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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거대한 장애물 앞에서(다윗의 생애2) (삼상 17:3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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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장애물 앞에서(다윗의 생애2) (삼상 17:31-40)
 
하나님은 자신의 일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에게 기회를 주십니다

다윗은 숨겨진 인물이었습니다. 아버지도 다윗이 있는지 잘 몰랐을 정도로 멀리 떨어져있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다윗을 택하셨습니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 되도록 사무엘 선지자로 하여금 기름을 붓게 하셨습니다. 그는 일개 목동이었지만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본문에서 블레셋과 이스라엘의 전쟁이 있었을 때 아버지는 아들 셋이 전쟁터에 나가있어서 다윗을 부릅니다. 그리고는 먹을 것을 가져다가 그들을 위로하라고 다윗을 심부름꾼으로 보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아무것도 아닌 이 자리에서 다윗이라는 감추어진 인물을 공개적인 인물로 우뚝 세워주시는 역사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일을 소중히 하는 사람에게 기회를 주십니다. 인생이란 그렇습니다. 자기에게 맡겨진 일을 기쁨으로 감당하고 열심히 감당하는 사람에게 기회가 주어집니다. 다윗이 하는 일은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양을 사랑하고 양에게 꼴을 먹이는 것, 짐승들이 다가올 때면 그 짐승들을 내쫒아서 양을 보존하는 일이 다윗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일로 인해서 하나님께서는 다윗이라는 이름을 공개적인 자리에 드러나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골리앗의 모욕에도 아무런 반응을 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생애를 축복하시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새롭게 인식되는 자리로 초청하십니다. 그런데 그 곳은 아주 위험한 자리였습니다. 자기의 목숨을 걸어야할 만큼 위태로운 순간의 자리였습니다. 왜냐하면 블레셋과 이스라엘 군대가 서로 대적하며 직접 대치하고 있는 싸움터였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지금 스무 살도 안 된 젊은 소년, 청년입니다. 그가 전쟁터에 갔을 때 백성들은 침묵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없는 사람들처럼 보였습니다. 다윗은 자기의 백성이 곧 패배할 운명에 놓인 것을 직감하게 되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욕하는데도 불구하고 꿀 먹은 벙어리처럼 공격할 준비조차 하지 않고 꼼짝 못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블레셋 사람들 맨 앞에 골리앗이라는 거대한 장수가 서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윗도 그것을 함께 보게 됐습니다. 

어린 아이들에게 물어보면 골리앗이 누군지를 잘 압니다. 그런데 다윗은 잘 모릅니다. 이 세대가 큰 것을 좋아하고 많은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다보니 골리앗이라는 이름은 곳곳에 붙어있습니다. 크면 다 골리앗입니다. 그의 키는 사본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2미터가 조금 넘거나 3미터에 가깝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어찌됐든 큰 장신의 장수였습니다. 머리에는 놋 투구를 썼습니다. 몸에는 갑옷을 입었습니다. 그 갑옷의 무게가 약 60kg이나 됐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8kg의 청동으로 만든 창을 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앞에는 멀리서 활을 쏘면 그것을 막으려고 방패를 든 사람이 딱 가로 막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이 아주 장대했습니다. 적군에게도 장대했고 블레셋 백성에게도 장대했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장대했습니다. 아주 장관이었을 것입니다. 골리앗은 바로 이스라엘 군대 앞에 나아가서 40일 동안이나 이스라엘 군대를 모욕하고 있었습니다. 

사울 왕은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는 누가 있었을까요? 거기에는 사울 왕이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목 하나가 더 컸다고 했습니다. 골리앗만큼 키가 크지는 않았지만 지도자인 사울 또한 아주 위풍당당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그 사울 왕이 골리앗이라는 사람 앞에서 아주 초라해졌습니다. 겁을 먹고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것은 지도자로서 가질 수 없는 아주 부끄러운 모습이었습니다. 지도자로서 자격미달이었습니다. 사무엘상 17장 11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울과 온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의 이 말을 듣고 놀라 크게 두려워하니라.” (사무엘상 17:11)

블레셋 사람이 큰 소리로 외치는 소리를 듣자마자 사울이 놀라자빠졌습니다. 여기 보면 사울과 온 이스라엘이 함께 두려워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도자가 두려워하면 그 공동체는 함께 두려워하게 되어있습니다. 아버지가 두려워하면 온 가족이 전부 두려워하게 되어있습니다. 

