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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저울에 달아 보라 (단 5: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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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저울에 달아 보라 (단 5:17-28)
  

내가 미국에서 집회중이었습니다.

점심 식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하늘에 <Donard>라고 글씨가 쓰여져 있었습니다. 파란 하늘에 흰 연기로 쓰여진 글씨를 처음 보았습니다. 그리고 심장 하트 그림이 그 옆에 그려져 있었습니다.

“도날드가 무엇입니까?”

옆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집사님이 말해주었습니다. 어떤 남자가 도날드라는 여자를 사랑한다고 고백하며 비행기 회사에 부탁하면 저렇게 써준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고백이라는 것입니다. 저렇게 수 백만원 들여서 하늘에 자기 이름을 써놓고 사랑을 고백하면 결혼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벽에 갑자기 쓰여진 신비한 글씨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 아들 벨사살 이야기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벨사살 왕이 궁중에서 1,000명 고관들과 함께 성대한 파티를 하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아버지가 훔쳐온 금기병들을 가지고 술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한창 기분좋게 파티가 진행되고 있는 데 갑자기 앞 벽에 손가락이 나타나더니 글씨를 쓰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나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1,000여명의 시선이 그 곳으로 집중되었습니다.

벨사살 왕은 사지가 떨리기 시작하였습니다. 너무나 놀라서 녹초가 되었습니다. 수많은 점쟁이, 박수들을 불러다가 그 글씨를 해석하라고 하였지만 아무도 해석하지 못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쓰신 글씨는 하나님만이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영은 영으로만 통하기 때문입니다.

벨사살 왕은 다니엘을 불러 벽에 쓰인 글자 해석을 명령하였습니다. 다니엘이 그 글씨를 보면서 벨사살 왕에게 해석하여 주는 장면이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기록한 글자는 이것이니 곧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

그 뜻을 해석하건대 메네는 하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 함이요 데겔은 왕이 저울에 달려서 부족함이 뵈었다 함이요 베레스는 왕의 나라가 나뉘어서 메대와 바사 사람에게 준바 되었다 함이니이다.>
<왕이 저울에 달려서 부족함이 뵈었다 함이요.>
하나님의 저울에 올라가 보아야 진정한 평가가 난다는 말입니다. 벨사살 왕은 자기가 보기에는 자기가 최고였습니다. 사람들도 모두 그 앞에서는 고개를 숙였습니다. 모두 위대한 왕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저울로 보니 부족한 것이 많았습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의 저울위에 올라서 보아야 합니다.

1. 자기 저울로 자기를 보아서는 안 됩니다.

벨사살 왕의 가문에서는 교만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헤롯왕의 가문에서는 혈기가 흘렀습니다. 다윗왕의 가문에는 음란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케네디 가문에서 암살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느브갓네살 왕이 꿈을 꾸었습니다.
하늘에 닿을 정도의 나무에 수많은 새들이 깃들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무가 베어지고 새들이 떠나고 들짐승만 우글거리는 곳이 되었습니다. 느브갓네살 왕이 궁중에서 쫓겨나 산속에 짐승과 함께 살고 있는 꿈이었습니다. 이 꿈을 다니엘이 해석하였습니다.

왕은 권세가 등등하였었는 데 너무 교만하여 하나님이 들짐승과 함께 살다가 데려 가시겠다는 꿈이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네가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거하며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내서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알기까지 이르리라 하더니 그 동시에 이 일이 나 느부갓네살에게 응하므로 내가 사람에게 쫓겨나서 소처럼 풀을 먹으며 몸이 하늘 이슬에 젖고 머리털이 독수리 털과 같았고 손톱은 새 발톱과 같았었느니라>(단 4;33-34)

이런 교만이 벨사살 왕에게 흘렀습니다. 아버지가 교만하였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은 말하고 있습니다.
<벨사살이여. 왕은 그의 아들이 되어서 이것을 다 알고도 오히려 마음을 낮추지 아니하고>(4;22)

