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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거룩한 일에 미쳐 사는 행복한 인생 (고후 5: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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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일에 미쳐 사는 행복한 인생 (고후 5:13-21)


인생을 살아가면서 자주 깨닫는 것은 실천이 이론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감동을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천 마디의 말이 아닙니다.  한 번의 행동이 사람을 감동시킵니다.  뿐만 아니라 사랑은 모든 것을 아는 것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내가 꼭 알아야 한다고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믿고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면 그 내면의 깊은 곳에서 열정이 일어납니다.  사랑이 식었다는 말은 그 내면에서의 열정이 사라졌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을 살아가면서 그가 어디에 있든지, 혹은 무엇을 하든지 열정은 참으로 중요한 삶의 자원입니다.

사람이 열정에 사로잡히면 열광하게 됩니다.  그리고 열광하게 되면 인생은 그야말로 신바람 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신바람만 나면 무서운 것도, 두려운 것도, 불가능한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신바람에 취할 때 자신을 잊습니다.  배고픔도 잊어버립니다.  서러움도 원망도 자질구레한 일상사에 얽매였던 자신을 잊어버리고 현실을 떠나 탈혼의 경지인 더 커다란 세계에로 빠져 들어갑니다.  특별히 우리 민족에게는 그러한 신바람으로 인해서 어렵고 힘든 일상의 격랑을 헤쳐왔던 어떤 축제의 정서가 있습니다.  그런 신바람은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는 집단적 헌신의 모습으로 역사에 위기가 있을 때마다 나타나 국난을 극복하게 만드는 힘이 되기도 했습니다.

사실 우리 민족은 잠재적인 신바람, 신명만 나기만 하면 거칠 것이 없는 그런 연합을 이루는 이상한 기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 국민이 구호에 하나가 되고, 노래에 하나가 되어서 말 그대로 완전히 미쳐버립니다.  열광합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열광하는 자'(enthusiasm)라는 뜻은 그리스어로 하나님과 하나가 된 자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하나가 되면 마음에 열정이 넘치게 됩니다.  하나님과 하나가 되면 하나님께 대하여 열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저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우리 안에 잠자고 있는 열정을 다시 일으켜 그것으로 신바람 나게 주를 섬기고 주를 위하는 일에 미쳐서 살아가자고 권면을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가 세상 일에 미치기는 것보다 훨씬 더 행복하고 보람있는 일에 미쳐서 한 번 멋지게 살아보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에 열광하고 구원에 감격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가 되는 신명나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들이 살아가야 할 삶의 방향과 자세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이 시작되는 13절에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런 고백을 합니다.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오늘 본문의 편지를 받은 고린도 교회는 사도 바울이 정성을 들여서 세웠던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언젠가 이 고린도 교회에 돌아올 것을 약속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방문 계획이 좀 늦어집니다.

그러니까 바울을 시기했던 사람들이 바울의 사도성과 메시지에 이의를 제기하
고 나서는 일이 생겼습니다.  때문에 사도 바울은 자기를 변호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그래서 주후 60년, 자기가 사랑하고 전도해서 세웠던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바울이 지금까지 살아왔던 자신의 인생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서 이렇게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직도 저를 모르십니까?  저는 그냥 하나님께 미쳐서 살아왔습니다."

바울이라는 사람은 정말 미쳐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도대체 왜 바울은 미쳤을까요?  무엇 때문에 미쳤을까요?  이 대답을 찾는 과정에서 저와 여러분도 한가지로 주 앞에서 미치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차피 인생은 미쳐서 사는 것이 아닙니까?  어떤 사람은 돈에 미치고, 어떤 사람은 쾌락에 미칩니다.  어떤 사람은 도박에 미치고, 어떤 사람은 허황에 미칩니다.  따지고 보면 모든 인생은 무엇엔가 다 미쳐서 살아갑니다.  제 정신으로 살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 아닙니까?  미친다는 것이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어떤 것에 미쳤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미쳐서 살 바에는 기왕에 거룩하게 미치는 것, 거룩한 목적을 위해서 거룩하게 미쳐 사는 것, 이런 삶에 한 번 도전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이 시간, 옆 사람을 돌아보면서 "우리 거룩하게 미칩시다"라고 인사를 나누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무엇에 미쳤습니까?  그리고 또 우리는 무엇에 미쳐야 합니까?

