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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무엇을 염려하십니까? (마 6:2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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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염려하십니까? (마 6:25-34)

농사를 짓는 어느 집사님이 있었는데, 이 집사님은 늘 걱정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한 해는 풍년이 들어서 그 집사님의 밭에 심어놓은 감자가 잘 되어 굉장히 많이 수확하게 되었습니다. 평소 이 집사님이 걱정을 많이 한다는 것을 안 목사님이 집사님을 심방했습니다. ‘이제 농사가 풍년이 들었으니 걱정을 좀 덜 하고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겠지’ 하는 마음으로 심방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집사님은 여전히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한숨을 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물었습니다. “집사님, 풍년이 들어서 감자가 잘 되어 이렇게 많이 수확하게 되었는데, 얼굴이 왜 그렇습니까?” 그랬더니 그 집사님이 이렇게 대답하더랍니다. “감자 농사가 잘 되긴 했습니다만, 작년에는 썩은 감자가 많아서 돼지를 먹였는데 올해는 썩은 감자가 없으니 어떻게 합니까?”

사람은 누구나가 걱정과 근심, 염려 가운데 살아갑니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걱정과 염려를 하며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염려는 우리의 삶의 일부가 되어버렸습니다.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는 ‘인간이 자신의 존재와 관계를 맺는 방식이 염려’라고 말합니다. 인간과 염려는 떨래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런 고대 로마의 신화를 예로 듭니다. 
  
고대 로마에 쿠라(Cura)라는 염려의 신이 있었는데, 하루는 염려의 신 쿠라가 강을 건너다가 점토를 발견합니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그 중에서 한 덩어리를 떼어내 자신을 닮은 형상을 빚었습니다. 그 때 주피터(Jupiter) 신이 다가오자 쿠라는 주피터에게 자신이 만든 점토 덩어리에 혼을 불어넣어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주피터는 흔쾌히 쿠라의 요청을 수락하고는 점토 덩어리에 혼을 불어넣어줍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게 사람입니다. 

쿠라는 자신이 만든 그 사람에게 자신의 이름을 붙이려고 했고, 주피터는 자신이 혼을 불어넣어 주었기 때문에 자신의 이름을 붙여야 한다고 다투게 됩니다. 그 때 대지의 신인 텔루스(Tellus)가 다가오더니, 자신의 몸의 일부인 진흙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자신의 이름을 붙여야 한다고 싸움에 끼어들었습니다. 다툼에 결론이 나지 않자 이들은 시간의 신인 사투르누스(Saturnus)에게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사투르누스는 이렇게 판결해 줍니다. 

‘주피터는 혼을 주었으니까 사람이 죽으면 혼을 가져가고, 텔루스는 육체를 선물했으니까 육체를 가져가라. 쿠라는 처음 사람을 만들었기 때문에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쿠라의 것이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염려의 신인 쿠라의 소유가 되어 살아있는 동안 끊임없이 염려를 떨쳐버리지 못한 채 염려 가운데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 인간이 늘 염려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라 하더라도, 염려는 우리에게 결코 유익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어떤 종류의 염려라 하더라도 염려는 우리 인생과 영혼을 좀 먹는 것일 뿐 우리 영혼을 튼튼하게 하거나 강하게 하지 않습니다. 시련은 우리를 연단하게 만듭니다. 고된 훈련이 우리의 근육을 강하게 만들듯이 시련은 우리의 영혼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줍니다. 그러나 염려는 아무리 많이 한다 할지라도 우리를 튼튼하게 하지 못합니다. 염려는 오히려 우리의 몸과 마음 더 나아가 영혼까지 피폐하게 만들 뿐입니다.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예프스키(Fyodor Mikhailovich Dostoevskii, 1821-1881)가 쓴 한 단편소설이 우리의 그러한 모습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제정 러시아 시대에 시청의 동서기가 어쩌다 실수를 해서서 시장님의 장화를 밟고 말았습니다. 그는 즉시 사과를 했지만 시장은 누군가와 대화에 열중하느라 그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날 저녁 집에 돌아온 그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시장님이 나를 용서하지 않은 것 아닐까? 그러면 나는 해고될텐데 그렇게 되면 내 가족들은 어떻게 하지?’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잠을 설친 그는 다음 날 시장님을 찾아갔습니다. 잘못을 빌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그날도 시장님은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느라고 그를 본체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는 시장님이 자신에게 대단히 화가 나서 자신을 일부러 모른 체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다음날도 출근하자마자 그는 시장님을 찾아갔습니다. 마침 시장님은 혼자 있었습니다. 그는 시장님 앞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한 번만 봐 주십시오. 모르고 그랬습니다. 저는 처자식이 있는 몸입니다.”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습니다. 그러자 시장은 버럭 화를 냈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매일같이 찾아와서 귀찮게 굴기 때문입니다. ‘당신 정신 나간 것 아니야!’ 고함을 치며 나무라자 그는 크게 낙심하고 말았습니다. 자신은 꼼짝없이 해고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그의 아내가 그를 흔들어 깨웠지만, 그는 깨어나지 않았습니다. 뻣뻣한 시체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시장님은 누군가가 자신의 구두를 밟은 것쯤은 까마득히 잊고 있었는데, 그는 시장님이 자신을 해고하지나 않을까 염려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염려가 결국 그의 목숨을 앗아가고 말았던 것입니다. 
  