가장이 왜 중요합니까? 가장이 용기를 잃어버리면 자녀들이 용기를 잃어버립니다. 아내도 용기를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지도자가 된다는 것은 참으로 엄한 책임을 갖는 것입니다. 지도자의 목표는 영광과 존귀를 누리는데 있지 않습니다. 공동체가 힘들고 어려울 때 먼저 도전하고 막힌 담을 뚫어보겠다고 결심하는 사람들이 지도자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사울왕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겁쟁이였습니다. 이미 그의 마음이 패배주의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우리는 사울의 몰락이 훨씬 일찍부터 시작됐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는 마음으로부터 겁먹은 사람, 백성들이 고통을 당할 때 그 속에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 백성들의 아픔을 자기가 이겨내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때부터 서서히 그의 삶이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한 일이 이것이었습니다. 포상금을 내걸었습니다. “나가서 싸워 이긴 자에게 많은 재물을 주겠다! 내 딸을 맞이해서 부마로 삼겠다! 뿐만 아니라 세금을 면제하고 그 집을 자유하게 하겠다!” 대단한 포상금을 걸었습니다. 그런데도 자원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이란 무서운 것입니다. 두려움이란 총체적으로 우리를 깨뜨려버립니다.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그 사람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그 앞에서 도망하며” (사무엘상 17:24)

이번에는 블레셋 사람을 보고서 놀랐습니다. 총체적으로 놀랐습니다. 보아도 두렵고 들어도 두려웠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인생이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한발자국만 나아가면 미지의 세계가 펼쳐집니다. 그러나 그것을 두려워하기만 하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마음으로부터 항복하게 됩니다. 패배주의적 사고 속에서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전투하면서 때로 낙심할 수 있습니다. 인생에 성공만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낙심하고 염려하고 근심하게 됩니다. 그런데 때로는 전쟁터에 나가보기도 전에 먼저 머릿속에 상상력을 갖고 낙심하면서 전투하기를 포기하는 우리들의 모습도 있습니다. 시도조차 해보지 않고 부딪쳐보지도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랬습니다. 그 맨 앞에 사울 왕이 있었습니다. 현실의 전쟁에서 진 것이 아니라 이미 상상의 세계에서 패배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꿈과 비전을 주셨는데 안 된다는 것입니다. 못한다는 것입니다. 내게는 합당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아도 두렵고 들어도 두렵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참된 모습이 아닙니다. 

다윗의 마음속에는 거룩한 분노가 있었습니다

바로 이때 하나님의 사람 다윗이 등장하게 됩니다. 그의 마음속에 낙심과 패배의 옷이 왜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다윗은 그것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그는 마음속에 분연히 일어나고 있는 힘을 붙잡았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마음속에 생겨난 거룩한 분노였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게으름이 반복되면 자신에 대해서 의연하게 분노해야 합니다. “이놈아! 내가 언제까지 게으르겠느냐?!” 우리가 거짓과 탐욕 속에 있다면 자신을 향해서 분노하셔야 합니다. “내가 언제까지 그 어둠속에서 삶을 헛되이 낭비하겠는가?!” 환경이 나를 끊임없이 막아서고 있다면 환경을 향해서 선포해야 합니다. “환경아! 네가 나를 억누르지 못 할 거다! 네가 나를 지배하지 못 할 거다! 나는 이것을 넘어설 거다!” 마음속에 이러한 의로운 분노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시대를 변화시키고 역사를 바꿉니다. 이것이 공동체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축복을 가져다줍니다. 다윗은 젊은 나이에 마음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가 있었습니다.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 누구이기에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 (사무엘상 17:26下 )

저 이방사람들이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는 것을 그대로 놔둘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민족의 자긍심, 자기의 자존감이 무너지는 것을 견뎌낼 수 없다는 애통함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우리도 그런 경험이 있지 않습니까?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 스스로 애통해하고, 시대의 잘못이나 공동체의 잘못에 대해서 애통해하던 적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들이 다 사라졌습니다. 지속시켜야 하는데 모두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거룩한 분노를 가졌지만 너무나 많은 걸림돌을 만나면서 너 혼자 뭐하려 하느냐고 질문하기 시작합니다. 

