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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여 새 힘을 얻으라 (사 40:2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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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여호와를 앙망하여 새 힘을 얻으라 (사 40:27-31)
 

누구나 한 평생 살아가는 동안 숱한 우여곡절을 만납니다. 이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모든 것을 자기들의 힘으로 해결해 나갈 수밖에 없지만, 성도들은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을 힘입어서 문제를 해결해 나갑니다. 인생의 위기를 만났을 때 세상 사람들은 고아와 같이 그 심정이 외롭고 피곤하지만, 성도들은 하나님 아버지께 모든 걱정, 근심을 맡김으로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당시 유다 나라는 바벨론 제국에게 멸망당하여 예루살렘은 함락되고, 성전은 불탔으며, 왕과 귀족들과 백성들은 포로가 되어 바벨론에 끌려갔습니다. 고난 중에서 유다 백성이 하나님께 부르짖어 간구했으나 아무 응답이 없었습니다. 기도를 들으셨는지 아니 들으셨는지 감감무소식이었습니다. 그러자 유다 백성은 당황하고 낙심했습니다. 그들은 탄식하기를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원통한 것을 하나님께서 돌아보시지 않으신다.”고 했습니다. 이와 같은 경험은 비단 유다 백성 뿐 아니라 우리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욥은 아무 잘못도 없이 형언할 수 없이 큰 환난을 당했습니다. 하루아침에 그 많던 재산을 다 약탈당했고, 열 자녀가 맏이의 집에 모여 잔치를 하던 중에 태풍이 불어와 집이 무너지는 바람에 몰사하였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욥은 온 몸에 악성 종양이 발해서 견딜 수 없는 고통 가운데 연명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므로 재 가운데 엎드려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침묵하셨습니다. 그는 탄식하기를 “주님, 내가 주님께 부르짖어도, 주님께서는 내게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내가 주님께 기도해도, 주님께서는 들은 체도 않으십니다.”(욥 30:20)라고 했습니다.

다윗도 한 때 동일한 심정을 토로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호소했습니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시 13:1) 성경의 인물들 뿐 아니라 우리도 이와 비슷한 형편에 직면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몸과 마음이 아울러 곤비해서 허덕일 때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인생의 위기를 만났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좋을까요?

첫 번째로, 불신앙을 회개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로 하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우리가 겪는 시련과 환난이 모두 다 범죄의 결과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욥의 경우는 오히려 정반대였습니다. 욥기 1장 1절에 보면 “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고 하였고, 하나님께서도 사단에게 이르시기를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욥 1:8)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대로, 욥은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 까닭이 무엇이었을까요? 그 답은, 욥기를 읽어보면 알 수 있는데, 그것은 욥의 신앙을 한 단계 더 향상시켜서 더 큰 복을 받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욥은 고난 중에서 말하기를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욥 23:10)고 했습니다.

그러나 유다 백성는 그들의 허물과 범죄로 인해 시련과 환난에 직면했습니다. 유다 백성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 숭배에 빠졌을 때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그들의 죄를 지적하시고 회개를 촉구하셨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마음을 강퍅하게 만들어서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우상 숭배에 더 몰두하였으므로 하나님께서 바벨론 제국을 막대기로 삼아 유다 백성을 징벌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을 완전히 멸하시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을 정신 차리게 해서 악한 길을 떠나 바른 길로 돌이키게 할 목적으로 그 같은 징벌을 가하셨습니다. 

그것은 부모가 그 사랑하는 자녀가 그릇된 길로 갈 때 사랑의 매를 때리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생의 시련을 만났을 때 겸손히 자신을 반성하고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가운데 살아 왔는지, 아니면 내 고집, 내 욕망을 위해 살아온 것은 아닌지 살펴보고 하나님 앞에 바로 서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시편 119편을 기록한 성도와 같이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67),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71)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인생의 위기를 만났을 때 오직 하나님을 앙망하여 새 힘을 얻어야 합니다.

나라가 망해서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유다 백성은 낙심하고 절망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무능함을 절감하고 이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빠져 있었습니다. 무슨 방법으로 막강한 바벨론 제국의 세력을 꺾고 해방되어 고토로 돌아갈 수 있단 말입니까? 그것은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습니다. 더구나 그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묵묵부답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셨다는 생각은 무력감을 더 심화시켰습니다. 

