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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들에게 복을 내리며 (겔 34:2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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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에게 복을 내리며 (겔 34:25-31)

오늘은 에스겔 34장 25절에서 31절까지 있는 말씀가지고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며"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26절을 보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며”라는 말씀 그대로 제목을 정했습니다. ‘내가’라고 하는 말씀은 하나님을 가리키고 ‘그들’은 포로생활 중에서 남은 자들을 가리킵니다. 이 남은 자들이 그루터기라 할 수 있습니다.

바벨론이 유다를 침략할 때 저항하는 사람들은 모두 죽이고 항복하는 사람들은 전부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생활 70년 동안 어려운 고난을 겪습니다. 그런데 힘겨운 노예생활 속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모든 믿음의 찌꺼기들을 다 제거하고 끝까지 믿음의 자리에 남은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을 남은 자라고 합니다. 살아 남았다고 할지라도 제멋대로 사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실 복은 없습니다.

본문을 기록한 에스겔 선지자는 포로기간 동안에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서 활동하던 선지자요, 포로된 백성들에게 말씀을 외치던 선지자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남은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많은 복을 약속해 주셨는데 어떤 복을 약속해 주셨는지 본문에 의지해서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그 복을 원하기 전에 우리도 남은 자처럼 어떠한 불행이나, 고난이나 역경 중에서도 믿음의 찌꺼기들을 다 제거하고 항상 믿음의 자리에 굳게 남아 있는 사람이 먼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첫째, 평안의 복 (25-27상)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일구월심 주님만 따르던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절망에 빠졌습니다. 그들이 믿는 예수님과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같지만 믿음의 질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영적인 메시아, 즉 만민을 죄에서 구속하시는 메시아를 믿지만 제자들은 정치적인 메시아를 믿었습니다. 이스라엘을 못살게 굴고 착취하고 핍박하는 로마의 세력을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독립시킨 후에 왕으로 등극할 메시아를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자 제자들은 이제껏 헛살았다는 절망감에 빠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실망 중에 흩어지기도 하고 도망가서 숨는 제자들도 있었습니다. 자신의 대장 되시는 예수님을 죽인 사람들이 자신들을 죽이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이 없지 않습니까? 뿔뿔이 흩어져서 숨어있으려니 더 무섭기만 하여 다시 한 곳에 모였습니다. 

유대지방이 얼마나 덥습니까? 그렇지만 문을 꼭꼭 닫아놓고 숨소리조차 죽이고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못자국 자리와 창자국 자리를 보여주시면서 죽음의 공포와 불안에 떨고 있던 제자들,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장담했다가 주님을 헌신짝처럼 버리며 도망갔던 까닭에 수치심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한가운데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안이 있을지어다”라고 축복하셨습니다. 그때 제자들이 느꼈을 기쁨과 평안을 상상해 보십시오. 죽으면 끝나는 줄로만 알았는데 죽음의 건너편에 있는 영화로운 세계를 맛보며 죽음을 초월하고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고 주님만이 주시는 평안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때부터 제자들이 죽음은 죽음이 아니다라고 생각하며 목숨을 내놓고 온갖 충성을 다 바쳤습니다.