다윗도 그랬습니다. 그의 맏형인 엘리압이 전쟁터에 와서 이것저것 참견하는 다윗을 보면서 화를 냈습니다. “아니, 전쟁이 무슨 너희들 장난감 가지고 노는 곳인 줄 아느냐?” 야단을 칩니다. 

“큰형 엘리압이 다윗이 사람들에게 하는 말을 들은지라 그가 다윗에게 노를 발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리로 내려왔느냐 들에 있는 양들을 누구에게 맡겼느냐 나는 네 교만과 네 마음의 완악함을 아노니 네가 전쟁을 구경하러 왔도다.” (사무엘상 17:28)

우리는 목표를 세우고 용기를 갖고 하다가도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야, 그거 안 돼!” 라고 말하면 갑자기 실망합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야, 네 꼬락서니가 그게 뭐냐? 네가 무엇을 할 수 있느냐?” 라고 말하면 아들은 큰 포부를 가졌다가도 포기하기 시작합니다. 엄마가 딸에게 말합니다. “너는 내가 봐도 괜찮은 데가 없어.” 그 말 한마디에 억장이 무너지는 상처를 받습니다. 나를 잘 아는 사람이 내 능력을 의심하고 어떤 일도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문제를 제기하면, 사람은 누구나 철썩 주저앉고 맙니다. 

예수님도 그러하셨습니다.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향해서 비난을 퍼부을 때 선지자는 고향에서 대접받기 힘들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다윗은 이것을 넘어갔습니다. 목표가 명백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하는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그래서 사울 왕 앞까지 가게 됐습니다. 

흉내 내는 인생은 성공할 수 없습니다

사울 왕이 보기에 이 젊은 소년 다윗은 가상하기는 한데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다윗을 향해서 이렇게 충고합니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울 수 없으리니 너는 소년이요 그는 어려서부터 용사임이니라.” (사무엘상 17:33)

사울은 다윗을 향하여 “내가 널 보니 너는 소년이 아니냐? 저 사람은 어려서부터 싸움꾼으로 이름난 용사다. 너와는 비교할 수가 없는 상대란다.” 라고 말했습니다. 보통사람 같으면 “맞아요. 내 모습이 이게 뭐란 말입니까?” 하고 물러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렇지 아니했습니다. 다윗에게는 그 젊은 나이에 기백과 용기가 있었습니다. 자기목표를 향한 시도가 있었습니다. 다윗은 결국 골리앗과 투쟁할 수 있는 사람이 자기 혼자인 것을 절감합니다. 그래서 말하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골리앗 별거 아니에요! 저것은 껍데기에 불과해요! 하나님이 더 크신 분이에요! 저 큰 골리앗은 애기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외모를 보시는 분이 아니라 중심을 보시는 분이에요!” 다윗은 가슴으로부터 소리쳤을 것입니다. 그래서 말합니다. “내가 나가서 싸우겠습니다.” 

그러자 사울 왕이 기특하게 생각해서 “정말 싸울 테냐? 그럼 내 투구를 써보아라.” 하고는 놋 투구를 씌워줬습니다. “내 갑옷을 한번 입어봐라. 칼도 한번 차봐라.” 그래서 다윗이 그 장비들을 입었습니다. 그런데 본래 사울은 남들보다 목 하나가 큰 사람이었습니다. 맞지 않았습니다. 헐렁했습니다. 갑옷을 입고 칼을 움직이려니 움직여지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 장비들을 벗었습니다. 

