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지혜란 무엇인가? 3 (왕상 3:16-28)

첨부 1


지혜란 무엇인가? 3  (왕상 3:16-28) 
 
 
❚친자소송

어느 날 아침 한 초등학생 아이가 부지런히 학교에 등교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뒤에서 누가 다가오더니 아이를 꽉 잡는 겁니다. 아이는 순간적으로 “이게 말로만 듣던 유괴범인가” 싶어 너무 겁이 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아이를 잡고는 고작 머리카락을 몇 개 뽑아 도망가는 것입니다. 아이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집에 돌아와 엄마에게 말합니다. “엄마, 나 오늘 이런 일을 당했는데 이상하게 그 아저씨가 내 머리카락만 뽑아갔어. 큰일 날 뻔 했어.” 그런데 너무 다행이라고 할 줄 알았던 엄마가 얼굴이 사색이 됩니다. “얘, 어떻게 하면 좋니. 정말 큰일 났구나.” 사연인즉, 그 아이는 어떤 유명 인사의 숨겨놓은 자식이었습니다. 범인은 이 아이가 친자가 맞는지 유전자 검사를 하기 위해 머리카락을 뽑아 간 것입니다. 엄청난 재산이 달린 문제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지요. 얼마 전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이 아이가 과연 친자로 판정이 났는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요즘은 이렇게 머리카락 한 올만 있으면 친자확인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만약 이런 놀라운 기술이 솔로몬 시대에 있었다면 솔로몬의 명재판도 필요 없었을지 모르지요.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 시대에는 이런 기술이 없었습니다. 기껏해야 이 아이가 누구 닮았나 정도였겠지요. 교회에서 어린아이를 보고 아빠 닮았다, 엄마 닮았다 하면 참 좋아 합니다. 그런데 간혹 아빠도 별로 안 닮고, 엄마도 별로 안 닮은 아이가 있어요. 이럴 때는 어떻게 말해야 할까요? “할아버지 닮았다, 할머니 닮았다” 하면 됩니다. 그도 아니면 “삼촌 닮았다.” 하면 되고요. 그런데 정말 이도저도 아닌 경우도 있지요. 누굴 닮은 것만 가지고는 판단하기 쉽지 않습니다.

보세요. 솔로몬이 판결을 내리기가 참 어려웠을 것입니다. 모든 상황이 참 어렵습니다. 친자 확인 유전자 검사도 못 하고, 그렇다고 누굴 닮았는지도 분명치 않고, 그렇다고 간난 아이가 “제가 이분 아들입니다” 하고 스스로 증언을 할 수도 없고, 아시다시피 두 여인이 다 직업이 창기니 이 아이가 어떤 남자 아이인지도 확실치 않을 것이고, 18절에 보면 “우리 둘 외에는 집에 다른 사람이 없었나이다” 하니 증인 서 줄 사람도 아예 없지요. 모든 상황이 지극히 복잡하고 난해합니다. 그 누구도 이런 상황에서 명쾌한 판단을 내기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솔로몬의 명 판결

우리가 만약 솔로몬이라면 이럴 때 어떤 판결을 하겠습니까? 어느 날 솔로몬 임금 앞에 창기(창녀라는 뜻입니다) 두 명이 와서 재판을 청합니다. 사연인즉, 둘이 한 집에 사는데 사흘 차이로 두 여자가 각각 아들을 낳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밤중에 그만 한 여자가 아들 위에 누워서 아이가 죽고 맙니다. 아마 뒤척이다가 모르고 아이를 깔고 누운 모양이지요. 

아이는 불쌍하게도 엄마 밑에 깔려 질식사 하고 맙니다. 그런데 그 여자가 밤에 몰래 아이를 바꿔치기 했다는 것입니다. 죽은 자기 아이를 내 품에 누이고, 살아있는 내 아들을 데려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상대방 여인은 죽은 아이가 저 여자 아이고 산 아이가 내 아이라고 우깁니다. 두 여인이 서로 이 아이가 내 아들이라는데 아이를 이 여인에게 줄 수도 없고, 저 여인에게 줄 수도 없습니다. 참 난감하지요.

우리 인생에도 이런 상황이 종종 닥치곤 합니다. 이렇게 할 수도 없고, 저렇게 할 수도 없습니다.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어떤 판단을 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고민됩니다. 힘이 듭니다. 내 한 번의 결정으로 인해 큰 이익을 볼 수도 있지만 반대로 큰 손해를 볼 수도 있습니다. 단 한 번의 결정으로 인해 가정이 흥하기도 하고 망하기도 하기에 우리 가장들은 짐이 참 무겁습니다. 내 한 번의 판단에 회사나 사업이 서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합니다. 분명한 확신이나 보장만 있으면 뭐가 문제겠습니까? 불확실하고 한 치 앞도 모르니까 문제지요. 여러분은 이런 어려운 상황일 때 어떻게 하십니까? 아주 중요한 결정이나 선택을 해야 할 때 어떻게 하십니까?