첫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미쳐야 합니다.

14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한다" 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강권이란 말은 본래 꼼짝달싹 못하도록 붙잡혀버린, 그래서 사랑의 포로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젊은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게 되면 사랑에 사로잡히고 사랑의 포로가 됩니다.  그래서 이성적으로 판단을 잘 못합니다.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잘 어울리지 않는데, 제 눈에 안경이라고 자기들 볼 때에는 죽고 못 삽니다.  그것을 사람들은 눈에 콩 깍지가 씌웠다고 말합니다.  사랑의 포로가 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바울이 그랬습니다.  그는 말할 수 없는 주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 사랑을 경험했습니다.  그 사랑에 푹 빠져서 사랑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예수께 그만 미쳐 버렸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의 사랑에 붙잡혀 그 사랑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무엇 때문입니까?

그는 두 가지 이유를 들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이유는 우리가 정말 진짜 예수 믿는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오늘날 우리도 또한 주님의 사랑에 빠져서 살아야 할 두 가지 이유이기도 합니다.  두 가지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에 빠져야 할 첫 번째 이유는, 그가 나를 위해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본문 14절을 다같이 읽으시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대부분의 사랑은 이기적인 동기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부라도 서로를 위해서 죽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아니 부모와 자식간이라 할지라도 부모를 위해 죽는 자식은 거의 드물고, 자식을 위해 죽는 부모도 결코 흔치 않는 것이 오늘 이 시대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부모도 아니고, 자식도 아니고, 같은 동족도 아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스라엘 땅에 태어났던 한 사람이 우리를 위해 그리고 나를 위해 죽으셨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것이 사실이라고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나를 위해서 목숨을 던지신 그 분과의 사랑에 빠져 사는 것이 이해될만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당연히 그분과의 사랑에 완전히 빠져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바울은 로마서 5장 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그렇습니다.  의인을 위해서 죽는 일도 쉽지가 않은데 그분은 죄인인 나를 위해서 죽으셨습니다.  이어서 그는 이런 유명한 고백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남동생의 뒷바라지를 위해서 시집가기를 거절하고 평생을 바쳤던 어떤 간호사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동생도 이제는 누님 자신의 살 길을 찾아가라고 그렇게 권유했지만 막무가내였습니다.  주변 사람도 좀 지나친 것이 아니냐고 말했습니다.  동생을 위해서 그렇게까지 희생할 필요가 있는가 라고 말렸습니다.  그렇지만 막무가내였습니다.  그녀는 오직 동생을 위해서만 살았습니다.  마치 그녀의 전 존재가 동생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처럼 동생 뒷바라지에 평생을 쏟아 부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세상을 떠나기 전 그 이유를 이렇게 고백했다고 합니다.  자기가 사춘기 시절 병을 앓다가 수술을 받게 되어서 수혈의 필요성이 있었는데 아주 독특한 혈액형이어서 피를 구하기가 어려웠다고 합니다.  그때 불과 10살도 안된 자기 남동생이 수혈을 하겠다고 자원을 했다고 합니다.  마침 같은 혈액형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수혈이 끝난 후 이 남동생이 입원실에서 의사선생님에게 뜻밖에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선생님, 저는 이제 언제 죽게 되나요?"

이 소년은 수혈한다는 의미를 잘 모르고 수혈을 했던 것입니다.  수혈하면 그래서 자기 피를 빼면 죽는다고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죽기를 각오하고 누님을 위한 수혈에 임했던 것입니다.  나중에 누님이 이 소식을 전해 듣고 나서 그 순간 누이는 하나님께 이런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저는 이제 내 평생을 제 동생을 위해 살겠습니다"라고.  죽기를 각오하고 나를 위해서 피를 주었던 내 동생을 위해서 나는 평생을 살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심을 실천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자기를 위해 죽을 각오를 하고 수혈을 한 동생을 위해서 한 여인이 동생에게 빚진 마음으로 평생 동생을 사랑하고 뒷바라지하는 일에 헌신적인 삶을 살 수가 있었다면 여러분과 저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어주신 그분과의 사랑에 빠져 살아가는 것이 지나친 삶이라고 할 수가 있을까요?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사도 바울이 미쳤던 그리스도의 사랑에 오늘 우리도 한 번 미쳐 볼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사랑에 빠져서 살았던 두 번째 이유는, 그가 나의 삶의 이유가 되셨기 때문이라고 고백을 합니다.