이처럼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줄 수가 없고 주님이 빼앗지 않는 이상 세상이 빼앗아갈 수 없는 평안입니다. 이 평안은 돈주고 산 것이 아닙니다. 공로를 세우고 대가로 받은 것도 아닙니다. 훈련받고 쟁취한 것도 아닙니다. 주님이 축복으로 주신 주의 평안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25절에서 27절 상반절을 보면, “내가 또 그들과 화평의 언약을 세우고 악한 짐승을 그 땅에서 그치게 하리니 그들이 빈들에 평안히 거하며 수풀 가운데서 잘지라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며 내 산 사면 모든 곳도 복되게 하여 때를 따라 비를 내리되 복된 장마 비를 내리리라 그리한즉 밭에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땅이 그 소산을 내리니 그들이 그 땅에서 평안할지라”고 하였습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외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포로로 잡혀가서 온갖 고생을 하며 죽지 못해 살아가는 노예들이었습니다. 위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믿음 위에 굳게 버티고 살아있는 남은 자들을 종자로 삼아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시켜 주시고 회복된 나라는 아주 평안한 나라가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비유로 설명하시기를 ‘악한 짐승을 그치게 하리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수풀이나 빈들에서 마음놓고 살고 잠을 잘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팔레스타인 지방에는 숲 속이나 혹은 빈들에 악한 짐승들이 많았습니다. 사자도 있었고 그밖에 무서운 짐승들이 있어서 사람들이나 연약한 동물들이 마음놓고 잠을 자거나 살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악한 짐승들을 제하여서 순한 짐승들과 사람들이 숲 속과 빈들에서 마음놓고 편히 살 수 있는 평안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악한 짐승은 이스라엘을 못살게 구는 바벨론을 가리키며 그 바벨론을 완전히 제거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은 자들로 말미암아 회복되는 이스라엘에는 마음놓고 살며 잠을 잘 수 있는 나라의 평안을 이루어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나라가 먼저 평안해야 합니다. 나라가 불안하고 안보가 위태롭고 심지어 나라가 망했다고 할 때에 여러분의 가정은 온전합니까? 가정의 안전과 평안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했을 때 우리들의 가정이 온전했습니까? 우리의 아들, 딸들이 평안했습니까?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치가 떨리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런 악한 나라를 제거하고 평화로운 나라를 하나님께서 이룩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나라의 평안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빼앗으시지 않는 이상 세상이 빼앗을 수가 없는 평안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나라에 평안을 약속해 주시는 것으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음으로는 복된 장마 비를 때마다 허락해 주셔서 농사가 잘 되어 곡식을 넘치도록 쌓고 배불리 먹으며 살 수 있는 생활의 평안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생활이 평안치 못해서 가난하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친구의 아들 결혼식에 너무 가고 싶고 또 가야 하는데 가진 것이 없어서 갈 수가 없을 때 골방에 들어가 그 시간을 한숨으로 지내야 하지 않습니까? 세상을 살면서 사람구실을 못하는 것이 얼마나 괴롭습니까? 가난하면 사람구실을 못할 때가 있습니다. 생활이 평안하지 못하면 이렇게 어려움과 불편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활이 넉넉하도록 생활의 평안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가 이만큼 사는 것이 박정희 대통령 혼자서 경제 부흥시킨 것입니까? 우리나라 백성들이 땀흘리며 근면해서만 잘사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오늘의 우리나라를 세워주셨고 6・25사변 때 지켜주셨고 이만큼 축복해 주셔서 이제는 살만큼 사는 나라와 가정이 된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평안의 축복입니다.

다윗이 시편 131편 2절에 “실로 내가 심령으로 고요하고 평온케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 어미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중심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라고 읊었습니다.

‘젖 뗀 아이들’이 얼마나 허전해 합니까? 잘 놀던 아이에게 젖을 떼 보십시오. 젖 대신에 다른 먹을 것을 줘도 잘 먹지를 않고 또 잘 놀지를 않습니다. 잠을 자도 깊은 잠을 자지 못합니다. 이런 아이에게는 평안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 때에 어린 아이가 평안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어머니가 꼭 안아 줄 때입니다. 비록 젖을 떼서 허전할지라도 어머니의 품에 꼭 안길 때 가장 평안하다는 말입니다. 지금 다윗의 심정이 그와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즉 자기는 하나님의 품에서 평안을 얻는다는 고백입니다.

저에게는 지금 돌을 갓 지난 손녀가 있습니다. 그 아이가 엄마와 화요일부터 금요일 저녁까지 떨어져서 지내는데 그러면 저와 제 집사람이 잘 돌보아 줍니다. 그 때에는 어머니를 잊은 듯이 잘 노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엄마가 갑자기 나타나면 먹던 것을 내버리고 장난감도 다 던져버리고 제 엄마에게 달려가서 안깁니다. 저와 아내가 붙잡으려고 하면 사정없이 뿌리치고 자기의 엄마에게 안겨서 좋다고 합니다. 아무리 오라고 해도 싫다고 합니다. 어미의 품에서 얻는 평안을 무엇으로 대신할 수 있습니까? 그 평안을 돈주고 산 것입니까? 훈련받고 얻은 것입니까? 배워서 얻어온 평안은 아니지 않습니까? 부모가 주는 평안, 어머니의 품에서만 얻을 수 있는 평안입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 하나님의 품에서 얻는 평안이 하루 24시간, 일년 365일, 그리고 평생 여러분의 복이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자유의 복 (27사-29)

예수님께서 한번은 베데스다라고 하는 못가에 가셨습니다. 그 곳은 간헐천입니다. 샘이 갑자기 솟아났다가는 또 조용해지는 못입니다. 큰물이 뒤집히고 솟아오르는 순간에 어떤 병이 걸렸든지 간에 제일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낫는다는 전설이 있어서 각색 병든 자들이 다 모여 있었습니다. 마침 예수님께서 그 곳에 가보았더니 그 중에 제일 비참한 병자가 있는데 38년 동안 일어나 걷는 것은 고사하고 일어나 앉아본 일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쯤 되면 어느 정도가 되겠는지 상상해 보십시오. 주님께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38년 된 병자가 낫고자 하지만 물이 동할 때에 먼저 들어가려고 하면 다른 사람이 먼저 들어가고, 또 나를 물에 넣어줄 사람이 없습니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이제는 자신을 돌보아 주는 가족들도 없다는 것입니다. 못가에 내버려두고 살겠으면 살고 죽겠으면 죽으라고 내다 버린 것이 아닙니까? 한마디로 그 병자는 버림받고 잊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말씀 하시자마자 병자의 온몸에 힘이 오르고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걸었습니다.