물론 소설 속의 이야기이지만, 어쩌면 그게 우리의 삶을 보여주는 한 단면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너무 많은 염려 속에 살아갑니다. 그 염려가 우리의 건강을 해치기도 하고, 우리의 마음을 힘들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 할 수 있겠느냐?” 염려함으로 키를 키울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염려하는 것의 대부분은 전혀 쓸데없는 염려입니다. 무론 염려하지 않을 순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상황이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여러분, 이 말씀은 아주 기가 막힌 상황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루 세끼 먹고 사는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라는 말씀은 먹지 못해 목숨을 잃을 수 있는 환경 속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을 마시지 못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시각으로 보면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는 4복음서에 모두 기록된 기적이 하나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입니다. 유월절이 가까웠을 때에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겠다고 벳새다 광야로 몰려들었습니다. 그 수가 남자만 무려 5천명이나 되었습니다. 여자들과 어린아이들까지 합하면 최소한 2만 명 이상은 될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듣던 중에 저녁이 되었습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되었는데, 광야 빈들까지 따라온 그들은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그냥 돌려보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린아이가 가지고 온 도시락 하나로 거기에 모인 모든 사람들을 먹이셨습니다. 정말 놀라운 기적이었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이 있었습니다. 그건 수만 명의 인파가 몰려들어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는데, 그 많은 사람 가운데 도시락을 가지고 온 사람은 어린아이 단 한 명뿐이었다는 것입니다. 나머지는 모두 도시락 하나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이 말은 거기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하루 종일 굶을 것을 각오하고 거기에 온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만큼 당시에는 먹을 것이 아주 심각했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처럼 ‘어떤 것을 먹을 것이냐’ 하고 골라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은 먹을 수 있을까’를 걱정해야 합니다. 마시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어디를 가나 물을 구한다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 시대의 팔레스틴에서는 건기에 물을 구하는 것은 아주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마태복음 10:42)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냉수 한 그릇은 누구나 줄 수 있는 적선이 아니었습니다. 뜨거운 여름에 물을 얻기도 힘든 때에 시원한 냉수를 대접한다는 것은 최고의 접대입니다. 그만큼 물이 귀했습니다.