이것이 15절의 말씀입니다.  1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해 다시 사셨다고 증언을 합니다.  그리고 그가 다시 사신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이제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시 사신 그분을 위해서 살게 하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나를 위해 죽으시고, 또 나를 위해 다시 사신 그리스도, 이제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그분이 우리의 삶의 존재의 이유요, 존재의 목적이요, 내가 살아가는 이유가 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목적 없이 인생을 그냥 표류하고 있습니까?  방황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삶이 때로는 무기력해 보입니다.  그리고 전혀 감동이 없습니다.  무기력과 무감동의 삶, 어쩌면 이런 탈출구를 찾기 위해서 사람들은 어떤 일에 쉽게 흥분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는 신드롬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왜 무기력해졌고 무감동 속에서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까?

저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목적 의식의 결핍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를 믿는 순간, 예수를 만나는 순간 우리에게는 분명히 바라볼 수 있는 대상이 생긴 것입니다.  그리고 내 존재를 던질 수 있는 대상과 목적이 생긴 것입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믿으십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그 믿음의 고백을 이제는 좀 분명히 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바로 내가 살아가는 삶의 이유입니다.  그래서 나는 오직 그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아주 쉽게 바꾸어서 말한다면 주님은 저와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나는 너를 위해 죽었다.  그리고 너를 위해서 다시 살았단다.  그리고 지금도 존재하고 있는 이유는 너를 위해서 존재하는 거야.  그렇다면 너도 나를 위해서 살지 않겠니?"

이것은 마치 아주 사이 좋은 부부가 어느 날 남편이 아내에게 이렇게 말하는 광경을 상상해 보십시오.  "여보, 난 당신 때문에 살아요.  나는 당신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죽을 수가 있어요."  만약 이런 고백을 받는 부인이라면 이런 고백을 하지 않겠습니까?  "여보, 나도 당신을 위해서 살아요."  저는 동일한 고백이 우리 주님과 나 사이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이유가 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그리스도의 사랑에 미쳐 있었을 뿐 아니라 두 번째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일에 미쳐야 한다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하는 일은 분명히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저는 우리 성도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가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일에 미칠 수 있어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아주 좋은 학벌을 가지고 율법의 학문을 가진 사람입니다.  또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사회적 지위도 높은 사람입니다.  그는 당시 사회의 엘리트였습니다.  출세가 보장되어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어느 날 예수님을 만나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포로가 되고 예수님께 완전히 미쳐버리고 말았습니다.  엘리트로서 모든 사회적인 배경이 튼튼하기 때문에 편안하게 출세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런 삶의 모든 배경들을 다 버리고 예수님께 미쳐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선교 여행하고 때로는 감옥에도 가고 때로는 매도 맞습니다.  때로는 굶주리면서 복음 전하는 일을 합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26장 24절에 보면, 베스도라는 총독이 이러한 바울의 모습을 보고 기가 막혀서 이렇게 말합니다.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총독 같은 사람이 보니까 바울이 너무나도 한심한 겁니다.  저 똑똑한 사람이 예수한테 미쳐서 왜 저 모양이 됐나, 그런 정도가 된 것입니다.

