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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포도원에 들어온 일꾼 (마 20: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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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원에 들어온 일꾼 (마 20:6-7)

(마 20:6) 제십일시에도 나가 보니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
(마 20:7) 이르되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영국에 컨글튼 경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컨글튼 경이 집에서 쉬고 있는데 집에서 일하고 있는 하녀가 부엌에서 접시를 닦다 말고 한숨을 쉬며 중얼거리는 말을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나에게 만약 5파운드가 생긴다면 더 이상 소원이 없겠다.” 이 말은 들은 컨글튼 경은 그 하녀에게 다가가 정말 소원이 그것인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하녀는 놀라면서 “그럼요, 주인님. 정말 그렇고 말고요.” 그래서 컨글튼 경은 일하는 하녀의 등을 두들겨 주면서 “내가 자네 소원인 5파운드를 줄 테니 이제부터는 불평하지 말고 열심히 일하게”라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하녀에게는 혼자 그냥 중얼거린 한 마디의 넋두리가 정말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5파운드를 하녀에게 주고 난 후 오후에 컨글튼 경이 정원으로 나가서 산책을 하는데 이런 소리가 들렸습니다. “아이구, 이럴 줄 알았으면 10파운드라고 말하는 건데.” 그 하녀는 자신의 일에 만족하지 못하고 끝없이 불평했습니다.
  
어느 날 미국 신문에 크게 보도가 된 이야기라 합니다. 시청에서 쓰레기 수거 노동자 모집을 했는데 유명 대학 교수 두 사람이 신청을 해서 화제가 되어서 신문에 난 것입니다. 두 분이 다 채용되었습니다. 그러니 이것이 신문에 얼마나 큰 화젯거리입니까? 신문 기자들이 톱기사로 냈습니다. “당신들은 이 사회에서 가장 존경받는 직업을 가지고 또 지금도 아무 문제가 없는데 그 훌륭한 직업을 왜 버리고 이러한 직업에 신청을 했습니까?” 

거기에 대한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이것이 더 좋아 보여서입니다.” “무엇이 더 좋아 보이는데요?” “네, 저는 대학교수로 지금까지 날마다 책상에서 머리를 쓰는 직업을 가지고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가야 합니다. 때만 되면 연구 논문을 발표해야 되고 그것이 점수가 안 나오면 골치가 아프고 이런 머리 쓰는 직업을 평생 했는데 아무리 봐도 이 직업은 머리 쓸 일이 없을 것 같이 보였습니다. 똑같은 동작만 똑같은 동네에서 하면 넉넉히 먹고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학에서는 내가 이 사회의 문제점이 되고 교수들 간에, 학생들 간에 그 문제 중심에 서서 이런 처리, 저런 처리 이 사람의 골치 아픈 관계성 때문에 신경이 날마다 예민해졌는데 그런 신경을 하나도 안 쓰니까 얼마나 편한지요?” 

또 쓰레기를 가져가는 방법도 한국 같지는 않습니다. 주택이 바둑판처럼 정리가 되어 있는데 시청에서 보내준 규격이 똑같은 쓰레기통이 약속한 장소에 그날이면 나란히 있습니다. “쓰레기차를 몰고 가면서 사람의 손으로 하는 게 아니라 스위치를 누르면 기계가 나가서 손이 되어서 쓰레기통을 딱 규격에 맞게 되어 있으니 집어서 그 자리에 놓는 작업만 하면 되니까 아무 신경 쓸 거 없고 내가 맡은 이 지역에서 똑같은 일을 날마다 하니 너무나 편안하고 신경도 안 쓰니 너무나 좋습니다.” 그래서 그 교수 두 사람이 신문에 크게 나고 더 신기한 일은 “대학 교수보다 월급이 많습니다. 그래서 너무나 좋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이른 아침에 인생들 앞에 나타나셨습니다. 일찍 포도원에 들어오도록 초청하러 오셨습니다. 주인은 뭇 사람들에게 넘치는 보상을 약속하며 이렇게 외칩니다. “나의 포도원에 들어오십시오. 내가 상당하게 드리겠습니다. 풍성하게, 공정하게, 부족함 없이 그렇게 드리겠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불렀던 그 아름다운 포도원의 노래를 아십니까? 내가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땅을 파서 돌을 제거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었도다. 이곳에 들어오라. 부족함 없이 주리라”(사 5장 참고).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침 일찍부터 포도원에 들어오려는 사람의 수는 적었습니다. 인생의 아침나절에 예수 그리스도의 포도원에 들어오는 젊은이가 많지 않음과 같습니다. 오히려 젊은이들은 “내 몫을 주소서. 아버지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주소서.”하고 당돌하게 주장하면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건강과 지혜를 챙긴 다음 멀리 떠나 버리기를 즐겨합니다. 우리는 이런 인생을 ‘탕자’라 불러왔습니다(눅 15장). 그랬으면서도 우리 역시 방탕했고, 하나님의 고귀한 선물을 남용하면서도 그것이 소중한 것인 줄 몰랐던 지난날이 탕자의 기억과 함께 아픔으로 남아 있습니다.
  