사람이 무력감에 빠지는 것처럼 심각한 위기는 달리 없습니다. 무력감에 빠지면 매사에 의욕을 상실하고, 사소한 일에도 스트레스를 받고, 내일에 대한 희망을 갖지 못하고, 적개심을 갖고, 자주 분노하고, 냉소적인 태도를 나타내고, 우울증에 시달립니다. 그뿐 아니라, 육체의 건강에도 여러 가지 문제가 생깁니다. 소화가 잘 되지 않고, 만성 피로, 불면증, 고혈압, 심장병, 알레르기 등과 같은 질병이 생깁니다.

그러면 무력감에 빠지는 원인이 무엇일까요? 자기의 무능을 절감할 때 무력감에 빠지기 쉽습니다. 능력이 충분해서 모든 일을 얼마든지 처리할 수 있다면 무력감에 사로잡힐 이유가 없겠지만, 그렇게 만능인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능력은 한계가 있는데, 모든 무거운 짐을 자기 혼자서 다 지고 해결해야 한다는 책임감에 사로잡힐 때 무력감에 빠지기 쉽습니다.

민수기 11장에 보면, 모세와 같은 위대한 인물도 무력감에 빠졌던 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생활을 하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해 매일 같이 만나를 내려주셨으나, 이스라엘 자손은 감사하기는커녕 애굽에서 먹던 식물을 먹지 못하는 것을 불평했습니다. 그들은 울며 말하기를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 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 정력이 쇠약하되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라고 했습니다. 백성들이 각기 장막 문에서 우는 것을 듣고 마음이 상한 모세가 하나님 앞에 엎드려 이같이 고했습니다.

“주께서 어찌하여 종을 괴롭게 하시나이까 어찌하여 나로 주의 목전에 은혜를 입게 아니하시고 이 모든 백성을 내게 맡기사 나로 그 짐을 지게 하시나이까 이 모든 백성을 내가 잉태하였나이까 내가 어찌 그들을 생산하였기에 주께서 나더러 양육하는 아비가 젖 먹는 아이를 품듯 그들을 품에 품고 주께서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가라 하시나이까 이 모든 백성에게 줄 고기를 내가 어디서 얻으리이까 그들이 나를 향하여 울며 가로되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라 하온즉 책임이 심히 중하여 나 혼자는 이 모든 백성을 질 수 없나이다 주께서 내게 이같이 행하실찐대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나로 나의 곤고함을 보지 않게 하옵소서”

그 때 하나님께서 이르시기를 “이스라엘 노인 중 백성의 장로와 유사 되는 줄을 네가 아는 자 칠십 인을 모아 데리고 회막 내 앞에 이르러 거기서 너와 함께 서게 하라 내가 강림하여 거기서 너와 말하고 네게 임한 신을 그들에게도 임하게 하리니 그들이 너와 함께 백성의 짐을 담당하고 너 혼자 지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칠십 인의 장로들을 세우셔서 짐을 나누어지게 하심으로 모세의 무력감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짐을 나누어 져 줄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합니까?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벧전 5:7) 하신 대로,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시편 68편 19절에 이르기를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찌로다”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모든 삶의 무거운 짐을 주님께 맡길 수 있는 것입니다.

바벨론에 끌려간 유다 백성은 낙심하고 절망한 나머지 무력감에 빠져서 탄식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을 향하여 이르시기를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이르기를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 하느냐?”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을 향하여 “야곱아, 이스라엘아” 라고 부르셨습니다. 이는 야곱이 어디서 어떻게 이스라엘이라는 영광스러운 이름을 얻게 되었는지를 그들로 하여금 기억하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야곱이 하란에 있는 외삼촌 라반의 집에 피신하여 20년 만에 갑부가 되어 금의환향하는데, 원한의 칼을 갈고 있던 형 에서가 400인의 군사를 거느리고 그를 맞이하러 달려온다는 전갈을 받았습니다. 그 때, 야곱은 두려워서 안절부절 못했습니다.

야곱은 가족과 짐승 떼로 하여금 앞서 얍복 강을 건너게 하고는 자기는 해질녘에 혼자 나루터에 남아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 동안 야곱이 자기의 꾀를 의지해서 살아왔지만, 이제는 속수무책입니다. 야곱은 절망했습니다. 그러나 그 절망으로 인해 야곱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게 되었습니다. 밤중에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찾아왔을 때 야곱은 그를 붙잡고 애원했습니다. 천사와 씨름하던 중에 환도뼈가 위골되었지만 굴하지 않고 “내게 축복하소서”라고 매어 달렸습니다. 드디어 여호와의 사자가 야곱에게 이르기를 “네 이름이 무엇이냐?” 하였습니다. 

