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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바다로 뛰어 내리라 (요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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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로 뛰어 내리라 (요 21:1-7)
  

오늘은 불확실성의 시대입니다. 그래서 모두들 미래를 불안하게 생각합니다. 이것은 나이와 상관없이 모두에게 동일합니다. 노년에는 종말이 불안합니다. 조사에 의하면 80세에서 85세 정도만 살고 싶다고 응답이 가장 많았다고 합니다. 각종 질병으로 불안해서 그 이상은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중년에는 언제 직장에서 퇴출될지가 불안합니다. 그래서 직장에 목숨을 걸고 일을 합니다. 그런데 젊은이들은 이들보다 고민이 더 많습니다. 등록금도 문제이지만 졸업 후에는 직장 때문에 걱정이 더 많습니다. 그래서 대학 5, 6학년생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젊은이들은 막 뛰어다니며 미래에 취해 살아야 하는데 이런 저런 이유로 위축되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괴테는 젊은이라는 말만 들어도 취한다고 했는데 오늘의 젊은이들은 그런 기백을 잃고 살아갑니다. 

오늘은 기백 있는 젊은이를 소개하려 합니다. 그 사람은 바로 베드로입니다. 그는 인생 초반에 기반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하루하루 벌어서 살아가던 어부였기에 사람들은 그를 무식한 사람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가 어느 날 예수를 만난 후 그의 인생이 변하였습니다. 얼마나 변하였는가 하면 “예수다”라는 말 한마디에 바다로 뛰어 들어갈 만큼 기백 있는 제자로 변화를 받았습니다. 이런 모습이 바로 젊은이의 모습입니다. 

또한 그런 기백이 예수를 좇는 제자의 삶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갈릴리로 가서 기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고향으로 가서 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누군가 와서 고기를 잡았느냐고 물었습니다. 고기를 못 잡아서 시름에 젖어 있던 제자들은 누군가가 오른편에 한 번 더 던져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한 번 더 던져보았더니 고기가 많이 잡힌 것입니다. 

그때 베드로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갑자기 고기가 그물 가득히 잡히는 것이 제자가 되기 전 예수께서 오셔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한 번 더 던져보라는 말씀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그 순간 누군가 “저기 주님이 계시다”라고 소리쳤습니다. 그 소리를 듣자마자 베드로는 바다로 뛰어 들어갔습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믿음 방정식입니다. 이것이 제자의 진면목입니다. 제자에게는 이런 기백이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에게는 제자로서의 그런 기백이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베드로에게는 몇 가지 남다른 자질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오늘 신앙인들이 가져야 할 자질입니다. 

담백한 결단력

예수님이 “나를 따르라”고 하셨을 때 베드로는 그 자리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따라나섰습니다. 이는 아주 담백하고 순수한 결단의 모습입니다. 물론 베드로는 사전에 어느 정도 예수가 누구인지 교육을 받았습니다. 베드로는 세례요한의 제자로 장차 예수께서 부르면 따라 나서라는 지침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기다렸다는 듯이 따라나서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막상 결단의 시간이 오면 다시 재어보고 계산하며 망설이기 쉽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 즉시 따라 나섰습니다. 이는 베드로의 마음과 영혼 그리고 생각이 아주 맑았다는 증거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이 삶의 자세와 모습이 참 중요합니다. 오늘 우리는 너무 나약하고 무력하며 주저함이 많습니다. 그것은 생각이 너무 많고 복잡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잠자리에 들어가도 쉼이 없는 것입니다. 제가 지난 5월에 교회봉헌예배 행사를 끝내고 유럽에 15일간 여행을 갔었습니다. 보통 여행 때는 일거리를 한 짐 가득 가지고 떠났었는데 이번에는 빈손으로 떠났습니다. 머리를 비운채로 아무 생각 없이 여행만 하겠다고 작정했던 것입니다. 그랬더니 보름동안 계속해서 잠이 쏟아졌습니다. 

또한 밥맛도 좋고 소화도 잘되었습니다. 또한 시간 가는 것에 전혀 염려가 없었고 모든 시간이 그렇게 재미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에게는 일터를 떠나보고 때로 안식년을 갖는 것이 필요하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고 계산하며 살아가기 때문에 삶이 피곤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베드로의 모습에서 아주 단순하고 담백한 삶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예수께서 “나를 따르라”하시니 기다렸다는 듯이 따라 나섰습니다. 그것은 그의 마음과 생각이 그만큼 담백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순결한 순종 

