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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위대한 계명 (마 22:3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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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계명 (마 22:34-46)

세상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 가사에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가 무엇입니까? 사랑. 가사에 나오는 사랑은 주로 사람들끼리 감정에 얽힌 사랑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개역 개정판 성경에서 3594번 나옵니다. 그 다음으로 많이 나오는 단어 중의 하나가 사랑입니다. 555번 나옵니다. 사랑이란 단어의 상당수는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사랑과는 차원이 다른 아가페 사랑의 의미로 사용됩니다. 그 사랑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셨습니다. 그 사랑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타락했지만 하나님은 끊어진 관계를 회복시키려고 수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셨습니다. 그 사랑 때문에 하나님은 마침내 아들을 보내셔서 아들에게 우리가 담당해야할 고난을 대신 담당하게 하셨습니다. 그 사랑 때문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자기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한 베드로에게 나타나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이나 물으시면서 그를 회복시켜 초대 교회의 위대한 사도로 삼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을 붙드시고, 이삭과 야곱을 붙드시고 베드로를 붙드신 하나님은 그 크신 사랑, 그 끈질긴 사랑으로 저희들을 또한 붙들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은 수없이 들어왔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의미하는 사랑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그 사랑을 실천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말씀 중에서 '위대한'이란 제목이 붙은 두 구절이 있습니다. 

하나는 마태복음 28:19-20절로서 위대한 사명 또는 위임(Great Commission)이라 불립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승천하시기 전에 하신 말씀으로서 예수님 대신 제자를 삼는 사역을 감당하라는 명령입니다. 

또 하나는 오늘의 본문으로서 위대한 계명(Great Commandment)라 불립니다.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바로 알고 그 사랑을 이웃 사랑으로 연결시키면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사랑의 제자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님은 그의 생애 마지막 주간에도 종교지도자들과의 논쟁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계속 증거하십니다. 마태복음 22장은 성전 안에서 종교지도자들과 예수님이 벌이는 논쟁을 담고 있습니다. 제일 먼저 바리새인들이 와서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은 것인지 하는 문제를 가지고 질문을 던졌다가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라는 전혀 예상치 못한 주님의 답변을 듣고 그들은 돌아가 버렸습니다. 

그러자 사두개인들이 수혼법을 근거로 부활에 관한 질문을 던집니다. 일곱 남자와 결혼한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고 물었다가, 주님으로부터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자들이라는 책망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라 하시면서 그들이 절대 신뢰하는 모세 오경을 근거로 부활이 있음을 분명히 하십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영적으로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36절) 

예수님께서 사두개인들도 잠잠하게 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바리새인들이 한 자리에 모여 예수님을 공격하기 위한 모의를 벌입니다. 그들 중에서 모세의 율법에 정통한 율법사 한 사람이 대표로 선정되어 예수님께 나타납니다. 율법사는 주로 바리새인이나 서기관 무리에 속하였습니다. 그들은 랍비로도 불리고, 율법을 잘 알고 있었기에 율법을 해석하여 시행 세칙을 만들고, 이것들을 사람들의 종교 및 일상생활에 적용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선생님'으로 부르며 질문을 던집니다. 

질문하는 이유는 평소에 궁금하던 진리를 예수님으로부터 배우기 위함이 아니라,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함입니다. 율법사는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당시 랍비들은 그들의 전통에 따라 율법을 365개의 부정적인 명령과 248개의 긍정적인 명령 248개, 합해서 모두 613개의 명령을 만들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 명령들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중요하고, 또 이 조항들을 총괄하는 대원칙이 어떤 것이 있는지 이끌어 내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19-20) 하시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큰 것과 작은 것으로 구별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다 같이 중요하며 어느 것도 무시하거나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또한 율법을 많이 알아서 가르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말씀 하나라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십니다.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은 남들에게 계명을 지키라고 하면서 막상 자신들은 제대로 지키지 않는다고 하시면서 천국에서 큰 자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자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율법은 최소한의 행동 기준을 규정합니다. 십일조를 드리라는 계명은 소득의 십분의 일만 드리면 하나님의 백성으로 임무를 다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적어도 십분의 일은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계명은 안식일 하루만 하나님을 섬기면 하나님의 백성으로 의무를 다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일주일에도 적어도 하루는 구별하여 하나님께 예배드리라는 것입니다. 또한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하는 말이 계명이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인하거나 도적질 하면 안 된다는 것이지 살인하지 않고 도적질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들이 잘했다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형식이 아니라 그 계명 가운데 들어있는 정신입니다. 모든 계명 중에 어떤 계명이 가장 큰 계명이냐는 질문은 본질을 묻는 가장 핵심적인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첫째 되는 계명이며, 둘째는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모든 계명을 '사랑'이라는 주제로 묶어 요약하십니다. 특정조항을 언급하며 그 계명이 가장 큰 계명이라는 답변을 기대하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대답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는 말씀의 출처가 어디입니까? 유대인들의 교육 지침을 '쉐마'라고 하는데 그 단어는 신명기 6장에서 나왔습니다. 특별히 4-5절은 유대인들이 구약 성경 가운데 가장 많이 암송하는 구절로서 하루에 두 차례씩 아침과 저녁으로 암송하며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새롭게 세웁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히브리 원문은 들으라 (쉐마) 하면서 시작됩니다. 마음(heart)은 인간의 이성과 의지의 작용이 일어나는 곳입니다. 성품(soul)은 인간의 감정과 욕구가 일어나는 곳입니다. 즉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요 그분은 유일하신 분임을 분명히 합니다. 

