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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말씀을 가까이 하라 (벧후 1: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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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가까이 하라 (벧후 1:16-21)


옛날에 훌륭한 임금이 한분 있었습니다. 하루는 젊은 청년 하나가 임금님을 찾아와서 임금님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여야 나도 임금님처럼 성공할 수 있는지 가르쳐 주십시오.”
그 때 임금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컵에다 포도주를 가득히 담아서 청년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임금은 엄한 목소리로 무장한 군인 하나를 불러 세웠습니다. 그리고 임금은 그 군인에게 “이 젊은 놈이 포도주 잔을 들고 저 마을을 한 바퀴 도는 동안 너는 뒤를 따라가다가 만일 이놈이 포도주를 한 방울이라도 흘리거나 엎지르면 그 자리에서 목을 치도록 하여라.” 아 이렇게 명령을 했습니다.

이 청년은 성공의 비결을 들으러 왔다가 그만 칼에 맞아죽게 생겼습니다. 그래서 청년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조심조심, 마을을 돕니다, 칼을 찬 군인이 칼을 빼들고 뒤를 따라오고 있습니다. 청년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 포도주 잔만 바라보며 포도주잔이 흔들리지 않도록 온갖 주의를 다하고 있습니다.
드디어 청년은 무사히 마을을 다 돌아 임금 앞에 다시 왔습니다. 청년의 이마에는 땀이 주르르 흐르고 있습니다. 그때 임금이 빙그레 웃으시면서 청년에게 하시는 말씀이 “수고했다. 그런데 너는 마을을 도는 동안에 무엇을 생각했으며 또 무엇을 보았느냐? 장터에 사람들을 보았느냐? 길거리에 누워있는 거지들을 보았느냐?”

청년이 대답합니다. 
“임금님! 저는 마을을 도는 동안 포도주 잔 외에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으며, 또 포도주 잔을 넘치지 않게 하겠다는 생각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해본 것이 없습니다.”
그 때 임금은 청년의 어깨를 두드리며 
“이것이 바로 성공의 비결이다. 네가 되고자 하는 목표만 바라보고 열심히 뛰어가라”고 교훈합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우리가 집중해야 할 대상입니다.
앞에서 베드로 사도는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고 권면을 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집중해야 할 대상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요 목표는 그 나라에 넉넉히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가 더욱 힘써 우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여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닫는 것은 영원한 나라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택하신 것은 자기의 영원한 나라에 우리가 넉넉히 들어가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노아의 때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시며 마음에 근심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마음을 아주 모질게 잡수십니다.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지만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니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따라 노아는 자그마치 120년 동안이나 방주를 짓습니다. 하지만 모든 땅 위에서 호흡하는 짐승들이 다 방주로 모여들어 방주 안으로 들어가고 마지막 노아와 노아의 세 아들과 각각의 아내들 합해서 여덟 명이 방주로 들어가 문이 닫히기까지 누구하나 방주로 나아온 사람이 없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노아가 육백 세 되던 해 둘째 달 곧 그 달 열이렛날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문들이 열려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집니다. 결국 온 세상이 다 물에 잠겼고 다음해 둘째 달 스무이렛날 다시 방주에서 나오기까지 1년 열흘을 노아와 온 가족이 방주 안에서 생활합니다. 한데 그 날들이 갑갑하다고 해서 방주에서 나와 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그건 보나마나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택하신 노아의 가정 여덟 명과 하나님께서 방주로 이끄신 짐승들 외에는 다 홍수로 쓸어버림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노아와 그 온 가족들 역시 하나님께서 다시 방주에서 나오라고 하실 때까지는 답답해도 방주 안에 머물렀던 사실을 우리가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우리의 구주시오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언제든 믿음으로 고백하고 이 믿음 안에서 흔들림이 없어야 합니다. 일찍이 베드로 사도는 대제사장들 앞에서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고 담대하게 증거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예수 그 이름 외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이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직 예수를 믿음으로만 우리가 구원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가 그리스도가 되신다는 것을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생각해보세요. 아무리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어도 그래서 내 자식이 배불리 먹는다고 해도 나는 그저 바라만 보고 있으면 어떻습니까? 내 배가 부릅니까? 결코 아닙니다. 

마가복음 3장에 보면 “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또 누가복음 4장에 보면 “여러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으사 그들이 말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 이는 자기를 그리스도인 줄 앎이러라”고 했습니다. 더러운 귀신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라고 하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예수를 구주로 믿고 그 권세 아래 굴복해야 하는데 결코 그렇게 하지를 않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그 권세 아래 굴복하지를 않아요. 자기도 믿지 않을 뿐 아니라 어떻게 해서든지 한 사람이라도 더 믿음 안에 서지 못하도록 훼방을 합니다. 

