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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삶을 조각하시는 하나님 (요 1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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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조각하시는 하나님 (요 11:5-16)

“5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6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7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8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10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11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오늘은 꼭 17년 전 125가구가 있던 마을에서 처음으로 교회가 예배했던 날입니다. 첫 예배는 임복출 집사님 집의 소 마구간을 개조한 7평정도 되는 사택에서 여덟 명이 예배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이 마을에서 교회를 하면 안 된다고 엄포를 놓았습니다. 설명과 설득을 하면서 “여러분들이 겪어보고 좋다고 말 할 때까지 교회간판도 십자가도 달지 않겠다.”고 마을 대표에게 약속을 했습니다. 그리고 네 평 남짓한 창고를 개조하여 교회당으로 만들었습니다. 

선교원을 개설하고, 마을의 전기 전자제품들을 수리해주며, 마을 아이들을 웅촌까지 등하교 차량을 운행하면서 차츰 마을 사람들의 마음이 열렸습니다. 첫 예배를 한지 열 달 정도가 지났을 때에 마을의 대표가 식사 초대를 했고, 그 날 ‘교회가 십자가도 달고 간판도 세워야 하지 않겠느냐?’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5년이 되었을 때, 지금의 교회당을 허락하셔서 개축을 하고 이전을 했습니다. 그동안의 과정을 이루 말로다 할 수 없지만 돌아보면 하나님의 철저한 계획과 인도하심이었음을 감사드립니다.

이처럼 인생의 모든 삶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하심을 생각하면서, 이 시간에는 ‘삶을 조각하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펴보려합니다. 여러분도 자신이 걸어온 삶을 돌아보면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생각해보고, 또한 자신의 삶을 조각하시는 하나님을 깊이 신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34세에 ‘낭창’이라는 ‘결핵성 피부병’ 으로 죽은 ‘에디스 류스’라는 젊은 부인의 신앙고백 중 한 부분입니다. 이 글은 죽음 직전에 기록한 것입니다. 

“삶에서 경험하는 우리의 십자가조차도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의 유익을 위해 사용될 수 있음을 아는 것, 이것이 기쁨이다. 기쁨은 우리의 상황이 어떻든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관여하신다는 것을 알고, 영혼의 깊은 평안함을 맛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뻐할 때 기뻐하시며, 우리가 울 때 함께 우신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 곁에 계신다. 임마누엘 하나님이시다. 이 사실을 아는 것이 궁극적인 기쁨이 된다. 그것은 죽음이나 우울함, 의심, 그리고 낭창의 화염으로도 약화시킬 수 없는 강한 것이다. 그것보다 더한 기쁨이 있겠는가? 나는 그 가능성에 대해 탄복하며 전율한다.”

이 부인은 죽음 앞에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기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이렇게 죽음 앞에서도 기뻐하며 감사하는 것은 자신의 모든 삶을 조각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일들이 스쳐간 지나온 17년의 시간들은 하나님의 계획과 인도하시는 섭리하심이었습니다. 자라는 아이들이야 성장과 자신이 품은 비전 때문에 시간이 더디게 여겨지겠지만, 대부분은 시간을 잡고 싶도록 점점 더 빠르게 느껴지실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가장 공평한 것이 시간입니다.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만물에는 동일한 시간이 적용됩니다. 한 시간의 길이가 부자라고 더 길고, 가난한 사람이라고 더 짧은 것도 아니고, 아이라고 길고 어른이라고 짧지도 않습니다. 모두에게 주어진 이 공평한 시간을 계획하시고 다스리시는 분이 우리 아버지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이사야 45:7절에서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들을 행하는 자니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의 생애에서 계획하고 소망했던 일들이 이루어졌습니까? 나름대로 힘쓰고 애를 썼는데도 아직 아무런 진전이 없어서 낙심되는 일은 없습니까? 이 말씀을 통하여 자신의 삶을 조각하시는 하나님을 알고 신뢰하고 맡기고 순종하여 아름다운 삶을 이룰 수 있기를 바랍니다.

※ 먼저, 본문을 살펴봅시다.