이스라엘이 정착하게 될 가나안에는 바알, 아스다롯 등을 비롯한 각종 지방 신들과 우상들이 많았습니다. 이스라엘이 정신을 바짝 차리고 하나님을 섬기지 않으면 언제 어떻게 가나안 사람들의 영향을 받아 그들의 우상들을 섬길지 알 수 없었기에 모세는 출애굽 2세대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유일하신 분임을 미리 주입시켰습니다. 또한 구약의 하나님은 신약의 하나님과 동일하신 분이기에 신약시대에도 여전히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합니까?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다하고’가 세 번 반복됩니다. 마음을 다하여 사랑한다는 것은 다른 데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만 초점을 맞추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우리의 영혼을 지배할 때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는 또한 그의 목숨을 다하여 사랑을 실천하게 됩니다.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은 어떤 형편과 처지에서도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라는 말입니다. 목숨을 다하는 사랑은 순교적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것까지도 기쁨으로 여기는 자가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이러한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지켜 행하며 하나님을 향한 결단을 내릴 수 있습니다.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은 의지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살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대한 성도의 사랑은 그의 지성과 감성과 의지가 온전히 하나님께로 향하는 전인격적인 사랑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사랑은 곧 이웃 사랑의 원동력이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성품을 닮으며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시려고 아들을 십자가에 달리게 하셨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죄악을 위하여 가시관에 이마를 찔리시고, 못으로 양손과 양발을 찔리셨으며, 창으로 허리를 찔리셨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고통과 수치, 모욕을 당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야말로 목숨 바쳐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우리에게도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하라고 요구하십니다. 과연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고 온 천하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온 마음과 뜻과 정성을 모아 사랑하고 있습니까? 바울은“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롬 12:2) 하면서 삶 전체로 하나님께 헌신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힘으로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습니까? 참된 신앙은 사랑을 낳습니다. 여기에 믿음이 요구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진리를 받고 그 빛과 생명을 얻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생활이 가능하게 됩니다. 

20세기의 순교자로 알려진 Jim Elliot 선교사는 29살에 Ecuador에 있는 Huaoranis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로 하고 뜻을 같이한 4명의 동료와 함께 56년 1월 인디언들이 살고 있던 지역의 한 해변에 비행기로 착륙했다가 바로 그날 인디언들에게 칼과 창으로 무참하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의 허리에 권총을 차고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전도에 방해가 될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사역은 실패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부인들과 자녀들이 선교사역을 훌륭하게 감당하였기 때문입니다. 목숨 바쳐 주님을 사랑했더니 그 지역에 더 풍성한 선교의 열매를 나타났고 그들을 죽인 자들도 회심하여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웃을 어떻게 사랑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된 우리의 가치관과 행동이 우리의 가정이나 대인 관계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이웃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구제와 자선을 행하고 많은 일을 행할지라도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이웃 사랑은 사람들은 알아줄지 몰라도 하나님 앞에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긴다는 명목으로 이웃 사랑을 소홀히 하는 것 역시 주님은 강하게 정죄하십니다. 

