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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 백성을 위로하라 (사 4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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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백성을 위로하라 (사 40:1-11)
    
지난 주일 하나님의 공평과 의의 따르는 사람들로 살자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많은 민족 가운데 택하여 불러내시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공평과 의를 닮아 살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로 삼아 세계 모든 민족들을 위하여 제사장의 직무를 담당하게 하셨지만 이스라엘은 이 사명에 실패한 백성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배워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로 따라가야 할 사람들이 세상과 똑같은 방식을 따랐습니다.   힘 있는 자는 그 권력으로 연약한 자들을 억압하고 약탈하였으며 가진 자들은 더 많이 가지려는 욕심으로 온갖 불의와 불법을 행하며 재물을 쌓고 또 쌓았습니다.   

그러고도 안식일에는 성전에 올라가 짐승을 잡아 그 피를 제단에 뿌렸고 고기를 불태우며 차고 넘치는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거짓 제사에 신물이 나셨습니다.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공평과 의를 내버린 왕들과 제사장들과 관리들, 거짓 평화와 탐욕으로 가득한 번영에 도취되어 하나님을 잊고 살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피할 수 없이 정해진 일이었습니다.

이사야 1장은 전체 66장의 서론에 해당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환상(vision) 중에 범죄한 이스라엘의 참혹한 처지를 보았습니다.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으로 가득하였습니다.   그 흉악한 몰골을 제대로 치료받지 못한 채 버려진 모습이 이스라엘 백성의 가련한 상태였습니다.   이사야서 전반부 39장까지의 말씀은 이처럼 죄로 가득한 이스라엘과 주변 국가들을 향한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의 메시지가 중심 내용입니다.  

그런데 40장에 들어서면서부터 메시지의 주제가 바꾸어집니다.  마치 천둥번개를 치며 폭우를 쏟아내던 하늘이 그 분노를 그치고 잠잠해진 후 맑고 평화로운 세상으로 바뀌듯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의 메시지는 위로와 회복의 내용으로 그 분위기를 바꾸고 있습니다.   1장 서두에서 하나님은 남왕국 유다와 예루살렘을 가리켜‘범죄한 나라, 허물진 백성, 행악의 종자, 행위가 부패한 자식’(1:4)이라고 거칠게 부르셨는데 40장 1절에서는 사랑을 담뿍 담아‘내 백성’이라 하십니다.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는 말씀으로 시작하는 이사야서의 후반부는 택하신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고 사랑으로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심정이 구절구절 담겨있습니다.  

내일이 8월15일 조국의 광복 제66주년을 맞이하는 날입니다.  오늘 많은 한국교회들은 광복기념주일로 정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드리는 주일로 예배드릴 것입니다.  강대국 앗수르와 바벨론에게 짖밟혀 나라를 잃고 신앙의 자유를 빼앗기며 종노릇하던 이스라엘의 불행처럼 과거 우리 나라도 일본에게 나라와 주권을 빼앗겨 종노롯했던 백성이었습니다.  강대국 일본에게 업신여김을 받고 이등국민으로 온갖 수모를 당하며 힘 없는 민족의 설움을 겪어야만 했던 가련한 백성이었습니다.    

외세의 힘을 빌어 겨우 해방이 되었지만 곧이어 일어난 6.25의 동족상쟁은  조국산하를 온통 피범벅으로 만들었고, 백성들의 마음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으로 가득하였습니다.   과거 우리의 모습이 어쩌면 그렇게도 이사야서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처참하고 가련한 형편을 닮았는지 그 험한 시대에 목숨을 부지하며 살아야만 했던 우리 부모님과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고난을 생각하면 가슴이 쓰려옵니다.     

이제 해방 66주년을 맞이하는 우리나라, 전쟁으로 완전 폐허가 되었던 수도 서울의 새로운 모습을 보는 외국인들 중에 반세기 전 한국의 역사를 안다면 놀라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고 전쟁 후 절망 속에 허덕이던 대한민국이 어떻게 이처럼 빠른 시일 내에 회복되고 세계 속에 우뚝 선 경제대국이 되었는가 우리 스스로도 놀라며 세계가 놀랄만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해방기념주일에 이사야서를 읽으며 우리 개인과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보는 시간이 되기 바랍니다.   회복과 번영의 복을 누리고 있는 우리나라가 하나님의 위로하심을 감사하고, 우리 민족에게 기대하시는 뜻을 헤아릴 줄 아는 지혜로운 백성으로 살기를 소원합니다.