포도원에 품꾼들이 들어간 뒤 시간은 흐르고, 오전 아홉 시가 되었을 때 놀랍게도 주인은 다시 일꾼들을 찾아 나왔습니다. 장터에 서서 놀고 있는 인생들을 향하여 아까보다 더욱 간절하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그대들, 나는 며칠 전에 한 청년을 만났습니다. 그는 내게 와서 말하기를 ‘선생님,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청년은 상당한 교양이 있었고 명예와 권세까지 두루 갖춘 모범 청년이었습니다. 그는 영생을 위하여 부모 공경, 이웃 사랑의 계명까지 모두 자신 있게 지켰습니다. 그러나 재산 문제에 부딪히자 그만 고민에 빠지고 말았습니다(마 19장). 나의 포도원에는 더 큰 가치와 극상의 소망이 있는데 여러분은 염려하고 있습니다. 더 좋은 수입과 인생의 쾌락이 무엇인지 살피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그 청년처럼 우리도 이전에는 몰랐습니다. 나의 권세와 능력, 그리고 재산에 비교하여 영생을 너무도 값싸게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그 포도원에 들어갈 절호의 순간이 찾아왔을 때도 내 이익에 눈멀어 있었던 사람, 그 청년의 모습이 바로 신앙과 영생의 문제에 너무도 소홀했던 우리 모습은 아닌가요?

설교자 샘 존스(Sam Jones)는 갑자기 병들어 죽게 된 젊은 부자의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합니다. 부자가 마지막으로 의사와 나누었던 말이라 합니다. “당신은 뇌막염에 걸렸습니다. 두 시간 이내에 생명이 다할 것입니다.” “제발 내일까지라도 살게 해 주십시오. 백만 달러를 드리겠습니다.” “시간은 하나님의 것, 팔 수 있는 시간이란 내게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께서 주신 소망이 있을 따름입니다.” “좋습니다. 나의 전 재산으로 그 소망을 사겠습니다.” “돈은 필요 없다오. 세상의 어떤 가치보다도 소중한 그 소망을 붙드십시오.” 

포도원 주인은 낮에도 계속하여 포도원에 들어오라 하십니다. 열두 시가 넘고 오후 세 시가 되었는데도 주인은 또다시 나와서 초청의 말을 멈추지 않습니다. 그러나 장터에 앉아 놀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일에만 마음을 두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장터의 인생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는 복된 잔치 자리의 참예자가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인자한 주인이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습니다. 잔치에 초대했던 사람들에게 정중히 인사하며 기별하니 사람들은 갖가지 핑계를 대며 사양하고 오지 않았습니다.‘ 나는 밭을 샀는데 아무래도 나가보아야하겠습니다.’‘나는 소를 샀가거든요. 무려 다섯 겨리나 되는데 시험하러 가봐야 합니다.’‘나는 장가들었으니 곤란합니다. 아시잖습니까? 율법에는 일 년 동안 전쟁에도 나가지 않고 모든 의무에서 벗어나도록 하고 있지 않습니까? 나도 아내와 함께 행복한 365일을 보낼 권리가 있지요.’하고 거부해 버렸답니다”(눅 14장).