여기에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남의 흉내를 너무 오래내면 안됩니다. 나보다 잘하는 사람, 나보다 멋진 사람의 흉내를 조금은 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성숙이 되니까요. 그러나 계속 흉내만 내면 인생을 성공할 수 없습니다. 인생을 이겨나갈 수 없습니다. 다윗은 자신에게 불편한 것, 자기의 것이 아닌 것을 훌훌 던졌습니다.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잘 하는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시냇가에 가서 매끈매끈한 돌 다섯 개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물매를 갖고 골리앗 앞에 나아갔습니다. 

실패를 두려워 말고 계속해서 도전하십시오

저는 이 본문을 읽다가 왜 다섯 개를 가지고 갔을까 궁금해졌습니다. 다윗이 던져서 첫 번째에 딱 맞을 거라고 생각했다면 하나만 가지고 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섯 개를 가지고 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그는 처음에 들판에서 짐승을 쫒아내려고 이것을 돌렸을 것입니다. 제일 처음에는 안 맞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보니까 30%정도 맞았습니다. 어느 날은 보니까 50%, 60%, 70%, 80%정도 맞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결전의 날이 찾아왔습니다. 그에게는 무슨 준비가 되어있었을까요? 몇 번은 실패해도 괜찮다는 준비가 되어있었습니다. 네 번 실패해도 다섯 번째에 또 던지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한번만 실패하면 이렇게 외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 이게 뭐에요! 이게!” 하나님께 짜증을 내고 다른 사람에게 짜증을 냅니다. 그러면서 우리 인생의 수많은 꿈들을 땅속에 묻어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다윗은 처음부터 준비를 했습니다. 굉장히 잘 맞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섯 개를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골리앗 앞에 섰습니다. 

그의 전투 전략은 무엇이었을까요? 골리앗을 보니까 거들먹거리는데 행동이 아주 느렸습니다. 그래서 그는 속도전을 택했습니다. 순식간에 골리앗의 이마를 향하여 물맷돌을 던졌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마에 맞았을 뿐만 아니라 이마에 박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세게 던졌는지 박혀버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골리앗은 무너졌습니다. 

하나님이 도우셔서 이것이 한 번에 끝났지만 다윗은 다음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훈련하고 있었습니다. 자기에게 익숙한 것, 열심히 준비한 것이 무엇인지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골리앗 앞에 섰던 것입니다. 그는 최선의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용기란 준비한 사람의 몫입니다. 용기란 기도하는 사람의 몫입니다. 용기란 하나님을 신뢰하고 도전하는 사람의 몫입니다. 

우리에게는 꿈과 비전이 있습니다. 이 땅에 살면서 꿈과 비전을 안 꾸어 본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한번 실패하면 낙담해버립니다. 어떨 때는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습니다. 머릿속에서 실패할 것을 예상하고 이미 패배주의 속에 넘어가버렸던 때도 참으로 많았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남은 생애가 있습니다. 진정한 용기는 어디서부터 오는 것일까요?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데에서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내가 잘하는 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십시오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사무엘상 17:36)

다윗은 고백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그는 이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용기가 생긴 것입니다. 또한 46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사무엘상 17:46)

성경은 다윗이 순간순간 하나님께 의지했고 하나님께서 전쟁의 주인인 것을 고백하면서 담대하게 나아갔던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살면서 인생의 거대한 장애물을 만납니다.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그때 우리는 혼자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누구에게도 맡길 수가 없습니다. 모든 인생이 그렇습니다. 다윗도 혼자 나아가 싸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낙심하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내 인생의 주인인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면서 나아가 싸워야 합니다. 내가 외소하고 별 볼일 없다고 낙심하여 시작부터 포기하면 인생에 주어지는 것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때 내가 잘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다시 되돌아보십시오. 내게 익숙해져있는 것이 무엇인가?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리고 하나님께서 영광 돌리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을 가슴으로 다시 생각하십시오. 많은 것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기도를 잘 합니다. 남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을 즐기는 분들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찬양을 잘합니다. 어떤 분은 남을 잘 돕는 분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돈 버는 능력을 주신 것 같다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분도 있습니다. 또한 직장에서 일을 맡으면 나는 참 잘 한다고 여기는 분도 있습니다. 내가 잘하는 것이 모두 다릅니다.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이 높임 받는 역사를 이루어나가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김지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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