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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비움을 연습합시다 (빌 2: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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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움을 연습합시다 (빌 2:5-11)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어려웠던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또 지금 여러분의 삶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무엇입니까? 앞으로 살아가면서 가장 어려운 일이 무엇일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로마 시대 현인 가운데 한 사람인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 BC 106-BC 43)는 이렇게 말합니다.
  
“가장 어려운 일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비밀을 지키는 것이요, 둘째는 타인에게서 받은 해를 잊어버리는 것이요, 셋째는 한가한 시간을 이용하는 것이다.”

물론 사람마다 어려운 일은 각각 다를 수 있습니다. 제게 가장 어려운 일 가운데 하나는 살을 빼는 것입니다. ‘물만 먹어도 살이 찐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그런 체질을 가지고 있는 저로서는 살을 뺀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런데 여러분, 저 같은 사람이 살을 빼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살을 찌우는 것입니다. 저 같은 사람에게야 살을 찌운다는 것이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바짝 마른 체질을 갖고 있어 살을 찌우고 싶은 사람에게는 살을 찌게 만든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살을 빼고 싶은 사람은 먹을 것을 좀 줄이고 열심히 운동을 하면 어느 정도 살을 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살을 찌우고 싶은 사람은 아무리 애써도 살이 찌지 않습니다. 살을 찌우려고 늦은 밤에 라면을 끓여먹고, 열량이 많다는 초콜릿을 먹어도 살이 찌지 않습니다. ‘울어도 못하고 힘써도 못하는’ 것이 살을 찌우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또 하나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목표하고 세운 것을 이루는 것입니다. 목표를 세우고 열심히 기도하면 그대로 이루어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그게 결코 쉽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평생에 10억을 모으겠다고 목표를 세웠다고 합시다. 

한 때 편안한 노후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10억 정도는 있어야 한다고 해서, ‘10억 만들기’란 제목의 책이 굉장히 많이 나왔습니다. 『나의 꿈 10억 만들기』『백수아지매 주식으로 10억 만들기』『종자돈 500으로 10억 만들기』『부동산으로 10억 만들기』. 여러분, 10억 만들어 놓으셨습니까? 그리고 정말 10억을 가지고 있으면 노후가 편안할 것 같습니까? 우리 같은 범인(凡人)들이 10억을 만든다는 것도 힘들지만, 10억을 가진다 한들 우리의 노후가 평안하다고 아무도 보장해 주지 못합니다.
  
우리 같은 사람이 10억을 만든다는 목표를 세우고 10억을 만드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그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가지고 있는 10억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몇 십억이나 몇 백억을 가진 사람들이 10억을 포기하는 것이야 쉬울지 몰라도 자신의 수중에 가진 10억을 모두 포기하는 것은 아무 것도 가지지 않는 사람이 10억을 만드는 것보다 더 어렵고 힘든 일입니다. 

누구나 자기의 것을 포기하고 비운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어쩌면 우리의 인생에서 가장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자기를 비우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어렵고 힘들다 하더라도 우리 신앙인은 자신을 비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고,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가복음 8:34)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자기의 것을 포기하고 비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자기를 비워야 합니다. 바로 거기에서부터 신앙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세기 12:1)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는 말씀은 ‘네가 가지고 있고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떠나라’는 말씀입니다. 지금 자신이 가지고 있고 누리고 있는 것을 다 비워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고, 믿음의 순례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잡이를 하고 있는 베드로와 안드레를 당신의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베드로와 안드레는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르게 됩니다. 그물을 버려두었다는 말씀은 자신의 직업과 삶을 포기했다는 말입니다. 베드로와 안드레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누가복음 5장에 보면 세리 마태를 부르시는 장면이 소개됩니다. 세관에 앉아 사무를 보고 있던 마태에게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마태는 즉시 예수님을 따르게 됩니다. 그 때의 모습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라.”(누가복음 5:28) 

