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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 이렇게 영광스러울 수가! (엡 1: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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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이렇게 영광스러울 수가! (엡 1:22-23)

:22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시는 은혜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안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영어가 안 되는 사람이 미국인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역시나 영어로 하는 설교를 전혀 못 알아듣겠더랍니다. 더욱 당황스러운 것은 사람들이 설교를 들으면서 웃는데 왜 웃는지 모르겠더랍니다. 남들은 웃는데 멀뚱히 있으려니 이만 저만 고역이 아니더랍니다. 그런데 저 쪽에 한국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같이 막 웃더랍니다. 예배 후, “설교 시간에 무슨 이야기였기에 그렇게 웃었느냐?”고 물었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하는 말이 “사실 나도 무슨 이야기인지 모른다.”고 하더랍니다. 그냥 옆의 사람이 웃으면 따라서 웃는다고 하더랍니다.

이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은 이래 웃으나 저래 웃으나 웃으면 행복해 진다고 말합니다. 많이 웃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저는 성도들이 설교를 들으면서 알아들으나 못 알아들으나 ‘아멘’하시면 은혜가 되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요즘처럼 교리 설교는 좀 딱딱하고, 어떤 분에게는 머리가 지끈거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틀림이 없는 성경의 진리입니다. 성경 그 자체로의 진리입니다. 그러니 ‘아멘’하셔도 됩니다. 모르고 웃어도 웃는 사람은 행복해집니다. 말씀이 진리이기에 ‘아멘’하면 진짜로 행복한 사람이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능력에 대하여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예수님께 역사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을 하늘에서 하나님의 오른 편에 앉히셨습니다. 예수님을 모든 영적 세력들 위에 뛰어나게 하셨습니다. 만물을 예수님의 발아래에 복종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이 가장 탁월하고 놀라우신 예수님을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습니다.  

I. 머리  

22절 후반절 말씀입니다.
:22b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하나님의 능력은 예수님을 교회에게 머리로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교회의 머리로 주셨고, 교회는 예수님을 머리로 받았습니다. 머리를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머리가 생겼습니다. 여기에서 머리[kefalh/켑할레]는 우리의 몸에 있는 머리를 가리킵니다. 비유적으로 머리는 주인, 남편, 으뜸이 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1.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교회에게 머리로 주셨습니다.
머리 어깨 무릎 발 무릎 발~ 머리 어깨 무릎 발 무릎 발~ 
머리 어깨 발 무릎 발~ 머리 어깨 무릎 귀 코 귀 

‘무릎 발’이 ‘발 무릎’이 될 수도 있습니다. ‘무릎 발’이 ‘코 귀’또는 ‘귀 코’도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머리의 위치가 달라질 수는 없습니다. 머리가 달라지면 전혀 다른 것이 됩니다.

교회의 머리가 예수님이라는 것은 교회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말합니다.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이십니다. 교회의 머리가 예수님이시라는 것은 교회가 누구에게 속해 있어야 하는가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교회는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주인으로 분명하게 알고, 예수님께 확실하게 순종하는 사람들입니다.  

머리는 다른 여러 지체들 중에 단지 하나의 지체가 아닙니다. 머리가 없는 몸을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머리는 모든 다른 지체들을 결정하는 첫째로 중요한 지체입니다.

골로새서 1장 18절 말씀입니다.
(골 1:18a)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예수님을 교회의 머리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교회를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머리가 몸을 결정합니다. 머리에서 좋을 일을 생각하는 사람은 좋은 사람입니다. 머리에서 나쁜 일을 생각하는 사람은 나쁜 사람입니다. 머리가 곧 그 사람입니다.


2. 예수님은 교회 그 자체입니다.

팔이나 다리와 같은 어떤 지체에 장애가 있으면 불편합니다. 그러나 머리가 없으면 존재를 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심장이 뛰고 붉은 피가 돌고 있어도 머리가 활동을 하지 않으면 죽은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머리는 그 사람 전체입니다. 

사울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하여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였습니다. 사울은 대제사장에게 가서 공문을 청하였습니다. 그 공문의 내용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울은 그 공문을 가지고 길을 가다가 다메섹이라는 도시에 가까이 이르렀습니다. 그 때,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었습니다. 사울은 땅에 엎드러졌습니다.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사울은 하늘의 소리에 “주여 누구시나이까?”라고 물었습니다. 하늘의 소리는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고 하였습니다.

언제 사울이 예수님을 박해하였던가요? 아마도 사울은 예수님의 얼굴을 본 적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난 일도 없는 예수님을 사울이 어떻게 박해할 수 있었습니까? 사울이 박해한 것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박해하는 것이 곧 자신을 박해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교회 그 자체이십니다.

머리이신 예수님과 몸인 교회는 다르지 않습니다. 머리와 몸은 언제나 함께 하나의 살아있는 존재입니다. ‘머리 따로 몸 따로’를 결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교회 그 자체입니다.  

