번역할 수도 있는데 그러니까 인생은 안개나 연기처럼 잠깐 보이다가 사라지는 허무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시39:4-5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의 어떠함을 알게 하사 나로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뿐이니이다 (셀라)’ 라고 했습니다. 

인생 70-80년이란 것이 기껏해야 한 뼘 길이만큼 밖에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욥7:6 ‘나의 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니 소망없이 보내는구나’ 라고 하였습니다.

베틀의 북은 순식간에 좌우로 왔다 갔다 하는 것인데, 인생은 그 베틀의 북보다 더욱 빠르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정해진 시간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네 번째로 때와 기간에 대해 강조한 것은 인간은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인간은 시간적 존재이기 때문에 날 때가 있는가 하면, 반드시 죽을 때가 있는 것이 정한 이치입니다. 

석가모니가 제자들을 불러 모아 놓고 문답을 하면서 ‘세상에서 이해할 수 없는 가장 기이한 일이 무엇이냐’ 라고 물었습니다. 

제자들은 각자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러 가지 자연 현상과 사회 현상들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석가모니가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습니다.

그 때에 마침 가장 총애하는 제자가 “사람은 누구나 죽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 누구도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이 놀라운 사실을 망각한 채, 영원히 살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습니다. 이것보다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한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다윗은 죽을 날이 임박하여 그 아들 솔로몬에게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의 가는 길로 가게 되었다’ 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죽음을 가리켜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 이라고 하였습니다.

흔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가리켜 ‘불확실성의 시대’ 라고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우리는 확실치 아니한 시대에 확실치 아니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불확실한 시대, 불확실한 삶 속에서 한 가지 확실한 것, 즉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라는 만고불변의 사실을 명확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죽음에는 ‘모르는 것 셋, 아는 것 셋’ 이 있다고 합니다.

모르는 것 세 가지란, ‘언제 죽을지 모른다.’ ‘어디서 죽을지 모른다.’ ‘어떻게 죽을지 모른다.’ 라는 것이며 아는 것 세 가지란 ‘반드시 한번은 죽는다.’ ‘아무도 함께 가지 못한다.’ ‘아무 것도 가지고 갈 수 없다.’ 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동의 하십니까?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높은 사람도 낮은 사람도 모두 죽습니다. 지식인도 무식한 사람도 죽는 것은 일반입니다. 유명한 사람도 무명한 사람도 다 죽습니다. 

고대 이집트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가운데 잔치를 베풀고 손님을 초대한 자리에 미라나 해골을 갖다 놓고 손님들에게 ‘죽음을 기억하라’ 고 말해주는 관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사실 이집트 사람들처럼 영원한 생명의 가능성을 잡아보려고 노력을 아끼지 않은 사람들이 또 어디에 있습니까?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를 세워 거대한 무덤을 만들고 방부제를 써서 미라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죽음을 잊지 말라고 끊임없이 되뇌임으로 죽음을 극복해 보려고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모든 사람의 결국이 이와 같이 됨이라.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

여러분 우리에게 때와 기한이 있음은 우리가 항상 언젠가는 이 세상을 떠나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다섯 번째로 때와 기한을 강조한 것은 인간은 이 세상이 끝이 아니라 영원을 사모하고 준비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기 위함입니다. 

인생이 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있고, 인생은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은 반드시 영원한 세계를 준비하며 살아야 합니다. 

1963년11월23일 금요일 미국 달라스시 한 복판에서 오픈 카 퍼레이드를 하며 달리며 지나던 미국 대통령 차를 향해 3발의 총성이 울렸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미국 역사상 가장 큰 인기를 얻었던 프런티어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케네디 대통령이 머리에 총을 맞고 쓰러졌습니다. 

그날 대통령의 호주머니에는 그가 잠시 후 연설하기로 되었던 연설문이 들어 있었다고 합니다.

이 연설문의 마지막 문단은 ‘범사에는 때가 있다’ 는 오늘의 성경 말씀을 인용하여, 지금은 미국이 세계 평화를 지키기 위한 파수꾼의 사명을 위해 국력신장을 위해 힘을 써야 한다는 것을 역설하고, 그리고 이어서 ‘여호와께서 성을 지켜 주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는 시편의 말씀으로 마쳐지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 연설문은 그의 죽음으로 영원히 읽혀지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케네디가 세상을 떠나기 몇달 전, 케네디 대통령은 미국 국가 조찬 기도회에 참여하여 빌리 그래함 목사의 ‘영원을 준비하라’ 는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기도회 후에 그는 빌리 그래함 목사님에게 잠시 백악관에 가서 좀 더 이에 대해 이야기를 할 수 있느냐는 요청을 합니다.

그때 빌리 그래함 목사님은 자신이 지금 감기 중이므로 대통령에게 감기를 옮기고 싶지 않다면서 만남을 다음 기회로 미루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케네디가 암살 당하던 날 11월23일 이 뉴스를 접한 빌리 그래함 목사는 순간적으로, 몇 달 전 워싱톤에서 자신에게 백악관에 가서 영원에 대하여 좀 더 이야기 할 수 없느냐고 간청하던 대통령의 얼굴이 떠올랐다고 합니다.

