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죄와 벌이 아닌 죄와 용서 (요일 1:5-10)

첨부 1


죄와 벌이 아닌 죄와 용서 (요일 1:5-10)
   
요즘 사람들이 건강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의 질병을 세 종류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몸에 일어난 외상의 병입니다. 외상으로 드러나는 병은 누구나 자신이 다친 것, 병에 걸렸다는 것을 다 알 수 있습니다. 다음은 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본인은 고통을 느끼는 질병입니다. 몸이 아픕니다. 그런데 눈으로는 확인이 되지 않습니다. 

본인은 고통을 호소하는데 병원에서는 이상을 발견하지 못하는 질병입니다. 마지막으로 눈에 보이지도 않고 통증도 없는 질병입니다. 우리들에게 가장 위험한 보이지도 않고 질병으로 인한 통증이 없기에 병이 악화되는지를 모릅니다. 이런 질병은 악화될 대로 악화가 된 이후에서야 발견되어 돌이킬 수 없는 경우가 됩니다. 

오늘은 제가 많은 분들이 듣기에 거부감을 갖게 되는 죄에 대해 말씀을 드릴까 합니다. 죄를 앞에서 말씀 드린 몸의 질병에 비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죄도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법을 어기는 죄가 있습니다. 이를 범죄라고 말합니다. 이 죄는 자신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도 그것이 죄라는 것을 다 압니다. 영어에서는 이러한 죄를 crime이라고 합니다. 

또 다른 죄는 사람들에게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양심에 걸리는 죄입니다. 양심이라는 것은 자신의 행동에 대한 옳고 그름과 선과 악을 판단할 수 있는 선한 마음입니다. 법으로 처벌을 받지 않아도 그 양심에 가책을 느끼며 힘들어 하는 죄가 있습니다. 

양심으로 죄를 구분하는 데는 한계성이 있습니다. 양심이라는 것은 모두에게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양심은 개인의 삶의 환경과 생각의 차이에 따라 느끼는 기준이 다를 수 있습니다. 양심이 무딘 사람이 있고 민감한 사람이 있습니다. 양심이 무딘 사람은 죄를 짓고도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저 사람은 양심도 없는가 봐’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습니다. 이렇게 보면 양심을 중심으로 죄를 판단하는 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절대 선이 되시는  하나님 앞에 설 때에 드러나는 죄가 있습니다. 이 죄의 기준은 양심도 아닙니다. 기준이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죄를 판단하실 때 우리의 행동과 결과만을 보지 않습니다. 마음까지 보십니다. 마음에 이미 악한 마음을 품으면 이미 죄를 지었다고 말씀하십니다. 내 양심에 비추어 죄로 생각하지 않았던 부분이 하나님의 선을 기준으로 보면 죄가 됩니다. 우리들이 자각하지 못하는 죄가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가 자각하지 못했던 질병이 MRI 촬영을 통해, CT 촬영을 통해, 초음파 검사를 통해 다 속속히 드러나는 것처럼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들이 알지 못했던 죄들이 숨김없이 드러납니다. 영어에서 이런 죄를 sin이라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나는 죄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세상의 법과 자신의 양심을 기준으로 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나는 죄가 없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8절에서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라고 말씀합니다. 또 한  성경은 로마서 3장 10절에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씀합니다.

사람들은 죄에 대해 거부감을 갖습니다. 사람들은 종종 ‘그것도 죄가 됩니까?’라고 물으며 죄에 대한 거부 반응을 보입니다. ‘그것도 죄가 됩니까?’라고 묻는 것은  ‘그것은 죄가 아니다’라는 말을 듣고 싶은 것입니다. 자신은 죄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죄인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을 보면 그들은 ‘그것도 죄가 됩니까?’라고 항변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예, 저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죄로 인해 부끄러워하며 하나님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처음으로 만나는 장면이 성경에 나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과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내용을 보며 그는 예수님에게서 이상한 기운을 느낍니다. 베드로는 예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 됨을 보게 됩니다.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예수님께 나아가 무릎을 꿇고 ‘주님, 나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을 베드로에게 죄에 대해 한 마디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베드로는 유대인으로서 죄인의 의식보다는 의인의 의식을 가지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자신은 다른 사람에 비해 그래도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예수님께서 그에게 죄에 대한 어떤 말씀도 하지 않았는데 그는 스스로가 죄인이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약함과 허물이 드러난 것입니다. 거룩함 앞에서 자신의 추한 모습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 앞에 무릎 꿇으며 죄인임을 고백하는 순간부터 예수님과 인격적인 만남을 갖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베드로가 무식한 어부였기에 그런 행동을 했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대의 최고의 엘리트 중의 엘리트였던 바울의 변화를 보면 그런 생각이 달라집니다.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서 당대에 최고의 지식인이었습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던 최고의 특권층이었습니다. 그는 사회적으로, 종교적으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는데 앞장섰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들이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는 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을 만나가 전의 그의 이름은 사울입니다. 사울이라는 이름은 ‘큰 자’라는 뜻입니다. 자신의 죄가 아닌 자신의 의를 자랑하며 드러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예수님을 만난 후에 사울이라는 이름을 바울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했습니다. 바울이라는 이름은 ‘작은 자’라는 뜻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더 깊이 알면 알수록 자신의 의로움이 아닌 자신의 죄인 됨을 더 크게 고백합니다. 