예수님이 교회의 머리라는 것은 또 무엇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골로새서 2장 19절 후반절 말씀입니다.
(골 2:19b)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받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므로 자라느니라.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온 몸은 머리이신 그리스도로부터 각 마디와 힘줄을 통하여 영양을 공급받고, 서로 연결되어서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시는 대로 자라나는 것입니다.”[새번역]고. 머리는 온 몸을 조절하고 통제하고 다스립니다.


3. 예수님은 교회를 통치하십니다.

우리의 몸은 우리가 미쳐 생각도 하기 전에 작동합니다. 심장을 빨리 뛰게 하는가 하면 천천히 뛰게도 합니다. 촉진과 억제를 통하여 몸을 정상적으로 유지합니다. 이것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병든 몸입니다. 몸은 머리의 통제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주권을 인정하여 그리스도께 복종하여야 합니다.

어느 곳에 백 명 쯤 모이는 교회에 새로 목사님이 부임했습니다. 목사님을 격려하기 위하여 할머니 권사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한 분이 천 가지의 소리를 들으시려면 얼마나 피곤하겠습니까? 목사님이 천 가지 소리에 잘 견디시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이 그 권사님께 이렇게 이야기했답니다.
“백 명의 이야기를 목사 한 사람이 듣는 것이 쉽겠습니까? 아니면 백 명이 목사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쉽겠습니까? 백 명이 목사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백 명이 이 말 저 말 하는 것을 목사가 혼자서 다 들어 줄 수 없습니다. 목사가 교인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습니다. 목사에게 모든 교인들의 말을 다 들어 달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백 명이 목사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 좋으련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교인이 목사의 이야기에 무조건 순종하는 시대도 아닌 듯합니다. 교인에게 목사의 말을 무조건 들으라고 해도 문제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여야 하겠습니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교인도 목사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자기 말을 들으라고 서로 주장하면 싸움이 납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께 순종하는 사람들입니다.

교회의 머리는 오직 한 분 예수님이십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다스림과 통치를 받아야 합니다. 진정으로 예수님을 머리로 인정하고 다스림을 받는 교회만이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가 이런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이어지는 말씀은 머리에 대한 몸에 관한 것입니다. 머리는 그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머리가 아무리 중요하더라도 몸이 없는 머리를 상상하는 것은 끔찍합니다. 이번에는 몸입니다.
  

II. 몸  

23절 전반절 말씀입니다.
:23a교회는 그의 몸이니 

여기에서 ‘몸[sw'ma/소마]’은 ‘신체’, 사람이나 동물의 몸, 식물의 줄기와 전체를 가리킵니다. 비유적으로 크거나 작은 단체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또, 그림자와 구별되는 그림자가 생기게 하는 것으로 실체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교회는 누구의 몸입니까?

1.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이것은 교회의 정체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의 몸, 다른 그 어떤 사람의 몸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의 몸입니다. 물론 이 교회는 건물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머리가 비유인 것처럼 몸도 비유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이 머리이신 사람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성도의 공동체입니다. 머리는 예수님인데 몸은 다른 사람의 몸이라면 이것도 큰일입니다. 그런데 많은 교회가 머리는 분명히 예수님이라고 하는데 몸은 전혀 다른 사람의 몸처럼 움직이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이 시대의 아픔입니다. 머리가 예수님이면 몸도 예수님의 몸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몸인 교회는 머리이신 예수님과 어떤 관계입니까?

에베소서 5장 23절 말씀입니다.
(엡 5:23)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성경은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머리와 몸의 관계를 비유로 사용하였습니다. 머리는 몸을 대표하고 몸은 머리를 보호하는 관계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2. 교회는 예수님의 보호를 받습니다.

몸은 머리의 통치권을 완전히 인정하고 받아들입니다. 그런 몸을 머리가 보호합니다. 몸과 머리의 관계는 단순히 명령하고 복종하는 관계로 설명하기는 부족합니다. 몸과 머리는 유기체입니다. 머리는 몸을 보살피고 인도하고, 일하게 하고 쉽게도 합니다. 몸이 머리의 지시와 보호를 받음으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우리의 심장이 뛰고 숨을 쉬는 것은 인체의 신비입니다. 눈앞에 무엇이 갑자기 나타나면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눈을 깜빡이는 것도 신비입니다. 위험한 것이 날아오면 생각하고 계산하기 전에 먼저 몸이 반응합니다. 우리의 몸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그 어떤 컴퓨터보다도 더 빨리 머리에서 작용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고 고백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이 대답을 들으시고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고 칭찬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또 예수님은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교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교회를 죽음에서 보호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교회는 음부의 권세, 즉 죽음도 어찌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죽어도 사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영생을 얻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를 안타깝게 하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종종 예수님의 보호하심 밖에 머물러 있습니다. 머리에서 오는 신호를 몸이 반응하기만 하면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머리이신 예수님께로부터 오는 신호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는 듯합니다. 오늘의 교회는 자주 감기에 걸리는 허약한 몸과 같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감기는 건강의 이상을 알아차리게 하는 경보라고 합니다. 그래서 교회의 건강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본질적으로 교회는 예수님의 보호 속에 있습니다. 