이런 상황에서 솔로몬은 그 유명한 판결을 합니다. “그렇다면 칼로 이 아이를 둘로 나누어 두 여자에게 반씩 나누어 주어라!” 와, 정말 끔찍한 말이지요. 공평하게 아이를 반으론 나누어라, 말이 되는 판결입니까? 어떻게 아이를 반으로 나누어 가집니까? 아마 두 여인뿐 아니라 그 자리에 모인 모든 사람들도 경악을 금치 못했을 것입니다. “아니, 뭐야? 솔로몬이 지혜롭다더니 어떻게 저런 말도 안 되는 판결을 하냐?”며 수군거리거나 마음속으로 손가락질을 했겠지요. 그러나 여러분, 알고 보면 이 판결이 얼마나 놀라운 판결입니까? 사실 이 판결은 한 아이를 칼로 쪼개서 공평하게 나누어 주자는 것이 아니라 모성애(母性愛)를 이용한 판결입니다. 24절부터 보세요.

24 또 이르되 칼을 내게로 가져오라 하니 칼을 왕 앞으로 가져온지라 25 왕이 이르되 산 아이를 둘로 나누어 반은 이 여자에게 주고 반은 저 여자에게 주라 26 그 산 아들의 어머니 되는 여자가 그 아들을 위하여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왕께 아뢰어 청하건대 내 주여 산 아이를 그에게 주시고 아무쪼록 죽이지 마옵소서 하되 다른 여자는 말하기를 내 것도 되게 말고 네 것도 되게 말고 나누게 하라 하는지라

무슨 말입니까? 칼로 아이를 둘로 나누라고 하자 친엄마가 뭐라고 합니까? 26절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여자가 그 아들을 위하여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친엄마의 모성애가 불탄 것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내 아이를 죽일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차라리 내 아이를 저 여자에게 주라고 한 것입니다. 아이에 대한 소유욕보다 모성애가 더 크기 때문에 이렇게 한 것이지요. 반대로 다른 여자는 뭐라고 합니까? “좋습니다. 아이를 나눕시다. 

기왕 내가 이 아이를 못 가질 바에야 차라리 죽입시다.” 반대입니다. 이 여자는 모성애보다, 아이를 진정 사랑하는 마음보다 소유욕이 더 크기 때문에 내가 못 가질 바에야 차라리 둘로 쪼개자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부모가 자녀를 사랑합니다. 하지만 여러분도 이 모성애, 부성애와 소유욕을 구분하기 바랍니다. 내 자녀 내가 낳았으니, 내 거니까 내 마음대로, 내 뜻대로 하겠다는 것은 소유욕일 뿐입니다. 자식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실제는 소유욕을 더 앞세운다면 반드시 문제가 생깁니다.

솔로몬이 이 사실을 잘 알았던 겁니다. 기억하십시오. 진짜 엄마는 소유욕보다 당연히 모성애가 더 큽니다. 그러니 아이를 차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더 커서 아이를 양보한 것입니다. 이게 진짜 엄마지요. 자식을 위해서라면 내 모든 것을 희생하고 내 생명조차 얼마든지 내줄 수 있는 것이 진짜 부모지요. 저도 그렇지만 솔로몬도 자식이 있었지만 실제로 내 몸으로 안 낳아봤습니다. 그런데도 이 모성애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이런 명 판결을 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이야기의 결론이 되는 28절 말씀이라고 했지요. 함께 읽습니다.

온 이스라엘이 왕이 심리하여 판결함을 듣고 왕을 두려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지혜가 그의 속에 있어 판결함을 봄이더라

성경은 분명히 이렇게 말씀합니다. 솔로몬이 이렇게 명쾌한 명 재판을 한 것은 무엇 때문이다? 솔로몬이 똑똑해서도 아니고, 유능해서도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지혜’가 솔로몬에게 있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지혜, 하늘의 지혜가 그 속에 있음을 보고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놀라고 또한 왕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문제해결능력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이 지혜를 꼭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지혜, 하늘의 지혜 말입니다. 오늘 이 솔로몬의 명 재판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는 바로 ‘문제해결능력’입니다. 지난 두 주에 걸쳐 성경이 말씀하는 지혜는 첫째로, 하나님과의 관계고, 둘째로, 사람과의 관계를 풀어가는 능력이라고 했는데 이제 마지막 세 번째로, 성경이 말씀하는 하늘의 지혜는 바로 문제해결능력이라는 것입니다. 좁게는 나 자신에게 일어나는 문제들, 중요한 일들을 결정하고 추진할 때 잘 풀어가고 해결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또 내 인생에 어려운 일, 곤란한 일이 닥쳤을 때 풀어가고 해결하는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이 지혜를 받은 사람은 솔로몬처럼 인생의 가장 중요한 순간마다, 혹은 인생의 가장 어려운 순간마다 바른 결정을 하게 됩니다. 왜? 내 능력이나 머리로, 경험으로 결정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항상 그는 형통한 길로 갑니다. 왜요? 시편 1편은 그 까닭을 우리에게 이렇게 말해줍니다.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여기서 말하는 복 있는 사람이 바로 하늘의 지혜를 얻은 사람입니다. 왜냐? 2절에 나온 대로 그는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능력이나 경험이 아닌 솔로몬처럼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마음’을 갖고,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게 바로 지혜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또 성경이 말씀하는 지혜, 즉 문제해결능력은 넓게는 솔로몬의 재판처럼 내 주변의 일들, 대외적인 일들, 다른 사람이 관련된 일까지 해결해주는 능력을 뜻합니다. 이런 사람은 제가 늘 강조하지만 주변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지요. 기억하십시오.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한 종류는 일이 늘 잘 풀리게 하는 사람 / 일을 쉽게, 쉽게 잘 풀어가는 사람입니다. 또 한 종류는 일이 늘 꼬이게 하는 사람 / 일을 자꾸 어렵게, 복잡하게 만드는 사람입니다. 참 이상합니다. 어떤 사람은 보내 놓으면 일을 잘 풀어갑니다. 꼬인 일도 복잡한 일도 잘 해결합니다. 꼬여있는 인간관계도 잘 풀고 두루두루 모든 일이 되게 만듭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줍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6장에서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라는 동역자를 소개하면서 그들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들이 나와 너희 마음을 시원하게 하였으니(18절)