<왕이여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왕의 부친 느부갓네살에게 나라와 큰 권세와 영광과 위엄을 주셨고 그에게 큰 권세를 주셨으므로 백성들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들이 그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하였으며 그는 임의로 죽이며 임의로 살리며 임의로 높이며 임의로 낮추었더니 그가 마음이 높아지며 뜻이 강퍅하여 교만을 행하므로 그 왕위가 폐한 바 되며 그 영광을 빼앗기고 인생 중에서 쫓겨나서 그 마음이 들짐승의 마음과 같았고 또 들 나귀와 함께 거하며 또 소처럼 풀을 먹으며 그 몸이 하늘 이슬에 젖었으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우시는 줄을 알기까지 이르게 되었었나이다. 벨사살이여.
왕은 그의 아들이 되어서 이것을 다 알고도 오히려 마음을 낮추지 아니하고>(단 5;18-22)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보고 계셨습니다. 아버지가 교만으로 들짐승들과 함께 풀을 먹으며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러면 아들 벨사살을 정신을 차렸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더 교만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저울에 달아 보고 모자라서 심판하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요즈음 몰래 카메라가 많은 물의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특히 여자들 화장실까지 몰래 카메라가 등장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한국에서 방금 미국으로 이사 온 이가 있었습니다. 고급 시계, 고급 보석상에 들렀습니다.그 곳에서 그리 비싸지 않은 물건 몇 가지를 구입하였습니다. 그리고 1,000 만원짜리 비싼 보석 하나를 집어 넣고 나왔습니다. 얼마 후 1,000 만원 청구서가 날라 들었습니다. 그는 그 상점으로 가서 언제 1,000 만원짜리 보석을 구입하였느냐고 호통을 치면서 당당하게 따졌습니다. 주인은 들어오라고 하였습니다. 비데오실에 들어가서 몰래 카메라가 찍은 필림을 보여 주는 데 자기 모습이 비쳐졌습니다. 1,000 만원 짜리 보석을 집어 넣는 장면이 그대로 재현되었습니다.

챙피만 당하고 1,000 만원을 지불하였습니다. 그리고 왜 진작 잡지 않았느냐고 물었습니다. 주인은 회개하고 1,000 만원을 가지고 오기를 기다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면 1,000 만원짜리 보석을 팔 수가 없지 않느냐고 대답하였습니다.
자기 마음만 믿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 저울로 자기를 달아 보고 자기 만족에 빠져 있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아들이 엄마에게 달려 와서 말했습니다.
<엄마! 나 골리앗만큼 키가 커졌어. 2m 70 cm 야.”
엄마가 이상하여 물었습니다.
“어떻게 네 키가 그렇게 크니?”
아들이 말했습니다. 아들은 자기가 만든 30cm 자를 보여주면서 말했습니다. 
"엄마. 내가 30 cm 자를 만들었어. 이것을 재보니 9자야."
자기 자로 자기를 재서는 안 됩니다. 자기 저을이 자기 판단의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어느 집주인이 가마를 타고 다녔습니다. 요즈음으로 말하면 자가용입니다. 가마꾼을 두 명 고용하였습니다. 요즈음으로 말하면 운전기사입니다. 어느 날 주인 집 비싼 개가 집을 나갔습니다. 가마꾼에거 개를 찾아 오라고 말했습니다. 가마꾼이 거절하면서 말했습니다.
“나는 가마꾼이지 개 찾는 사람이 아닙니다.”
주인이 조용히 말했습니다.
“알았다. 개는 내가 찾을 터이니 너는 가마만 메고 다녀라.” 그리고 여기 저기 다녔습니다. 산까지 올라갔습니다. 3일을 계속 다녔습니다. 가마꾼이 지쳐서 말했습니다.
“주인님은 가만히 집에 계세요. 제가 개를 찾아 오겠습니다.”

세상에는 자기 생각이면 모두가 다 올바른 줄 알고 자기 저울로 자기를 재면서 만족을 가지는 이가 있습니다. 자기 저울로 자기를 달아 보아서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자기는 자기에게 관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기에게는 냉정하고 남에게는 관대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보통 자기에게는 관대하고 남에게는 냉정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의 저울에 달리기 전에 자기가 자기 저울질을 냉정히 하여야 합니다. 

2. 다른 사람의 저울로 자기를 보아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에 너무 신경을 날카롭게 세우며 살아갑니다. 사람들의 평가에 감정이 따라가기가 쉽습니다. 지금 벨사살은 바벨론의 최고의 사람들 1000명과 함께 잔치를 하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 한 명도 벨사살을 나쁘게 평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모두가 아부꾼들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저울로 볼 때 벨사살은 위대한 지도자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저울은 달랐습니다. 늘 하나님의 저울에 달릴 것을 의식하며 살아야 합니다.

사도행전 12장에 헤롯왕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가 두로와 시돈 지방에 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단위에서 연설을 시작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외쳤습니다.
“이것은 신의 소리지 사람의 소리가 아니다.”
사람들의 저울로 최고라고 외칠 때 헤롯이 교만하여졌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자기가 영광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안 보였습니다. 헤롯 왕은 자기 외에는 없는 줄 알았습니다. 교만이 하늘을 찔렀습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즉사하였습니다. 