본문 1절에, ‘내 백성을 위로하라!’ 하십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의 학대 아래 부르짖던 히브리인들을 구출하기 위하여 모세를 애굽으로 보내셨습니다.   모세가 바로에게 전한 하나님의 명령은‘내 백성을 보내라’였습니다.  바로가 붙들어 두고 종으로 부리며 학대하던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바로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이 복주시려고 준비해 놓으신 백성이었습니다.  ‘내 백성’이라는 표현 속에 그들을 아끼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있습니다.   

히브리인들을 바로의 손에서 건져내신 그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범죄하여 징벌을 받고 고통 중에 우는 백성들을 가리켜 나의 백성이라 하십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43:1)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사람들을 주어 너를 바꾸며 백성들로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사43:4)  하십니다.   

언제는 금방이라도 멸망시키실 듯 무섭게 심판하시는 분이 이제와서는 내가 너를 사랑한다 하시니 하나님은 병주고 약주는 분이십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병을 주시고 또 치료하십니다.  왜?  이 백성은 하나님을 위하여 지으신 자기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   하나님의 찬송을 불러야 할 택한 백성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하나님을 버렸으니 그 병든 영혼을 고치기 위하여 암 덩어리처럼 썩고 굳어진 그 몸을 찢고 터뜨리며 치료하십니다.   

그러나 온 몸이 병들고 상처난 이스라엘은 치료하시는 하나님의 본심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향해 원망합니다.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사40:27) 하였고,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사49:14) 하였습니다.    이런 백성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나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사49:15, 16) 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다는 말은 내가 너를 한 순간도 잊은 적이 없었다는 하나님의 강변입니다.   오래 전에 ‘내가 너를 손바닥에 새겼다’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는데 다시 한 번 생각해 봅니다.  자식은 어디에 있든 항상 어머니의 품에 있습니다.  어머니의 가슴에 있는 자식을 어머니가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혹시 어머니는 자식을 잊을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들을 항상 자신 안에 품고 계십니다.   ‘손바닥에 너를 새겼다’는 말씀은 선지자 이사야 시대의 문화를 이해하면 그 의미가 더 확실합니다.   