포도원 주인의 안타까운 음성이 들려오는 인생의 대낮 시간에 장터 사람들의 삶은 복잡하기만 합니다. 실타래처럼 얽힌 인생의 문제로 아옹다옹, 이곳 저곳을 바삐 뛰어도 결국 허무만 남는 삶의 뒤안길에서 남은 것이라고는 후회와 슬픔, 상한 몸과 빈 영혼뿐이라는 탄식이 귓가에 쟁쟁합니다.

포도원 밖의 인생들은 소란 속에서 나름대로 바쁜 삶을 삽니다. 어떤 설문조사의 결과를 보면, 80%가 넘는 사람들이 자신의 일이 바쁘다고 대답했고, 그중에 60%가 몹시 바쁘다고 응답했다합니다.
몹시 바쁘신가요? 할 일이 너무 많아 예수 그리스도의 포도원에 들어올 수 없었다고 말하려는가요! 삶에 있어 가장 시급한 일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는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편안히 살기 위해 곳간을 짓는 사람의 일과, 오늘밤 영혼이 세상을 떠나는 사람의 일입니다(눅 12장). 바쁜 몸 이제 쉬려 하니 내 생명 벌써 끝이 납니다. 주님은 장터 인생들을 가리켜 “아직 놀고 있는 사람들”이라 말씀하십니다. 장터에서 바쁜 발길을 부지런히 옮겼으나 하나님의 일꾼으로 삯을 받는 인생은 없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분주한 발길을 멈추고 잠시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나는 장터에서 노는 일에 바쁜 인생인가요, 생명을 위해 일하는 포도원 인생인가요? ”생명을 위해 일하지 않고 있다면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풍랑 일렁이는 인생의 바다를 직장, 가정이라는 무거운 멍에를 지고 급히 저어가는 인간들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되면 이것들을 모두 벗어놓고 생명줄 하나만을 붙잡아야 할 순간이 오고 만다는 것을. 너무 늦어지고 있음을 모르는가요? 지금도 포도원 안으로 들어오라고 부르시는 주인의 음성을 못들은 체하고 있지는 않는가요? 밭에서 소들을 부릴 때 들었던 주님의 음성, 장가가고 시집간 날에 날아온 주님의 말씀, 갈등 많고 복잡한 생활의 터 위에 내리신 생명에의 초대를 어찌 외면할 수 있을까요. 힘겨운 우리 인생이 하나님을 외면한 채 바쁘게 지내다보면 어느새 중천의 해는 떨어지고 황혼의 저녁별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하는 때가 찾아오고 맙니다.

'가장 귀한 것'이라는 이야기라 합니다. 승용차를 운전하여 출근하는 길에서 있었던 사고를 경험한 한 사람의 글이었다 합니다. 길을 가는데 옆 차가 바짝 붙여지나 가면서 승용차의 문짝을 찍 긁어놓았습니다. 그는 차를 멈추었습니다. 상대편 차를 운전하던 젊은 부인이 허겁지겁 내리더니 그에게 다가왔습니다. 그 여성이 얼마나 놀랐는지 얼굴빛이 사색이 되어 있었습니다. "미안합니다. 제가 아직 운전에 서툴러서요. 변상해드릴게요" 그 여성은 바로 잘못을 인정하였습니다. 그 여성은 자기의 차 앞바퀴 부분이 심하게 찌그러진 것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이틀 전에 산 새 차인데 이렇게 찌그러뜨려 놓았으니 남편 볼 면목이 없다며 계속해서 눈물을 뚝뚝 흘렸습니다. 

사고를 당한 사람도 그녀가 참으로 안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튼 사고 보고서에는 운전면허증과 보험 관계 서류 등에 관하여 상세히 적어야겠기에 여러 증빙 서류를 담은 운전석 옆의 사물함을 열어 한 봉투를 꺼내주었습니다. "이건 저의 남편이 만약의 경우를 위해서 필요한 서류들을 담아둔 봉투예요" 이렇게 말하면서 그녀는 또 다시 울먹였습니다. 

