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초림 예수와 재림 예수 (행 1:9-11)

첨부 1


초림 예수와 재림 예수 (행 1:9-11)


오늘과 내일은 헤어졌던 가족과 만남의 시간을 갖기 위해 대이동을 하게 될 것입니다. 실제로 그리운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정말 행복한 일입니다. 사랑하는 자와의 재회는 어떤 행복보다도 무게감 있는 기다림이라서 오늘과 내일 모두 헤어졌던 가족들이 만남의 기쁨을 가지고 좋은 날을 가지게 된 것을 하나님 앞에 감사드립니다. 아울러 우리가 일생을 통하여 그토록 사모하는 신앙의 대상인 주님과 만나게 되는 것은 가능한 것인가? 그래서 오늘 말씀의 조명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일대기를 큰 사건으로 간추리면 출생과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마지막에 재림 사건입니다. 부활 사건과 재림 사건 사이에 승천이 있었는데 오늘 승천에 대한 기록이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설교를 하시고 이제 사명의 완수자가 되셨으므로 이 땅에 더 계실 이유가 없어져서 본래의 모습대로 하늘나라에 승천하여 올라가신 기록의 본문을 오늘 우리가 읽었습니다. 이 승천 사건에 대한 본문 해석을 몇 가지로 우리가 구분할 수가 있는데 제일 먼저는 오늘 본문 성경에 몇 가지로 아주 자세히 잘 나와 있습니다.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이런 말씀이 나와 있습니다. 

이 장소는 감람산이라고 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주님은 40일 동안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간간히 나타나셔서 자신의 부활을 나타내 보여주셨습니다. 감람산에 가시면 ‘승천교회’라고 하는 교회가 하나 있습니다. 그 교회는 벽만 있고 지붕이 없습니다. 그 자리에서 예수님께서 승천하여 올라가셨기 때문에 그것을 의미화해서 지붕 없이 벽만 있는 교회를 만들었다는 설명을 감람산에서 들었습니다. 이 승천의 사건은 예수 부활의 마지막 증거 장면이 되겠습니다. 사람이 자연과학적으로 생각할 때 몸이 둥둥 떠서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현실로 바라본 이 승천의 역사적 사건 때문에 예수의 부활은 마지막으로 확실한 증거를 남기게 된 것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의 승천이 의심받을 조건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그 자리에서 의심을 했던 모든 사람들은 나가서 예수의 승천은 거짓말이라고 다 전했을 것입니다. 예수 승천 현장에 누가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바울의 기록이 아주 자세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3절에서 8절에 보면 고린도에 가서 복음을 전하니까 헬라 철학의 전문가들이 반대를 했습니다. “여보시오. 당신은 어디서 온 사람인데 지혜의 고장인 헬라에 와서 고린도라는 학문의 도시에 와서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났느니 사람이 하늘로 올라갔느니 내려왔느니 하는데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요? 아니, 우리를 바보 취급하는 거요? 이 세상에서 지금 여기가 최고의 학문의 도시이며, 헬라철학의 본고장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도는 미련한 것이라고 사람들이 말을 하니까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는 장사지낸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시고 그 살아나신 몸을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는 5백의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있습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5백여 명이 일시에 보는 가운데서 승천하신 내용을 바울이 말했습니다. 그러면 5백 명 중에 단 한명이라도 승천에 대해서 분명하지 않은 말을 했다면 문제는 험악해졌을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이렇게 생활하다가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진리가 있을 때가 있습니다. 바로 현장 목격입니다. 내 눈으로 확인된 사건은 절대적입니다. “무슨 소리야? 내가 확실히 봤는데!” 그 말은 힘이 있습니다. 우리 한국 같은 경우는 교통사고가 많이 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교통사고 현장에 있는 사람이 증인으로 나서는 것을 꺼려합니다. 나서봤자 나중에 공연히 오가라 어째라 귀찮습니다. 그러니까 봐도 못 봤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고가 나면 서로 우기지 않습니까? “나는 파란 불에 지나갔다.” “무슨 말이냐? 내가 파란 불에 지나갔다.” 그러면 어떡합니까? 똑같은 말을 하기 때문에 참 난처합니다. 그래서 현장 목격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미국 같은 경우에는 그 주변에서 현장을 목격한 자가 거의 나섭니다. 자기 일이 바빠도 귀찮아하지 않고 증인으로 나서주어야 사회 정의라고 생각하고 “내가 봤습니다. 내가 현장 목격자입니다. 이 사람이 잘못했습니다. 이 사람이 빨간 불에 지나가서 사고가 난 것입니다. 법원에서 오라고 하면 내가 가서 증언하겠습니다.” 아주 놀랄 만큼 참여합니다. 상대방에게 어떤 불이익 당할 것을 생각하지 않고 “당신이 잘못했어. 당신이 빨간 불에 지나갔어.” 그러며 나섭니다. 현장목격자 두 사람만 있으면 100퍼센트 이깁니다. 한 사람은 거짓말 할 수도 있지만 두 사람의 현장목격자가 있다면 그 재판은 볼 것도 없이 이깁니다. 이렇게 현장 목격은 힘이 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쓴 시기는 주후 55년에서 60년 사이로 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25년 후가 됩니다. 그러면 “25년과 30년이 지난 사건의 증언자들이 지금 250명 정도나 살아있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물어보십시오.” 또, 예수의 승천 사건은 5천년이나 6천 년 전의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근래 2천 년 전입니다. 이 사건이 얼마나 확실성 있는 사건이냐 하는 것은 오늘 성경에도 나와 있습니다. 이렇게도 나옵니다.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아주 확실한 증거가 되는데 구름이 있는 날 우리의 시야의 길이는 구름까지 밖에 볼 수가 없습니다. 

