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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도응답이 지연될 때(1) (요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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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요11:1-4 

 여러분, 운동 경기 중에서 사인이 가장 많이 오고가는 스포츠가 무엇인지 아시죠? 그렇죠 아마 야구일 것입니다. 야구에서 사인이 과연 얼마나 오고갈까? 투수가 공 던질때마다 그리고 중요한 순간, 타자들이 나올때마다 오고가니까 아마도 수백회 오고 갈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사인이 항상 자기가 원하는대로 주어지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사인이란 것도 커뮤티케이션의 한 방식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커뮤니케이션의 독특한 특징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일방이 아니라 쌍방간에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투수쪽에서 이 공을 던지고 싶다고 사인을 보내도 포수가 그건 안돼라고 고개를 저으면 다시 한번 사인을 내고 그렇게 해서 절충을 해 나가는 것입니다. 
감독이 기다려라 사인을 냈으면 타자는 자기가 아무리 좋아하는 코스의 공이 들어온다고 하여도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또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코스의 공이 들어와도 무조건 치라는 싸인, 전문용어로 힛앤드런 싸인이 나면 헛스윙이 되는 한이 있어도 배트를 휘둘러야 합니다. 그래야 팀을 승리로 이끌어 갈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의사소통의 과정이 운동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도 존재한다는 것을 아십니까? 하나님과 우리의 의사소통의 과정이 무엇일까요? 예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영혼의 호흡이며 하나님과의 대화인 기도일 것입니다.
이 하나님과의 의사소통과정에도 야구와 마찬가지로 세 가지 종류의 사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응답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음을 아마 알고 계실 것입니다. 
바로 yes와 no 그리고 wait입니다. 
이것을 잘 알고 있지만 우리는 이것을 알고만 있을 뿐 삶 속에서는 잘 인정하려고 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아주 많습니다. 

어떤 면에서 그럴까요? 우리가 기도응답의 간증을 듣게 되면 대부분의 간증의 내용은 기적적인 방법으로 또 즉각적으로 응답을 받은 yes의 경우만을 듣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런 이야기들을 들으면 웬지 아직 나는 기도와는 인연이 없고 믿음이 많이 부족한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드는 경우가 많다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할 것은 우리가 기도한 그 즉시 우리가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이 예스로 응답되지 않고 우리의 기도의 응답이 지연되거나 또는 거절당한다고 하여도 그것으로 인해서 우리가 낙심하거나 좌절하거나 실망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에 예스로 즉각 응답하시거나 아니면 그 기도에 대한 내용을 잠시 보류하시거나 또는 아예 거절하신다고 하여도 분명한 것은 그러한 하나님의 응답의 방식과 상관없이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시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 했을 때 예스라고 응답받는 그 사람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이고 노로 혹은 잠깐 보류로 응답받는 사람은 하나님이 사랑하시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착각에 빠져서는 결단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울러 예스로 응답받는 사람은 기도의 능력이 있는 사람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기도의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는 또 한가지 착각에 빠져서도 결단코 안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말씀에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기적을 통해 우리에게 이 사실을 말씀하시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을 볼까요? 3절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평소 예수님께서 자신의 오빠 나사로와 자기 남매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께서 빨리 와 주셔서 병든 오빠를 고쳐주시기를 간청합니다. 