베드로 일행이 고기 잡는 곳에 예수께서 오셨습니다. “고기를 잡았느냐?”하고 묻자 베드로 일행은 “못 잡았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면 오른편에 한 번 더 던져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베드로 일행은 밤새도록 그물을 던져서 지쳐있을 때입니다. 이제는 고기가 잡힌다 해도 귀찮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베드로는 그물을 또 던졌습니다. 누가복음 5장에서 예수께서 깊은 데로 가서 한 번 더 던져보라고 하셨을 때에도 베드로는 “말씀하시니 다시 한 번 던지리이다.”하고 그물을 또 던졌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다 해 봤습니다.”라는 말을 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는 아무 말 하지 않고 그냥 던졌습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면모입니다. 그런 때에 대부분 사람들은 똑같은 말을 합니다. “다 해 보았습니다.” “소용없습니다.” 이것이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오늘 목회의 현장에서도 “전도하라”고 하면 “이만하면 됐지 또 전도합니까?”라고 반응합니다. 이는 생각이 복잡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적 수준이 깊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가끔 길가에서 전도지를 나누어주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오늘 이 시대에 저렇게 해서 누가 믿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생각들이 전도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힘 빠지게 만듭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분들 대부분이 전도 해본 일이 없는 분들입니다. 베드로가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는데 오른편 왼편 안 던졌겠습니까? 그런데도 베드로는 또 던졌습니다. 이것은 굉장한 신앙의 자질입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장점이고 이것이 베드로로 하여금 수제자가 되게 한 요인입니다. 그리고 이것 때문에 거기에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처럼 단순함의 믿음은 기적을 일으킵니다. 거기에 담백한 순종이 있기 때문입니다. 기적은 순종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열왕기하 5장을 보면 나아만이 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 시대는 엘리사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대였는데 아람왕의 신하이자 국방장관이었던 나아만이 나병에 걸려서 병을 고치기 위해 엘리사를 찾아온 것입니다. 그는 오면서 엘리사가 친절하게 자신을 맞아주면서 병을 고쳐 주리라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내다보지도 않고 사람을 시켜 요단강에 가서 7번 몸을 씻으라고 말했습니다. 나아만은 병을 고치는데 절차가 굉장히 복잡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희귀한 나병이 단지 요단강에 가서 7번 씻음으로 낫는다니 너무 간단해서 의심이 든 것입니다. 그래서 그냥 돌아갈까 생각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말대로 믿고 가서 씻었더니 병이 깨끗이 나았습니다. “가서 씻으라.” “씻으면 깨끗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신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의 체계는 복잡하지 않습니다. 아주 간단하고 단순합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이것만 믿으면 완전한 신앙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이 단순한 신앙체계를 너무 복잡하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씻으라.” 얼마나 간단합니까? 가서 씻으면 됩니다. 그런데 “왜 꼭 거기를 가야 하느냐?” “왜 꼭 일곱 번이냐?”하며 이유를 붙입니다. 신앙의 세계는 단순한 세계입니다. 그 단순한 신앙이 그대로 표현되고 발로되고 이루어지는 곳에 기적이 일어나고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기적은 모두 그 단순함의 순종에서 나타납니다. 처음 예수님을 만났을 때도 베드로는 “이제 너희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자리에서 다 버려두고 따라나섰습니다. 그것이 베드로의 면모입니다. 

천진한 믿음

예수께서 “나는 이제 죽어야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순간 베드로는 예수님을 극구 만류했습니다. 마가복음 8장 32절을 보면 항변해서 극구 만류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순간 정색을 하시며 “사탄아 물러가라.”고 호통을 치셨습니다. 바로 엊그제는 천국의 열쇠를 주시더니 오늘은 사탄아 물러가라고 소리치셨습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어찌 보면 당연한 말을 한 것입니다. 그 상황에서 “주님은 마땅히 죽으셔야 합니다. 아멘.” 그럴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는 그가 아주 순박한 신앙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변화산에서도 베드로는 그런 모습을 보입니다.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갑자기 변화하더니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서로 대화하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제자들은 황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베드로가 침묵을 깨고 말했습니다. “여기가 좋사오니 초막 셋을 짓고 우리 모두 함께 삽시다.” 베드로는 그 순간 마음에 느끼는 대로 말한 것입니다. 그만큼 순박한 신앙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언제나 화제를 주도했고 공동체를 이끌어 나갔습니다. 전승에 나오는 이야기를 보면 베드로의 면모가 그대로 나타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산에 오르시며 돌 하나씩을 들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어디에 사용할 것이라는 용도를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은 각자 자신의 생각대로 돌 하나씩을 들고 올라갔습니다. 가룟 유다는 아주 작은 돌 하나 들고 앞장서서 올라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큰 돌을 하나를 들고 땀을 흘리며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산위에 먼저 올라간 유다는 땀을 흘리며 올라오는 베드로의 모습을 보고 생긴 대로 논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요령 많은 사람들이 보기에 베드로의 모습은 분명 어리석어 보였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모두 산에 올라가자 예수께서 모두를 자리에 앉게 하시더니 들고 온 돌을 들고 “이 돌들이 모두 떡이 되게 하소서”하고 축사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장점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수제자가 된 것입니다. 매사 계산이 빠르고 뺀질거리고 땀 흘리기를 주저하는 사람은 큰 인물이 못 됩니다. 그런 사람은 당장은 이익을 볼 수 있으나 복을 못 받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그런 고백을 했습니다. 교회에서 늘 부 반주자로 수고하던 여학생이 있었는데 그 학생은 언제나 스페어 피아니스트로 땜질만 했습니다. 그런데도 이 여학생은 정반주자가 나오지 못하는 새벽예배, 밤 예배 때의 반주를 도맡아 하였습니다. 모든 교우들이 그 여학생의 수고를 알고 칭찬했습니다. 그런데 이 여학생이 가정형편도 어려운데 아무 대책 없이 유학을 가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님도 학비를 조금 마련해 주고 도움을 줄 수 있으면 도와주라고 광고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여기저기서 봉투를 하나씩 주는데 비행기 값, 1년 생활비, 1년 학비가 다 준비되었다는 것입니다. 

