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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더 행복한 가정 (히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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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행복한 가정 (히 12:1-4)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2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3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4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히12;1-4)

오늘은 히브리서 12장 1-4절 말씀을 통해서 ‘더 행복한 가정’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선포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에 성령의 기름 부으심과 감동이 넘쳐나기를 소원합니다.   모든 사람이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불행을 소원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나 혼자만으로는 행복하기가 어렵습니다. 행복은 가족단위인 것 같습니다. 그러면 ‘행복한 가정’은 어떤 가정일까요?  ‘더 행복한 가정’ 은 또 어떤 가정일까요? 
 
행복한 가정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가정입니다. 그러면 더 행복한 가정은       
첫째로, 예수님을 믿으면서 제사를 지내지 않는 가정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을 믿으면서 믿음을 중도에 포기하지 않는 가정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을 믿으면서 끝까지 예수님만을 바라보는 가정입니다.  
여러분들의 가정이 행복한 가정에서 나아가 ‘더 행복한 가정’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오늘 본문에 들어가기에 앞서서, 오늘 본문 말씀이 있는 히브리서의 배경을 살펴봅니다. 히브리서는 누가 쓴 글인지, 또 누구에게 쓴 글인지는 불확실합니다. 그러나 히브리서의 목적은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는 히브리인이라고도 불리우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을 권면하고 격려하기 위해서 기록된 책입니다. 당시 유대교는 로마가 인정하는 ‘합법(合法)’종교였고 기독교(=예수교)는 ‘불법(不法)’종교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안으로는 동족인 과격한 유대주의자들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받았고, 또 밖으로는 로마의 폭군 네로황제가 로마 대화재의 책임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덮어씌워서 기독교를 대대적으로 박해하였습니다. 사회생활 뿐이 아니라 생명까지도 위협을 받는 상황입니다.  

이러한 고난과 앞으로 또 어떤 박해가 올지 모르는 불안감에서 히브리 성도들은 유대교로 되돌아가  ‘합법’의 울타리 속에 들어가서 안주하고 싶은 유혹이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물론 아직 대대적인 ‘배교(背敎)’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히브리 성도들은 흔들리고 있었고,  더 큰 문제는 유대교로 되돌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부인하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즉 ‘옛 종교’인 유대교로 돌아가 율법이 말하는 제사를 다시 지키는 것이 그리스도를 배신하는 ‘배교’라고 까지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유대인 성도들에게 핍박가운데에도 믿음을 굳게 지키고, 바른 신앙, 생명의 신앙을 히브리 성도들에게 전하려는 목적으로 기록된 것이 히브리서입니다.   히브리서는 오늘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필요한 말씀입니다. 

이제 말씀을 하나 하나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더 행복한 가정은 예수님을 믿으면서 제사를 지내지 않는 가정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가정은  행복한 가정입니다.  사실 모든 사람이 다  예수님을 믿지는 않지요. 우상을 섬기며, 조상의 영혼을 섬기는 집이 우리나라에는 더 많습니다. 우리는 그 영혼을 불쌍히 여기며 전도의 대상으로 보고 기도하고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여러분,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옛 종교인 조상제사를 버리지 못하는 가정이 혹 있습니다.  초대교회 히브리 성도들이 옛 종교인 유대교로 돌아가서 율법을 지키고, 제사를 드리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배신하는 ‘배교(背敎)’이듯이... 믿는 사람들이 여전히 제사를 지내는 것이 오늘날의 ‘배교’입니다.  

왜 유대교로 돌아가서 율법을 지키고 5대 제사를 지내는 것이 배교입니까?  그것으로 구원을 받으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을 의지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 다니는 교인들이 여전히 조상제사를 계속하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교회를 다니면서,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여전히 제사를 지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추도예배를 드리는데 상을 차려 놓고 드린다고 합니다. 

왜 예배를 드리는데 상을 차려놓고 예배를 드릴까요? 조상의 영혼이 와서 밥을 먹도록 섬기는 것 아닙니까? 예수님도 섬기고 조상도 섬기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분명히 우상숭배라고 말을 합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참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우상과 같은 수준으로 내리는 것이며, 우상을 하나님과 같은 수준으로 높이는 것이기도 합니다.   

