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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 말대로 사하리라 (민 14:18-20, 롬 1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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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말대로 사하리라 (민 14:18-20, 롬 10:9-10)

어느 날 성 프란시스코 수도원에서 금식기간 중에 제자 한 명이 죽을 훔쳐 먹다가 걸렸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아니 이럴 수가 있어? 다들 배고픔을 참고 금식 하는데”하며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습니다. 제자들은 열을 올리며 모두 분개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중의 한 제자가 “얼마나 참기 힘들었으면 죽을 훔쳐 먹었을까? 금식기간이니 사랑으로 용서하자”라고 하였고 모두가 동의하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때, 프란시스코는 말없이 제자가 먹다가 만 죽 그릇을 들고 죽을 떠먹기 시작했습니다. 제자들은 깜짝 놀라 “선생님! 금식기간 중에 먹다니요? 그래도 돼요?”라고 했습니다. 

그 때 프란시스코는 “얘들아, 우리 다 같이 죽을 먹자. 죽을 먹은 한 사람을 정죄하는 죄를 범하지 말고, 다 같이 죽을 먹고 다 하나가 되자꾸나!”라고 하였습니다. 행동보다 말로 더 많은 사람을 정죄하고 죽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말의 힘을 가지고 있고, 모든 말은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말은 행동을 낳습니다. 말이 행동이 되면 말은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말이 행동이 되지 못하면 그대로 이루질 가능성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우리 옛말에 “말 한 마디가 천량 빚을 갚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빚을 갚는 자세의 말은 그 자체가 천량 빚도 갚는 사람을 감동하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사회의 막말은 위험수위를 넘은 듯합니다. 소위 ‘악플’이라 불리는 인터넷의 막말은 테러 수준이라고 할 만큼 갈수록 심각합니다. 막말은 유죄가 됩니다. 젊은 판사가 노인에게 막말을 하고, 젊은 여성이 할머니에게 막말을 하고, 어느 목사가 교인에게 막말을 하였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벌금형을 받았습니다. 말은 힘이 있고, 말은 뼈가 있고, 말은 그대로 되는 속성이 있습니다. 
  
언어폭력은 어떤 폭력보다 피해자에게 깊은 상처를 줍니다. 군대 언어폭력이 총기사건으로 비화되었습니다. 가정 언어폭력이 가정파탄으로 이어집니다. 학교 언어폭력은 교단파괴로 이어집니다. 어느 교수는 여학생이 결석하였다고 “낙태하러 가느라 결석했냐?”라고 했다가 파면 당했습니다. 학생 언어폭력은 친구를 왕따시키고 인생을 망치기까지 합니다. 직장 언어폭력은 사회생활을 하지 못하게 합니다. 말은 반드시 어떤 면에서든지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습니다. 
  
민수기 22장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 하는 가운데 모압 평지를 지나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압왕 발락은 이스라엘이 그들의 땅을 지나가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왕은 선지가 발람에게 사람을 보내 “그대가 복을 비는 자는 복을 받고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줄을 내가 앎이니라”고 하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해 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발람에게 하나님의 백성을 저주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발람은 나귀를 타고 가는데 하나님의 사자가 칼을 들고 길을 막았습니다. 발람이 포도밭 좁은 길을 지날 때에 나귀가 발람을 담에 끼게 했습니다. 발람은 화가 나서 나귀를 채찍질하였습니다. 

그 때 나귀는 “당신이 뭐길래 나를 세 번 때리느냐?”고 발람에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나귀의 입을 여셨습니다. 하나님은 말 못하는 나귀에게도 말을 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말의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때는 아이들이 ‘호산나’를 부르며 예수님을 환영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아이들이 소리를 지르지 못하게 하라고 했지만 예수님은 이들이 가만히 있으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돌도 소리 지르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말하게 하시며, 말대로 되게 하십니다. 
  
유재석과 이적의 ‘말하는 대로’라는 노래의 가사를 보면 “말하는 대로 말하는 대로 될 수 있다곤 믿지 않았지 믿을 수 없었지...말하는 대로 말하는 대로 될 수 있단 걸 눈으로 본 순간 믿어보기로 했지”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말하는 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하는 대로 이루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말하는 대로 하나님은 이루어주십니다. 하나님의 사람의 특권이며 동시에 책임은 말하는 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복을 빌면 복을 받고, 저주하면 저주를 받습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용서를 구하는 말대로 우리의 죄를 사하신다는 것입니다. 
  
  
첫째, 하나님은 우리를 사하시기를 즐겨하십니다. 

민수기 14:19에는 “구하옵나니 주의 인자의 광대하심을 따라 이 백성의 죄악을 사하시되 애급에서부터 지금까지 이 백성을 사하신 것 같이 사하시옵소서”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용서하시는 분으로 인정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긍휼과 인자가 풍성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사죄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의 사죄는 하나님의 본능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죄는 죄를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희생으로만 가능합니다. 
  