순박할 정도로 자기가 맡은 일에 충실함은 나 자신에게도 행복함을 주지만 보는 사람들에게도 상당한 행복을 줍니다. 그리고 그 행복은 마침내 길을 만들고 기회를 만들고 마침내는 기적을 일구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문제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너무 계산하고 이해타산적으로 요령껏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삶에서 복을 받지 못하고 복을 받을 기회마저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제가 어려서 고향교회에서 부흥회가 있었는데 오신 부흥강사님이 방언을 많이 강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모두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이곳저곳에서 방언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런데 누가 방언의 은사를 받았는지 아십니까? 대부분이 아이들과 중고등학생들이었습니다. 오히려 어른들은 입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아이들은 마음이 맑고 생각이 순수합니다. 기도하면 주신다니까 그대로 믿고 기도한 결과 아이들이 방언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어른들은 기도하면서도 생각이 복잡합니다. “기도하면 정말 주어질까, 방언은 별로 안 좋다고 하는데, 과연 주어질까?” 속으로 생각이 복잡합니다. 

그러니까 안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른들은 읽으면서도 생각이 많습니다. “무슨 만화 같은 이야기만 기록해 놓았느냐” 하고 의심도 합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읽기는 많이 읽는데 크게 은혜가 안 되는 것입니다. 어느 어린 아이가 식사하면서 혼자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까 “아버지가 불쌍해서 그런다”고 했습니다. “교회에서 선생님이 예수님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고 하셨는데 우리 집에서 지옥 갈 사람이 아버지 밖에 없잖느냐”고 하면서 눈물을 흘리더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순수하고 그 영혼이 맑고 깨끗합니까? 그러니까 예수님이 어린 아이들을 칭찬을 하시고 어린아이 같아야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해타산에 민감하지 않은 것이 복입니다. 따지지 않음이 복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것이니 그대로 따르고 순종하는 것이 복입니다. 그 삶이 행복한 삶입니다. 베드로는 실수도 많이 했으면서도 수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 영혼이 맑고 깨끗하고 믿음이 순수하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베드로의 장점입니다. 

오직 예수사랑 

베드로의 관심 속에는 오직 예수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예수를 사랑하는데 타의 추종을 불허했습니다. 그는 실수도 많이 했지만 예수님을 사랑하는데 특출했습니다. 마침내 베드로가 순교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달아 죽이려 했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그냥 십자가를 져도 영광이지만 나는 십자가를 거꾸로 지겠다고 우겼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십자가를 그냥 질 수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고난 받을 때 자신은 도망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수제자로서 참 부끄러운 일입니다. 또 예수님 면전에서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저주하며 맹세했습니다. 그때 예수님 말씀처럼 닭이 울었습니다. 그 후로 베드로는 닭 울음소리만 들으면 온 몸에 소름이 끼쳤다고 합니다. 이처럼 베드로는 이런 이유 때문에 그냥 죽을 수 없고 십자가를 거꾸로 지겠다고 자청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베드로를 예수님은 일찌감치 수제자로 인정하셨고 천국 열쇠도 주셨고 중요한 자리에는 반드시 베드로를 동행시키셨습니다. 

신앙생활은 예수님을 좇는 제자의 삶입니다. 믿음의 길에는 이런 자질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너무 생각이 많고 이해타산적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믿음이 깊어지지 못하고 무게를 잃는 것입니다. 믿음의 세계는 너무 생각이 많고 주저하게 되면 영적 샘이 자꾸 얕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비워야합니다. 그리고 단순화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베드로의 일생을 장황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줄 메시지가 많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담백한 결단력과 순결한 순종의 믿음을 소유했습니다. 또한 천진한 믿음의 세계를 갖고 있었고 예수사랑이 넘치는 사람이었습니다. 때로는 실수하고 도망치는 경솔함을 보이기도 했지만 금방 회개하고 실수를 인정하여 자세를 바로잡았습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믿음 방정식입니다. 번지점프에 3가지 요령이 있습니다. 첫째 계산하지 말고, 둘째 아래를 보지 말고, 셋째 생명줄을 믿고 뛰어 내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믿음 방정식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예수다”라는 말이 나오기 무섭게 바다로 뛰어 내렸습니다. 이것이 제자의 삶입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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