구름 위로 올라가신 예수를 볼 수가 없었다는 것은 그것을 쳐다본 사람들의 눈이 모두다 정상적 시력을 갖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그 다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올라가셨을 때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았다고 했습니다. 우리 주일 예배 마치고 바깥에 주차장에 다 나갔다고 합시다. 이필재 목사가 둥둥 떠서 하늘로 올라갈 때 어떡하시겠습니까? “흥! 뭐, 올라가겠지!” 그러십니까? “이게 도대체 뭐냐?” 아마 1초도 눈을 안 떼고 바라보실 것입니다. 안보일 때까지 쳐다보실 것입니다. 그렇게 된 것입니다. 이때 쓰는 말이 “눈이 뚫어지게 바라본다.”라는 말입니다. 

가끔 우리 사회는 ‘매직쇼’하는 마술사들이 재미있게 기술을 부리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사람들은 그 비밀을 밝혀보려고 아주 긴장을 하고 눈도 깜짝 거리지 않고 ‘저게 어떻게 저리 되나?’하고 계속해서 시선을 집중시킵니다. 그런데 마술사들이 마술을 행할 때 언제나 사용하는 물건이 하나 있습니다. 손수건이나 아니면 커다란 보자기입니다. 잠깐 뒤집어썼다가 화다닥 뒤엎습니다. 그러면 분명히 조금 전까지 예쁜 여자가 앉아 있었는데 사자가 있단 말입니다. 

문제는 잠깐 동안 가린 그 시간입니다. 그렇게 장치가 되어 있습니다. 그 잠깐 동안 보자기로 사람들의 시야를 가리는데 속임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승천 장면은 5백 명이 1천개의 눈동자를 굴리면서 자세히 쳐다본 생명력 있는 살아있는 현장 목격 증언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다 죽은 것이 아니고 이 고린도 시대에도 250명 정도가 아직도 살아있으면 그 사람들에게 물어보라고 이렇게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승천 사건은 하나님 나라의 존재 확인이 된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의 승천 사건이 없었다면 지금까지도 궁금증이 계속되었을 것입니다. ‘어디 가셨나?’ 40일 동안에 예수님의 출현을 보면 예기치 않은 시간에 예기치 않은 장소에 돌연히 나타나시고 돌연히 사라지셨는데 그러다가 예수님이 영 안보이시면 제자들과 이후의 사람들은 ‘또 돌아가셨나? 어디 계신가? 어느 때 또 나타나실 것인가?’ 별 생각을 다 하게 될 것입니다. 승천 사건 때문에 ‘아! 주님은 본래 모습대로 가셨다.’ 가시는 장소를 확실하게 보여주신 사건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어떤 고백을 합니까? 오늘도 하지 않았습니까?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다가” 이렇게 우리가 고백하는 것입니다. 영원으로부터 시간 속에 오셨다가 다시 영원으로 가신 사건! 태초부터 계셨던 주께서 인간의 시간 속에 33년을 계시다가 본래 영원의 세계로 가신 것입니다. 영의 세계에 계시다가 물질세계로 오셨으며 물질세계로부터 다시 영의 세계로 돌아가신 사건, 이것이 예수님의 승천 사건입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의 승천은 우리들의 휴거의 약속이 됩니다. 예수 재림 때 일어날 수 있는 현상에 대해서 데살로니가에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무덤이 열리며 죽은 자들이 모두 살아날 것입니다. 이때 변화된 몸의 부활을 통해서 주님을 만나서 공중 재림하는 주님과 함께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한 가지 문제가 생깁니다. 죽은 사람들이 무덤이 열리면서 주님을 만난다면 그때 세상에 살아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 바로 휴거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몸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변화되면서 주님을 만나서 영원한 세계에 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실 그때를 만나는 사람이 제일 복된 사람입니다. 휴거를 하는 사람이 제일 복된 사람들인 것입니다. 오늘 마지막 약속을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재림에 대한 약속을 하고 가셨습니다. 