성도여러분, 구약성경을 보면 가장 어둡고 타락한 시대중의 하나가 사사기시대입니다.  사사기 시대의 특징이 무엇일까요? (삿17;1-4)“에브라임 산지에 미가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더니 2그의 어머니에게 이르되 어머니께서 은 천백을 잃어버리셨으므로 저주하시고 내 귀에도 말씀하셨더니 보소서 그 은이 내게 있나이다 내가 그것을 가졌나이다 하니 그의 어머니가 이르되 내 아들이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3미가가 은 천백을 그의 어머니에게 도로 주매 그의 어머니가 이르되 그러므로 내가 이제 이 은을 네게 도로 주리라 4미가가 그 은을 그의 어머니에게 도로 주었으므로 어머니가 그 은 이백을 가져다 은장색에게 주어 한 신상을 새기고 한 신상을 부어 만들었더니 그 신상이 미가의 집에 있더라” 아들이 어머니의 은을 도둑질합니다. 

그런데 도둑을 맞은 어머니가 ‘詛呪’를 하니까, 아들이 저주받지 않으려고 ‘내가 훔쳤습니다’ 합니다.  이제 어머니가  ‘내 아들이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  라고 ‘祝福’을 합니다. 그리고 그 은 일부를 가져다가 무엇을 합니까?   ‘내가 내 아들을 위하여 한 신상을 새기며 한 신상을 부어 만들기 위해 내 손에서 이 은을 여호와께 거룩히 드리노라’ 하면서 ‘한 신상을 새기고 한 신상을 부어’ 두 개의 신상을 만듭니다. 그 새긴 신상과 부어 만든 신상이 여호와라는 것입니다.  이 모든 행동은 ‘복’을 받기 위한 목적입니다.   

성도여러분, 제사는 조상이 목적이 아니라 ‘복’이 목적입니다. 왜 조상제사를 드리느냐 ‘복’을 받기 위해서이지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왜 상을 차리느냐 ‘섬기기 위해서’ 상을 차리는 것입니다. 복을 받기 위해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신상을 만드는 것처럼, 복을 받기 위해서는 도덕도 없고 윤리도 없는 것이 우상숭배의 특징입니다.  (사44;17) “그 나머지로 신상 곧 자기의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엎드려 경배하며 그것에게 기도하여 이르기를 너는 나의 신이니 나를 구원하라 하는도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귀신도 살아 있습니다.  귀신을 우리 가정에 초대할 방법이 있습니다.  굿을 하는 것입니다. 음식을 차려놓고, 무당을 불러서 굿을 하는 것이 당연히 귀신을 초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방법은 제사(祭祀)를 드리는 것입니다.  한상 차려놓고 ‘오셔서 많이 드세요’ 하는 것입니다. 올까요? 안 올까요?  (벧전5;8)“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오지 말라고 해도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데... 오라고 상 차려 놓고 부르니 당연히 오지 않겠습니까?  추도예배를 드리면서 상을 차려 놓고 드린다고 하였습니다. 상(床)을 차리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와서 밥 먹으라는 것이고, 귀신을 공양하는 것입니다. 맞지요? 그러면 귀신이 올까요? 안 올까요?  옵니다. 오라고 제사를 지내주는데 왜 안 오겠습니까!!  

우리는 두 가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인생들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짐승의 혼은 아래 곧 땅으로 내려가는 줄을 누가 알랴”(전3;21)  죽은 뒤 인생의 혼은 위로 올라갑니다. 조상의 영혼이 밥 먹으러 온다는 말은 성경의 어디에도 없습니다. 단지 귀신들이 옵니다. 뭐하러 옵니까?  (요10;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오는 것입니다.  특히 귀신들은 몸을 아프게 하고, 사고가 나게 합니다.  하나님과는 정 반대입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겁을 먹고 사고가 무서워서, 병이 무서워서 하나님을 버리고 귀신만을 섬깁니다.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4;7) 마귀를 대적하면 도망가는데, 마귀를 겁을 내서 불러들이면... 얼마나 마귀가 좋아하겠습니까? 마귀가 합법적으로 그 집에 터를 잡고 주인행세를 합니다. 내가 불러들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귀신을 집에 불러들이지 마십시오. 귀신을 우리 가정의 주인으로 만들지 마십시오. 가정이 불행해 집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요10;10) 인데 왜 스스로 도둑을 불러들입니까? 복을 부르고, 축복을 받아도 모자라는데... 혹시라도 자녀에게 남이 없는 질병이 있거나,  집안에 근심거리와 불행이 있다면... 내가 불러들인 귀신 때문일 수 있습니다. 다 그렇지는 않지만... 내 책임일 수 있습니다.  내가 무당 역할을 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한 번 들어온 귀신은 잘 안 나갑니다. 절대로 안 나가려고 온갖 발악을 합니다.  철저히 회개하고, 강력한 성령의 능력을 의지해야 이 귀신을 좆아 낼 수 있습니다.    