마가복음 7장을 보면 모세의 율법에는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였고 부모를 욕하는 자는 죽이라고 했는데 유대인들은 고르반이라는 전통을 만들어 부모를 모시는 책임을 벗어버렸습니다. 고르반 제도가 무엇입니까?  자기가 가진 재물은 하나님께 드렸다고 사람들 앞에서 선언합니다. 그러면 고르반으로 지정된 재물을 가지고는 부모를 위해 사용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부모님을 섬기고 싶은데 하나님께 바쳤어요. 여유가 없어 어떡하지요? 

그런데 고르반 제도에 함정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기는 드리는데 언제 드린다는 기약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 재물을 자기 마음대로 쓰다가 죽으면 그만입니다. 즉 고르반은 부모를 위하여 쓰기는 싫으면서도 자기 재물을 하나님께 드렸다고 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과시하기 위한 방편으로 만들어낸 제도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긴다는 명분으로 부모에 대한 의무를 게을리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헛되게 하는 위선자들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39절)고 하셨습니다. 율법사는 가장 첫째 되는 계명이 무엇이냐고 질문했는데 주님은 두 번째 계명까지 가르치셨습니다. 이는 첫째 계명과 둘째 계명이 동전의 앞뒷면과 같이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임을 보여 줍니다. 똑같이 중요하지만 순서는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사랑이 우선입니다. 그리고 이웃 사랑이 자연스럽게 따라야 합니다. 이웃 사랑이 언급된 예수님의 말씀은 레위기 19:18절을 기초로 합니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이웃은 유대인을 말합니다. 

레위기 19:33-34에는 이웃의 범위가 확대됩니다. 이웃 사람은 단지 유대인 뿐 아니라 이스라엘 땅에 거하는 이방인들을 향해서도 열려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웃에 대한 개념을 바꾸셨습니다. 이웃은 어려움에 처한 누군가를 도와주는 사람이며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이웃의 개념을 수동적인 것에서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것으로 변화시켰습니다. 

누가 이웃입니까? 모든 사람들. 가깝게는 자기 가족들부터 시작됩니다. 부모 사랑, 부부 사랑, 자식 사랑. 예수님은 원수나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도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은 나 자신과 대한 사랑과 같은 비중과 강도를 지녀야 합니다. 이것이 이웃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네 자신과 같이’는 이웃을 대할 때 마치 자신을 대하듯 하라는 말입니다.   

1) 따뜻하고 자상하게 사랑합니다. 

인간은 누구든지 자신의 몸을 아낍니다. 건강해지려고 음식을 조절하고, 운동을 합니다. 몸에 좋다는 것을 골라 먹습니다. 자기 몸에 관심을 가지고 사랑하고 아끼듯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2) 잘못에 대해 관대합니다. 

또한 자신의 행동은 정당화하고 자신의 잘못에 대하여 관대한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도 이웃을 자기 자신을 대하듯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3) 자신에게 유익된 일이라면 매사에 신속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일이라면 그것을 얻으려고 얼마나 부지런하고 행동이 빠른지 모릅니다.  사소한 것까지도 신속하고 부지런하게 쫓아다닙니다. '네게 있거든 이웃에게 이르기를 갔다가 다시 오라 내일 주겠노라 하지 말며' (잠 3:28). 이웃에게도 동일한 자세를 가지고 대하라는 말입니다. 

4) 대접을 받고 싶어 합니다. 

자신이 대접받고 싶은 대로 이웃에게 대접을 베풀라는 말입니다.(마 7:12) 

5) 끈기를 가지고 사랑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자신을 끈기 있게 인내를 가지고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하는 데 있어서도 끈기를 가지고 사랑하는 말입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최고의 율법으로 제시합니다.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 이웃 사랑의 동기가 되며,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 사랑의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은 성육신이 된 하나님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한 단어로 표현한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십자가에서 보여주시면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은 행위자체 보다 그 행위의 동기를 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사랑을 통하여 우리의 믿음을 달아보십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한 사람들에게 복을 주십니다. 