그런데 그 서류들을 꺼냈을 때 맨 앞장에 굵은 펜으로 다음과 같은 커다란 글씨가 적혀 있었습니다. "여보, 만약 사고를 냈을 경우에 꼭 기억해요. 내가 가장 사랑하고 걱정하는 것은 자동차가 아니라. 바로 당신이라는 사실을" 그녀의 남편의 글이었습니다. 사고를 당한 이 사람이 그녀를 다시 쳐다보았을 때 그녀의 눈에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습니다. "내가 가장 사랑하고 걱정하는 것은 자동차가 아니라, 바로 당신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물질중심의 가치관을 버리고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소중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한 사람의 영혼입니다. 

놀랍게도 포도원 주인은 해질 무렵까지도 나와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마지막 열한 시는 지금의 오후 5시, 즉 일몰 한 시간 전을 말합니다. 주인은 인생들에게 최후의 기회를 주십니다. 그래도 “내 마음이 아직도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라고 할 수 있을까요? 더 이상 늦출 겨를이 없습니다. 인생의 마지막 때, 깊은 절망의 순간에서도 주님은 우리를 부르십니다. 내가 아무리 주님을 멀리 떠나려 해도 그 마지막 순간, 마지막 자리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손을 내미십니다.
  
세상 어디서도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곳이 없을 적에 그분은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따뜻하게 이르십니다. “그래요, 아직도 늦지 않았습니다. 포도원에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장터의 인생들은 몹시 쑥스러워졌습니다. “하루 종일 놀았는데 이제 들어가려니 미안합니다.” “평생 믿지 않고 살았는데 면목이 없네요. 괜찮을까요?” 이내 포도원 주인의 자비로운 말씀이 떨어졌습니다. “아브람의 99세 때의 일을 읽지 못하였는가요. 하나님께서 나타나서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서부터 나오리라”(창 17장).

아흔아홉 살의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팔십 살의 모세를 쓰신 하나님, 늦게 피어나는 인생을 받으신 하나님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가을이 시작되어 만산에 단풍이 들 준비를 하게 됩니다. 그럴 때면 생각나는 것이 늦게 꽃을 피워내는 만추의 화훼(블룸 레이터 Bloom later)아 합니다. 포도원에 들어와 늦게 핀 만추위 화훼, 예배에 늦을까봐 백발 날리며 종종걸음으로 들어와 주름진 손으로 땀 닦고 돋보기로 바라보는 성경구절, 늦게 핀 꽃의 향기를 받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거기에 있습니다.

“그래요, 품꾼으로 쓰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괜찮습니다. 들어오시기 바랍니다.” 
“나중 온 자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어라고 하십니다.” 

주인께 감사드릴 뿐입니다.
구원은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얻을 시기가 바로 이순간입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고 합니다.

우리가 처해 있는 바로 이 시간을 가리키는 말 ‘지금’은 현재의 이 자리를 강조합니다. 너무 늦어진 우리, 그러나 더 늦기 전인 ‘지금’, 하나님의 진노가 임박한 마지막 때인 바로 ‘지금’ 주님의 포도원에 들어가는 일이 비록 늦었으나 지금이라고 여긴다면, 그것이 나를 변화시킬 유일한 때입니다. 늦게 온 사람에게 인간의 생각으로는 차등이 있기를 기대하나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먼저 삯을 주시며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모여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이 순간이 바로 그때입니다. 나는 늦었으나 하나님의 시간으로는 바로 그때, 세상의 원리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원리로써 자비를 행하시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너무 늦게야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이 저를 소리쳐 부르사 저의 귀먹은 것을 열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빛을 저에게 보이사 저의 눈먼 것을 밝혀 주시고 저에게 향기를 불어넣어 주시니 그 향기를 마시고 이제 주리고 목마름같이 주님을 사모하나이다.”