그런 시대에 ‘무엇을 먹을 것인가? 무엇을 마실 것인가?’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먹을 것이 풍부해서 무엇을 골라먹어야 하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은 먹을 수 있을까를 걱정해야 하는 시대에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는 것은 인간의 생존권과 직결된 걱정거리요 염려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무엇을 입을까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겉옷 하나로 생활하던 시대입니다. 겉옷 하나가 낮에는 몸에 걸쳐 입는 옷이고, 추운 밤이 되면 몸을 따뜻하게 하는 이불이 됩니다. 속옷을 입는다는 것은 부자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겉옷 하나로 옷과 이불을 대신하던 가난한 사람들이 혹시 옷이라도 빨아야 할 때면 낯에 활동하는 것도 불가능하고, 밤에 이불을 대신할만한 것이 없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밤에 추위에 얼어 죽을 수 있습니다. 그런 때에 무엇을 입을 것인가 하는 것은 사느냐 죽느냐 하는 걱정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런 것을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오늘 굶을 수 있습니다. 목이 마른데 마실 물을 구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추운 밤에 몸을 덮어야 할 옷이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한들 하나님께서 생명을 잃도록 버려두지 아니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염려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 두 가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첫 번째는 염려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 27절에서 말씀합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대답이 분명한 질문입니다. 염려한다고 작은 키를 키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염려한다고 상황이 바꿔지지 않습니다. 염려한들 아무 소용이 없는데 뭐하러 염려하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우리가 염려함으로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다면 머리에 띠를 둘러매고서 밤새도록 염려해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염려한다고 바꿔지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내 건강만 상하고, 내 마음만 아플 뿐입니다.

그래도 염려가 되신다면 이런 방법을 한 번 사용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더 팽크’라는 영국의 사업가가 있었습니다. 회사에 어려움이 있어 늘 걱정과 염려가 끊이지 않았고, 회사가 어떻게 될까봐 항상 불안했습니다. 늘 걱정과 염려 가운데서 힘들게 살던 그는 ‘이런 걱정과 염려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하고 고민하고 기도하던 중 문득 아이디어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그날 이후 그는 걱정거리가 생길 때마다 메모를 했습니다. ‘몇 월 며칠 회사에 이러이러한 문제가 있다.’ 그리고는 상자 하나를 준비하여 그 상자에다가 메모를 넣어두었습니다. 메모지를 상자에 넣어둔 후에는 그 일에 대해서 잊어버리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매주 수요일 그는 상자를 열어보았습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걱정이 되어서 메모를 해 상자 안에 넣어두었던 일들이 수요일이 되어 메모지를 꺼내 읽을 때에는 이미 문제가 다 해결되어 있었습니다. 내가 걱정하지 않아도 다 해결된 것입니다. 그 후로 그는 그것을 ‘수요 염려 상자’라고 이름을 붙이고선 염려되고 걱정되는 일이 생기면 메모지에 적어서 그 상자에 넣었습니다. 그런 후에 그는 걱정할 것도, 염려할 것도 없이 늘 평안하고 기쁨 가운데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수요염려상자』라는 제목의 책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 책의 결론은 이런 것입니다. “염려는 아무 효험이 없다. 염려는 무익하다.” 
  
그렇습니다. 염려는 아무 효험도 없습니다. 염려해 봐야 우리에게 주어지는 이익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염려할 필요가 없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들의 백합화를 자라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누군가가 애써 가꾸지 않아도 예쁜 꽃을 피우고 아름다운 향기가 나게 하십니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도 그렇습니다. 누가 새에게 먹이를 주기 위해서 농사를 짓지 않습니다. 새들이 굶어 죽을까봐 다 불러들여 먹이를 먹으라고 하지도 않습니다. 가만 두어도 하나님께서 하늘을 나는 새들을 다 돌보아주십니다.
  
이 말씀을 하시면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들의 백합화를 가꾸시고 기르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왜 버려두시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에게도 먹을 것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굶어죽게 하시겠느냐는 것입니다. 배고파 힘들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굶어죽게 하시지는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본문 30절 마지막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믿음이 작은 자들아!” 먹을 것 걱정하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는 것은 믿음이 없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이심을 믿는다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다 알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우리가 무엇 때문에 힘들어하는지 하나님께서는 다 알고 계십니다. 우리의 형편을 잘 아시는 주님께서 때를 따라 우리의 삶에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십니다. 우리의 욕심이나 욕망만큼은 아닐지라도, 살아가는 데 필요한 만큼은 채워주십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는 염려할 것 하나도 없습니다. 빌립보서 4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염려가 아니라,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아시고 가장 적절한 것들로 공급해 주십니다.
  