바울은 정말 문자 그대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하는 일에 미쳐있었습니다.  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정말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이라면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믿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일에 미쳐야 있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여기에도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이유는, 그리스도의 사랑만이 인간을 변화시킬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간이 가진 가장 큰 존재의 갈망이 있다면 그것은 변화에 대한 갈망입니다.  아무도 자기의 존재 그대로를 만족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스스로에 대해서 절망할수록, 내 자신의 한심한 꼬라지와 모습을 보면서 스스로에게 불만을 가지면 가질수록 우리 속에 변화의 열망은 더욱 간절하게 증대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변화가 쉽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놀라운 소식을 전합니다.  이것은 전 인류가 들어야 할 감격스러운 복음의 소식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말씀입니다.  본문 17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이 말씀이 전하는 내용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변할 수가 있다는 것이 아닙니까?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기만 하면 뭐라고 했습니까?  새로운 피조물이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사실 이 고백은 사도 바울 자신의 신앙 고백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사랑을 받을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스데반 집사를 죽이는데 앞장을 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것도 부족해서 예루살렘 곳곳을 다니면서, 심지어는 다메섹에까지 가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찾아내고, 그들을 감옥에 가두고, 교회를 핍박하는 일에 앞장을 섰던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믿는 사람들 쪽에서 볼 때에 바울은 원수 같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원수 같은 바울에게 찾아오셔서 바울을 사랑하시고 바울을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을 때에 말할 수 없는 사랑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이런 고백을 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정말 예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감격하는 사람치고 변화되지 않는 사람을 본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아무리 교회에 열심히 나와도, 또 교회에 나와서 세월이 흘러가니까 무슨 집사가 되고 장로가 되어도 정말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교회 생활을 골백년 해도 변하지 않습니다.  정말 복음을 깨닫고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들은 홀연히 변합니다.  그의 가치관이 변하고 삶이 변합니다.  그의 삶 전체가 변합니다.

저는 정말 여러분에게 한 번 묻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정말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이 너무 기가 막혀서 밤을 지새워 그 사랑 앞에서 울먹여 본 그런 경험이 있습니까?  정말 그 사랑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변합니다.  사랑하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자기 자신을 희생하고 헌신하게 됩니다.  기억하십시오.  사랑은 인간을 변화시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의 지배를 받는 한 식민지 출신의 젊은이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의 거대한 과학을 자랑하고 무력을 자랑하고 군사력을 자랑하고 지식과 지혜를 자랑하던 로마를 향해서 바울이 편지를 쓰면서 이런 유명한 고백을 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왜냐하면 이 복음은 복음을 믿는 모든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바울은 보았습니다.  로마의 발달된 그 당시의 군사력도 과학도 철학도 단 한 사람의 영혼도 변화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러나 그가 복음을 전했을 때, 정말 진정한 의미에서 복음을 깨닫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들이 변하더라는 말입니다.  인간을 자유케 하고 인간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복음, 그래서 바울에게 있어서 복음 보다 중요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복음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일에 문자 그대로 미쳐 있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랑만이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해답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미쳤습니다.  이 사랑을 전하는 일에 미쳤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저는 주의 이름으로 여러분들에게 요청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정말 복음의 감격을 아는 사람의 모습을 보여 주십시오.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는 사람은 어느 누구든지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변하지 않는 삶,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거룩한 삶으로의 변화가 없는 인생, 그는 아직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무엇보다 복음의 감격을 잃어버린 사람의 모습, 그래서 열정이 사라진 그 모습으로는 결코 세상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가 없습니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일에 미쳐 있었던 두 번째 이유는, 그리스도의 사랑만이 인간을 하나님과 화목 시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인류 최대의 과제는 창조주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인간의 모든 비극은 하나님을 등진데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어느 날 당신이 사랑하는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신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척 스윈돌 목사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만약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정보였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교육자를 보내셨을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기술이었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과학자를 보내셨을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만약 돈이었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경제학자를 보내셨을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쾌락이었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연예인을 보내셨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 인간의 근본 문제는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회복하는 것, 이 관계의 문제가 가장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관계를 중보할 수 있는 중보자로, 그리고 화목자로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전도의 책임을 본문에서 '화목하게 하는 직책'이라고 말합니다.  복음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됩니다.  더 이상 하나님을 등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새로운 인생을 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이 복음의 말씀을 사도 바울은 19절에서 '화목하게 하는 말씀'이라고 말합니다.  20절에 의하면 전도의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화목하십시오."  다른 말로 말하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으십시오." 라고 증언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복음 전도의 영향력이 커질수록 이 세상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됩니다.  우리 가정이 하나님과 화목할 때에 우리의 가정과 삶에 하나님의 복이 있습니다.  그때 세상은 화목한 세상, 화목한 공동체가 되어 갑니다.  그런 의미에서 복음은 개인을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세상을 변혁시키는 유일한 처방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미쳐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이것이 우리가 복음에 미쳐서 살아야 할 이유이기도 합니다.