당시 세리가 누리고 있던 것은 참으로 많았습니다. 직업적으로 안정되어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세리들은 백성들에게 부과된 세금보다 더 많이 거둬들여 일부는 로마에 상납하고, 나머지는 자신이 가졌습니다. 그렇게 해서 세리들은 부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비록 그것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미움을 받기도 하고 ‘죄인’ 취급을 받기도 했지만, 그들은 삶에 부족함이 없이 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모든 것을 버려두고 따랐다’는 말은 그가 지금 누리고 있는 편안하고 안락한 삶 모두를 포기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만 ‘포기하고 비우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이미 당신께서 모든 것을 비우고 포기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늘 부르던 찬송시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가장 잘 나타내주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본체이십니다. ‘하나님의 본체’라는 말은 하나님이셨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리를 포기하시고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은 ‘자기를 비우셨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가지고 계신 모든 것을 포기하셨습니까? 왜 ‘자기를 비워’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까?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구원하려고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입니다. 육체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온갖 고난과 고초를 겪으시고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감당해야할 죄의 값을 치루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으로서 받으셔야 할 모든 영광과 존귀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오늘 본문 6절의 표현으로 한다면,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셔야’ 마땅합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신 영광을 받으셔야 하고,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존귀를 받으셔야 합니다. 모든 인류와 피조물로부터 찬양을 받으셔야 할 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받으셔야 함에도 그 모든 것을 다 비우시고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비우셨다’라는 단어는 성경언어로 케노시스(Kenosis)인데, 이 말은 얼굴을 깎았다는 뜻입니다. 얼굴의 가죽을 벗었다는 뜻입니다. 마치 조각가가 칼이나 정으로 조각할 돌을 깎아내듯이, 예수님 스스로 당신의 얼굴을 깎아내셨다는 말입니다. 아무것도 남지 않을 때까지 깎아내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기 비움이라는 말은 스스로 체면을 깎아 내렸다는 뜻이고, 스스로 자기의 명예를 벗어던졌다는 뜻입니다. 여기에는 고통이 따릅니다. 조각가의 칼이나 정이 조각품을 깎아낼 때, 그 조각품이 겪는 아픔과 같은 아픔과 고통을 예수님께서 친히 당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자리를 비우심으로 받으신 것이 무엇입니까?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심입니다. 마땅히 예수님께 영광을 드려야 할 인간에게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마땅히 예수님께 존귀함을 드려야 할 인간에게서 업신여김을 받으셨습니다. 마땅히 예수님을 찬양해야 할 인간으로부터 모욕을 당하셨습니다. 마땅히 높임을 받으셔야 할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자기를 비우심으로 예수님께서 얻으시는 것은 비움에 대한 영광이나 칭찬이 아닙니다. 비우심에 대한 찬양이 아닙니다. 고난과 모욕과 멸시를 당하셨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비운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자기를 비움으로 그곳에 영광이 채워지고, 자기를 비움으로 그곳에 사람들의 칭찬으로 채워진다면 비운다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자기를 비움으로 고난을 받고, 자기를 비움으로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하고, 자기를 비움으로 업신여김을 당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럴 줄 알면서도 그 자리로 내려가는 것이 자기 비움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신앙인들에게 자기 비움은 고통이지만, 끊임없이 우리가 걸어가야 할 십자가의 길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본받아야 할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하는데, 예수님의 어떤 모습을 닮아야 하는가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자기 비움’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께서 하늘 영광의 보좌를 비우시고 이 땅에 오신 것처럼, 그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받은 우리는 그 예수님을 닮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모든 것을 비우신 것처럼 우리도 비우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기를 비우지 않고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시작할 수 없듯이, 끊임없이 자기를 비우지 않고는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왜 오늘날 교회가 우리 사회로부터 비난을 받습니까? 왜 오늘을 사는 신앙인들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손가락질 당하는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습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예수님을 닮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닮는 삶을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자기를 비우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더 많은 것으로 채우려 합니다. 많이 채우는 것을 축복이라고 생각하고 채우기 위해서 혈안 되어 있습니다. 
  
교회는 비우는 데에서 교회다운 모습이 보여집니다. 성도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비움으로서 비로소 세상으로부터 신앙인답다고 인정을 받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가 비워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내려놓아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비워야 한다는 말에는 이미 채워져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채워져 있지 않으면 비울 수가 없습니다. 채워져 있지 않는 것은 비울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비어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이셨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이미 하나님으로서 받으실 영광과 존귀와 찬양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비우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자기를 비우셨다는 것이 정말 위대한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채워져 있는 것을 비워야 합니다. 한 때 내려놓음이라는 말이 유행했습니다. 몽골에서 선교하고 계신 이용규 선교사님이 쓰신 『내려놓음』이라는 제목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우리 신앙인들 사이에 내려놓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롭게 인식되었습니다. 이 내려놓음이라는 말이 자기 비움이라는 말입니다. 

이용규 선교사님이 『내려놓음』이라는 책을 쓰신 후에 그 2편으로 『더 내려놓음』이라는 책을 내셨습니다. 거기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내려놓음』이라는 책을 쓰신 후에 선교사님이 많은 곳에 강사로 초빙되어 가시게 되었습니다. 가는 곳마다에서 종종 듣는 이야기가 ‘선교사님의 책을 읽고 내려놓기로 했습니다’라는 말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부자 되겠다는 생각을 내려놓았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청년은 ‘서울대학교 가겠다는 생각을 내려놓았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사람 가운데는 부자가 될 가능성이 없으니까 포기하겠다는 뜻으로 내려놓겠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서울대학교 갈 실력이 안 되니까 서울대학교 안 가겠다고 선언하면서 서울대학교를 내려놓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려놓는 것과 포기하는 것은 전적으로 다릅니다. 내려놓는다는 것, 자기를 비운다는 것은 먼저 채워져 있어야 합니다. 서울대학교를 내려놓는다는 것은 서울대학교에 갈 충분한 실력을 쌓았고 갈 능력도 있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을 다른 곳에 쓰신다면 서울대학교라는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에 가지 않고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곳으로 가는 것을 말합니다. 서울대학교 갈 능력도 없으면서 서울대학교 가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은 내려놓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서울대학교에 못가는 것이든지, 아니면 서울대학교에 갈 수 없으니까 가고 싶은 생각을 포기하는 것일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10억을 벌 수 있는 가능성이 없으니까 ‘나는 10억을 내려놓았어’ 그렇게 말하는 것은 내려놓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진짜 내려놓는 것은 ‘10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나를 위해 쓰지 않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곳에 기쁨으로 쓰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비운다는 것이 바로 그것을 말합니다.