이 고백의 주인공인 성 어거스틴, 그는 세상을 돌면서 방황하다가 너무 늦게 주님께 돌아온 사람입니다. “너무 늦게야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목메어 외친 그때의 나이는 서른세 살이었습니다. 우리는 상당수가 그보다도 더 늦게 포도원에 나온 인생들입니다. 그러나 늦게 피는 꽃들을 온 산야에 두시어 저무는 가을을 더욱 찬란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 삶에 머무를 줄 믿고, 다시 한 번 이 고백을 주님께 드려야 하겠습니다. “너무 늦게야 주님을 사랑합니다. 오래오래 보았으나 새롭게 아름다우신 주님을 이토록 뒤늦게야 사랑합니다. 주님은 제 안에 계셨고, 저는 주님의 바깥에 있었나이다. 주님을 찾다가 추할 대로 추해진 제가 주님 만드신 그 아름다움 위에 이제야 비로소 넘어졌나이다.”

성 어거스틴의『고백록』중 우리의 가슴을 울리게 하는 한 구절입니다. 

예수님의 아름다우신 이름을 들은 지는 너무도 오래였지만, 그 이름 앞에 넘어진 것은 언제였는지요? 그렇게 밖으로만 맴돌았어도 주님은 내 안에서 한시도 떠나시지 않았음을 뒤늦게 깨달은 사람들의 부끄러운 노래가 이렇게 울려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고백의 노래를 부르기 전에 하나님의 음성은 먼저 찾아와 있었습니다. 마치 어거스틴 같은 인생의 방랑자인 우리를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포도원 주인으로서의 인자한 음성을 들려주고 계셨습니다.

11시에 들어온 일꾼들로 최선을 다하여야 합니다.
1968년 멕시코 올림픽 때의 일입니다. 폐회식을 위해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모인 수많은 관중들이 한 마라톤 주자를 위해 기립 박수를 보냈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일까요? 금메달리스트가 아닙니다. 꼴찌였습니다. 탄자니아 ‘아크와리’ 선수입니다. 그는 도중에 넘어졌습니다. 무릎이 깨져 피가 철철 흘렀고, 통증도 굉장했습니다. 나중에는 눈의 초점이 풀릴 정도로 정신까지 혼미해졌습니다. 하지만 끝까지 완주했습니다. 그는 골라인을 통과한 후 기절하고 말았습니다. 그가 곧 깨어나자 기자들이 달려들어 질문합니다. “어차피 꼴찌인데 왜 끝까지 피를 흘리며 달렸습니까?” 사실 마라톤 경기가 맨 마지막이므로 그 선수 때문에 폐막식 시간까지 늦어졌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의 조국이 나를 머나먼 이곳까지 보냈습니다. 비록 조국에 금메달을 안겨주지 못하지만, 기권해서 나의 조국에 불명예를 끼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게 곧 올림픽 정신이요,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추구할 인생의 원리입니다

옛날 신대륙 개척시대에 아일랜드 출신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신대륙으로 가서 성공하려는 꿈을 갖고 있었습니다. 가난했던 그는 겨우 노자를 마련해서 런던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뉴욕까지 갈 배 삯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선장에게 통사정을 합니다. 나중에 꼭 갚겠으니 제발 태워 달라고. 어쩐지 그 청년이 마음에 들어 선장은 승선을 허락합니다. 말은 안 했지만, 받을 생각은 아예 접고 공짜로 태워준 겁니다. 청년은 선장의 은혜가 너무 고마워서 열심히 일했습니다. 자진해서 구석구석 청소를 하고, 선원들의 일을 도왔습니다. 

수개월 후 뉴욕 항에 도착합니다. 청년은 내리면서 선장에게 다시 확인합니다. 다음에 찾아와서 배 삯을 꼭 갚겠노라고. 그러자 선장은 자기 호의였으니 갚을 필요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봉투를 하나 내놓았습니다. 배 안에서 그동안 일한 대가라며 ... 청년은 어리둥절했습니다. 아무리 일을 했다 해도 배 삯에 미칠 수 없는데, 배 삯은 공짜로 해 주고 게다가 용돈까지 주다니!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의 보상입니다. 우리가 구원의 감격 때문에 감사하며 수고하는 게 당연하지만, 그래도 갚을 수 없는 은혜인데, 가외로 우리의 수고와 헌신을 기억하시고 보상해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이 또한 기가 막힌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은혜에 감사하며 사명감당하는 모두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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