과거에 공산주의가 기승을 부리던 시절에 빌리 그래함 목사님은 어느 날 한 통의 편지를 받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 편지를 공개했습니다.  그것이 그 당시에 전세계에 살던 그리스도인들에게 대단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 편지는 공산주의자였던 한 청년의 글입니다.  공산주의에 헌신하기 위해서 사랑하는 애인과 작별의 편지를 썼던 것입니다.

그 편지가 누군가의 손을 통해서 빌리 그래함 목사님에게 전달되었습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은 이 편지를 공개하면서 오늘날 오늘을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헌신이 잘못된 이데올로기인 공산주의에 바치는 헌신보다 못한 것을 우리 모두는 부끄러워해야 한다는 유명한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이 편지를 한 번 읽습니다.  이런 내용입니다.

"우리들 공산주의자들은 누구보다도 사망의 높은 확률을 안고 살아갑니다.  총에 맞고 교수형을 당하고 조롱 당하고 직업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우리 중에 상당한 퍼센트는 이미 죽었거나 감옥에 갇혀있습니다.  우리는 대부분 가난하게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좋은 집, 좋은 자동차를 가질 여유가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우리의 모든 시간, 우리의 모든 재산, 우리의 모든 재능을 아낌없이 당과 사상을 위해 바칩니다.  사람들은 우리를 광신자라고 부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광신자입니다.  우리는 기꺼이 광신자가 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오직 하나의 목적, 세계 공산화의 노력과 이상화에 의해서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내가 죽도록 갈망하고 또 갈망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공산주의가 실현된 세상을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제 내 삶이요, 내 사업이요, 내 종교요, 내 취미요, 내 연인이요, 내 아내요, 내 빵이요, 내 존재 그 자체입니다.  나는 낮에는 그것을 위해서 일하고 밤에는 그것을 꿈꾸고 있습니다.  나에게 이제 이 비전을 떠나서는 나의 어떤 다른 인생도, 다른 우정도, 다른 사랑도, 다른 대화도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나의 사랑했던 이여, 나는 이제 이 이상을 위해 감옥에 갇힐 준비가 되어 있고 필요하다면 사형대에 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나를 떠나 주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과 제가 과거에 공산주의자들이 그들의 이데올로기를 위해서 바쳤던 그 열정의 적은 부분만 소유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아니 우리가 일상의 삶에서 쉽게 흥분하는 그 적은 부분만이라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래서 그것을 가지고 생명의 복음이요,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우리가 헌신할 수가 있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변할 수가 있을까요?  그리고 우리의 가정과 믿음의 공동체는 또 얼마나 아름답게 세워져 갈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주를 위하여,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기 위해서 나를 바꾸고, 내 이웃을 바꾸고, 세상을 바꾸는 이 헌신 앞에 자신을 던져보지 않으시겠습니까?  한 번 밖에 없는 내 인생을 주를 위한 거룩한 목적과 소명 앞에 내 존재를 던져 헌신하는 일에 한 번 미쳐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사람은 무엇엔가 미쳐서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 어떤 일에 대한 미침, 그 열정이 인생을 보다 신바람 나게 만들고 행복하게 합니다.  그러나 열정이 사라진 인생은 그 속에 역정만 남아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열정과 역정은 다릅니다.  열정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역정은 사람을 절망하게 만듭니다.  열정은 사람들을 하나 되게 합니다.  그러나 역정은 사람들을 떠나가게 합니다.  거룩한 일에 대한 열정,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미쳐 살 때에 우리는 세상을 살아 갈만한 가치가 있는 행복한 인생으로 변화시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가지고 한 번뿐인 인생을 살아갑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허락해 주신 인생을 어떻게 살든지 그것은 분명히 여러분의 자유입니다.  여러분이 거룩한 일에 미쳐서 세상을 신바람 나게 살아갈 수도 있지만, 반면에 세상 잡기에 미쳐서 불나방처럼 이리 저리 기웃거리면서 방황하는 인생을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그것은 분명히 여러분의 자유입니다.  간혹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렇게 믿어서 뭐하나?  꼭 그렇게 믿어야만 하는가?

그러나 이것 하나만은 반드시, 꼭 기억하십시오.  우리 모든 인생은 때가 되면 다 죽습니다.  그리고 죽음 이후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훗날 당신이 주님 앞에 섰을 때에 받게 될 그 준엄한 심판을 생각하십시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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