우리 신앙인들이 비워야 할 것 중에 가장 먼저인 것은 ‘자기 의’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책망을 들은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들이 신앙생활을 게을리 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열심히 신앙생활했습니다. 그들은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했습니다. 십일조 철저히 했습니다. 하루에 세 번씩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했습니다.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구제도 많이 했습니다. 어려서부터 율법을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행동거지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했습니다. 옷자락에 더러운 것이 묻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조심스럽게 행동했습니다. 정말 거룩하다는 말을 듣기에 충분할 정도로 열심히 신앙생활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들이 신앙적인 열심을 내지 않는다고 책망하신 것이 아닙니다. 금식기도 하지 않는다고 책망하신 적도 없습니다. 왜 십일조하지 않느냐고 나무라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책망하신 것을 하나입니다. 그들이 ‘자기 의’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 의’라는 것은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 자기 스스로 만족해하며 자랑스러워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열심히 한 것만큼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싶어 합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했습니다. 금식하면서 자신이 금식했노라고 자랑하고 싶어서 일부러 허약하게 보이도록 했습니다. 기도 많이 한다는 것을 알리고 자랑하고 싶어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손을 높이 들고 큰 소리로 기도했습니다. 남들을 많이 도와주었지만, 도와주면서 자신이 이렇게 좋은 일을 많이 한다고 떠벌리고 다녔습니다. 그게 모두 자기 의입니다. ‘자기 의’가 무서운 것은 자신이 한 것을 자랑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자신만큼 하지 못한 사람을 업신여긴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줍니다. 

여러분, 열심히 봉사하시고 열심히 신앙생활하십시오. 그러나 자기 의에 사로잡히진 마십시오. 우리는 겸손하게 신앙생활해야 합니다. 우리가 열심을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하여 주님을 섬기고 교회를 섬기고 교인들을 섬겨야 합니다. 그리고 열심히 일한 후에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누가복음 17:10)
  
열심히 신앙생활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신앙적인 자기 의도 없습니다. 포기할 것도 없습니다. 자기의 삶을 열심을 다해 살지 않는 사람에게는 자기 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자기 의를 만들지 않겠다고 열심을 포기하는 것은 게으르고 나태한 종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살 때에도 그렇고, 직장이나 사업장에서 일할 때에도 그렇고, 교회에서도 그렇고 모든 일에 열심해야 합니다.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리고 꼭 잊지 마십시다. 그 열심이 나의 의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열심히 한 후에는 열심히 했기 때문에 마땅히 받아야 할 영광과 칭찬을 받고 싶어 하는 마음을 비워야 합니다. 그게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것이고, 그게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나를 드러내고 싶어 하는 마음만 비우면 우리의 삶은 하늘의 기쁨으로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나를 드러내고 싶어하는 자기 의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실망하고, 짜증나는 삶을 살게 됩니다. 내 마음을 비우기만 하면 실망할 것도 없습니다. 기대하지 않았는데 실망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열심히 일한 후에 칭찬을 기대하기 때문에, 기대한 만큼의 칭찬이 되돌아오지 않으면 실망하고 섭섭함을 느낍니다. 그러나 칭찬을 기대하지 않으면 칭찬해 주는 이 하나 없어도 섭섭하지 않습니다. 내가 선을 베풀고 나서 그것을 되받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에 그가 나에게 되갚아 주지 않으면 마음에 미움과 분노가 일어납니다. 그런 마음을 비워버리면 그가 은혜를 잊는다 해도 미울 것도 없고 원망스럽지도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 마음을 비웁시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비우셨습니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다”는 말씀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하나님으로서 받으셔야 할 영광이나 존귀를 하나도 남김없이 비워버리셨습니다. 그랬기에 십자가의 길을 가실 수 있었습니다. 조금이라도 덜 비우셨다면, 조롱하고 채찍질하는 그들을 어찌 용서할 수 있었겠습니까? 조금이라도 덜 비우셨다면, 배신하고 도망쳐버린 제자들을 어떻게 다시 제자로 부르실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가 우리의 마음에서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자기 의’와 욕심을 비워버린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만족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비우면 단순해지고, 그 때 우리는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하늘의 기쁨을 가득 담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때 우리는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비우면 없어진다고 생각합니다. 비우면 바보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비우면 모든 것이 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비워야 바르게 살 수 있습니다. 
  비워야 하늘의 은혜를 가득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비워야 하늘을 품을 수 있습니다. 
  비워야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비움은 결코 한 순간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비움을 연습해야 합니다. 내 손에 들고 있는 작은 것부터 내려놓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내려놓음으로 찾아온 기쁨을 알 때에만 더욱 큰 것을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비움에 채워지는 하늘의 풍요가 있음을 경험할 때에만 더욱 많은 것을 비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비우면 예수님을 닮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비우면 예수님을 더 많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비우면 예수님으로 만족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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