“야곱이니이다” 하니,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고 했습니다. 그 순간, 야곱은 모든 무력감을 떨쳐버렸습니다. 그는 담대한 마음으로 대열의 맨 앞에 서서 에서를 향하여 절뚝거리면서 걸어 나갔고, 에서가 그 같은 동생을 보고는 측은히 여겨 달려와서 얼싸안고 형제간에 화해하게 되었습니다. 야곱이 모든 짐을 하나님께 맡겼을 때 이처럼 최선의 해결책을 베풀어 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에게 “야곱아, 이스라엘아” 하신 것은 야곱이 어떻게 이스라엘이 되었는지 일깨워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변화된 우리의 신분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요 천국의 시민입니다.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위기를 만났을 때 무력감에 빠질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앙망하여 위기를 축복의 기회로 만들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기대치가 실현되지 못했을 때 무력감에 빠질 수 있습니다. 지난날 유다 백성은 바벨론 제국에 의해 멸망당하여 포로로 끌려갈 것을 상상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우상 숭배에 빠져 지내면서도 스스로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하나님의 선택받은 민족이기 때문에 절대로 바벨론에게 망할 리가 없다고 확신했습니다. 더구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이 함락될 리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습니다. 예루살렘은 함락되었고, 성전은 불타 무너졌으며, 왕은 눈이 뽑혔고, 수많은 백성들이 살해당하고 남은 자들은 포로가 되어 끌려갔습니다. 그 때까지 그들이 기대했던 바가 허사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유다 백성은 완전히 무력감에 빠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유다 백성의 잘못된 기대를 깨뜨리셨던 것입니다. 그 대신, 하나님을 기대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오늘날 한국인들은 오천년 역사에서 가장 부유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역사상 가장 일을 많이 하고 가장 피곤한 삶을 살고 있기도 합니다. 어딜 가든지 치열한 경쟁에 내몰려서 심한 스트레스를 감수해야 합니다. 요즘 한국인의 자살률이 세계 1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우리 사회가 그만큼 건강하지 못하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나라의 청소년들은 모두 과중한 공부에 짓눌려서 살아갑니다. 밤낮으로 공부하느라 뛰어놀 여유가 없습니다. 그것은 부모의 기대치가 너무 높은데 원인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부모들이 자기 자녀들을 수재라고 생각합니다. 

성적이 오르지 않는 것은 더 노력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자녀들을 닦달합니다. 이로 인해 무력감에 빠져서 고생하는 자녀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자녀들에게 일등만 하라고 다그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주신 재능을 발견하고 발전시켜 나갈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자녀들에게 공부가 제일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 자녀들이 하나님을 앙망할 때 새 힘을 얻게 되어 활기찬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장년층의 삶은 마치 전쟁을 방불케 합니다. 직장에서도 쉼 없이 경쟁해야 합니다. 경쟁에서 승자가 있으면 패자가 있기 마련입니다. 내가 이기면 동료 중에서 누군가가 지게 되어 있습니다. 더구나 내가 언제나 이긴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더구나 가족의 생활을 책임지고 있습니다. 요즘은 자녀들을 교육시키는 것이 큰 부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장년들이 쉴 겨를이 없이 열심히 일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일만 하다보면 지칠 수밖에 없습니다.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질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열심히 일을 하되 쉴 줄도 알아야 합니다. 건강에 적신호가 켜질 때까지 무리하지 말고 잠시 일손을 놓고 휴식을 취하는 지혜를 발휘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앙망하십시오. 그리할 때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하신 대로, 활력이 넘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을 앙망하려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아야 합니다.

유다 백성이 하나님을 향하여 불신앙적인 언사를 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바로 알지 못한데 원인이 있습니다. 호세아 4장 6절에 이르기를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선지자는 유다 백성을 향하여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는 하나님께 대하여 막연한 지식이 아니라 성경에 입각한 확실한 지식을 가져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어떤 분이라고 말씀합니까?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라고 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영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영원성은 하나님이 시간과 관련하여 무한하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시 90:2)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하신 분이시므로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이 없으십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어제와 오늘이 다르시다면 우리는 불안하여 감히 하나님께 우리 자신의 운명을 맡길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토록 변함없는 분이시므로 우리는 염려 없이 우리의 삶 전체를 내어 맡길 수 있는 것입니다. 