그는 에베소서3장 8절에서 자신을 표현할 때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라고 표현합니다. 디모데전서1장 15절에서는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표현합니다. 이상하지요? 우리들은 기도를 많이 하고, 성경을 많이 읽고, 많이 헌금하고, 많이 봉사하면, 그리고 직분을 얻으면 우리의 의를 자랑하고 드러내는 모습인데 바울은 죽기까지 헌신하고, 신약 성경 27권 가운데 13권을 쓸 정도로 하나님의 말씀에 조회가 깊었습니다. 기도로는 삼천층, 즉 기도 중에 하나님 나라를 경험할 정도로 깊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고백은 더 큰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신실한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함으로 자신을 조명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나갈수록 죄를 더 크고 깊게 봅니다. 제가 종종 여러분에게 말씀드렸습니다. 일반 사람들보다 성인들이 더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 하나님의 거룩함 앞에서 자신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일반 사람보다 더 자신의 죄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런 말을 하면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서 자신의 죄를 더 깊이 보고 그렇게 고민하며 살게 되는데 무엇 때문에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가느냐고 말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허물과 죄가 더 드러나기에 가능하며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려합니다. 자신의 허물이 드러나는 것이 싫습니다. 죄가 하나님 앞에서 다 드러나는 것이 거북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면서 말합니다. ‘나는 그렇게 큰 죄가 없다’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게 산다.’ ‘내 죄는 내가 책임진다’라고 말합니다. 죄 문제로 인해 사람들은 하나님께 나오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거북스러워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교회의 문턱을 넘는 것을 힘들어 합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내가 스스로 죄를 지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사람을 죽이고 주어진 형벌을 받는다고 해서 죄책감이 사라집니까? 내가 다른 사람에게 나쁜 짓을 하였는데 어떤 보상되는 일을 한다고 해서 그 죄가 없어집니까? 조금의 위안을 받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죄로부터 자유할 수 없습니다. 이 죄에 대한 문제가 사실은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죽음이 두려운 것이 아닙니다. 죽음 이후가 두려운 것입니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만약 죽음이 모든 것의 끝이라면 죽음은 단지 이 세상을 떠나는 아쉬움이지 두려움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 이후에 남는 죄 때문입니다. 그 죄의 내용을 가지고 심판의 세계가 펼쳐집니다. 

하나님은 죽음 이후에 당신 앞에 선 사람들의 행적을 보며 심판하십니다. 그의 선함과 악함을 가지고 심판하십니다. 그것에 따라 상급을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인데 그러면 하나님 앞에서 누가 구원을 받으며 누가 상급을 받을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 길을 통해 들어오면 우리의 죄가 씻겨지는 은혜를 얻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며 흘리신 보혈의 문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흘리신 보혈을 ‘영적인 지우개’ 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시면서 그 보혈을 우리의 죄를 지우는 지우개로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보혈을 가지고 우리의 죄를 닦고 하나님 앞에 거룩한 모습으로 서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벌하기 위해 기다리고 계신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죄로 알고 하나님께 고백하면 그 죄가 어떤 죄이든지 하나님은 예수님의 보혈의 지우개로 지워주시며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워지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어떤 죄이든지 지울 수 있는 지우개라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오늘 본문 5-10절을 다시 한 번 읽어봅시다.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하나님은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두움 속에서는 더러운 것과, 추한 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빛 앞에서는 모든 것이 드러납니다. 빛을 멀리하고 어두움으로 들어가면 우리의 죄를 죄로 보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보혈은 멀리하면 할수록 죄에 무뎌지고, 죄와 더 가까운 삶을 살게 됩니다. 예수님의 보혈에 가까이 하면 할수록 우리의 삶이 부담이 되는 것 같아도 결국은 우리가 죄로부터 멀어지는 삶이고, 예수님의 보혈의 지우개로 우리의 죄를 지우며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은혜를 더 깊이 깨닫는 삶을 살게 됩니다. 성숙한 믿음의 사람일수록 ‘그것도 죄가 됩니까?’라고 항변하는 삶이 아니라 ‘예, 죄가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는 삶을 삽니다. 예수님의 보혈의 지우개로 우리의 죄를 지우며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자리에 더 가까이 나아가는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