그러면 이 사건을 몇 가지로 우리가 분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정말 재림하실 것인가?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을 초림 사건이라고 합니다. 초림 사건이 있을 것이라고 구약 가운데 다 예언해 놓은 것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 초림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재림을 또 예언하시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면 그 약속은 이루어질 것인가? 여기에 우리 신앙의 초점이 있습니다. 이 문제는 복음서에 나타났던 예수님의 예언성의 말씀의 성취가 어떻게 되었는가를 우리가 조명해 보면 금방 알게 됩니다. 예수님은 여러 가지 예언을 하셨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앞에 서셨더니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자랑을 했습니다. “이 건물을 보십시오. 이 성전은 46년 걸려서 건축했습니다. 이 웅장함과 이 견고성을 한번 보십시오.” 건물 자랑을 하니까 “맞다. 대단하다. 그러나 때가 되면 너희가 자랑하는 웅장한 이 건물이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다.” “아니, 여보시오! 당신은 선지자라는 사람이, 하나님 믿는 사람이 어떻게 성전 무너질 것을 예언하십니까?” “하나님의 성전도 내 말대로 될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과 다툼이 벌어졌습니다. 하지만 누구도 생각하지 아니하던 “때가 되면 무너질 것이다.” 

이 말씀은 AD 70년에 로마군에 의해서 그 46년 걸려 건축한 웅장한 건물이 팍삭 다 무너지고 서쪽의 벽 하나만 지금 남아서 그 벽을 ‘통곡의 벽’이라 하지 않습니까? 예수님 말씀하신 대로 된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왕이 될 것 같이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끝까지 따를 거 아닙니까? “예수님! 왕 되실 겁니까?” “때가 되면 너희들이 다 나를 버리고 도망가리라.” 제자들이 “죽을지언정 그런 일이 절대 없을 것입니다.” 그러던 사람들이 죽을까봐 다 도망갔지 않습니까? 예언대로 되었습니다. 어떤 때는 베드로에게 “오늘밤 몇 시간 후에 네가 나를 모른다고 세 번 부인하리라.” 

베드로는 제일 성격이 급하고 장담을 잘 했습니다. “주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나는 주님과 함께 죽을 수도 있습니다. 나한테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하십니까?” 불과 몇 시간이 지났는데 철저하게 예수님 말씀대로 세 번 부인했습니다. 그것도 아주 분명한 시간 “닭 울기 전에”라 말씀하셨는데 그대로 되었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왕이 될 거라고 모든 사람들이 바라보는데 “내가 왕이 돼? 고난을 받고 나는 이제 십자가에 죽을 것이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죽으셨지 않습니까? “내가 죽었다가 삼일 만에 살아날 것이다.” 제자들이 안 믿은 부분이 예수님의 부활 부분입니다. 아무도 안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이 생전에 세상에 계실 때 하신 예언은 예수님 당시와 후대에 100퍼센트 다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면 내가 다시 올 것이라는 예수님의 가장 악센트를 둔 재림에 대한 예언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일점일획이라도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그래서 예수를 믿는 모든 기독교인들은 예수님 예언에 대한 믿음의 고백을 가지고 날마다 “거기로부터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신앙 고백하러 오는 겁니다. 