바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는 사람입니다. 편하게 해주고 막힌 것, 답답한 것을 뻥 뚫어주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을, 따라합시다. “되게 하는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꼭 똑똑해야, 머리 좋아야 이렇게 됩니까? 천만에요. 지혜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로, 하늘의 지혜로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 하나만 있으면 모두가 편안합니다. 만사형통입니다. 그 한 사람, 지혜로운 한 사람 때문에 말입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보내 놓으면 되던 일도 꼬입니다. 자꾸 일을 힘들게 합니다. 다른 사람을 힘들게 하고 답답하게 만듭니다. 원만하게 다른 사람과 의논하고 협력하는 것이 아니라 자꾸 고집을 부리고 자기주장만 앞세우지요. 조정하고 풀어가는 것이 아니라 자꾸 복잡하게 만들지요. 이런 사람을, 따라 하세요. “안 되게 하는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제가 이런 사람에게 별명을 붙였어요. ‘시까고’라고 말입니다. 미국 ‘시카고’가 아니라 ‘시까고’입니다. “시끄럽고, 까다롭고, 고집 센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 하나만 있으면 정말 복잡합니다. 일이 어려워집니다. 모두가 힘들어 합니다. 지혜롭지 못한 그 한 사람 때문에 말입니다.

보세요. 지혜로운 사람 한 사람이 있으니까, 그런 사람이 왕이니까 온 나라가 편하지 않습니까? 솔로몬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지혜로운 사람 한 사람만 있으면 온 가정이 다 편안하지 않겠습니까? 온 교회가 다 편안하겠지요? 온 직장이, 그 사람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다 복 받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바로 이런 사람을 찾으시는 것이지요. 왕이 아주 복잡할 일을 해결할 때 보내는 특사는 머리 좋은 사람 아닙니다. 능력만 좋은 사람 아닙니다. 오히려 제 머리, 제 능력 믿고 까불다가 일만 그르칩니다. 지혜를 보고 보냅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혜는 바로 문제해결능력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이런 지혜로운 사람, 이런 문제해결능력을 가진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래야 자기 문제도 탁월하게 지혜롭게 해결하고, 또 하나님이 맡기신 일도 잘 해결할 테니까요.

❚나는 갈 길 모르니

오늘까지 네 주에 걸쳐 지혜에 대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결론은 이것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지혜는 오히려 뭘 아는 것이 아닙니다. 뭔가를 잘 아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 저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솔로몬이 고백한 것처럼 아이 같아서 아무 것도 모릅니다. 저를 가르쳐 주십시오” 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찬송가 375장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갈 길 모르니 주여 인도하소서 어디 가야 좋을지 나를 인도하소서 어디 가야 좋을지 나를 인도하소서

아무 것도 모르니 나를 가르치소서 어찌 해야 좋을지 나를 가르치소서 어찌 해야 좋을지 나를 가르치소서

아이 같이 어리니 나를 도와주소서 힘도 없고 약하니 나를 도와주소서 힘도 없고 약하니 나를 도와주소서

이 고백이 바로 저와 여러분의 고백이 되기 바랍니다. 성경은 물론 지혜를 문제해결능력이라고 말하지만 그게 어디 내 머리나 지식에서 나온 능력이겠습니까? 아닙니다. 철저하게 하나님께 의지하고, 하나님께 물어서 나오는 문제해결능력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정의하고 싶습니다. ‘문제해결 능력’이 아니라 ‘문제해결 믿음’이다. 즉,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라기보다 문제를 해결하는 ‘믿음’이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철저하게 그 분만 의지하고 의뢰하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이 도우셔서 참된 지혜를 주십니다. 그 지혜를 통해 내 앞에 닥쳐온 어려운 일들, 중요한 문제를 넉넉히 해결하고, 나아가 하나님이 보내신 곳, 맡기신 일을 잘 해결하여, 내 주변에 선한 영향력을 펼쳐나가는 지혜로운 성도들, 우리의 자녀들이 다 되기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