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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목자의 음성 (요 10:2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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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자의 음성 (요 10:22-29)
  

이 시대를 가리켜 흔히 불확실성 시대라고 부릅니다. 정말 딱 맞는 말입니다. 내 인생이라고 큰 소리를 치지만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고, 어디로 가야 할지 갈팡질팡 할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결혼 시기가 닥치면, 이 사람과 해야 되나, 아니면 다른 사람이 있나, ... 사업을 시작하려면, 지금 해야 되나 나중에 해야 되나, 어떤 업종을 택해야 되나, 누구하고 손잡고 하나, ... 아이들은 대학 진학 시기가 다가오면 어느 대학에 가야 되나, 전공은 뭐로 하지, ... 정말 고민이 됩니다. 그렇다고 동전을 던지거나 침을 튀겨가며 살 수도 없고 ... 답답하니까 어떻게 합니까? 대충 남 하는 대로 따라 합니다. 한심한 케이스지만 너무 답답하면 점쟁이한테 찾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오늘날과 같은 문명시대를 살아도 인간이 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지식이 많아도 영적으로 무지하고 나약하기에 이렇게 어리석은 인생을 살아갑니다. 

이럴 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내 인생길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시고 인도해 주신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평안하고, 하는 일마다 승승장구하고 ... 그렇죠? 성경은 분명히 증거합니다. 예수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 바로 그런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예수님과 나의 관계를 뭐라고 비유하셨습니까? 목자와 양입니다. 성경의 배경이 되는 팔레스틴 지방에는 양들을 많이 길렀습니다. 그런데 양은 아주 특이한 동물입니다. 다른 동물들은 나름대로 자구책이 있죠. 사자는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이 있고, 말은 빨리 달릴 수 있는 튼튼한 다리가 있습니다. 소는 들이받을 수 있는 뿔이 있습니다. 하다못해 토끼는 약하지만 빨리 도망가는 재주라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양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아무 것도 가진 게 없습니다. 

작은 소리에도 화들짝 놀라 도망가고, 눈은 지독한 근시라 방향도 분간 못합니다. 계곡 같은 데라도 지나갈라치면 엎어지고 빠지고 난리가 납니다. 그러므로 양에게는 목자가 필수입니다. 양은 좋은 목자를 만나야 삽니다. 인간이 그렇습니다. 양과 같습니다. 약해 빠졌습니다. 인간도 목자를 잘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참 목자로 오셨습니다. 좋은 목자를 만나 보호와 인도를 받으면 양이 행복한 것처럼 우리 인생도 목자이신 예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음으로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목자의 보호와 인도를 잘 받을 수 있을까요? 우선 목자의 음성을 잘 들어야 합니다. 목자의 음성을 잘 듣고 따라갈 때 비로소 행복하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을 목자로 모셨습니까? 날마다 그분의 음성을 듣고 있습니까? 만일 그렇지 않다면 목자의 보호와 인도를 받고 있는 게 아닙니다. 넘어지고 쓰러지고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끊임없이 실패하는 원인은 거의 목자의 음성을 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무쪼록 이 시간 말씀을 통해서 목자의 음성을 듣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재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목자의 음성을 듣는 법을 배우심으로 행복하고 승리하는 인생 다 되시기 바랍니다. 

[1] 목자와 양의 관계 : 사랑과 신뢰의 관계

목자와 양의 관계는 한 마디로 사랑과 신뢰의 관계입니다. 요10:3~4 “3 문지기는 그(=목자)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4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목자는 양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잘 압니다. 한 마리 한 마리 각각의 이름을 부를 정도로 잘 압니다. 그만큼 큰 관심과 사랑을 갖고 있다는 뜻입니다. 양은 이와 같은 목자의 사랑을 알기에 그의 음성을 듣고 따라갑니다. 목자를 전적으로 신뢰한다는 뜻입니다. 