몸은 여러 가지 기능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가장 대표적인 것은 드러나 보이는 것입니다. 교회를 예수님의 몸이라고 할 때 그 기능을 설명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에베소서 4장 16절 말씀입니다.
(엡 4: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몸은 여러 지체들이 각 지체의 분량대로 활동하여 자랍니다. 그리고 더 굳게 세워집니다.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것은 머릿속에 있는 생각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보는 것은 생각이 만들어낸 몸의 행동입니다.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것은 생각이 아니라 행동입니다.


3. 교회는 예수님을 드러냅니다.

교회는 이 세상에 예수님을 보여 주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통하여 예수님을 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행동을 통하여 예수님을 드러내 보여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이 세상에 있는 교회의 역할입니다. 예수님의 몸인 교회는 예수님을 세상에 드러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미 생명을 다한 것입니다. 우리의 주변에서 우리를 안타깝게 하는 소식들은 바로 맛 잃은 소금들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몸으로 예수님을 드러내는 교회이길 원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예수님의 몸인 우리를 가득 채우고 있어야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몸인 교회를 충만하게 채우는 것은 무엇입니까?
  

III. 충만  

오늘 말씀은 교회를 예수님의 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같은 맥락에서 교회를 충만함이라고 합니다. 

23절 후반절 말씀입니다.
:23b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교회는 그의 몸인 것처럼 교회는 그로 충만함입니다. 여기에서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는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교회는 예수님으로 충만한 사람들입니다. 

1. 교회는 예수님의 충만함입니다. 

‘충만[plhvrwma/플레로마]’은 가득 채워진 것을 가리킵니다. 충만은 가득 차서 흘러넘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이시며 몸인 교회 안에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교회는 예수님으로 가득 차 예수님이 흘러서 넘쳐야 합니다.

우리의 몸은 어디를 찔러도 붉은 피가 나옵니다. 바늘로 찔러도 피가 나오지 않으며 몸이 굳은 것입니다. 채하면 바늘로 따도 피나 나지 않습니다. 굳은 몸을 풀어야 합니다. 

교회가 예수님으로 충만한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전도’는 예수님의 이름을 전하는 것입니다. ‘교육’은 예수님의 삶을 배우는 것입니다. ‘봉사’는 예수님의 향기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하는 일은 그 어떤 일이라도 예수님과 연관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과 관련이 없는 일은 잘한다면 그것은 암 세포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예수님을 드러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예수님으로 충만한 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몸으로 예수님으로 충만하여 누구를 닮아야 합니까? 물론 예수님을 닮아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들이 닮아야 할 기준을 달리 표현하기도 합니다.

마태복음 5장 48절 말씀입니다.
(마 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예수님의 몸인 교회는 예수님으로 충만하여 예수님을 깊이 닮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하나님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하여 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처럼 온전하여 지기를 원하십니다.


2. 교회는 하나님을 닮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닮아야 한다는 말과 하나님을 닮아야 한다는 말은 다른 말이 아닙니다. 다만 예수님을 닮아야 한다는 말에는 보다 인간적인 면을 강조하는 듯합니다. 보다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인간을 강조하는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닮는 말은 인간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영적인 면도 강조하는 것입니다. 본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심을 받은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온전하심에 이르기를 갈망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은혜로 예수님의 몸인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는 여전히 사람의 몸을 가지고 있는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예수님으로 충만하여 하나님을 닮아갈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도전할 수 있겠습니까?

에베소서 5장 18절 말씀입니다.
(엡 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으로 온전하여 지는 길 역시 성령님의 도우심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으로 입니다.


3. 교회는 성령 충만을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님께서는 스스로 원하시는 데로 일하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마음대로 성령의 역사를 조정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성령님께서 사모하고 간구하며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함께 하시기 때문에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바로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삼손이 머리카락을 밀린 것과도 같습니다. 머리카락이 밀린 삼손은 두 눈이 뽑혀서 사로 잡혔습니다. 삼손의 머리카락이 다시 자랐던 것처럼 기도 운동이 일어나야 한국교회는 희망이 있습니다. 머리와 몸에 같은 피가 도는 것처럼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기도가 돌아야 교회가 살 수 있습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니키 검불은 부흥의 본질로 ‘날지 않는 독수리’를 말합니다.

독수리는 날지 않습니다. / 날아간다는 것이 날개를 쳐서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겨가는 것을 의미한다면 말입니다. / 다른 새들은 그렇게 날아가지만 독수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 독수리는 선천적으로 바람의 흐름을 구별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 독수리는 적당한 바람이 불 때까지 다른 장소로 가지 않습니다. / 적당한 바람이 불면, 단지 공중에 떠서 바람에 몸을 맡길 뿐입니다. / 독수리는 날개를 칠 필요가 없습니다. / 독수리는 같은 자리에 날개를 고정시킬 수 있습니다. / 독수리가 하는 일이란 바람을 타는 것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바람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으로 일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본질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능력에 우리를 맡겨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교회입니다.  

우리는 머리도 예수님이고, 가득 채운 것도 예수님이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회복하기 까지 성령 충만을 사모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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