사실 우리 가운데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주가 되신다는 것을 또한 다 믿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 가운데 이 말씀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아주 귀가 따갑도록 들어온 말씀입니다. 그런데요 아무리 몸에 좋은 보약이라도 먹어야 보약이 되는 것이지 “그것 정말 몸에 좋은 것이거든. 먹으면 정말 좋은 거야. 먹어 봐” 하면서 정작 자기는 먹지를 않는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어요? 
우리가 여행을 하다보면 흔히 상점에 갑니다. 특별히 여행사를 통해서 가게 되면 으레 상점을 들릅니다. 그런데 그 상점들이 주로 취급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먼저 건강을 위한 식품들입니다. 보약도 있고 건강 보조 식품도 있고 여러 가지 비타민이라던가 차들도 많이 삽니다. 또는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도구들도 중요 메뉴 중 하나입니다. 

가끔은 보석점에를 데리고 가기도 하죠. 값은 둘째 치고 하나같이 탐나는 것들입니다. 들어보면 정말 그것만 먹으면 몸이 아주 좋아질 것 같고 그 도구들만 있으면 전혀 아프지 않을 것만 같습니다. 물론 그렇기도 합니다. 말만 좋은 것이 아니고 진짜로 좋습니다. 진짜로 좋은데 그럼 뭐가 문제냐? 꾸준히 먹게 되지를 않는다는 것이고요 꾸준히 사용을 하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런닝머신이라든가 자전거 같은 것을 집에 갖추고 있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럼 날마다 그 운동 기구를 사용하는가 하면 그렇지를 못합니다. 며칠은 잘 합니다. 그런데 조금씩 시간이 지나면서 꾀를 부리기 시작하다 보면 어느 날 문득 생각해보면 먼지만 풀풀 날리고 있더란 말입니다. 보약이나 건강 보조식품도 마찬가지입니다. 며칠은 잘 먹습니다. 그런데 끝까지 꾸준하게 먹지를 않습니다. 잊어버리기도 하고 귀찮기도 하고 먹기가 좀 거북하기도 하고 그러다 보면 그냥 한쪽 구석에 처박혀 있다가 시간이 지나 내버릴 수밖에 없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구주가 되신다고 하는 것을 아무리 알고 믿고 있다고 해도 그분이 바로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구주가 되신다는 것을 믿어야 그 예수님이 나와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한다는 것도 예수님이 나의 주님, 나의 구주, 나의 메시야, 나의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을 믿고 시인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영원한 하늘나라에 이르도록 곧게 붙잡아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다시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서 오신다고 하는 사실을 사람들이 믿으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하는 것은 우리 믿음 안에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일반 세상의 사람들조차도 많이 이야기를 합니다. 아주 귀가 따갑도록 말세야 말세 하지를 않습니까? 그러면서 종말 시계가 12시 5분전을 가리키고 있다느니 뭐니 하면서 지구가 멸망하는 이야기를 이렇게 저렇게 만들어서 말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이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서 오신다는 것만은 극구 부인을 합니다. 왜요? 그렇게 되면 자기들이 어떻게 될 것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지막까지도 아니라고 하며 몸부림을 치지만 주님이 다시 오셔서 세상을 심판하신다는 것은 변함없는 진리입니다. 그들 모두가 다 좋은 곳으로 가시길 빈다고 합니다. 명복을 빈다는 것이 바로 그 말입니다. 그러면서도 천국이 어디 있냐고 말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명복을 빌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이미 판결은 끝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명확한 증거가 있습니다. 예수를 자기의 구주로 믿지 않았다고 하는 이것보다 더 정확한 증거가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어떻게 우리의 구주가 되실 수 있느냐고 하겠습니까? 예수님이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시고 산위로 올라가셨습니다. 그 산 이름을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단지 그 위에서 놀랍도록 변모하셨다고 해서 변화산 또는 변모산이라고 부를 뿐입니다. 그 산위에 올라가셨을 때 그들 앞에서 변형되시는데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다고 합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 때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에게 나타나 예수와 더불어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 베드로가 정신없는 소리를 합니다.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그때 하늘로부터 소리가 들려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이렇게 하나님 아버지가 예수님으로 하여금 존귀와 영광을 받게 하셨다고 하면서 베드로 사도는 다시금 강력하게 증거합니다.