특별히 예수님은 당신 스스로 어떤 목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요10: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의로우신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범죄한 인간들을 위해 자신을 대속의 십자가에 내어주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피 흘리신 희생!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더욱이 예수님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특히 내 인생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계십니다. 험한 세상에 살지라도 나를 충분히 보호해 주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 28절~29절에서 예수님은 직접 말씀하십니다. “28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9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실 뿐만 아니라 절대 빼앗기지 않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붙잡아주십니다. 하나님 아버지도 붙잡아 주십니다. 세상의 그 무엇도 그 누구도 우리를 낚아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세상의 그 어느 것보다 위대하고 강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양과 같이 연약해도 목자이신 그분만 의지하면 필승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목자가 되심으로 자기 인생이 얼마나 아름답고 행복한지 노래합니다. 시23:1~6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마치 한 폭의 그림과 같습니다. 우리 각자가 목자이신 예수님, 목자이신 하나님을 잘 따라가면 이렇게 멋진 인생을 살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모든 성도들이 다 같은 인생을 사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어떤 사람은 최소치의 인생을 살고, 또 어떤 사람은 최대치의 인생을 삽니다. 요10:10 “ ...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무슨 말씀입니까? 기본적으로 예수님을 믿으면 영생을 얻고 장차 천국에 들어가겠지만, 그 인생의 풍성함이 각각 다르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최대한 풍성한 인생으로 인도하시기를 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이 원하시는 최대치의 인생을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최소치의 인생을 살고 있습니까? 목자의 음성을 듣고 잘 따라가면 최대치의 인생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 소설가 조창인 씨를 아시죠. 그의 소설 「가시고기」「등대지기」등을 읽어 보면 대번에 그가 크리스천인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는 본래 기자였는데, 취재 잘못으로 인해 수감됐습니다. 감방에 들어갔는데, 죄수들이 심상치 않습니다. 모두 인상이 흉악합니다. 그런데 그 중에 두목이 대뜸 묻는 겁니다. “너 교회 다녀?” “아뇨. 안 다닙니다.” “그러면 찬송가 아는 것 있어?” “잘 모릅니다.” “성경은 읽어 봤어?” “대학 다닐 때 학교에서 조금 읽어 봤습니다.” “그래? 그럼 너 오늘부터 예배 인도 해!” 놀리나 싶었지만 무서워서 거부도 못하고 억지로 예배 인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희한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 두목이 예배를 드릴 때마다 눈물을 흘리는 겁니다. 처음에는 일부러 장난을 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잘 보니까 진짜로 눈물을 흘리는 겁니다. 그러던 중 독방으로 이감됐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시나? 그렇다면 그 두목처럼 은혜를 받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무조건 믿기로 결심했는데, 정말 은혜가 임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일이 잘 해결되어 출옥하게 됩니다. 

그 후 아내와 함께 교회에 열심히 나갔습니다. 기자 생활은 접고 소설가로 나섰습니다. 하지만 일이 잘 풀리질 않았습니다. 거의 7년 반 동안 백수 생활을 했습니다. 그 동안 성경 읽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겁니다. 그 때 쓴 소설이 바로「가시고기」입니다. 10만 부가 팔리도록 기도했는데, 놀랍게도 150만 부가 팔렸습니다. 한 마디로 기적입니다.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라가면 이런 놀라운 일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2] 양이 사는 법 :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라가기 

우리는 양과 같은 인생입니다. 우리가 정말 행복하게 승리하는 인생을 살고 싶으면 이 한 가지만 꼭 지키면 됩니다. 목자이신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따라가자! 이것은 우리의 의무라기보다는 특권입니다. 아무나 목자의 음성을 듣는 게 아닙니다. 27절.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우리가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 어땠습니까? 내가 믿는 것 같지만 사실은 믿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한 자녀들은 영적인 귀가 열리고 말씀이 들어와요. 그럴 때 믿음이 생기는 겁니다. 그리고 그 후에 신앙이 성숙해질수록 목자의 음성이 잘 들리게 됩니다. 목자와 양이 서로 통하는 겁니다. 요10:5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타인은 거짓 선지자, 이단자 등을 가리킵니다. 영적으로 맞질 않아요. 그래서 어딘지 모르게 이상한 느낌이 들어 도망가고 피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영적으로 목자에게 맞춰져서 그 음성을 듣고 따라갈 수 있습니다. 롬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목자의 음성을 들었다고 하면 신기하게 생각합니다. 사실은 하나도 신기한 게 아닙니다. 아주 특별한 사람들만 목자의 음성을 듣는 줄 압니다. 아닙니다! 목자의 음성을 듣는 게 정상이고 듣지 못하는 것은 비정상입니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까 어떤 현상이 발생합니까? 군중 심리에 휩쓸려 세상의 풍조를 따라갑니다. 남들이 하는 대로 아무 생각 없이 따라갑니다. 그렇게 살지 않으면 잘못될 것 같아서 겁을 냅니다. 그러나 도매금으로 함께 망하는 수가 있습니다. 