전쟁을 할 때, 승리를 위해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는 일입니다. 상대편의 본부를 공격하여 승리를 얻기 위해서 반드시 먼저 유리한 지형을 선점해야 합니다. 교두보를 마련한다고 하지요. 자리를 잘 잡으면... 절반은 이기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제사(祭祀)가 바로 귀신에게 자리를 잡아주는 일입니다. 가정을 파괴하는 땅을 내가 스스로 내어 주는 것입니다.  조상제사를 드리지 않는 더 행복한 가정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둘째로, 더 행복한 가정은 예수 믿는 믿음을 중도에 포기하지 않는 가정입니다.  오늘 본문은 믿음의 정의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믿음은 경주(競走)’라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특히 100미터 단거리가 아니라 꾸준히 달려야 하는 장거리 경주입니다. 오래 달리는 일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힘이 듭니다.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경주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경주를 하는 자가 가져야 3가지 마음이 있습니다. 

 **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1절上) 이 길이 진짜 믿음의 길이고, 이 길이 진짜 진리의 길이라는 확신입니다.  이런 확신을 가지고 먼저 믿음의 길을 걸어간 구름 같은 허다한 증인들이 있습니다.   바라기는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가장 강력한 믿음의 증인이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따라가다가 환난과 핍박속에서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려는 믿음의 불확신 속에 사는 사람들에게 ‘구름 같은 허다한 증인들이 있다’ 고...강조하는 것은 이 길은 진짜 길이다. 정말이다. 하고 저자가 도장을 쾅쾅 찍어주는 것입니다. 

  ** 결단이 있어야합니다. 

믿음의 경주에는 결단이 중요합니다. 1절에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성도여러분, 죄는 ‘무거운 것’입니다. 마라톤 할 때 오리털 파카입고, 군화 신고 달리는 사람 있습니까? 가벼운 유니폼 입고 조깅화 신고 최대한 가볍게 해서 달리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는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려야 합니다. 죄가 있으면 믿음의 경주가 힘이 듭니다. 어깨에, 등에, 줄줄이 뭔가를 매달고 달리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속도가 안 나옵니다.  그래서 결단(決斷)이 있어야 믿음의 경주를 달려갑니다. 

성도여러분,  결단이 없으면 30년 예수 믿어도 담배 못 끊습니다. 예수 믿으면서 성령님이 도와주시면 저절로 끊기겠지? 노!   내가 끊으려고 결정할 때 성령님이 나를 도우십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결단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서 신앙의 진보가 있는 사람과 신앙의 진보가 없는 사람의 차이가 여기서 나타납니다.  모두가 죄인입니다. 다 버려야 약점과 죄의 습관들이 있고 성품들이 있는데 내가 예수 믿기로 딱 결정을 하면서 결단을 빨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분은 굉장히 믿음이 빨리 성숙을 하는데... 30년을 믿어도 ‘멍.. 왔다 갔다 할 뿐’ 인 사람도 있습니다.  한 번도 자신의 인생가운데 결단이 없는 인생은 술도 못 끊고 담배도 못 끊습니다. 30년을 믿어도 성경일독 못합니다.  그러니 여러분,  예수는 얼마나 오래 믿었느냐가 아닙니다. 얼마나 결단을 잘 하느냐 입니다.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믿음의 경주를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 인내(忍耐)가 있어야 합니다.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늘 기쁨으로만 신앙생활하지는 않습니다. 슬프거나 아플 때가 있지요. 마라톤을 해보면 쓰러지고 싶고, 그만 달리고 싶은 힘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무조건 앞을 향하여 달려야 합니다. 신앙생활에는 포기가 없습니다. 그냥 앞을 향하여 전진입니다. 뛰다가 그만두는 사람에게 무엇이 주어지겠습니까?   두마음을 가지는 것은 신앙의 적입니다.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약1;8) 하나님 앞에 정한 마음을 가지고 고난과 역경이 있지만... 무조건 앞을 향하여 가야만 합니다. 확신과 결단과 인내를 가지고서 믿음의 경주를 잘하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더 행복한 가정은 믿으면서 오직 예수님만을 바라보는 가정입니다.  어떤 경주(競走)에도 목표점이 있습니다. 그 목표를 바라보고 확신과 결단과 인내를 가지고서 경주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바라봅니까? 2절입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을 바라보아야 이 믿음의 경주를 끝까지 완주할 수 있지 중간에 세상을 바라보고, 사람들 바라보기 시작하면.... 더러워서 예수 못 믿습니다.  여러분, 예수 안에 행복이 있습니다. 예수 안에 우리인생의 모든 문제의 해결이 있습니다. 예수 안에 우리인생의 모든 처방이 있습니다.  이 말이 정답인데도 이 말이 너무 식상하게 들릴까봐 염려가 됩니다.  스테반이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가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자기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들을 위해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예수그리스도를 사랑한 것은 그가 예수를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놀라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예수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고난과 생명의 위협 속에서도 믿음의 길을 걸어갈 수가 있고요, 예수를 바라보는 사람은, 자신의 향락을 위하여 쓸 수 있는 물질과 기득권을 기꺼이 가난한 자와 나눌 수 있는 용기와 삶이 그들에게 있습니다. 지금도 예수를 바라보는 자에게는 엄청난 일들이 일어납니다.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으면서도 기꺼이 가난한 자들과, 장애우들과 함께 살아가는 낮음의 자리로 내려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있습니다.  

