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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선으로 악을 이기라! (롬 12: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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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으로 악을 이기라! (롬 12:9-21) 
   

요즈음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듣는 말이 믿음은 있는지 모르지만 행함은 전혀 없는 것 같다는 말입니다. 한국 교회가 그 어느 때보다 심하게 세상 사람들에게 비난과 조롱을 당하고 있는 까닭도 행동이 뒤따르지 않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에 대해서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물론 우리가 이 세상에서 무조건 인정을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옛날 초대 교회 성도들도 세상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한국 교회가 당하고 있는 비판은 그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믿음은 그럴듯하게 보이지만 그 믿음에 상응하는 삶의 내용이 전혀 없는 것이 문제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 너무 막연한 요구처럼 들린다고 말합니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것이냐는 말입니다. 아마 그 옛날 로마 교회 교인들도 똑같은 불평을 했던 것 같습니다. 때문에 사도 바울은 오늘 봉독한 본문 말씀을 통해서 사랑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14절 이하의 말씀을 통해서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주님의 가르침을 실천에 옮길 수 있도록 구체적인 방법까지 제시하고 있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은 먼저 사랑에는 거짓이 없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지극히 당연한 말 같지만 예나 지금이나 거짓 사랑, 위선적인 사랑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처음부터 거짓 사랑이 있을 수 있고 시간이 흐르면서 참 사랑이 변질될 수도 있습니다. 주님이 에베소 교회에 대해서 뭐라고 책망하셨습니까?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계 2:4) 그리고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고 말합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실제로 악을 사랑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 6절 말씀에 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잘못된 것을 보고 눈을 감아 주는 것은 결코 참 사랑이 아닙니다. 

아울러 그는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비록 혈연관계는 아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원받은 지체들이기 때문에 친형제 이상으로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또한 친형제 이상으로 사랑한다면 서로 먼저 존경하는 것이 지극히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서로 존경할 수 있습니까? 자신을 겸손하게 낮출 때 비로소 상대를 존경할 수 있다는 사실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는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님을 섬기라고 지시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과 주님을 뜨겁게 섬기는 것 사이에는 아무 연관이 없는 것처럼 보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주님을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살 것 같으면 그 주님이 구원하신 다른 지체들을 사랑함에 있어서 결코 게으름을 부릴 수 없습니다.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이란 결코 뒤로 미룰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이어서 그는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쓸 것을 주문하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과 믿지 않는 사람들의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대체로 미래가 절망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죽었던 존재였지만 구원받은 사실에 대해서 다만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리고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 때문에 그 어떤 상황에서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환난 중에 참는 것도 그 장래의 소망 때문입니다. 기도에 항상 힘쓰는 까닭도 바로 그 소망 때문임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는 좀 더 구체적으로 사랑의 실천 방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가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롬 12:13) 자신이 쓸 것을 챙기라는 말이 아닙니다. 다른 지체들이 쓸 것을 챙기라는 말입니다. 성령 충만한 예루살렘 교회가 유무상통했다고 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습니까? 다른 지체들의 처지에 관심을 갖게 되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그는 다만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할 뿐 아니라 손 대접하기에도 힘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당시에는 주로 순회 전도자를 잘 대접하라는 뜻이었지만 오늘 그 의미는 좀 더 넓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열악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땀 흘려 일하고 있는 외국인 근로자들과 다문화 가정의 주부들을 좀 더 잘 대접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이어지는 말씀을 통해서 교회 밖의 이웃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특히 좋은 이웃보다는 좋지 않은 이웃과의 관계에 대해서...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롬 12:14) 일찍이 주님도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 사실 이미 모세를 통해서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레 19:18)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잘못해서 박해를 받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 때문에 박해를 받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물론 억울하고 분합니다. 그러나 저주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저주할 권한이 없습니다. 주님이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요 15:18) 박해자가 우리를 박해하는 것 같지만 알고 보면 주님을 미워하고 박해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결코 저주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그를 축복해야 하고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그는 또한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다른 지체들일 수도 있고 교회 밖에 있는 믿지 않는 자들일 수도 있습니다. 하여간 어떤 대상이 되었든지 간에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물론 원수와 같은 자에 대해서는 좀 어렵겠지만... 그러나 문제는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도 있지 않습니까? 심지어 교회 밖에 있는 믿지 않는 자들이 즐거워할 때, 특히 그들이 우리를 박해하는 자들인 경우 그들과 함께 즐거워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이어서 그는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아무에게도, 또 모든 사람 앞에서 라는 말은 예외는 있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아야 합니다. 선한 일을 도모해야 합니다. 그는 이어지는 19절 말씀을 통해서 좀 더 분명히 지시하고 있습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다만 원수를 직접 갚지 말 뿐 아니라 오히려 원수에게 적극적으로 사랑을 베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롬 12:20) 스스로 부끄럽게 여길 수 있도록 하라는 아주 지혜로운 대처 방안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역사 속에서 과연 그 누가 미움과 시기와 다툼이라고 하는 악순환의 고리를 더 악한 방법으로 끊은 경우가 있었습니까? 악은 악으로 다스릴 수 없습니다. 악은 악으로 이길 수도 없습니다. 악은 더 큰 악을 만들 뿐입니다. 때문에 그는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악을 사용하는 것은 결국 악에게 지는 것입니다. 악에게 이기는 방법은 오직 선을 행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를 누가 먼저 사랑했습니까? 그렇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10) 하나님께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때문에 우리도 사랑을 실천할 수 있게 되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 4:19~20)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을 사랑합니까? 그렇다면 거짓 없는 참 사랑으로 먼저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말과 혀로만 사랑할 것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아울러 원수까지 사랑해야 합니다. 결코 원수를 저주해서는 아니 됩니다. 어떤 경우에도 악에게 지면 아니 되겠다는 말입니다. 우리 대신 십자가를 지신 그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이웃 사랑을 실천하되 원수까지도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그 주님이 주시는 영광의 면류관을 받아 쓰는 참으로 복된 여러분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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