고전 13:1-3,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아무리 작고 보잘것없는 것이라도 사랑으로 하는 모든 일은 좋은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자손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  먼저 질문하셨습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구의 자손이냐?" 헬라어 그리스도는 히브리어 메시야와 동의어로 그 의미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이며 구약시대에 선지자, 제사장, 왕이 사명을 감당할 때 기름 부음을 받았습니다. 메시야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은 유대인이면 상식적으로 다 알고 있는 것이었기에 그들은 주저하지 않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는 지극히 정치적이요 세상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성경이 예언하는 그리스도가 사람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하여 율법적으로 알던 그들에게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다윗의 주님인 것을 알려주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사실에 비추어 시편 110편 1절을 해석해보라고 하십니다. 이 구절은 그리스께서 이 땅을 통치하러 오시기까지 하늘에서의 위상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 시편에서 다윗은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윗의 시편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임을 지적하십니다. 그러면서 다윗이 내 주라고 말한 대상이 다윗 자신이 아님을 주목하게 하십니다. 다윗은 바리새인들이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른 그 사람을 그리스도라고 언급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메시야가 다윗의 주님이면서 동시에 다윗의 자손이 될 수 있는가?" 라고 물으심으로써 그들이 전에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을 질문하십니다. 예수님의 의도는 분명합니다. 

첫째는 바리새인들에게 메시야이신 자신에 대하여 알려주기 원하십니다. 그리스도는 구약 시대의 예언이나 율법에 계속해서 영으로 나타나셨고 또 계시되셨습니다. 두 번째는 다윗의 주로서 그리스도는 다윗 자손으로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을 알려주기 원하십니다. 세 번째로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고 하시면서 메시야가 여호와의 우편이라는 권세 자리에 앉아계신 것과 대적들을 물리치므로 모든 원수 마귀의 세력을 멸하시고 완전한 회복을 이루시며 새 하늘과 새 땅의 완성을 이루기 위하여 활동하실 분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원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은 구약 성경에 관한 지식은 많았지만 그 의미들을 제대로 알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질문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 즉 메시야가 다윗의 자손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자손이 다윗의 주가 된다는 사실에 대하여 깨닫지 못하였기에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도 성경말씀을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으면 그들과 같은 실수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의 한 말씀, 한 말씀을 깊이 묵상하여 주님의 뜻을 바로 깨닫도록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침내 모든 논쟁을 종식시키십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시험을 통과하셨으나 그들은 주님의 시험에 실패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일련의 논쟁 속에서 확인된 예수님의 율법 지식과 통찰력에 압도되어 그날부터 '감히' 예수님께 묻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과의 논쟁을 통해 자신들의 실체가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있는 수많은 계명들 중에 어느 것이 가장 중요한 지를 물으면서 예수님을 시험하려 했으나, 예수님은 그 계명들을 공통적으로 묶어주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셨습니다. 똑같이 율법의 계명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둘 사이에 보는 각도가 달랐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계명의 각론에 치우쳐서 그 계명을 주신 원래의 목적을 소홀히 한 데 비해, 예수님께서는 모든 계명들을 순종하는데 필요한 기본자세를 중요시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율법적인 데 비해 예수님께서는 복음적이었습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바리새인들처럼 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어떤 일을 하느냐 마느냐는 문제를 중요시해서 그것으로 다른 사람을 비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무엇을 하든지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하도록 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모든 율법의 핵심이요 또한 율법의 완성입니다. 구약의 모든 계명과 가르침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의 눈에는 예수를 믿고 복음 안에 산다는 것이 어리석게만 보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말씀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 복음을 받아들인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와 구원에 대한 약속을 믿는다는 뜻이며,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말은 구원받기를 거절한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으려면 이 복음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요한일서 4장 10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려면 주님을 알아야 합합니다. 날마다 성령의 은혜로 주님을 더 깊이 알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생명을 다해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또한 그 고백이 입술의 고백에만 그치지 않고 그 사랑을 삶 속에 표현해야 합니다. 형식적인 말씀 묵상은 살아있는 말씀을 그저 기록된 말씀으로 보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기에 말씀대로 살 때 능력이 나타나고 열매가 나타나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사도 요한이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 4:11)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당연히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보여주신 그 사랑에 감격하여 서로 격려하고 서로 섬기고 서로 책임지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하는 행동이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과 일치된 것인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어떤 복이 임합니까?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부귀가 내게 있고 장구한 재물과 공의도 그러하니라"(잠 8:17-1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히 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임을 믿어야 할지니라” 

하나님을 향한 불타는 신앙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행한 것에 대하여 책임을 물으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이제부터는 내가 원하는 인생이 아닌 주님이 원하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그 삶이 주님이 함께 하는 삶이요,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는 삶이요 열매가 풍성하게 맺히는 삶입니다. 그런 삶을 살 때 우리는 장차 주님 앞에 서서 떳떳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보여준 주님의 사랑에 감격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나만을 먼저 생각하는 이기주의와 개인주의에서 벗어나 '우리'와 '이웃'을 먼저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주님을 따라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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