요즘 저축은행의 부정대출 사건으로 돈을 맡긴 많은 사람들이 곤경에 처한 것을 보면서 이 세상에는 믿을 곳이 없다는 사실을 절감합니다. 세계적인 기업이 하루아침에 부도로 무너지는가 하면, 정권이 바뀌자 어제의 권력자가 죄수의 몸으로 법정에 서기도 하고, 그를 믿고 따르던 자들은 모두 낭패를 당하는 경우를 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시 146:3-4)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영원하신 분이시므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결코 낭패를 보는 일이 없습니다. 성경에 보니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여호와는 천지와 바다와 그 중의 만물을 지으시며 영원히 진실함을 지키시며”(시 146:5-6)라고 하였습니다. 그런즉 영원하신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언제나 활력이 넘치는 삶을 살아가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은 아무리 능력이 뛰어난 자라도 한계가 있습니다. 대기업을 일으킨 경영의 달인도 파산할 수 있고, 수십 년을 통치하던 독재자도 권좌에서 쫓겨납니다. 일본의 원전 사고는 과학 기술의 한계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의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진정한 지혜는 자기의 무지와 무능을 인정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능력으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공허 대신에 충실을, 흑암 대신에 광명을, 혼돈 대신에 아름다운 질서와 조화로 채우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할 때 모든 시련과 환난을 이기고도 남을 지혜와 능력을 공급받게 됩니다.

셋째로, 하나님은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지으신 만물을 운행하시며 섭리하십니다. 세상 나라들의 흥망성쇠를 주관하시며, 성도들의 삶을 인도하십니다. 유다 백성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사정을 모르시고 원통한 것을 해결해 주지 않으신다고 불평했지만, 그러한 생각은 그들의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많은 일을 하셔도 곤비치 아니하며 피곤치 않으십니다. 우리가 산더미 같은 문제를 하나님께 가져갈지라도 거절하지 않으시고 기꺼이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명철이 한이 없으시므로 모든 것을 다 아시고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다 아시며 최선의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또한 우리가 무엇을 구할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아시고 가장 좋은 것으로 응답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응답이 늦어서 낭패를 당하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사정이 하나님께 숨겨졌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유다 백성은 말하기를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고 했지만, 그것은 그들의 오해에 불과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시도 자기 백성을 잊으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야곱아 네가 어찌하여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어찌하여 이르기를 내 사정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원통한 것은 내 하나님에게서 수리하심을 받지 못한다 하느냐”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책망하고 계신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무능함이나 연약함을 꾸짖지 않으십니다. 시편 103편 14절에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 하신 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무능함과 연약함을 잘 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부득이한 실수에 대하여 얼마든지 용납하시고 긍휼을 베풀어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불신앙을 책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내 사정은 하나님께 숨겨졌고 하나님께서는 나를 도와주시지 않으니 끝장났다고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대신 긍정적인 믿음의 말을 해야 합니다. 고라 자손과 같이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흉용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지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시 46:1-3)라고 외쳐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위기와 곤경에 처할지라도 오직 하나님을 앙망하기만 하면 새 힘을 공급받아서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고 걸어가도 피곤치 않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앙망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의 태도를 말합니다. 하나님을 앙망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끊임없이 생각하는 것을 의미 합니다. 여러분의 연약함을 바라보고 낙심하지 마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생각하시고 힘을 내십시오. 고통 대신에 도움을 베푸시는 하나님, 오늘도 살아 계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을 마음 깊이 생각하십시오. 바로 그것이 하나님을 앙망하는 것입니다.

또한 여호와를 앙망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기대를 갖고 기다리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대하는 사람을 도와주십니다. 그리고 여호와를 앙망하는 것은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간절하게 하나님을 구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 8:17)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앙망하는 성도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인내하며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이사야 30장 18절에 “대저 여호와는 공의의 하나님이심이라 무릇 그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되 하나님의 때에 역사하십니다. 우리는 어린아이와 같이 조급하게 굴지 말고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때까지 오래 참고 기다릴 줄 아는 성숙한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인생을 사노라면 때로 낙심할 때도 있고 피곤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여러분의 능력이나 지혜나 돈이나 유력한 사람들을 의지하지 마시고 여호와 하나님을 앙망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앙망할 때 새 힘을 공급받아서 폭풍우 속에서도 의연하게 날개 치며 올라가는 독수리와 같은 삶을 살게 됩니다. 창공에서 독수리처럼 높이 날고 당당하고 힘 있고 강한 새가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성도들에게 새 힘을 주셔서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오늘 이 설교를 경청하신 성도님 마다 부정적이고 불신앙적인 생각과 말을 버리고, 영원하시며, 전지전능하시며, 지금도 우리의 삶을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앙망하심으로 새 힘을 얻어서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은 삶,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한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삶을 영위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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