남편에게 버림받은 여자가 예수를 바라보면 예수님은 그의 남편이 되고,  부모에게 버림받은 자녀가 예수를 바라보면 예수그리스도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어 찾아오십니다.  거절감속에 살아가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용기와 격려가 일어나고,  엄청난 유혹이 일어날 때 예수를 바라보면 그 유혹들을 거절하는 능력이 생깁니다. 움켜쥐고 사는 삭게오 같은 인생이 예수를 바라보니까 ‘자기의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면 토색한 것을 4배를 갚겠다’ 고 하게 됩니다. 

예수를 바라보면 목숨같은 돈을 내려놓는 그런 능력이 생깁니다. 미움 속에 살던 사람들이 예수를 바라보면 용서의 사람이 됩니다.  예수를 만나면, 자살 직전의 인생도 살 소망이 생깁니다. 버림받았다고 생각하고 고독하게 살던 인생이 예수를 만나면, ‘아 내가 사랑받고 있구나’ 하는 확신 속에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이거는 설명 안 됩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경우를 밤새도록 말할 수 있는데... 왜 예수를 바라보면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설명(說明)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내가 예수를 바라보면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데, 내 영과 예수의 영이 만나는 영적인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것 때문에 말로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피곤에 지친 내 영과 예수의 영이 만나면 그 인생가운데 혁명이 일어납니다.  말로 설명할 수 없고,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영적인 체험들, 사건들이 내안에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아직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다 하시는 분들은 자기가 ‘예수를 바라보아야 될 대상’ 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여러분이 교회를 오랬동안 다니시는데 예수그리스도께서 내 마음을 회복시키시고, 고치시는 경험을 해보지 못하셨다면, 지금부터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주님을 바라보시면 분명히 여러분 안에 영적인 사건들이 일어나게 되어있습니다. 그런 사건이 일어나지 아니하고는 예수에게 생명을 걸 수 없고, 예수그리스도가 우리의 주인이 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예수를 깊이 바라보십시오. 예수그리스도가 나의 마음에 들어오실 때... 나의 마음에 큰 고통이 사라집니다. 저는 성경의 지식을 무시하지는 않습니다. 또 신비한 체험만을 강조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를 바라보면 예수님과 나만이 아는 믿음의 사건들이 일어나게 되어있습니다. 이 확신이 있어야 복음을 능력 있게 전하고, 누구에게나 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부터 예수님의 십자가 하나 사다놓고 밤새도록 바라보면 됩니까? 예수를 어떻게 바라볼 거냐!! 3가지입니다. 

  ** 말씀 안에 깊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으십시오. 큐티를 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어떻게 역사를 하시는지 큐티를 하면 압니다.  아침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세요. 예수님이 곧 육신이 되신 말씀 아닙니까? 예수를 바라본다는 것은 말씀을 가까이하는 것입니다. 

  ** 깊이 기도하는 것입니다. 

깊이 기도하지 않고, 충분한 기도의 시간을 가지지 않고, 내안에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는 것이 어렵습니다. 우리에게 기도의 인내가 필요합니다. 기도의 시간을 확보하십시오.  고상하게, 지적으로만 예수를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바라보는 사람은 부르짖고 기도하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 믿음의 공동체와 함께 있어야 합니다. 

때로는 신앙생활에서 침묵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혼자만의 시간이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가능하면 좋은 믿음의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하나님과 가까이 있으려면 하나님과 가까이 있는 사람과 같이 있는 것이 하나님을 만나고 아는 빠른 지름길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더 행복한 가정은 
첫째로, 예수님을 믿으면서 제사를 지내지 않는 가정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귀신을 불러들이는 제사가 싹 사라지기를 원합니다. 
둘째로, 예수님을 믿으면서 믿음을 중도에 포기하지 않는 가정입니다.  확신과, 결단과, 인내로,  끝까지 믿음의 경주를 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예수님을 믿으면서 예수님만을 바라보는 가정입니다.  말씀과, 기도와, 믿음의 공동체와,  함께하는 것이 곧 예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가정이 행복한 가정에서 나아가 ‘더 행복한 가정’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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