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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느 때 인가? (대하 5: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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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때 인가? (대하 5:11-14)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였다. 이 성전이 완성되었을 때 성전에는 구름이 가득하였다. 대하5:14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하나님의 전에 가득함이었더라.” 솔로몬 성전만이 아니고 광야 시대에 만들어진 모세의 회막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였다. 

출40:34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그러니까 왕국시대에 지은 돌과 나무로 된 성전이나 모세 시대에 제작된 회막이나 하나님의 영광이 똑같이 임하였음을 볼 수 있다. 구름으로 뒤덮인 심볼로 그려진 하나님의 영광, 충만한 그 영광이 우리에게도 나타나야 한다. 왜냐하면 복음의 시대에는 우리 믿는 자들이 교회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솔로몬 성전에 충만한 영광의 구름이 교회 위에, 아니 우리 믿는 백성들에게 나타나겠는가? 

대하5:11 “이 때에”란 말이 나온다. 

대하5:13 “그 때에”란 말이 나온다. 이는 여호와의 전에 구름이 가득하게 되는 때를 의미한다. 그 때는 어느 때 인가?
 

1. 언약궤를 모셔드렸을 때 (대하5:7)

대하5:7 “제사장들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그 처소로 메어 들였으니 곧 본전 지성소 그룹들의 날개 아래라.”

언약궤는 나무 상자다. 글자 그대로 조각목으로 만든 궤다. 다만 그 나무궤를 앞세우고 간다는 것은 하나님을 앞세우고 간다는 뜻이다. 언약궤를 모신다는 것은 하나님을 모신다는 뜻이다. 특별히 대하5:10 “궤 안에는 두 돌판 외에 아무것도 없으니...”라고 하였다. 즉 하나님의 뜻이 담긴 계명의 상자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언약궤를 모실 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성전을 이루고 있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영광의 카보드, 영광의 구름의 무게를 느끼려면 말씀을 모셔드려야 한다. 이 시대 주의 지체된 성도들이 말씀을 모시지 않고는 영광의 빛을 볼 수 없다. 언약궤를 모셔드릴 때 구름이 가득한 것처럼 우리 성도들은 복음의 시대에 말씀이신 하나님, 말씀이 육신이 되신 아들 예수님, 말씀을 계시하시는 보혜사 성령님의 영광을 체험하기 위해 말씀을 겸손히 받아드려야 한다. 말씀이 내 심령에 임할 때 영광이 넘치게 된다. 말씀이 내 속에서 꿈틀거리며 역사하면 영광의 빛이 내 얼굴에 나타나게 된다. 
  

2. 스스로 정결하게 하고 나올 때 (대하5:11)

스스로를 정결하게 하는 것은 중요하다. 언약궤를 모실 때 대하5:6을 보면 “이스라엘 회중이 궤 앞에서 양과 소로 제사를” 드렸다. 그 때 그 수가 많아 기록할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었다. 얼마나 많은 재물이 드려졌는지 셀 수도 없는 재물을 번제로 드릴려면 제사장들은 부지런히 일을 해야 했다. 그리고 이 일에 참여하는 제사장들은 더욱 스스로를 정결하게 해야 했다.

정결은 중요한 일이다. 하나님의 속성이 거룩이기에 제사장은 거룩해야 한다. 레위기에 나오는 정결법은 먹는 것까지도 세밀하게 구별을 한다. 부정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정결례가 제사장들의 권위와 관련된 것이라면 우리의 권위도 마찬가지다. 신자가 거룩할 때 죄에서부터 자유로울 때 영광의 구름이 가득하게 된다. 우리는 음식으로, 의복으로, 절기로, 규례로, 날짜를 지켜 정결케 되는 것이 아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예수, 독생자의 영광을 보이신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예수의 피로써 정결케 된다. 

히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히9:13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히9:14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예수의 피, 그 피로 우리는 정결케 된다. 죄의 허물로 더러워진 우리들이지만 보혈을 지날 때, 아니 보혈이 나를 덮을 때 나는 정결케 된다. 보혈의 능력이 믿어지고 정결함을 느낄 때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이 나를 덮을 수 있다. 내가 추할 때가 아니다. 나의 부정한 것들이 다 씻겨질 때 구름의 영광이 내려오게 된다. 
  

3. 여호와를 찬송하며 감사할 때 (대하5:13)

제단 동편에 노래하는 레위인들과 제금, 비파, 수금을 잡고 또 나팔 부는 제사장 120명이 일제히 소리를 낸다. 나팔 불고 제금치고 모든 악기를 울리며 여호와를 찬송한다. 그 찬송의 내용은 하나님의 본성을 높이는 것이다.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되 선하시도다 그의 자비하심이 영원히 있도다.” 그 때에, 찬송하며 감사할 때 여호와의 전에 구름이 가득해졌다.