그리고 빌리 그래함은 그날 감기를 구실로 케네디와 더불어 영원에 대한 대화를 나누지 못하고 복음을 충분히 전하지 못한 것을 일생 최대의 후회로 생각한다고 그의 자서전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1절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동물이 아닌 사람에게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모두 내세를 동경하며 영원을 사모하며 살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본성입니다. 

배고픔의 욕망은 먹을 것에 대한 존재를 가정하고, 목마름은 마실 것에 대한 존재를 가정합니다. 
그리고 이성에 대한 욕구는 사랑할 수 있는 이성의 존재를 가정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내세에 대한 동경은 곧 영원한 세계의 존재를 전제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인간 사회에는 원시사회든지 문명사회이든지 종교가 없었던 적이 없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수많은 종교가 존재한다는 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죄와 삶의 고통과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을 바라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세계적으로 수많은 종교가 존재한다는 것은, 인간 모두에게 영원과 내세에 대한 간절한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내세도 영원한 세계도 없다면, 이처럼 많은 종교가 있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철학자 칸트는 전통적인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는 ‘내세는 있어야만 하는 당위의 세상이다’ 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인생이 한 번 살다가 죽으면 끝이다는 세상 사람들의 말에 절대로 속아 넘어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학생은 시험을 보면서 답안지에 얼마든지 자기가 원하는대로 마음대로 쓸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채점은 학생이 절대로 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선생님이 하고 교수님이 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 인간들은 얼마든지 인생에 대해 ‘인생이란 이런 것이네, 저런것이네’ 하고 자기 마음대로 말하고 살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사후에 평가와 심판은 절대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반드시 하나님이 하신다고 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인생이 한 번 살다가 죽으면 그만’ 이라는 생각 때문에 사람들은 영혼이 영원히 존재한다는 것과, 사후의 심판에 대한 무지 때문에 이 한번의 소중한 이 땅에서의 인생을 얼마나 어리석게 살아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 땅에서의 인생은 초로와 같으며 안개와 인생이요, 나그네 인생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의 부귀영화를 자랑할 것이 아닙니다.
괴롭고 불행하다고 하여 낙심할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생이 다 짧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세는 영원한 세계이며 무궁한 세계입니다. 
천국에서는 영원한 기쁨과 평강을 누릴 것이지만 지옥에서는 영원한 슬픔과 고통만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고 했는데, 세상에서 고생고생하며 살다가 죽은 후까지 또 영원한 지옥 형벌과 고통을 겪는다면 이 얼마나 불행한 인생입니까? 

반대로 세상에서는 잠시 혹 가난과 질병과 슬픔을 맛보고 살지라도, 천국에서 영원복락을 누리며 살수만 있다면 이 얼마나 복된 인생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 사람에게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사랑하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자녀를 낳고, 먹고, 자고, 하는 일이야 동물들도 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꿈은 아무리 아름다워도 꿈이고, 깨고 나면 무시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현세의 영화는 마치 꿈과도 같습니다. 죽고 나면 그것이 따라 가지 못합니다. 언젠가 저와 여러분에게도 분명히 생의 마지막 순간이 찾아올 것입니다. 

그 때 여러분은 어디에서 영원을 보내시겠습니까? 
혹시 하나님께서 오늘이라도 나를 부르신다면 여러분은 어디에서 영원을 보내실 것입니까? ‘영원’ 이란 시간이라는 말을 사용하기가 어려운 무궁한 기간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어느 것이 더 중요하겠습니까? 얼마든지 지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분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희락과 복락만이 가득한 영원무궁한 세계가 있다고 말씀합니다. 
또한 그와는 반대로 저주와 고통만이 가득한 영원한 세계가 있다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저와 여러분들은 어디에서 영원을 보내시겠습니까? 
여러분의 사랑하는 부모님, 여러분의 남편, 여러분의 아내, 여러분의 사랑하는 자녀들은 어디에서 영원을 보내야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영원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땅에 있는 동안에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영원을 준비하며 사는 것입니다.

영원을 준비하는 일은 곧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유비무환’ 이라는 말이 있듯이 이 땅을 살아가며 예수를 믿으면 심판과 지옥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죄 용서함을 받고 영생을 얻게 됩니다. 영원한 천국이 주어집니다. 이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할렐루야!

의사에게 절대로 듣지 말아야 할 말이 있다면 그것은 ‘너무 늦었는데요.’ 라는 말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말은 약도 수술도 소용없다는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저와 여러분이 영원한 문제에 대한 해결을 미룬다면, 그 사람은 영원토록 후회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과 이제 추석명절을 맞이하여 가족들과 친지들과 사랑하는 이들이 한자리에 모였을 때에 꼭 예수를 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사랑과 평화, 기쁨과 복락만이 충만한 천국에서 영원히 살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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