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은혜의 말씀 증거 (행 14:1-21)

첨부 1


은혜의 말씀 증거 (행 14:1-21) 
 
 
오늘은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와 더베에서의 전도 사역을 중심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13:46)고 선포한 이후, 전도자들의 경로는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와 “더베”로 이어집니다(1-8). 이 지역들은 북쪽의 고대 갈라디아 왕국에 속하지 않은 남쪽 땅에 있었지만, B.C. 25년에 로마에 복속되면서 행정 구역상 모두 갈라디아로 불렸습니다. 1차 전도여행(46-48년) 후 바울이 쓴 갈라디아서는 이 지역 교회들에게 보내졌지요. 전도자들은 갈라디아 주경계의 서쪽 끝 비시디아 안디옥부터 동쪽 경계인 타우루스 산맥 부근의 더베까지 가로질러 갔는데, 이동할수록 헬라적인 요소가 짙어져서 루스드라에 이르면 유대인 회당조차 없었습니다. 이렇게 복음은 점점 이방세계로 전진했습니다.

복음이 이방세계로 확산되면서 핍박의 양상이 달라졌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유대인들은 “변박”하고 “비방”지만(13:45), 이고니온에서는 “순종치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2)했으며, “능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들었습니다(5). 루스드라에서는 원정 박해단이 군중을 설득해서 “돌로 쳐” 죽입니다(19). 복음을 전할수록 복음에 순종치 않는 자들의 핍박은 더욱 과격해졌습니다. 전도자들이 받은 고난의 양상들은 예수님이 핍박당하시는 과정과 비슷합니다. 마치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채우는 것 같았습니다(골 1:24).

그런데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전도자들뿐만 아니라 핍박들을 통해서도 확산되었습니다. 핍박이 거칠어질수록 “주께서 저희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거”(3b)하셨습니다. 베드로 사도를 통해 일어났던 일들이 이방인 지역에서 동일하게 발생했습니다. 날 때부터 앉은뱅이였던 자가 일어나고 죽은 자도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표적과 기사들을 통해 전도자들이 전하는 은혜의 말씀의 권위를 세워주셨습니다. 바울은 베드로가 전했던 것과 동일한 은혜의 말씀을 전했던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핍박을 섭리하신 결과 구석진 지역까지 허다한 무리가 믿고 제자가 되었습니다(1, 21).

본문은 핍박에 대한 전도자들의 반응 또한 다양하게 변했음을 보여줍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는 “저희를 향하여 발에 티끌을 떨어”(13:51)버렸습니다. 이고니온에서는 험한 분위기 속에서도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3a) 말했고, 돌로 치려하자 “도망”했습니다(5). 루스드라에서는 돌에 맞아 죽었다가 “일어나” 다른 곳으로 옮겨 복음을 전했습니다(20-21). 전도자들은 금욕주의 고행자들처럼 고통을 즐긴 것도 아니고 애써 핍박을 더 받으려거나 순교의 기회를 찾은 흔적이 없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낙심하거나 위축되거나 주저앉지 않고 “은혜의 말씀”(3b)을 중단 없이 선포하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 백성은 공로를 쌓기 위해서 선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더 큰 영광 얻기를 노리고 금욕을 추구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자랑삼기 위해 성경 읽고 기도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성경은 핍박은 참고 견뎌야만 한다고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항상 좋은 인상을 주어야 한다거나, 결코 분열시켜서는 안 된다거나,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지내야 한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때로는 담대하게 맞설 수도 있고, 때로는 피할 수도 있습니다. 한 곳에 오래 있을 수도 있고 옮길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과정 속에서 교회가 참으로 주님 닮은 증인으로 드러나는 일이며, 교회를 통해 사도가 전한 것과 동일한 은혜의 말씀이 중단 없이 전해지는 일입니다.

“루스드라”는 유대인 회당이 없고 유대교로 개종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도 없었습니다. 구약성경도 하나님의 언약이나 구속사나 하나님 나라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전도자들은 그곳에서도 “복음”을 전했습니다(7). 그런데 나면서 앉은뱅이였던 한 사람이 바울의 말을 계속 경청(에쿠센, h[kousen)하다가,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생겼습니다(8-9).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데(롬 10:17),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었지요. 앉은뱅이가 일어선 것만 기적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 무지하던 사람이 믿음을 가지게 된 것부터 기적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큰 소리로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고 하자 앉은뱅이가 벌떡 일어나 걷는 것을 보고(10), 무리들은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고 소리 질렀습니다(11). 바나바는 “쓰스”, 바울은 “허메”라 했는데(12), 그리스 신화의 제우스(Zeus)와 헤르메스(Hermes), 로마 신화의 주피터(Jupiter)와 머큐리(Mercurius)입니다. 이 지역에는 쓰스와 허메가 사람의 모양으로 변장하고 왔을 때 그들을 거절한 주민들은 멸망했고 잘 대접했던 노부부는 큰 복을 받았다는 전설이 퍼져있었습니다. 그래서 성 밖 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관들을 가지고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했지요(13).