터키 동부지역에서 오래 전에 일어난 일입니다. 목자들이 아침식사를 하는 동안 양들을 한쪽에 두었는데, 그 중 한 마리가 이러 저리 거닐다가 그만 10미터 높이의 절벽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한심하게도 다른 양들이 아무 생각 없이 그 양의 뒤를 따라갔다가 모두 떨어져 버렸습니다. 1,000 마리가 떨어졌는데, 불행 중 다행으로 먼저 떨어진 양들이 쿠션 역할을 해서 500 마리만 죽고 나머지 1,000 마리는 살았다고 합니다. 양들이 이렇게 어리석습니다. 

여러분, 사람들도 이렇게 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요? 남들 따라 가다가 같이 망합니다. 뭐 하면 대박 난다고 우르르 몰려갔다가 다함께 쪽박을 찹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찌하든 목자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양들을 잘 관찰해 보면 두 종류가 있죠. 한 종류는 목자를 졸졸 따라다닙니다. 목자 없이는 못 산다는 양입니다. 어찌 보면 주변머리가 없는 것 같지만 주제 파악을 잘하는 거죠. 이런 양은 탈이 나지 않습니다. 안전하고 승리합니다. 그런데 어떤 양은 우쭐대며 잘난 척을 합니다. 나 혼자서도 살 수 있다, 목자 없어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혹시 위험한 일이 있으면 그때나 목자의 도움을 받겠다는 식이죠. 이게 정말 위험한 겁니다. 악한 원수 마귀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무시로 공격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 멸망시키려 합니다. 그러므로 절대로 방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최근에 출간된 화제의 책이 있습니다. 나타샤 캄푸쉬 著「3096일」입니다. 1998년 10세 소녀가 실종됐습니다. 영구 미제가 될 뻔했는데, 8년 만에 극적으로 해결됐습니다. 8년 후인 2006년 납치범의 지하실에 감등되어 노예 같은 생활을 하다가 탈출해서 나타난 겁니다. 그 날 수가 3096일인데, 그 동안의 과정을 기록해서 책으로 펴낸 겁니다. 납치 경위는 이랬습니다. 

10세의 나타샤는 엄마가 학교에 데려다 주는 게 창피했습니다. 그래서 매일 혼자 가겠다고 졸랐지만 허락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의 허락을 받지 않은 채 등교를 감행합니다. 그녀는 현관문을 빠져 나가면서 중얼거렸습니다. “나 혼자 간다고 무슨 일이 일어나겠어?” 바로 그날 등교 길에 납치된 겁니다. 더욱 더 기가 막힌 것은 집에서 지척인 18km 떨어진 곳에서 감금되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잠시 방심한 순간 이런 끔찍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양이라는 사실을 겸손히 인정하고 목자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이게 소극적인 게 아닙니다. 사실은 가장 적극적인 신앙생활이요 승리의 비결입니다. 

[3] 목자의 음성 듣기 : 성령의 인도 받기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목자의 음성을 들을 수 있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게 있습니다. 음성을 듣는다고 하니까 청각적인 소리가 귀에 들려오는 것만 생각합니다. 정말 특별한 때에 하나님이 그런 체험을 주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보편적인 방식이 아니고, 평생 몇 번 있을까말까 한 그야말로 특별한 경험입니다. 보편적으로는 하나님의 음성이 마음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통해서 주어집니다. 

① 성령이 주시는 생각 :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의 영이며, 동시에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이 그 마음속에 와 계십니다. 성령의 내주(內住)라고 하죠. 예수님이 와 계신 것과 동일한 효과입니다. 그래서 보혜사이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보혜사는 옆에서 도와주시는 분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보혜사로 계셨습니다. 그런데 십자가 죽음, 부활, 승천 이후 제자들을 떠나가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예수님 대신 ‘또 다른’(another) 보혜사로 성령을 보내주신다고 했습니다. 

보혜사 성령이 우리 마음속에 오셔서 하시는 일이 여러 가지인데, 그 중에서 대표적인 일이 바로 이겁니다. 요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보혜사 성령께서 예수님의 뜻을 가르쳐 주시고 생각나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게 바로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방식입니다. 