본문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예수님의 이적 이야기의 일부분입니다. 이야기의 발단은 예수님께서 특별히 관심을 가지시고 사랑하셨던 베다니에 사는 세 남매의 가정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와 오빠인 나사로 세 남매였습니다. 그런데 가정의 기둥이자 가장 역할을 했던 오빠인 나사로가 심한 병이 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다급한 자매는 사람을 예수님께 보내어 ‘오빠가 병들었다.’는 사실을 알렸습니다. 고쳐주시기를 바랐던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그 소식을 듣고서도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하시고는 그대로 이틀을 더 계셨습니다. 그 사이에 나사로는 죽었고, 이미 장례까지 치렀습니다. 그제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사로를 깨우러 가자’며 나섰습니다.

이 과정에서 예수님의 생각과 제자들의 생각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쉽게 느낄 수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있는 베다니로 가자고 하셨을 때 제자들이 펄쩍 뛰면서 만류했습니다. 제자들은 “선생님, 방금도 유대 인들이 돌로 치려하였는데, 또 그리고 가시려 하나이까?”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계획을 알지 못하는 제자들의 당연한 생각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고 하셨을 때에도 제자들은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확실하게 “나사로가 죽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래도 제자인 도마는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엉뚱한 소리를 했습니다. 

여기에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주제가 들어있습니다. 주제는 예수님께서 ‘베다니로 가자.’고 하시자 제자들이 극구 만류했을 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속에 들어있습니다. “낮이 열두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이 말씀 속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계획된 시간’입니다. 즉 우리 인생의 모든 삶을 조각하시는 - 계획하시고, 인도하시는 - 하나님의 섭리를 말합니다. 

※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때’를 조각하십니다.

때란 헬라어로 chronos(crovno") 라고 하며, 영어로는 time 으로 번역하고, ‘기회’라는 의미로서 ‘엄밀한 의미에서 고정된 시간’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대로 이틀을 더 머무셨습니다. 그 사이에 나사로는 죽었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참으로 야속한 분이십니다. 나사로가 병든 것을 미리 알고 계셨으면서도 가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소식을 들었을 때 즉시 출발하셨더라면 나사로도 죽지 않고, 자매들이 애타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자매는 그 며칠 동안 얼마나 애타게 주님을 기다렸겠습니까? 그래도 세상에서 의지가 되던 오빠였는데, 자신들만 남겨진다고 생각하면 앞이 캄캄했을 것입니다. 그 당시의 환경은 자매가 살아가기에는 너무나 힘든 세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그렇게 여유롭게 시간을 끌고 계셨겠습니까?

예수님은 ‘때’를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즉 나사로의 죽음을 통하여 나타내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실 때를 기다리셨습니다. 전도서 3:1절에서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는 사람이 생각하는 때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생각하는 때에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은 늦게 오시는 법도 없고, 일찍 오시는 법도 없이 언제나 정확하십니다. 그래서 성도는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악한 사람은 잘되는데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고통만 더한다.’고 불평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박국 2:3절입니다.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고 하십니다. 즉 하나님의 일에는 정하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는 사람이 볼 때에는 늦다고 생각되기도 하겠지만 결코 늦거나 거짓됨이 없이 정확하게 온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억울한 고통을 당하며 13년을 기다렸습니다. 다니엘은 사자 굴에 던져졌고,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풀무불 속에 던져졌습니다. 아브라함은 ‘후손을 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서도 인간의 가능성이 끊어질 때까지 25년을 더 기다려야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영접한 후 14년을 신앙의 연단의 기간을 지냈습니다. 38년 된 병자도, 소경 바디매오도, 난쟁이 삭개오도 모두 고침을 받거나 주님을 만나기까지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기도함에도 불구하고 이뤄지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남았다고 하는 것은 아직 해결되어야 할 문제가 남아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급하다고 문제를 덮어두고 역사하시지는 않으십니다. 그래서 신앙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믿음의 인내가 필요합니다. 히브리서 10:36절에서는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고 하시며, 야고보서 1:4절에서는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에게 아직 이루지 못한 계획들이 있습니까? 믿음으로 기도하며 소망을 품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십시오. 포기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반드시 이루실 것입니다. 사람의 조급함은 결코 덕을 세우지 못함을 잊지 마십시오.

※ 하나님은 우리의 ‘시기(時期)’를 조각하십니다.