여기에서 유의해 보아야 할 단어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사랑하시는 자라는 부분입니다.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말이 이들 남매만의 착각일수도 있었겠죠? 그러나 성경은 그것이 착각이 아니라 사실이었음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고 있습니다. 5절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실제로 이들 남매를 누구보다 사랑하시고 계셨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아주 중요한 교훈 하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사랑하는 자도 병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이 사랑하는자도 병들어 죽게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줄로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때로는 질병도, 가난도, 어려움도 고난도, 고통도 슬픔도 허락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고통은 주지 않고 아픔은 주지 않고 질병은 주지 않고 슬픔은 주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시지만 그런 것도 우리에게 주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목사님, 사랑하시는데 왜 고통을 주시고 아픔을 주시고 슬픔을 주시고 질병을 주시나요? 그것이 말이 됩니까? 말이 됩니다. 
자 이제부터 제가 왜 말이 되는지 설명해 드리죠... 
여러분이 잘 아는 대로 독수리는 새끼를 훈련시킬 때 아무렇게나 훈련시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독수리는 하늘의 왕자이기 때문에 그렇죠... 하늘의 왕자로서의 자부심과 긍지가 있기 때문에 자기 새끼를 그저 늘 편안하고 안락하게 훈련시키지 않습니다. 
독수리는 태어난 지 며칠 되지 않아서 어미 독수리의 인도 속에 벼랑 끝으로 갑니다. 거기서 어미 독수리는 찢어지는 마음을 가지고 새끼 독수리를 떨어뜨립니다. 
자기 새끼를 떨어뜨리는 그 독수리어미의 마음이 즐겁고 기쁠까요? 
제가 독수리에게 물어보지 않았지만 아마 그렇게 기쁘고 즐겁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미 독수리가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독수리의 미래를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훈련하지 않으면 새끼 독수리는 하늘의 왕자가 될 수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새끼 독수리를 떨어뜨리면 새끼 독수리는 아직 채 펴지지도 않은 날개를 마구 휘저어 대며 저 깊은 계곡 바닥으로 힘없이 떨어집니다. 그래도 떨어져 죽지 않으려는 생존적 본능으로 날개를 휘저어봅니다. 결국 바닥에 떨어지기직전 어미는 어느새 멋지게 날아와 다시 그 새끼를 태우고 높은 하늘로 올라갑니다. 아이고 살았다.. 좋아하고 있는 어느 순간 또 다시 그 새끼를 내팽겨칩니다. 
독수리 새끼는 아마 그 순간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우리 엄마는 날 싫어하나봐.. 날 맨날 이렇게 높은 하늘의 창공 한 가운데 내동댕이쳐... 차라리 낳지를 말지 왜 나아가지고 이렇게 고생을 시켜...
그러나 그런 훈련에 훈련을 거듭하게 되는 어느 날 독수리는 자기도 알지 못하는 순간에 날개에 힘을 얻어 하늘의 왕자로서 위엄 있게 하늘을 날 수 있는 그날을 맞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날 그 새끼 중의 한 마리가 그만 한 농가에 떨어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농부가 그 독수리를 불쌍하게 생각해서 병아리와 함께 키웠습니다. 병아리처럼 먹고 그들과 놀던 그 독수리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만 병아리 같은 독수리가 되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하늘을 날지도 못하고 하늘의 왕자는커녕 벌레 한 마리 가지고 병아리와 다툼하는 지극히 부끄러운 독수리답지 못한 독수리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되시는 하나님이 여러분의 아버지되시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이요 딸을 위해 찢어지는 마음을 가지고 허락하시는 고난과 어려움과 슬픔과 눈물을 우리는 감사함으로 극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 입니까? 우리를 병아리와 같이 세상에 썩어질 사람이 아니라 하늘을 나는 독수리처럼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하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시련과 아픔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우리를 성숙시키시고 훈련시키시기 원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하기에 여러분의 삶 속에서 부딪히는 크고 작은 어려움과 고난과 슬픔과 아픔과 눈물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말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아픔까지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롬8:35-39까지 읽어볼까요?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 앞에 어려움과 고난과 위험과 가난과 눈물과 한숨도 때로는 허락하십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들이 결코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을 통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이 더 뜨겁게 알 수 있고 우리 역시 하나님을 더 뜨겁고 아름답게 사랑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오늘 이 밤에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끊을 수 없는 사랑으로 사랑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좋습니다. 목사님,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나사로도 병들었습니다. 그것은 인정하겠습니다. 그런데 왜 와서 고쳐주시라는 기도에는 또 응답하시지 않은 걸까요? 
왜 바로 가서 고쳐주셨으면 살아났을 그 사랑하는 나사로가 죽어 썩어서 냄새 날 때까지 눈물로 지켜보셔야만 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었습니다. 4절 말씀을 볼까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 병을 허락하셨고 죽음을 허락하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마리아와 마르다의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은 것은 그들의 기도가 잘못되었다거나 그들이 믿음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시지 않았기 때문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이 계획하신 그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참으로 중요한 교훈을 주는 것입니다. 
기도의 응답에는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는 나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기도의 응답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속담에 떡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치국부터 마신다는 말이 있습니다. 떡을 주는 것은 주는 사람의 마음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떡을 주면 먹는 것이고 안 주면 못 먹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때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내가 기도하고 간구한다고 모든 것이 지금 즉시 바로 응답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하나님이 마음이 나쁘셔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아니 사랑하면 주셔야지? 왜 안 주시고 미루십니까?
저에게는 일곱 살짜리 딸 다은이가 있습니다. 그 딸은 엄마와 아빠 중에 누구랑 쇼핑할래? 하면 아빠랑 쇼핑한다고 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엄마는 원하는 걸 잘 안 사줘도 아빠는 웬만하면 다 사주기 때문입니다. 제가 제 딸이 원하는 건 웬만하면 다 사줄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그 딸이 저에겐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힘에 겹도록 챙겨주고 원하는 걸 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떼를 쓰고 울어대도 사줄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날카로운 칼입니다. 아무리 달라고 떼를 쓰고 울어대도 서슬이 시퍼런 칼은 사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울고 불고 땡강을 부리고 강청을 해도 부모입장에서 칼은 절대로 그 손에 쥐어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차라리 가슴이 아파도 같이 눈물을 흘리는 한이 있어도 울다가 지칠때까지 내버려두는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인간인 부모도 그럴진대 우리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위해 정말 아무것도 아끼시지 않는 우리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주시는 분이십니다. 롬8:32절 말씀 무엇입니까?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하나 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까지 우리를 위해 아낌없이 내어주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위하여 아끼실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그것을 우리가 달라고 보채기도 전에 이미 있어야 할 줄 아시고 베풀어주시고 채워주시기 원하시는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는 참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직 우리가 받을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직은 그것을 우리에게 주셨을 때 유익하기보다는 해가 될 것 같으니까 우리를 너무 사랑하시니까 주시지 않는구나하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즉시 예스로 응답하시지 않으시고 때로는 안 돼 no로 응답하거나 아니면 wait 기다려라고 말씀하셨을때 우리는 실망하고 낙심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 역시 우리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기도의 응답이 예스로 이루어 졌을때는 찬양을 하고 감사헌금을 하고 간증을 하고 야단법석을 피우지만 우리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때는 침울해가지고 코가 쑥 빠져 쳐져 있습니다. 
자식이 대학교에 척하니 붙으면 대학 합격 감사 꽃꽃이, 승진 감사 꽃꽂이는 하지만 대학낙방감사헌금, 불합격감사헌금은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기준에서 하나님의 권한을 인정하지 않는 잘못된 태도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 모든 일이 이루어지지 않고 노로 혹은 웨이트로 응답되어도 그것이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인정한다면 하나님께 진정으로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숙한 성도입니다. 