“우리는 그 영광을 우리의 눈으로 직접 보았다. 그리고 하늘의 소리를 분명하게 들었다”고 거듭해서 말씀합니다. 이보다 더 분명한 증인이 어디 있겠습니까? 내 눈으로 직접 그 모든 영광을 보았으며 내 귀로 하늘의 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 
결코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하나님께서 하늘의 소리로 예수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요 또한 메시야라고 하는 사실을 친히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도 못믿겠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계속해서 뭐라고 합니까?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기야 분명한 증거가 다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거 조작이라고 그러니 믿으면 안 된다고 하며 UN에 편지를 보내는 사람들도 있는 판에 무슨 말인들 믿겠습니까? 증거를 가지고 판결을 내리는 법관이면서도 내 눈으로 직접 본 것이 아니니 사실 여부를 말할 수 없다고 하는 판에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잘 알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다고 하면서도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향해 “네가 귀신의 왕을 힘입어서 귀신을 쫓아내는 거지?” 하지를 않습니까? “네가 메시야냐? 말하라” 하더니 “맞다. 내가 메시야”라고 하니까 신성모독이라고 하지를 않습니까? 그러니까 자기 마음이 비뚤어져 있는 사람은 모든 것이 다 비뚤어져 보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두운 밤에도 어둠을 밝히는 등불이 있듯 더 확실한 예언이 있다고 합니다. 긴긴 밤이 지나고 어둠이 벗겨집니다. 동이 터오기 시작합니다. 아직 해가 뜬 것은 아니지만 모든 사물을 다 분별할 수 있을 만큼 날이 샜습니다. 한데 그 때 밝게 빛나는 별이 하나 있습니다. 샛별입니다. 모든 별이 다 빛을 잃은 그 시간에 홀로 빛을 발하는 샛별이 있습니다. 그 샛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계시록에서는 예수님을 광명한 새벽별 곧 샛별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약속의 말씀을 따라 샛별 되신 주님이 다시 세상을 비추시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세상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이 될 것입니다. 

그 날까지 그러므로 우리는 이 약속의 말씀을 굳게 잡고 말씀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아무리 세상이 어두워도 우리는 그러므로 세상을 밝히는 빛의 역할을 다해야 하는 것이요 샛별 되시는 주님이 우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즉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우리는 주님을 모시고 주님만 바라보고 하늘나라를 소망하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성령 안에서 우리들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을 가까이 하며 따라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유감스러운 일이 무엇인가하면 오늘의 성도들은 성경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들어서 성경 말씀보다는 성경에 없는 이야기를 더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비웃는 말까지 있습니다. 
“교회를 부흥시키려면 성경에 있는 이야기만 하지 말고 성경에 없는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를 많이 해 보라, 그러면 반드시 사람들이 몰려올 것이다.”