마태복음 7:9-11절에서도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인간의 아버지가 자식에게 주는 것보다 더 좋은 것들로 우리에게 주시는 참 좋으신 아버지이십니다.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는 염려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자식이 굶주리면 굶는 자식은 배가 아프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부모는 가슴이 찢어지게 아픕니다. 자식이 목말라 울면, 그것을 바라보는 부모는 가슴이 다 타버리는 것 같은 고통을 느낍니다. 그게 부모입니다.
  
하물며 하늘 아버지께서 오죽 하시겠습니까? 자식인 우리가 배고파 울고 있는데,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가만 계시겠습니까? 나몰라라 하고 방관만 하고 계시겠습니까? 

하나님을 신뢰하십시다. 우리의 삶에 언제나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믿으십시다. 
때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굶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때로 마실 물이 없어 고통을 당하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겉옷이 없어 추운 밤에 떨며 밤을 지새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럴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 순간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당신의 품에 꼭 안아 주십시다. 
  
그리고 우리를 위한 놀라운 계획을 세우고 계십니다. 우리가 지금 당한 이 힘든 상황을 잘 극복하고 나면 더욱 놀라운 것으로 채워주시려고 준비하고 계십니다. 지금의 힘든 상황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더욱 크신 계획을 이루실 준비단계임을 기억하며 사십시다. 그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에 더욱 놀라운 일을 창조해 가실 것이고,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주실 것입니다. 

본문 34절에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우리의 염려는 대부분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오늘 힘든 과정을 거쳐서 내일 큰 영광을 얻는다면 누군들 오늘의 힘든 과정을 참아내지 못하겠습니까? 오늘도 힘이 든데 내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기에 걱정이 되고 염려가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염려하는 내일은 우리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일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염려한다고 오늘의 상황을 바꿀 수 없는 것처럼, 우리가 염려한다고 내일을 바꿀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내일의 일을 미리 끌어당겨 염려하고 걱정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합니다.’ 오늘 좀 힘들다면 오늘 하루만 참으면 됩니다. 내일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염려를 ‘안개’에 비유하곤 합니다. 우리는 때로 짙은 안개를 만납니다. 그런데 여러분, 30m 두께의 짙은 안개의 양은 물 한 잔의 분량밖에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한잔의 물이 약 600억 개의 작은 물방울로 바뀐 것이 안개라는 것입니다. 물을 컵에 한 잔 따라놓고 그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 한 잔의 물이 600억 개의 작은 물방울이 되어 우리 앞을 가로막으면 앞이 보이지 않아 두렵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염려는 그와 같습니다. 사실 물 한잔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염려하면 할수록 그 물방울은 더욱 짙은 안개가 되어 우리의 삶을 온통 두렵게 만들어버립니다. 짙은 안개가 끼면 앞을 볼 수 없듯이 우리의 마음에 염려의 안개가 자욱하게 끼면 내일이 보이지 않습니다. 내가 가야할 길도 보이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조차도 보이지 않습니다. 오직 나 혼자인 것처럼 보여져 더욱 나를 두렵게 만듭니다. 

여러분, 염려함으로 키를 한 자나 키울 수 있다면 염려하십시오. 염려함으로 부도날 위기에 있는 회사를 일으켜 세울 수 있다면 많이 염려하십시오. 염려함으로 몸이 건강해진다면 더 많이 염려하십시오. 염려함으로 우리의 신앙이 더욱 아름다워진다면 얼마든지 염려하십시오.
  
그러나 오늘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무 것도 염려 하지 말고 다만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믿음 없는 이방인처럼 염려하며 살지 말고,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당당하게 사십시다. 염려 대신에 하나님께 기도하십시다. 하나님은 우리 삶에 무엇이 필요한지를 가장 잘 아시는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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