사도 바울도 롬8:5,14에서 동일한 방식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롬8:5,14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 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우리 마음에 순간순간 하루에도 수도 없는 생각들이 스쳐지나갑니다. 그 무수한 생각들은 대개 세 가지로 분류됩니다. 나 자신의 생각(육신의 생각=욕심과 편견 등), 마귀가 주는 생각, 그리고 성령님이 주시는 생각 등입니다. 

예를 들어보죠. 오늘 아침 일어났는데, 몸이 찌뿌듯하고 마음도 꿀꿀합니다. 오늘 교회에 가? 말아? 이런 저런 생각이 마음에 떠오릅니다. 무슨 소리! 당연히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려야지! 이건 성령의 음성입니다. 오늘은 피곤한데 쉴까? TV 예배도 있잖아? 이건 내 육신의 안일한 생각입니다. 한술 더 떠서 1년이 52주일인데 오늘 하루 빠진다고 무슨 일이 생기겠어? 오늘 오랜 만에 온천이나 갈까? 이 전도 생각이면 마귀가 충동하는 생각입니다. 이런 생각들 가운데 성령이 주시는 생각을 붙잡아야 합니다. 

매사에 이런 식으로 생각들이 내 마음은 스쳐갑니다. 그 가운데 성령의 생각을 분별하고 선택하는 게 바로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이고, 목자의 음성을 듣는 겁니다. 바로 여기서 인생의 승부가 갈라집니다.

여러분, 가룟 유다와 베드로를 비교해 부십시오. 사실 인간적으로 보면 거기서 거기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가장 비참한 인생으로 멸망했고, 다른 한 사람은 역사 상 가장 위대한 크리스천 중의 한 사람이 됐습니다. 어떻게 해서 이런 차이가 벌어졌을까요?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따라다녔지만 육신의 생각만 했습니다. 그러니까 계속 실망하고 마음이 꼬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예수님을 배반하고 떠날 생각을 합니다. 결국은 예수님을 은 30에 팔 생각까지 하게 됩니다. 그 생각은 마귀가 준 생각이었습니다. 

요13:2 “마귀가 벌써 ...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이 음성을 듣고 결행한 그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반면에 베드로는 어땠습니까? 육신의 생각으로 겁이 나서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배반했습니다. 그러나 닭 울음소리를 듣고 에수님을 말씀을 생각하고 회개합니다. 마26:75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그 생각이 어떻게 났을까요? 성령께서 그런 생각을 떠오르게 해 주신 겁니다. 베드로는 그것을 거부하지 않고 붙잡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회개하고 새롭게 변화된 것입니다. 

② 목자의 음성 확인 :

그러므로 항상 영적으로 깨어 분별력을 가져야 합니다. 속아 넘어가면 안 됩니다. 목자의 음성을 확인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목자의 음성을 선택하면 무엇보다 마음에 확신과 평안이 옵니다.

마치 이런 겁니다. 조리개로 조절하는 카메라로 사진을 찍는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초점을 맞추기까지 흐릿한 영상들이 왔다 갔다 합니다. 그러다가 또렷하게 영상이 잡히는 순간 셔터를 누립니다. 그 때 기분이 어떻습니까? 상쾌하죠. 그리고 선명한 화상이 찍힙니다. 우리 마음속에서도 이와 비슷한 과정이 전개됩니다. 

롬8:6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성령의 음성 즉 목자의 음성을 들으면, 성령의 생각을 선택하면 마음에 평안이 옵니다. 두려움과 불안, 조급함이 없습니다. 반면에 마귀의 음성이거나 나의 욕심이 작동하면 왠지 조급하고 불안하고 두렵고 그럽니다. 다시 생각해 봐야죠. 빌4:7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빌4: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③ 목자의 음성을 듣는 훈련 :

그런데 이와 같이 목자의 음성을 분별하는 게 만만치 않습니다. 부단한 연습과 훈련이 필요합니다. 별난 방법은 없습니다. 내가 직접 자꾸 해봐야 합니다. 물론 그 과정 속에서 영적인 선배나 지도자의 상담과 지도가 있으면 도움이 됩니다. 하지만 결국은 내가 자꾸 연습해 보고 체험해 보고 습득해야 됩니다. 