어머니와 아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와 아들 모두가 글을 모릅니다.   글을 모르는 어머니는 아들이 멀리 떠나게 되자 아들을 생각나게 해주는 표를 가지고 싶었습니다.   지금처럼 사진을 가질 수도 없었을 때 어머니는 문신을 새기는 사람에게 가서 손바닥을 내밀고 아들이 보고 싶을 때에 늘 기억할 수 있는 표시를 그려 달라고 하였습니다.   문신을 새기는 사람은 어머니의 손바닥에 바늘로 한 점 한 점씩 찔러가며 아들의 모습을 새겼습니다.   어머니는 날마다 아들을 생각하며 보고플 때에는 손바닥에 새겨진 아들의 얼굴을 보면서 위로를 얻었습니다.   아침에 손을 씻을 때, 밥을 지을 때에도, 일을 할 때에도 언제나 아들은 그렇게 어머니의 손바닥에 있었고 어머니의 가슴 속에 있었습니다.   손을 물에 넣어도 지워지지 않고 닳아 없어지지도 않습니다.    어머니가 살아 있는 동안 그 손바닥에는 언제나 아들을 생각나게 하는 것이 있었으니 그 아들은 이렇게 항상 어머니의 마음에 있었고 어머니의 생각 속에 있었습니다.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다’  이것이 이스라엘을 잊지 않고 사랑하는 하나님의 마음이며 우리를 잊지 않고 기억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끝없이 반복되는 어려움으로 피곤한 인생을 살아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들려오는 재해와 기근과 사고와 난리 소식에 지구촌이 평안할 날이 없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한여름 물난리와 산사태로 수많은 목숨을 잃고 집을 잃은 사람들이 고통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발생한 노르웨이의 총격 사건, 지난 주간에 일어난 런던의 폭동사건…   가난한 나라에서도 잘 사는 나라에서도 이런 참상은 주님 오실 그때까지 멈추지 않고 반복될 것이고 사람들은 고통 중에 부르짖을 수 밖에 없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이 모든 두렵고 무서운 일들은 사람들이 죄의 씨앗을 뿌리고 악을 거두는 과정에서 따먹는 고통의 열매들입니다.   이땅에 일어나는 수많은 질병과 사고와 죽음이 모두 죄의 삯이냐고 묻는다면 성경의 답변은 ‘그렇다’ 입니다.   죄가 세상에 들어오면서 사망이 세상을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사망은 질병과 사고와 재난과 살인과 전쟁을 통해 그 무서운  위력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인간의 범죄와 함께 사망은 이렇게 어두운 세상에서 왕노릇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이들을 특별히 교훈하시기 위하여 그리고 더 성장하도록 연단하시기 위해 고난의 과정을 통과하게 하십니다.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때 선지자 이사야와 소수의 경건한 백성들은 범죄한 다른 백성들과 함께 동일한 고통 속에 살았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고통의 이유를 알고 견디었던 사람이지만 다른 백성들은 고통 중에‘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 하며 억울한 사정, 원통함을 호소하였을 겁니다.  고난을 당할 때 누구나 피곤하고 지치며 낙심이 됩니다.   고난은 누구에게나 동일한 사건이지만 고난에 대한 해석에는 사람마다 차이가 있습니다.   그 고난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하나님의 위로에 대한 감사도 차이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신앙 공동체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저버린 공동체는 함께 아픔을 당합니다.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한 아간 한 사람의 탐욕으로 이스라엘 전체가 고통을 당하였습니다.   교회 안에 어려움이 발생하면 공동체 전체가 아프고 때로는 한국교회 전체가 아픔을 당하는 것은 우리가 주 안에서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한 가족입니다.  자식이 매를 맞고 아프면 부모의 마음도 함께 아픕니다.   잘못한 아이가 혼나고 매 맞을 때 다른 형제들도 함께 힘이 들고 함께 아파합니다.  어릴 때 형제자매가 많은 집에서 아버지가 큰 녀석 하나만 대표로 혼을 내고 회초리를 들면 나머지 동생들은 지레 겁을 먹고 알아서 정신을 차리고 제자리를 찾던 기억이 있습니다.
    
광주에서 목회하시는 어느 목사님이 쓰신 글을 요약하여 소개합니다.   어느 날 차를 타고 교회에서 가까운 마을에 가다가 밭에 심어놓은 양파들이 죄다 쓰러져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답니다.   바람이나 장대비에 쓰러졌거나 누군가 일부러 쓰러뜨려 놓은 줄 알았는데 옆에 있던 나이 많은 집사님이 ‘자기들이 그냥 자빠졌어라우’하고 귀뜸해주었다.   때가 되면 저절로 쓰러진다는 것이다.   그래야 알뿌리가 굵어진다는 설명이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그리 하신 것이다.   

하지만 양파라고 해서 다 쓰러지는 것이 아니고 때가 되어도 꼿꼿이 서 있는 놈들도 있다.   양파 쫑이 올라온 놈들인데 수놈이라 불리는 이놈들은 쓰러지지 않아 알뿌리가 굵어지지 않아 상품가치가 없다고 한다.   

여기에 놀라운 진리가 담겨있다.   알뿌리가 굵어지기 위해 땅위의 줄기가 쓰려져야 된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때를 정해놓고 ‘너 쓰러져야 해’ 말씀하실 때 거부하지 않고 쓰러지는 것 그것이 생명이라는 말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너 쓰러져라’ ‘자신을 부인하라’ ‘너 낮아져라’ 요구하실 때가 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음성에 귀기울여 순종할 줄 아는 사람이 성도가 아닌가?   이런 사람이 생명이 있다.   

물론 쓰러짐에 어찌 아픔이 없고 눈물과 탄식이 없겠는가?   그러나 주님 안에서의 쓰러짐, 하나님이 정하신 쓰러짐은 넘어뜨림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진짜 일으켜 세워주고자 함이 목적이며 살리고자 함이다.  이 진리를 성도라면 다 알고 있지 않은가! 하나님이 목적을 두고 우리에게 쓰러지라 할 때 쓰러지는 아픔을 통과해야 상품가치가 있는 알뿌리가 열린다.   나는 하나님 보시기에 상품가치가 있는 열매인가?   
  