제 여동생의 딸 그러니까 제 조카가 있는데 아이가 참 성숙합니다. 그 아이는 5살되었을때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무엇을 사달라고 막 조르다가도 엄마 눈치에 돈이 없는 것 같이 보이면 엄마 돈 없어? 하고는 알았어 다음에 사줘 이렇게 말한답니다. 부모입장에서 그 5살밖에 안된 아이의 성숙한 모습을 보고 어찌 대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다음에 돈이 생기면 제일 먼저 그 아이가 사달라고 했던 그 물건을 사주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자라 사리를 분별할 수 있는 나이가 되면 과도 아니 식칼 아니 도끼 아니라 전기톱이라도 비록 위험하지만 달라고 하면 줍니다. 더 이상 위험하지 않다고 생각되기 때문이죠.. 
하나님앞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우리가 기도하는 것을 받을 수 있을 만큼 얼마나 성숙되어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달라고 하지 않아도 주실 만큼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서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이 정도면 되겠다 싶으실 때 그 때가 되면 또 하나님이 생각하시고 계획하셨던 그 때가 되면 하나님은 반드시 주십니다. 
그러기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당장 우리가 기도하는대로 바로 즉시 무엇인가 확 뒤집어지고 달라지는 것이 보이지 않더라도 그저 감사하면서 그 때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변함없이 하나님의 영광을 기대하고 소망하시기 바랍니다. 
그런 사람에게 노 혹은 웨이트의 응답도 예스의 놀라운 응답으로 바뀌어질 수 있는 그 날이 올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조지 뮐러 목사님은 평생동안 5만번이상의 기도의 응답을 받은 위대한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뮐러 목사님은 고아원을 운영하는 고아들의 아버지였습니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목사님을 찾아와 이 많은 고아들을 어떻게 다 양육할 수 있습니까? 목사님의 가장 큰 후원자는 누구입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은 한 골방으로 그 사람을 데리고 들어가 한 방석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방석에는 구멍이 두 개 뚫려있었습니다. 그 방석은 목사님이 늘 무릎을 꿇고 기도하던 방석이었습니다. 
그처럼 평생 5만번 이상의 기도의 응답을 받은 뮐러 목사님이 60년동안 기도하면서도 응답을 받지 못했던 것이 있었는데 바로 친한 친구의 구원을 위한 기도였습니다. 뮐러 목사님은 60년 동안이나 그 친구가 구원받아 주님을 믿기를 간절히 기도했지만 끝내 친구의 구원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친구는 조지 뮐러 목사님의 장례식에 왔다가 결국 예수님을 영접하고 주님을 잘 믿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결국 60년동안 기도했던 기도는 응답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도하는 사람은 죽을 지 몰라도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드리는 기도는 죽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없어질지 몰라도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드리는 기도는 없어지지 결코 없어지지 않는 줄로 믿습니다.

한번 따라해 봅시다. 기도하는 사람은 죽어도 기도는 죽지 않는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하기에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하는 일을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우리의 기도는 반드시 살아서 응답될 것입니다. 우리가 죽을 때까지 응답되지 않으면 죽어서라도 우리의 기도는 반드시 응답될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낙심하지말고 포기하지말고 주님을 향하여 더욱 간절히 기도하는 믿음의 성도들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으면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밤 하나님이 우리를 우리 자신보다 더 사랑하고 계심을 잊지 않으시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늘 형통하고 좋은 길 뿐만 아니라 때로는 시련과 고난을 함께 허락하시고 그것을 통해 우리를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왕자와 공주로 훈련시키시고 온전히 세워가시길 원하고 계신다는것을 깨달으시길 바랍니다. 
아울러 그처럼 하나님은 그처럼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가 구하기 전에 있어야 할 것을 아시고 또한 우리가 하나님앞에 구할 때 아낌없이 우리를 위하여 허락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우리를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늘 예스로만 응답하시는 것이 아니라 웨이트와 노로도 응답하심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셔서가 아니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노와 웨이트가 예스가 될 때까지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포기하지말고 기도하자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일을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하나님도 우리에게 응답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오늘 이 밤 우리 모든 성도들이 그러하기에 하나님이 주시는 응답의 날, 영광의 날이 올때까지 변함없이 기도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고 담대히 기도하는 복된 믿음의 성도들이 될 수 있길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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