사람들의 저울이 정확한 것이 아닙니다.
올바르게 판단하여 주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듣기 싫은 소리를 안 하려고 합니다. 좋은 소리만 하려고 합니다. 상처되는 말은 안 하려고 합니다. 그렇기에 다른 사람의 저울에 의지하면 안 됩니다.

대표적으로 실패한 사람이 빌라도입니다.
빌라도는 로마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을 지배할 때 총독으로 부임하였습니다. 사형 집행권은 로마에게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를 사형시키라고 빌라도에게 데리고 왔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하여 보았습니다. 아무리 찾아 보아도 죄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가 무리들에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치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 하였노라”(요 19;6)
그래도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아우성이었습니다. 빌라도는 다른 사람들의 저울에 평가를 맡겨버렸습니다. 그리고 방망이를 쳤습니다.

“사형!”
자기 저울로는 예수님이 무죄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저울로 예수님을 달았습니다. 그래서 사형을 시켰습니다. 요즈음 로마에서 신기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어느 분이 예수님의 사형언도 내린 로마 재판관 빌라도의 판결이 잘못 되었으니 재심하여 달라고 정식 요청을 하였습니다. 대답은 이것이었습니다.
“2천년전 사건이라 증거가 없으므로 재심할 수 없다.”
그러나 다시 요청하였습니다.
“성경을 가지면 자료가 충분하니 재심을 바랍니다.” 그 다음 이야기는 모르겠습니다. 다른 사람의 저울로 자신을 평가하여도 안 됩니다.

내가 알고 있는 어느 목사님이 호텔에서 수건 한 장을 집어 넣었습니다. 여행다니면서 수건 하나가 필요할 것만 같아서 그랬습니다. 얼마 후 한국으로 돌아 오려고 공항으로 나왔습니다. 공항에서 비행기 자리를 배정받을 때 청구서를 직원이 내밀었습니다. 호텔에서 자기 물건이 아닌 것을 집어 넣었으니 당연히 그 값을 지불하여야 출국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호텔에서 걸어 놓은 것이었습니다.

알고보니 그 방은 체크하다가 수건 한 장이 없어진 것을 알고 그 방에 묶었던 이에게 청구서가 발급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항상 저울에 달리며 산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정확하지 않지만 그래서 내 저울로 내가 냉정하게 달려 보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저울에도 올라가 보며 다른 사람들의 저울 평가도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들을 것은 들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36,000명 목사님들이 성막 쎄미나에 참석하셨습니다. 성막을 마치고 나면 모두 감탄하고 은혜를 받았다고 기쁨을 가졌습니다. 거의 다 신구약의 일치를 절묘하게 알았다는 고백들이었습니다. 구약의 짐승 죽음과 예수님의 죽음을 잘 연결시키는 성막은 중요한 성경공부 과목입니다. 그런데 22년 동안 꼭 한 명이 앙케이트에 빈정거리며 이렇게 썼습니다.

“성막이 별 것 아니다. 세미나에 와서 별로 배운 것이 없다.”

이런 앙케이트를 보며 처음에는 기분이 상하였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하여 보니 그 사람이 불쌍하게 보였습니다. 남을 칭찬할 줄 모르고 항상 재를 뿌리는 이같이 보였습니다. 함양 미달인 것만 같이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그 지방 목사님들에게 그 목사님에 대하여 알아 보았습니다. 전화를 받은 목사님이 한 마디로 말했습니다.
“그 사람 그런 사람이예요. 더 이상 안 물어 보셔도 돼요. 신경쓰지 말아요.”
30년 목회에 30명 정도 모이는 교회에서 늘 그렇게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지 못 하는 목사라는 뒷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우리는 남의 저울에 달려 기분나쁜 소리를 들었다고 그리 감정이 상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저울은 그리 믿을 만한 저울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의 평가와 저울을 항상 참고할 필요는 있습니다. 우리는 내 저울보다, 다른 사람의 저울보타 하나님의 저울을 두려워하여애 합니다.
하나님은 늘 우리를 저울에 달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3. 하나님의 저울로 자기를 보아야 합니다. 