위로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복역이 끝났다는 선언입니다.  죄값을 치르고 죄 사함을 받았다는 선언입니다.   이웃 나라들로부터 침략을 당하여 고통을 받은 이스라엘의 경우는 분명히 죄의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정하신 복역의 때가 끝났고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죄와 허물을 도말하시는 분이시니 죄를 기억지 아니하시겠다 (사43:25) 하셨습니다.   사람이 제 힘으로 죄값을 다 치루었기 때문에 더 이상 죄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 스스로 죄를 감당하시고 연약한 죄인들의 죄를 깨끗하게 용서하셨습니다.    사람이 당하는 고난은 자기 죄를 깨닫고 회개하며 돌아오는 과정일 뿐이며 진짜 죄의 대가는 하나님 스스로 감당하십니다.   우리에게 독생자를 보내시고 아들을 죽음에 내놓으심 이것이 죄인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위로의 근거가 무엇입니까?   영원히 변치 않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의 표현처럼, 우리의 육체는 풀과 같고 그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습니다.   광야의 더운 바람이 한 번 불어닥치면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들기 마련이지만 하나님의 말씀, 약속은 영원합니다.   사람이 공들여 세우고 아름답게 가꾼 모든 것들, 그것이 육신의 건강이든 아름다운 얼굴이든 재산과 학위와 경력과 기능이든 모든 것이 하나님의 기운이 한 번 불면 광야의 풀처럼 한 순간에 말라버리기도 합니다.   그것들이 잠시 기쁨과 위로를 줄 수는 있지만 영원한 위로와 소망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고 그 약속은 영원토록 변함이 없이 우리의 참 위로와 소망이 됩니다.   

또 하나 위로의 근거는 그가 오시기 때문입니다.  주 여호와께서 강한 자로 오실 것이며 친히 그 팔로 다스리실 것입니다.   그는 사람이 돌과 나무와 금은동철로 만든 우상들과 같지 않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처음이요 마지막이신 만군의 여호와이십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은 없습니다(사44:6).  하나님 외에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다른 신이 없는 것처럼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여 자유케 하실 또 다른 신이 없습니다.   그분만이 오직 우리의 상급이십니다.  

그러므로 죄로 말미암아 고난 가운데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실 위로와 은혜는 오직 창조주 하나님, 그 약속이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지금도 오고 계십니다.   사막에 강들을 내게 하시며 광야에 꽃을 피우게 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가 오시는 길, 그의 길을 예비하기 바랍니다.   그가 오시면 목자같이 양무리를 먹이시고 어린 양을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십니다.   다시는 잔인한 맹수들에게 어린 것들을 빼앗길 일, 슬픈 일들이 없어집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을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시고 지금도 죄와 죽음의 종노릇하고 있는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의 생명, 영원한 빛을 증거하라 하십니다.    
                                                 
아버지의 명을 따라 생명의 구주로 우리에게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모든 죄인들을 십자가 아래로 초청하셨고 우리의 더럽고 추한 모든 죄를 친히 맡으셨습니다.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은 아버지께로 돌아가시며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성령은 위로의 하나님이십니다.  보혜사라는 그 이름 속에 보호자와 은혜 베푸시는 분이라는 의미가 담겼고, 상담자라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하나님을 찾고 만나기를 원하는 자들에게 찾아오시며 늘 곁에 계시는 보혜사께서 우리의 참 위로자가 되십니다.   고난 중의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잘 모르고‘어찌하여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수리하심을 받지 못하느냐?’ 하였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사정을 아시며, 우리의 원통함을 알고 받아주시는 분이십니다.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고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사40:29)   어디서 이런 힘과 능력이 나옵니까?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작고 초라한 능력을 의지하지 말고 다함이 없는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하시기 바랍니다. 참된 위로는 언제나 하나님께로부터 끝없이 흘러나옵니다.   

찰스 스펄전 목사님의 글을 소개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니, 
그가 우리의 모든 환난과 눈물을 보고 들으신다. 
그러니 내 영혼아, 어떤 고통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모든 것을 영원히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라.

사망도 두려워 말고 사탄의 공격도 두려워 말아라.
하나님은 그를 신뢰하는 자들을 보호하시나니
내 영혼아, 어떤 고통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모든 것을 영원히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라.

이생의 긴긴 슬픈 밤을 보상해 주시려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평강과 기쁨을 주실 것이다.
그러니 내 영혼아, 어떤 고통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모든 것을 영원히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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