시기란 헬라어로 kairos(kairov") 라고 하는데, ‘적당한 때’를 의미하며, ‘때’보다는 좀 더 긴 ‘특별한 기간’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로마서 8:18절의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는 말씀에서 ‘고난과 영광의 시기’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있는 베다니로 가자고 하셨을 때, 제자들이 기겁을 하며 만류했습니다. “선생님, 방금도 유대 인들이 돌로 치려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라고 했을 때, 예수님은 “낮이 열두 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에서 “낮이 열두시가 아니냐?”라는 말씀을 주목해 봅시다. 

“낮이 열두시”라는 말에는 여러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먼저 ‘한 낮’이라는 의미입니다. 한낮에는 두려워하여 숨거나 잠자는 때가 아니라, 한참 일할 때입니다. 그리고 일을 할 수 있는 여건임을 의미합니다. 빛이신 주님이 함께 하시고, 건강하고, 기회가 있고, 능력이 있는 때입니다. 반대로 밤이 올 터인데 인생의 밤은 불신의 때, 병약할 때, 기회가 사라지고 없는 때, 고통의 시기이며, 이때에는 일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종합해 보면, ‘지금은 빛이 있으므로 일할 때’라는 ‘시기’에 대한 예수님의 관점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세상적인 이치로 볼 때에 ‘지금은 숨어있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자들이 “방금도”라고 표현했는데, 이는 유대인들이 자신들을 노리고 있는 지금의 상황 즉 숨어있어야 할 ‘시기’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이나 자신들이 유대인들 앞에는 나타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시기에 대한 제자들의 관점입니다.

성경에는 이런 관점의 차이들을 많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는 아브라함에게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99세 때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90세인 사라가 아들을 낳아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 엎드려 웃으면서 속으로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생산하리요”라고 했습니다. 

얼마 후 다시 하나님께서 임하셔서 사라를 찾으시며, 아브라함에게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사라가 장막에서 그 말씀을 듣고는 속으로 웃으면서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느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나으리요.’ 하느냐?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불가능한 시기에 대한 아브라함과 사라의 관점입니다.

사람은 환경과 여건을 보면서 일을 가늠합니다. 즉 사람의 관점은 눈에 보이고 이해되는 환경과 상황과 여건에 의하여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사라 부부도 ‘아들을 주겠다.’고 하신 시기가 불가능한 관점으로 생각된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 세계의 관점인 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능치 못한 일이 없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빌립보서 4:13절에서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고백합니다.

미국 켄터키 주 ‘아이솜’에 있는 한 어머니에게 월남전에 참전하고 있는 아들 ‘라리 매가드’로부터 편지가 왔는데 내용 중에 아들이 쓴 시가 있었습니다. 그 시를 읽는 중에 아들이 전사했다는 전보를 받았습니다. 그 시의 내용입니다.

“주 하나님! 이전에는 한 번도 당신께 말씀드린 적이 없지만 지금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사람들은 당신이 계시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바보같이 나는 그것을 모두 믿었습니다. 그런데 간밤에 구멍 난 창구를 통해 당신의 하늘을 보았습니다. 그 순간 그들이 거짓말쟁이들임을 깨달았습니다. 왜 그동안 당신이 만드신 것들을 볼 시간이 없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젠 제 손을 잡아 주시겠습니까? 당신의 얼굴을 직접 대하기 전에 이 지옥 같은 곳에 온 것이 재미있습니다. 오늘 당신을 뵌 것이 무척 기쁩니다. 곧 0시가 됩니다. 그러나 당신이 가까이 계심을 안 이상 두렵지 않습니다. 당신을 만난 후로는."

여러분에게 아직 이루지 못한 일들이 자신의 불신으로 인하여 늦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모든 생활 중심에 주님이 계심을 알고, 오직 그 주님을 믿고 의지하고 순종합시다. 우리의 하나님은 인간의 이해 속에서 일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영역에 계시면서, 우리가 이해하는 환경과 상황과 여건을 초월하여 일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해를 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한다면 결코 믿을 수도 따를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면서 믿음으로 나아갑시다. 우리의 모든 삶은 하나님께서 친히 조각하심을 믿고 인내하며 순종하여 대복교회로서 밝은 미래를 만들어 가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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