영국의 유명한 중보기도자 리즈 하월즈(Rees Howells 1879~1950)의 이야기입니다.그는 성령의 사람이요 기도의 사람으로 2차 세계대전 당시 기도로 연합군의 승리에 크게 기여한 분입니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그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선생님은 어떻게 주님의 음성, 자기 자신의 음성, 마귀의 음성을 분별하십니까?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들어보면 알죠.” 무성의한 대답 같지만 영적인 대가가 정곡을 찔러 한 말입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라도 자주 전화 통화를 하지 않으면 잘 모릅니다. 한번은 교회 어르신에게 전화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몰랐는데, 보청기를 사용하셨다고 합니다. 전화를 받을 때 보청기를 빼고 계셨나 봅니다. 아무리 말을 해도 누구냐고 묻는 겁니다. 나중에는 당신이 알아듣지 못하면서 오히려 저더러 안 들리게 말한다며 화를 냅니다. 사태가 그 정도 되니까 저를 알게 되면 민망할까봐 얼른 전화를 끊어버렸습니다. 이해는 하면서도 조금 섭섭하더라고요.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이처럼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도 섭섭하시고, 우리도 손해를 보는 겁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는 훈련을 하는 데 도움이 되는 책이 여러 권 나와 있습니다. 그 중 에 세 권만 소개해 드립니다. 관심이 있는 분들은 정독하고 훈련을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최영찬, 다시 듣기, 규장. 찰스 스탠리,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 두란노. 조이 도우슨,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삶, 예수전도단. 

우리가 목자의 음성을 듣는 데 사용하는 도구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청각적인 음성, 환상, 꿈 등도 있지만, 보편적인 것은 아닙니다. 주심해서 분별해야 합니다. 어떤 분은 크리스천이라면서 돼지꿈을 꾸고 나서 크게 투자를 했다가 망하고 말았습니다. 이건 아니죠. 

주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도구는 말씀과 기도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읽고 묵상할 때, 기도할 때 많은 생각들이 스칩니다. 그 때 세 가지(내 욕심과 생각, 성령의 생각, 마귀의 생각) 중에서 분별하면 됩니다.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이 주시는 깨달음이나 확신이 있습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음성이요 생생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묵상할 때 항상 듣는 자세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기도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요청하고 말하는 기도도 중요하지만 ‘듣는 기도’가 매우 중요합니다. 말씀 묵상이든 기도이든 쌍방 대화입니다. 듣는 기도를 위해서 질문식 기도를 드리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하나님께 질문하고 기다리면 됩니다. 성령께서 생각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십니다. 이것을 붙들고 간구하고, 이것을 붙들고 순종하면 반드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이단과 재판을 해서 승소한 변호사의 이야기입니다. 이단을 이단이라고 했다고 이단 측에서 명예훼손으로 신학교 교수들을 대거 고소한 적이 있습니다. 1심, 2심에서 연달아 패소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비용도 많이 들고, 심지어 교수들의 월급까지 차압되고 고통이 이만저만 큰 게 아니었습니다. 자칭 비주류 법조인인 그 변호사님에게 대법원 재판 변호 의뢰가 들어왔습니다. 마침 막 개업했을 때였는데, 주변에서 모두 만류합니다. 종교 사건은 해 봤자 손해만 본다, 만일 패소하면 사무소 문 닫는다, ... 별의 별 말로 말렸습니다. 

신학교 교수님들이 고통을 당하는데, 게다가 잘못 되면 이단들이 활개를 칠 텐데 고민이 됐습니다.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하며 고민을 하는데, 문득 마음속에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이 때를 위함이 아닌가?” 그 생각이 너무나 선명하게 마음에 새겨졌습니다. 그래서 그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고 추진했습니다. 결과는 승소였습니다. 1심, 2심에서 패소한 사건이 3심에서 뒤집혔으니 기적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 결과 그동안 들었던 비용을 다 돌려받고, 교계를 위해서는 이단들을 신학적으로 비판하는 자유를 보장받는 판례를 세우게 됐습니다.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라가면 이렇게 통쾌한 승리를 거둘 수 있습니다. 

여러분, 행복한 인생 승리하는 인생을 위해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우리는 어디까지나 양입니다. 목자이신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따라가면 됩니다. 이게 유일한 행복의 길이요 승리의 길인 줄로 믿습니다. 부디 광야 같은 인생길에 목자의 음성을 잘 듣고 따라감으로 꼭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홍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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