‘사하다’란 말은 히브리어로 ‘나사’입니다. 이 말은 ‘옮겨버리다’(bearing away)는 뜻인데, ‘감당하다’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을 의미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십자가의 희생으로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저자는 하나님의 ‘인자’에 매달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자하시기에 “애굽에서부터 지금까지” 지은 모든 죄를 용서해달라고 합니다. 출애굽 직후에 바로의 군대가 추격해 왔을 때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돌아가자고 불평했습니다. 마라에서 마실 물이 없었을 때 투정했습니다. 신 광야에서 먹을 것이 부족했을 때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습니다. 르비딤에서 마실 물이 없었을 때 또 불평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더디 내려온다고 생각했을 때 금송아지를 만들자고 했습니다. 광야길 여정이 힘들다고 생각됐을 때 애급으로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애급에서 먹던 생선과 마늘 등이 먹고 싶었을 때 또 불평했습니다. 가나안 땅 정복이 어렵다고 생각했을 때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어려운 일을 만날 때마다 그들은 지체 없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습니다. 하나님을 멸시한 행동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큰 죄, 오래 된 죄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다 용서하십니다. 하나님은 용서하기를 즐겨하시는 분이십니다. 죄 지은 인간을 용서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야고보서 5:15에는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고 합니다. 우리가 용서를 구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그 말을 들으시고 용서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용서 구하기를 기다리십니다. 용서를 구하면 그 말을 얼른 들으십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귀에 들리지 않는 죄는 용서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 용서를 구할 때 듣지 않는 기도는 없습니다. 
  
성경에 보면 용서 받지 못하는 죄는 딱 하나가 있습니다. 누가복음 12:10에는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고 합니다. 이전 성경에는 성령을 훼방하는 죄라고 하였습니다. 성령을 모독하는 죄는 성령이 하시는 이를 방해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회개하게 하는 영이신데 회개하지 못하게 하는 죄를 의미합니다. 이 말은 회개하지 않는 죄는 용서받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시기 전에 일곱 마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중의 하나는 용서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용서의 기도를 드림으로 그 말대로 모든 사람이 용서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말대로 되어 가장 득을 본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나 자신입니다. 예수님께서 “사하여 주소서”라고 기도하셨고, 그 기도의 말대로 되므로 내가 용서받고 구원받은 것입니다. 
  
시편 32:1에는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지은 죄를 용서받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그리스도가 이루신 공적이요, 인간에게 무한한 복입니다. 우리가 용서를 구하면 하나님은 용서하시기에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고”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지은 죄를 용서받는 것 하나만 하더라도 예수 믿는 엄청난 축복입니다. 
  
예일대학교의 미로슬라브 볼프 교수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기로 한 후 인간은 하나님과 인간 서로에 대해서 저지를 수 있는 모든 죄악들을 예견하셨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 계획을 수행해 나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세상을 창조하기 전 세상을 용서하기로 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용서의 약속은 창조 전에 이미 주어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보다 용서가 선행된다는 것입니다. 
  
민수기 23:19에는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죄의 용서를 빌면 그 말대로 용서하시겠다는 약속은 절대로 변치 않습니다. 변치 않는 하나님의 용서가 우리를 끊임없이 회복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은 우리의 말대로 이루어주십니다. 

민수기 14:20에는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네 말대로 사하노라”고 합니다. 우리가 하는 말대로 이루어주시는 주님이십니다. “내가...사하노라”는 말씀은 히브리어로 ‘살라흐티’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내가 사했노라’(I have pardoned)라는 완료형입니다.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죄가 이미 우리의 말대로 완결되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아뢴 모든 말이 이미 성취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아뢰고, 하나님이 들으신 것은 이미 이루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마가복음 11:24에는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고 합니다. 우리가 하는 말대로, 믿고 구하면 그대로 되리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말하는 대로 되는 이런 엄청난 성취의 축복을 경험하고 사는 우리들입니다. 
  
사토 도미오의 ‘잠의 즐거움’이란 책에는 “말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인생이 바뀐다”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말을 바꾸세요. 긍정적으로 바꾸세요. 감사로 바꾸세요. 믿음으로 바꾸세요. 그러면 인생이 바뀝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말대로 성취되게 하시는데 긍정적인 말은 긍정적으로 이루시고, 부정적인 말은 부정적으로 이루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말을 그대로 이루어지게 하시고 이루고 사는데 어찌 인생이 바뀌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 거역하고, 도전하고, 반대하는 자에게 어떻게 하셨습니까? 말을 혼돈하게 하셨습니다. 인류 초기의 ‘바벨탑’ 사건을 보면 하나님처럼 높아지려고 하던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무얼 하셨습니까? 그들의 언어를 혼돈케 하셨습니다. 그들이 서로 말을 알아듣지 못하게 사셨고 그들의 말을 안 들어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는 말대로 들어주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시지만 그러나 그 마음이 하나님과 멀면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듣지 아니하십니다. 
  