38년 동안 그 누구도 고쳐주지 못한 질병에서 해방이 되고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그 사람은 곧바로 성전으로 갔습니다. 그 사람은 비록 버림을 받았을 지라도 자기 집부터 먼저 가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그렇지만 성전부터 먼저 찾았습니다. 

광성의 청년들 중에서는 군대에서 제대하자마자 집에 가기 전에 교회부터 먼저 들려서 기도하고 가는 청년들이 많습니다. 38년된 병자는 성전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여러분들도 어디를 다녀오거들랑 성전을 먼저 찾으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그 병자에게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하시고 다시 죄를 짓게 되면 더 중한 병에 걸리게 된다고 경고하셨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지금까지 38년 동안 앓은 병이 죄 때문에 앓았다는 뜻이 아닙니까? 그리고 그 무서운 죄, 그 사람만이 알고 고민하던 죄를 예수님께서 모두 용서해주셨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무시무시한 병에 걸릴만한 죄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이 사람 혼자서는 죄에 대한 고민 때문에 무척 괴로웠을 것입니다. 그는 그 죄에서의 해방, 즉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가족들에게도 버림을 받았는데 먹을 것이 있었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주면 먹고 안 주면 굶어야 하지 않습니까? 세상에 가난도 이런 가난이 어디 있습니까? 이제는 벌떡 일어나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고 일하게 되었으니 얻어먹을 필요가 없습니다. 가난에서 자유함을 얻은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돈주고 사온 자유입니까? 누구도 줄 수 없는 예수님만이 주신 자유입니다. 이 사람에게 주신 주님의 축복이었습니다. 

가난에 울고 있는 분이 계십니까? 주님께로부터 가난에서 자유함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누구도 못 고치는 질병에 울고 있는 분이 계십니까? 예수님의 은혜로 그 질병에서 자유함을 얻기를 바랍니다. 혼자만이 고민하고 고민하는 죄 문제가 있습니까? 주님께로부터 이 시간에 용서받으신 줄로 믿고 죄의 고민에서 자유함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27절 하반절부터 29절의 말씀을 보면, 내가 그들의 멍엣목을 꺾고 그들로 종을 삼은 자의 손에서 그들을 건져 낸 후에 그들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겠고 그들이 다시는 이방의 노략거리가 되지 아니하며 땅의 짐승의 삼킨 바 되지 아니하고 평안히 거하리니 놀랠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그들을 위하여 유명한 종식할 땅을 일으키리니 그들이 다시는 그 땅에서 기근으로 멸망하지 아니할 찌며 다시는 열국의 수치를 받지 아니할지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포로로 잡혀가서 노예생활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죽지 못해 살아가고 있는 형편이 아닙니까? 일하다가 조금 쉬면 때리고 또 일을 많이 안 했다고 때리고 주면 먹고 안주면 굶어야 하는 노예생활은 죽지 못해 사는 생활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비참한 노예생활에서 하나님께서 자유함을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70년 동안 바벨론 포로생활에서의 자유함은 어떤 공로나 대가로 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 고난 속에서도 끝까지 믿음의 자리에 남아있는 자들에게 축복으로 주신 자유입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가나안땅으로 돌아가 농사를 지을 때 풍족하여서 가난 때문에 이웃나라에게 수치 당하는 일, 가난에 우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가난에서의 자유를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자유의 복이 여러분들의 복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저희 가정 얘기를 해서 죄송하지만, 저희 가정은 하나님의 기적 속에서 지금까지 살아온 가정입니다. 저는 결혼 할 때부터 병들어 골골거렸으니 말할 것도 없습니다. 나에게 젊음의 세월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요즘이래야 조금 사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건강하던 제 집사람이 큰딸을 낳고는 뭔가 좋지 않다고 병원에 가자고 합니다. 그래서 병원에 가서 검사를 했더니 자궁 속에 커다랗게 혹이 꽉 차있다는 것입니다. 암은 아니지만 자궁을 다 드러내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자궁을 드러내면 사람의 생명이 끝나는 것은 아니지만 여자의 생명은 끝나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아내가 한달 동안 하나님과 담판을 지어보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고도 안되면 한달 후에 수술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달 동안 성전에서 기도하고 몸이 반쪽이 되어서 돌아왔습니다. 그때 큰딸이 일곱 살이었는데 둘째딸을 낳았습니다. 그리고는 셋째로 막내아들을 낳았습니다. 아직도 병원에는 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면 우리 가정이 달라질 뻔했습니다.