찬송은 기독교의 특색이다. 즐거움으로 노래하는 사람들이 크리스챤의 특색이다. 인생이 왜 곤고하지 않는가? 왜 인생이 힘들고 고단하지 않는가? 일이 많고 사역이 어렵고 모든 환경은 가시처럼 찌른다. 그러나 찬송하고 감사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의 영성 색깔이다. 크리스챤이 살아있다는 색깔이다. 복음의 시대에 찬송하고 감사하며 기뻐하는 교회가 영광의 임재를 맛본다. 즐거워하는 성도는 진리를 알므로 복음이신 예수를 알므로 찬송하는 것이다. 삶이 쉬워서 편안해서가 아니다. 헬마라는 분은 「목양지」라는 책에서 “진리는 웃음과 어울린다. 진리는 즐겁기 때문이다. 진리는 적수들과 어울려 놀 수도 있다. 진리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바울이 말한 “주 안에서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는 것은 당연한 명령이다. 찬송하며 감사하면 임재의 하나님을 느끼고 볼 수 있게 된다. 바울이 빌립보 감옥에서 매를 맞고 옷을 찢고 누명을 쓰고 갇혔다. 그의 한 일은 귀신들과 아주머니를 고쳐준 것 외에 잘못한 일이 없다. 그런데 고소를 당했다. 

하지만 그 한 밤 중에 옥에 갇혀 있는 바울은 하나님을 찬미하였다. 고난의 신음 소리 대신 찬송을 올려 드렸다. 원망의 탄식 대신 노래를 올려 드렸다. 그때 옥터가 흔들렸다. 옥문이 열어졌다. 자물쇠와 착고, 사슬이 풀어졌다. 지키던 간수는 놀라 자결하려다가 구도자가 되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이 임한 모습이다. 그 영광이라는 말은 ‘카보드’ 무게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는 무게가 느껴졌다. 영광의 무게를 느끼면 우리는 달라진다. 우리를 억누르던 것들이 떠나간다. 어둠의 권세가 떠나가고 사탄이 쫓겨가고 막힌 것이 열리는 것을 보게 된다. 그것이 임재의 현현(顯現)이다. 

영적 전쟁이란 책을 쓴 딘 셔먼 목사님은 1970년 파퓨아 뉴기니의 포트몬레스비에 있는 마루 바닥에 누워 있었다. 응답을 위해 7일 동안 금식하며 기도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실제로 나를 괴롭히는 무엇인가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교회는 차고 넘쳤으나 죄의 사슬에 묶여 있는 사람이 태반이었다. 그 마루에 누워 기도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생각해 보지 못한 말씀이었다.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 도시를 지배해 온 어두움의 세력을 이기는 비결은 찬양이다. 이 어둠의 세력은 지금껏 도전을 받아본 적이 없다. 그 후 딘 셔먼과 예수전도단 팀은 찬양을 올려드렸다. 

마침내 변화가 일어나고 3개월간 열매 없던 전도에서 사람들이 구원을 얻고 죄를 벗어던지고 성령 충만의 일이 나타났다. 회개가 이어져 집회에 5천명이 참석하게 되고 태평양에서 매주 세례를 주는 일을 3년이나 계속하였다.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눈 먼 자가 눈을 뜨게 되었다. 이 이야기처럼 찬양이 영적 무기요 하나님의 임재의 통로다. 

여기 120명의 제사장들을 보라. 대하5:14 “제사장들이 그 구름으로 말미암아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라고 하였다. 120명이 노래를 부르는 자와 같이 서 있다가, 찬송하고 감사하다가 서 있을 수 없었다. 무슨 의미인가? 영광의 구름으로 가득한 그 때에는 에봇 옷을 입은 제사장들이 그 영광의 크기에 감히 서 있지 못하고 쓰러진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해지면 그 크기에 따라 엎드러질 수 밖에 없다. 

사도 요한은 부활의 주님 앞에 설 때 계1:17을 보면 죽은 자처럼 엎드려졌다. 하나님의 임재의 무게를 느낄 때 누가 서 있을 수 있겠는가? 말3:1~2 “그의 임하는 날을 누가 능히 당하며 그가 나타나는 때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런데 어찌 사탄과 어둠이 찬송할 때 거기 성소에 머물러 있겠는가? 사슬은 벗겨지고 자유가 임하는 것이다.  

우리는 신앙을 돌이켜 살아있는 생생한 말씀을 모셔드리자. 주의 보혈로 정결케 되자. 하나님을 찬송하고 그 기쁨의 즐거움으로 감사하자. 바로 그 때, 그렇게 할 수 있을 때 우리 믿는 자 한 사람 한 사람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이 가득한 체험을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게 된다.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 그 카보드의 무게로 인해 바로 그 때 우리의 삶의 형식과 격은 깨어져 나가고 진정한 영의 사람으로 변화된다. 참 생명에 접붙임을 받은 사람으로, 하늘의 사람으로 살아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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