C. S. 루이스의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서 스크루테이프는 조카이며 신참 악마인 웜우드에게 악마의 일을 가르칩니다. 인간의 고결함을 손상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 가운데 하나는 무엇보다 말을 파괴하고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라고 충고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의 말이 막히고, 우리의 말이 하나님께 바르게 하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들으시지 않습니다. 들으신다고 하더라도 옳지 못한 것만 들으시고 그대로 이루십니다. 
  
하나님과의 대화가 상실되고 하나님이 우리의 말에 귀를 막고 계신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을 불러도 아뢰어도 말이 응답 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것이야 말로 가장 큰 혼란이며, 비극이며, 멸망입니다. 
  
우리 속담에 “말이 씨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미국의 어느 교도소에서 조사를 해보니 수감된 재소자 90%가 부모에게 “너 같은 인간은 결국 감옥에 갈거야”라는 말을 들으며 자랐다고 합니다. 말이 씨가 되어 감옥에 간 것입니다. 인간관계에서도 말대로 되는 것이 많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말대로 됩니다. 
  
사사기 11장에는 사사 입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입다가 암몬과 전쟁에서 돌아오면서 자신의 집 문에서 자신을 영접하는 자를 여호와께 번제물로 드리겠다고 합니다. 미스바에 있는 자기 집에 도착했을 때 자신의 사랑하는 딸이 소고 치며 춤추며 영접하였습니다. 그 딸은 무남독녀 외딸이었습니다. 입다는 딸을 보는 순간 “어찌할꼬 내 딸이여”라고 탄식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지도 않은 일을 쓸데없이 약속하고 그 말을 지킬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평양 근교에 가면 온달장군의 묘가 있습니다. 고구려의 평강공주는 너무 울어서 달랠 수가 없었습니다. 임금은 평강공주에게 바보온달에게 시집을 보낸다고 했습니다. 공주가 16세가 되던 해에 공주를 대신 가문에 시집을 보내려고 했습니다. 그 때 공주는 “왕이 식언하면 안 됩니다”라며 온달에게 시집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공주가 궁중에서 쫓겨나서 온달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공주는 온달에게 “당신은 바보가 아닙니다. 위대한 장군이 될 수 있습니다”라고 하여 내조를 잘 하여 장군을 만들었습니다. 사람은 말대로 되는 것입니다. 잠재의식이란 플러스 암시이든, 마이너스 암시이든 자신도 모르게 수용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말대로 이루어진다는 것, 하나님께서 우리의 말대로 이루신다는 것은 무한히 감사한 일입니다. 그 중에도 특히 우리의 죄를 사해달라고 말하면 반드시 사하신다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죄의 은총 때문에 우리가 자유함을 얻고 평안 가운데 살고 있는 것입니다. 
  
잠언 18:21 “죽고 사는 것은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라고 합니다. 혀의 열매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하든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 부정적으로 말하면 부정적인 열매를 얻고, 긍정적으로 말하면 긍정적인 열매를 얻습니다. 그리고 회개하고 사죄를 구하면 죄를 사하는 은혜를 주셔서 죄가 사하게 이루십니다. 


결론 

가수의 인생은 히트곡대로 된다는 연구가 있습니다. 히트곡은 적어도 5,000번은 불러야 하는데 부르다 보면 자기 암시에 빠져 그렇게 될 확률이 크다는 것입니다. ‘노랫말 연구회’의 발표한 내용에 보면 슬픈 노래, 비관적 내용의 가사를 부르는 가수는 끝이 안 좋다는 것입니다. 남인수씨는 1962년 ‘눈 감아 드리오리’라는 노래를 마지막으로 41세에 눈을 감았습니다. 이난영씨는 ‘목포의 눈물’의 가사처럼 슬픈 인생을 살다가 가슴앓이로 49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차중락씨는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을 부르고 1968년 가을 29세의 나이로 낙엽 따라 가버렸습니다. 김정호씨의 ‘님’이란 노래의 가사 내용은 “간다 간다 나는 간다”라고했는데 33세에 갔습니다. 배호씨는 ‘0시의 이별,’ ‘마지막 잎새’를 부르고 29세에 죽었습니다. 반면에 좋은 가사를 가진 노래를 부른 가수는 잘 되었습니다. 남진씨는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를 불렀는데 지금도 그림 같은 집에서 장로가 되어 살고 있고, 송대관씨는 “쨍하고 해 뜰 날”을 부르더니 아직도 쨍하고 해가 뜨고 있습니다. 말대로 이루어지는 이유는 말의 힘 때문입니다.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말대로 용서하시고 꿈을 이루어 주십니다. 우리의 말을 항상 조심합시다. 항상 긍정적인 말, 믿음의 말, 감사의 말, 기쁨의 말, 용기의 말, 칭찬의 말을 많이 합시다. 우리의 모든 말은 우리 입에서 나온 그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의 말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은혜 가운데 풍성한 삶을 사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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