러셀이라고 하는 사람이 쓴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라는 책이 있습니다. 러셀은 그 책에서 말하기를 “여러 가지 책 중에 성경은 너무 비논리적이고 비과학적이며 지저분한 이야기로 가득찬 거룩하지 않은 책이며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말들로 꾸며진 책이다, 그런데 어떻게 믿을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러므로 나는 결코 기독교인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저는 이 러셀의 말이 결코 틀리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정말 사람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비과학적인 이야기와, 말도 되지 않는 비논리적인 말과 어떤 곳에는 낯이 뜨거워서 읽을 수 없는 성적인 이야기로 채워져 있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러므로 “이 책은 사람이 만든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사람이 만든 이야기가 아니고 하나님이 만드신 이야기이기 때문에 때로 우리가 하나님의 과학을 이해할 수 없고, 하나님의 논리를 이해할 수가 없을 때가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이것을 알게 해 주시고 믿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으면 지금까지 이해할 수 없던 하나님의 말씀이 이해가 되고 믿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당부하기를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예언을 사사로이 풀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즉 성경을 사람의 이해에 맞추고 사람의 논리에 맞춰서 푸는 이단이나 거짓 선생에게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이단들이 왜 인기가 있는지 아십니까? 성경을 사람의 논리에 맞춰서 풀고, 성경을 사람의 이성에 맞춰서 편집한 사람의 이야기를 전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을 좋아하고 그것이 진짜라고 따르는 것입니다. 통일교의 원리강론이라는 책이 바로 그런 책입니다. 그들은 성경을 제쳐 놓고 이 편집된 원리강론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고 따르고 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의 말 중에도 진짜가 아닌 만든 말들이 있습니다.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아십니까? 소위 거짓말입니다. 사람들 중에는 말을 잘 만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입니다. 교회 안에 이런 사람들 때문에 교회가 시끄러워지고 분쟁도 일어나며 어려움에 빠질 때도 생기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 교회는 정말 끈끈한 정이 넘치는 교회입니다. 모든 성도들이 그렇게 친밀하게 사랑의 교제를 나눕니다. 어찌 보면 교회와 집과 직장 또는 학교밖에 모를 정도로 순수함으로 가득찬 성도들입니다. 성도들끼리도 얼마나 정이 많은지요? 한데 너무 우리까리만 가깝다보니 한 가지 그것이 때로는 단점으로 나타날 때도 있는데 그건 새로운 성도들이 기존 성도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기까지가 너무도 힘이 든다는 것입니다. 안에서 우리끼리는 너무도 친밀합니다. 하지만 우리끼리만 친밀하고 끝나지 말고 새로운 얼굴들 낯선 얼굴들을 향해서도 이런 친밀함으로 다가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어쨌든 한 주일 만에 다시 만나기에 더 반가워합니다. 한데 여기서 한 가지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도들 간에는 한 주일에 한번 만나도 되지만 주님을 한 주일 만에 만나는 성도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혹시 우리 가운데 한 주일동안 주님을 까맣게 잊고 살다가 주일날에만 교회에 와서 만나시는 분들은 안 계십니까?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세상을 떠나 승천하시면서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셨고 승천 후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제자들을 향해 두 천사가 증거하기를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을 항상 바라보면서 우리 가운데 항상 함께 계신 주님을 날마다 생각하면서 살고, 항상 생각하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나를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시선은 주님에게서 떨어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주님의 뒤를 좇으려면 주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아울러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 되신다고 하는 것은 주님 되신 예수님, 주인 되신 예수님의 뜻을 바로 분별하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사사로이 풀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우리를 향한 주님의 뜻을 바로 알 수 있는가 하면 바로 성령 안에서입니다. 말씀이 기록되도록 하나님께서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성령의 감동하심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기록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말씀을 듣고 그 뜻을 바로 알기 위해서 필요한 것 또한 성령의 감동하심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항상 성령으로 충만할 때 우리는 어떤 환난이나 어려운 일이 와도 실족하여 넘어지지 않게 될 것이요 오히려 그러한 환난이나 어려운 일을 통해서도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되도록 이끌어가실 주님을 우리가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성령으로 충만할 수 있습니까? 바로 말씀의 사람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성령이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흔들림 없는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비결도 바로 성령 충만, 말씀 충만입니다.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서로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따르라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성령을 소멸하지 말며 예언을 멸시하지 말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했습니다. 성령을 소멸치 않고 성령으로 충만해서 살아가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믿음위에 굳게 선 성도의 모습입니다. 날마다 주님만을 바라볼 뿐 아니라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면서 사는 성도가 되심으로 그 주님이, 그 말씀이 우리와 우리의 삶을 늘 붙들어 주시는 귀한 역사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세계적인 전도자를 꼽는다면 우리는 서슴지 않고 미국의 무디를 꼽습니다. 그분은 초등학교밖에 공부하지 못했습니다. 교회학교 생활도 엉망이었습니다. 그는 요한복음을 찾는데 창세기부터 찾기 시작할 정도였습니다.
그가 신학교를 가려할 때 처음에는 거절당했습니다. 학교생활을 계속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못하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그는 가는 곳마다 왕따 당했습니다. 
“너처럼 희망 없는 사람은 없을 거야.”
“너와 친구 되는 것이 부끄럽다.”

그는 늘 고독했습니다. 언제나 혼자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매일같이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를 사용하셨습니다. 사람들에게는 무디가 어리석은 존재로 비쳐졌지만 하나님 눈에는 희망의 재료로 보였습니다. 
무디는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했고 스펄전은 고등학교만 다녔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누구보다도 독서를 더 많이 했습니다. 그것은 자신들이 스스로 부족함을 더 느꼈기 때문입니다. 
다른 것은 못 읽어도 좋습니다. 성경만은 항상 곁에 두고 읽는 습관을 기르십시오. 그래서 말씀을 가까이 하며 말씀으로 충만할 때 그리고 그 말씀을 따라 하나님 앞에 엎드려 간구할 때, 주신 약속을 따라 성령 안에서 놀라운 일들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은총이 말씀의 사람 성령의 사람 된 우리 모두와 함께 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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