그 후에 제 아내가 다시 심장병에 걸려서 2층에 올라가지를 못했습니다. 2층에 갈 일이 있으면 저에게 심부름을 시키곤 하였습니다. 한번은 부목사님들과 차를 타고 여름휴가를 가는데 갑자기 죽는다고 야단입니다. 숨이 멎는다는 겁니다. 차를 세웠더니 길바닥에 쓰러지듯 눕는 것입니다. 심장이 아플 때에는 앉아있으면 낫지 않습니다. 그때는 어디든지 간에 누워야 합니다. 그때 저에게 가느다란 소리로 유언을 하였습니다. 겨우 집으로 돌아와서 위기를 넘겼습니다. 병원에는 그렇게 가기를 싫어합니다. 그러나 죽어도 예배당에 기도하러는 나가겠다고 합니다. 나가지 말라고 하면 차라리 자기를 죽으라 하라고 하니 말리지도 못하였습니다. 세월이 흘러 어느 날 심장병이 깨끗이 나았습니다. 지금 산에 올라가면 저보다 훨씬 빨리 올라갑니다. 제가 따라가지를 못합니다. 저도 젊은 시절에 폐병과 위장병으로 온갖 고생을 하며 오늘날까지 이처럼 살아있으리라는 생각을 못했습니다. 내 나이 70이 된 지금까지도 나름대로 이렇게 살아 있습니다.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라는 찬송이 꼭 저희 가정의 찬송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에 깊고 끈질긴 질병에서의 자유를 주셨습니다. 돈주고 산 것이 아닙니다. 훈련받고 얻은 것이 아닙니다. 공로세우고 받은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의 복입니다. 여러분들에게도 이런 자유의 복이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셋째, 임재의 복 (27하-31)

본문의 30절과 31절을 보면, “그들이 나 여호와 그들의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있는 줄을 알며 그들 곧 이스라엘 족속이 내 백성인 줄 알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라 내 양 곧 내 초장의 양 너희는 사람이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바벨론에서 비참하게 포로생활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버린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 고난의 풀무 속에 넣고 연단 시키고 훈련시킨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을 이방나라들이 알게된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버린 것 같아도 그들은 하나님의 양이요, 하나님은 그들의 목자라는 것입니다. 양은 목자가 함께 있을 때 최고의 행복입니다. 이것이 임재의 복입니다.

세상의 것을 다 가지고 아무리 부요하다 하더라도 하나님께 버림받은 사람이 비참해지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아무리 신세가 비참해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날에 우리가 축복의 주인공이 되는 것도 역시 시간문제입니다. 포로생활하는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즉 임재의 복을 주시겠다는 것이 본문입니다.

틴 마틴이라고 하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한창 청년 때 아리따운 아가씨와 결혼을 했습니다. 모든 젊은이들이 부러워했습니다. 그 아가씨와 시간가는 줄을 모르며 재미있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가 첫아이도 낳기 전에 병들어 손도 써볼 여유 없이 죽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기가 막힙니까?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시신 앞에서 울고 울다가 밤이 되었을 때 벌떡 일어나 밖으로 뛰쳐나가는데 밤새도록 몽유병 환자처럼 어디론가를 헤매고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날이 밝아왔습니다. 동녘이 터오기 시작하자 정신이 들었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자신의 앞에 큰 강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아차 했으면 그 강에 빠져 죽을 뻔했습니다. 정신이 번쩍 들어서 뒤를 돌아보니까 아버지가 아무 말 없이 뒤에서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아들이 뛰쳐나갈 때 아버지가 뒤좇아 온 것입니다. 무슨 말이 위로가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말없이 묵묵하게 밤새도록 아들을 따라다닌 것입니다. 무슨 일이 있으면 붙잡아 주려고 말입니다. 그렇게 밤새도록 아들을 따라다녔습니다.

우리가 앞날이 난감해서 방황하고 헤맬 때도 하나님 아버지는 묵묵히 우리들의 뒤를 돌아보시며 우리와 함께 해주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세상 것을 다 가졌을지라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지 아니하신다면 그것은 복이 아닙니다. 가진 것이 없어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임재하심 그 자체가 복중에 복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결론을 짓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남은 자들에게 엄청난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이 시간에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본문을 통해서 같은 복을 약속해 주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첫째는 평안의 복입니다. 나라가 평안하고 가정이 평안하고 생활이 평안한 평안의 복입니다. 두 번째로는 자유의 복입니다. 혼자서 고민하는 죄에서 사죄로 말미암은 자유입니다. 누구도 못 고친다는 질병에서의 자유입니다. 헤어나기 어려운 가난에서의 자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자유를 여러분들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세 번째로 임재의 복입니다. 세상 것을 가지면 좋습니다. 못 가진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 하나님께서 돌보아 주신다는 임재의 복이 최고의 복이라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김창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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