무엇하러 오시는가? 심판주로 오시는 겁니다. 초림 예수는 고난의 종으로 오셨지만 재림 예수는 심판의 왕으로 오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오시는가? 그렇게 예언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 31절에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이것을 하기 위하여 세상에 다시 오시겠다 하셨습니다. 

그러면 언제 오실 것인가? “너희 알바 아니요” 예수님이 알지 말라 하신 것은 알지 않는 것이 믿음입니다. 가끔 신문에 이상한 기사가 납니다. “예수님이 언제 재림할 것인가 재림 세미나를 할 것이니 오라.” 다 거짓말입니다. 이단들이나 그런 짓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 사건은 예수님 자신도 시기를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만이 아시는 사건이다. 그 이상은 알지 말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성경 진리의 특수성을 이해해야 우리 신앙생활에 도움이 됩니다. 노아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서 아라랏 정상에 배를 만들 때 그를 바라보는 모든 사람은 노아를 정상적인 사람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도 배를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당연합니다. 

여러분! 지금 백두산 꼭대기에 배를 만드는 사람을 볼 때 여러분은 정상적이라고 보시겠습니까? 가서 질문할 수 있습니다. “여보시오. 이 산 꼭대기에 왜 배를 만드십니까?” “네, 나중에는 이 산꼭대기까지 물이 차서 이 배가 뜰 것입니다.” 라고 대답을 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누구도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재림은 믿을 수 없는 일에 대한 반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의 재림도 노아의 때와 같이 될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자연과학 세계를 한번 살피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대기권 안에서 경험한 것 밖에 모릅니다. 아침에 일어나니까 해가 뜨고 저녁이면 해가 지고 바람이 불고 비가 오고 나무가 자라고 우리가 그 안에서 살고 우리 시각적으로 감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우리가 살아갑니다. 우주가 어떻게 변한다든지 우주의 변동이 어떻게 일어난다든지 하는 문제는 전문가들이나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들이나 알 수 있는 것이지 우리 보통 사람들은 관심도 없고 알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 ‘블랙홀’이라는 것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는 영원하고 이대로 계속해서 갈 거 같지만 이 블랙홀에 한번 빨려들면 이 지구 같은 덩어리가 수십만 개일지라도 일순간에 흔적조차 없이 다 없어져 버립니다. 그래서 과학자들도 블랙홀에 대해서 정확한 답변을 내리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게 도대체 왜 이렇게 없어지는 거야?” 우리 찬송가에도 있지 않습니까? “대우주의 모든 천체 이변이 우리 주 목소리 한번 발하시면 천하의 모든 거 쓸데없네! 우리 주 목소리 한번 발하시면 천하의 모든 것 쓸데없네 ♪” 반주도 없이 내가 이렇게 잘합니다. 

지금 우리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신앙고백으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가 거기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성경을 종합적으로 마지막에 종결짓는 말씀이 성경 마지막 요한계시록 맨 끝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성경은 이것으로 끝입니다. 이렇게 적혀있습니다.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하는 인간들의 반응의 축도를 하고 성경은 끝납니다. 바로 예수의 재림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세상이 다 되어졌습니다. 

예언대로 다 되어졌습니다. 한 가지만 남았습니다. 예수의 재림만 남았습니다.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이 세상 사람들이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초능력적인 사건에 대해서 우리는 믿음의 고백을 가지고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이것이 우리 기독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지상에 발을 붙이고 살지만 우리의 삶의 목표는 영원한 세계, 주님과 함께 영생을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나라에 목표를 두고 주어진 이 생애는 하나님 나라 확장에 도움이 되는 생애를 우리가 사는 것이 우리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면서 믿음의 승리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 하나님 아버지! 주님은 약속하셨습니다. “다시 올 것이다.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고 영원하리라.” 오늘 우리가 그 주님의 약속 하나를 믿으면서 늘 신앙 고백을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면서 우리의 삶의 과정에서 있을 수 있는 여러 가지 고난스러운 모든 일들을 주님을 기다리는 신앙 때문에 이기고 승리하는 아버지의 자녀들이 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아멘. 」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