“루가오니아 방언”(11)을 몰랐던 두 사도는 한참 지나서야 상황을 파악하고서,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 질러” “어찌 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며 말렸습니다(14-15a). 옷을 찢음은 신성모독에 대한 거룩한 분노의 표현입니다. 두 사도는 마땅히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영광이 자기들에게로 향하는 것을 보고 경악하면서 온 힘을 다해 저지했습니다. 복음 전하는 이유가 “이 헛된 일을 버리고 …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함”(15)이며, 비를 통해 결실케 하시는 자연현상으로 이미 그분께서는 몰랐다고 핑계할 수 없을 만큼은 계시하셨다고 말하여 “겨우 무리를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못하게” 했습니다(18).

이상의 사건에서 바울의 설교 내용이 달라졌습니다. 헬라어 성경에는 1절의 “말하니” 뒤에 “그렇게”(ou{tw", 후토스)라는 부사가 있어서, 이고니온의 유대인 회당에서는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처럼 말씀을 전했음을 나타냈습니다. 그런데 두아디라에서는 구약 역사를 말하거나 메시아 예언 구절을 인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자연을 접촉점으로 삼아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하지만 청중들의 욕구에 맞추어 인간의 지혜를 가미하지는 않았습니다. 사도는 언제든지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했다고 했었지요(고전 2:1,4).

만일 전도자들이 청중의 욕구에 맞추려했다면 무리를 말리지 않았겠지요. 지나친 대접을 존경의 표현으로 좋게 받아들였다면 많은 것을 누리며 핍박 없이 편하게 가르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신처럼 떠받들 때 애써 부인하지만 않았어도, 말 한마디의 카리스마로 쉽게 그들을 휘어잡고 복종시킬 수 있었겠지요. 최소한 똑같은 사람인 사실만 감추거나, 헛된 것을 분별해 바른 자세로 돌이키도록 가르치지만 않았어도 신의 대리자로 자처하며 수많은 추종자를 얻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과 바나바는 이것을 기어코 저지해야 될 몸서리치는 죄악으로 여겼습니다.

목표를 위해 수단을 정당화하는 것은 현실 정치의 모습을 파악했던 마키아벨리의 사상이지 기독교 정신이 아닙니다. 교회는 어떤 일을 하든지 목표뿐만 아니라 그 과정과 수단에서부터 하나님 자녀다움과 하나님 백성다움을 드러내야 합니다. 그래야 여기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음과 그 나라의 속성들을 증시할 수 있습니다. 상황에 맞추어 설교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효과적인 통치를 위해 진리를 적당히 감추거나 사람들의 환호에 부응하여 상황에 따라 적당히 세상적인 지혜를 섞어도 좋다는 말로 생각한다면 참으로 옷을 찢고 분노할 일이겠지요. 자기 우상화를 허용하면서 하나님께 영광돌리겠다는 생각보다 얼빠진 태도는 없을 것입니다.

그릇된 존중을 거절했던 사도들에게 좋지 않은 결과가 생겼습니다. 19절을 보면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초인하여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성 밖에 끌어 내치니라”고 했지요. 사람들은 스스로 이룰 수 없는 욕망을 우상숭배를 통해 얻으려 하는데, 주로 복을 받고 재앙은 피하려는 목적으로 그렇게 합니다. 따라서 우상숭배자들이 자기 유익에 따라 한 순간에 태도를 확 바꾸는 것은 이상하지 않습니다. 쓰스와 허메를 잘 대접해서 물질적인 축복을 받고 싶었던 무리들은 기대가 무너지자 무섭게 돌변했습니다. 신으로 받들던 존재를 죽도록 돌로 쳐서 성 밖에 버렸습니다.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 “바울이 일어나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갔습니다(20). 바울이 기절했었는지 사망했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기절했었다 할지라도 죽었다고 여길 만큼 돌에 맞았던 사람이 스스로 일어나 성에 들어가고 다음날 더베로 떠나 복음을 전하여 많은 제자를 얻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기적적인 돌보심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지요(21a). 이 사건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돌에 맞지 않는 형태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죽고 끝나버렸다고 판단되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강한 손은 여전히 당신님의 종을 붙들고 계셨습니다. 힘들어 죽을 것 같은 순간에도 하나님은 당신님의 백성을 보호하시고 계십니다.

바울의 핍박 받음과 건짐 받음은 난생처럼 복음을 받은 두아디라 제자들이 어려움 속에서도 복음을 붙드는 일에 큰 격려와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나중에 이 성의 제자 중에 바울을 계승한 목회자가 등장했는데 디모데입니다. 디모데는 바울이 두아디라에서 어떤 핍박을 받았고 주께서 어떻게 건지셨는지 보고 알았고, 믿음이 장성하여 2차 선교여행 때는 바울의 동역자로 동행했습니다(16:1-3; 딤후 3:11). 때로 징계가 아닌 고난 있습니다. 즉 선을 행하고서 애매히 고난 받을 때가 있는데, 그런 고난은 믿음의 비밀을 깨닫고 은혜의 말씀 증거에 큰 유익이 있습니다. 바울 서신 곳곳에서 고난의 경험을 통해 깨달은 보석 같은 진리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남부 갈라디아 사역에서 전도자들을 넘어뜨리는 여러 유형의 핍박과 유혹, 그리고 그 속에서 기이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을 보았습니다. ♥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