벽에 손가락이 나타나서 쓴 글씨는 간단하였습니다.
<메네 메네 데겔 우르바신>
아무도 이 글씨 내용을 해석하지 못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이 해석하였습니다.
<메네는 하나님이 이미 왕의 나라의 시대를 세어서 그것을 끝나게 하셨다 함이요 데겔은 왕이 저울에 달려서 부족함이 뵈었다.>

하나님의 저울에 달아 보니 부족하였습니다. 자기 저울에 달아 보니 넘쳤습니다. 사람들의 저울에 달아 보니 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저울로 달아 보니 부족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저울이 가장 정확하고 가장 무서운 것입니다.
벨사살의 아버지 느브갓네살은 예루살렘 성전을 무너뜨린 이였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헐어버리고 성전의 성물들을 약탈하였습니다. 거의 다 금으로 만든 것들이었습니다. 심지어는 법궤까지 약탈하였다는 이야기도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바벨론에서 법궤를 찾고 있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 성전 기병을 가지고 술을 따라 마시고 이방신에게 음식을 제공할 때 사용하기도 하였습니다.
만일 손님이 왔는 데 개밥 그릇을 씻어서 밥을 드렸다면 손님 기분이 어떨가요? 다시는 오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내가 사용하는 그릇을 빼앗아서 개에게 밥을 담아 주었다면 내가 기분 좋을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에게 사용하여야 할 그릇들을 술마시고 이방우상에게 사용하였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노하셨습니다. 이것이 벨사살이 지은 죄입니다.

오바마 대통령의 이름을 따서 개 이름을 짓고 부른다면 오바마 대통령이 좋아 할 리가 없습니다.
우리 수양관에서 큰 개를 기를 때에 이름을 베토벤이라고 지었습니다. .어린 아들 주원이가 베토벤을 잘 아니까 그 아들에게 익숙하게 하느라고 그렇게 붙였는 데 베토벤이 살아서 나타나면 좋아 할 리 없습니다.
하나님의 고귀하고 거룩한 그릇들이 이방인들이 술따라 마시는 술잔이 되었다면 얼마나 모욕입니까?
그 날 밤에 벨사살 왕은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살해당한 것같습니다. 성경이 이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날 밤에 갈대아 왕 벨사살이 죽음을 당하였고(단 5;30)

죽임을 당한 것을 보면 살해당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저울 심판은 정확하였고 무서웠습니다. 하나님을 무시하는 사람들은 역사상 모두 비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최후가 좋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저울의 특성
하나님의 저울의 특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저울은 정확합니다.

벨사살 왕은 교만하였습니다. 자기 밖에 몰랐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몰래 카메라보 보시듯이 정확하게 보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저울은 정확하였습니다. 
우리 지방의 모 교회가 그렇습니다.
그 교회에서 지방회를 할 때였습니다. 어느 장로님이 화가 나서 성만찬 상을 뒤엎었습니다. 거룩한 포도주와 떡입니다. 예수님의 피와 살입니다. 그 후 그 장로님이 돌아 가셨습니다. 목사님이 병들었습니다. 불치병이었습니다. 그리고 후임자 목사님도 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하나님의 저울로 달아 모자라면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저울은 정직합니다.
인간의 저울은 부정확할 수 있습니다. 속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저울은 정확하였습니다. 벨사살을 하나님은 정확하게 심판하셨습니다.탈무드 이야기입니다.

어느 유대인 어머니가 중고 옷 시장에 가서 아들 옷을 사서 입혔습니다. 가난하였기에 중고옷을 사입히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 마음은 아팠습니다. 집에 와서 아들에게 입혔습니다.아들이 그 옷을 입고 주머니에 손을 넣어 보았습니다. 수 천만원짜리 보석이 나왔습니다.
아들은 수지맞았다고 좋아 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들을 데리고 중고 옷 가게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 보석을 주인에게 내밀면서 말했습니다.
“나는 옷을 샀지 보석을 사지 않았습니다.”
주인은 그 옷 주인이 누구인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 가게에 옷을 판 사람을 물색하여 돌려 주었습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의 정직성입니다.
하나님의 저울에 정직하게 달려야 하나님이 축복하십니다.
하나님의 저울은 피할 수 없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말했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벨사살 왕은 다니엘로부터 글씨 해석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저울로 달아 부족하게 죽을 것이라는 예언이었습니다. 그러면 빨리 회개하였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벨사살 왕은 꿈을 잘 해석하여 주었다고 다니엘을 그 나라 세 번째 자리에 앉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한 성물로 술마시고 이방 신에게 바친 것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여유있게 행동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예언을 별 것 아닌 듯이 흘려 버렸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그런 예언에 떨 자기가 아니라는 듯이 떳떳하게 행동하였습니다.

그 날 밤에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저울은 피할 수 없습니다.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저울에 달리고 있음을 의식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몰래 가메라가 나를 녹화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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