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기도응답이 지연될때(2) (요 11:33-35)

첨부 1


어느 한 남자가 미국의 캘리포니아해안을 기도하며 걸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큰 소리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나님! 저의 간절한 소원 하나를 들어주세요"
그러자 갑자기 이 남자의 머링 위 하늘의 구름 위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너의 변함없는 믿음을 보고 내가 한가지 소원을 꼭 들어주마"

그 남자가 말하길
"하와이까지 다리를 하나 만들어서 내가 언제든지 차로 갈수 있게 해주세요."

그러자 하나님께서 
"너의 기도는 들어가는게 너무 많아. 그게 보통 일이 아니야.
다리의 교각이 태평양 바다밑까지 닿아야하고
콘크리트와 철근이 얼마나 들어가야 하겠니?
내가 할 수 는 있지만 정말 세상 살아가는데 꼭 필요하다고 할수는 없겠구나. 
조금 더 생각해보고 내 영광을 나타낼 수 있는 다른 한가지 소원을 말해보아라."

그 남자는 한참동안 더 생각하다 결국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 저는 여자들을 잘 이해하기를 원합니다.
여자들이 내게 토라려 말 안하고 있을 때 마음 속에 어떻게 느끼고 뭘 생각하는지, 왜 우는지..
여자들이 '아니, 신경쓰지마 - '라고 할 때 그말의 참 뜻이 뭔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여자들을 정말로 행복하게 할 수 있을지 알기 원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숨도 안 쉬고 곧 바로 대답하셨다.
"하와이까지 가는 다리를 4차선으로 해주랴, 8차선으로 해주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에겐 하와이로 가는 다리를 만드는 일도 토라진 여인의 마음의 뜻을 알게 하는 것도 아무것도 아닌 일입니다. 우리가 기도할때에 우리는 그보다 더 크고 위대한 기도의 응답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지지난주에 말씀드렸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에 늘 예스로만 응답하시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예스로 즉시 응답하실때보다는 노나 웨이트로로 응답하실때가 훨씬 많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기도가 노로 거절되고 웨이트로 기다리라고 말씀하실 때 역시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주신 기도의 응답임을 잊지 말자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왜 그렇다고 말씀을 드렸습니까? 
지금 당장 내가 원하는대로 예스로 응답하지 않고 기도의 응답을 안 된다고 하시거나 기다리라고 하시는 것조차도 정말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렇게 하신다는 것을 제 딸을 통해 설명드렸습니다.. 
우리 딸 다은이에게 아빠로서 뭐든 나 주고 싶지만 딸이 가져서는 안 될 것을 달라고 하면 절대로 줄 수 없는 것은 딸을 미워해서가 아               니라 정말로 사랑해서임을 말씀드렸습니다. 
정말 성숙해져서 가져도 되는 그때가 오면 칼이 아니라 톱이나 망치, 도끼 심지어 전기톱까지도 줄 수 있고 달라고 하지 않아도 주면서 과일 좀 깎으라고 나무 좀 베라고 말하게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하기에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그 때가 될 때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낙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좌절하지 않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기도하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당장 우리가 기도하는대로 바로 즉시 무엇인가 확 뒤집어지고 달라지는 것이 보이지 않더라도 그저 감사하면서 하나님이 정하신 그 때를 믿음으로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변함없이 하나님의 영광을 기대하며 간절히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 
왜 그래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나요?
기도하는 사람은 죽을 지 몰라도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드리는 기도는 죽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없어질지 몰라도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드리는 기도는 결코 없어지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이렇게 말씀을 들을 때는 아멘하고 맞다 그렇지 하나님이 정하신 그 때가 되면 반드시 응답해 주실거야 하면서 감사하면서 돌아가지만 삶 속에서 또 기도의 응답이 지연되거나 거절될 때 우리는 또 다시 실망하고 낙심하며 좌절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응답하시는 그 영광의 날을 기다리는 것이 또 다시 너무 힘들고 멀게 느껴진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그렇죠? 
고개를 끄덕 끄덕하시네요..
그렇습니다. 너무 멀고 험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언제쯤 그 시간이 돌아올까 까마득하게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그런 연약함을 너무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을 통해 다시 한번 우리를 위로하시며 격려하시고 힘을 주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 요11장 33절에서 35절 말씀을 볼까요? 
슬퍼하는 사람들 속에 울고 있는 사람들 속에 누가 있었습니까? 
바로 우리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곳에서 울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함께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며 함께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예수님은 우리의 고난과 상관없이 저 멀리서 팔짱을 낀 채 무관심하게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은 고난의 현장에 우리 혼자 고통 받으라고 내팽개쳐놓으시는 주님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즐겁고 기쁜 순간에만 우리와 함께 하시고 고통스럽고 외로운 순간에는 우리와 함께 하지 않으시는 주님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푸른 초장과 맑은 시냇물가에만 함께 하시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는 함께 하시지 않는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즐겁고 기쁘고 감사한 순간뿐만 아니라 뼈를 깎는 고통의 순간, 눈물이 멈춰 흐르지 않는 그 아픔의 순간에도 변함없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주님이신 것입니다. 
 
우리가 눈물 흘릴 때는 우리와 함께 눈물 흘리시고 우리가 고통당할 때는 우리와 함께 고통당하시며 우리가 한숨 쉴 때는 우리와 함께 한 숨 쉬고 계시는 그런 사랑의 주님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저의 생각을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히4:15절을 찾아보죠.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모든 일에 한결 같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그 분이 바로 우리가 섬기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사실입니다. 

육신의 부모도 자녀가 아프면 하나님 차라리 저 아이 대신 제가 아프게 해주세요라고 말할 정도로 자녀를 사랑합니다. 육신의 부부도 남편이 아프면 차라리 내가 아프게 해주세요 하며 뜬 눈으로 밤을 새웁니다. 아내가 아파도 함께 아파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것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하물며 우리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고통과 눈물과 한숨과 좌절의 그 자리에 함께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항상 여러분의 고통의 순간에 함께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4장 말씀처럼 한결 같이 우리와 같이 시험을 받고 계십니다. 함께 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실 우리는 살면서 어떤 때는 아니 대부분의 경우 하루 종일 살면서도 태양을 인식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태양을 인식하지 못한다고 해서 우리에게 태양이 비취지 않나요?
우리의 인식과 상관없이 태양은 변함없이 떠서 우리를 향해 비취고 있습니다. 태양이 우리에게 비취지 않는 적은 단 한번도 없습니다. 
우리가 낮에는 태양을 인식하지 못하고 밤에는 달을 인식하지 못해도 세상 끝날까지 아침이 되면 태양이 밤이 되면 달빛이 우리를 향해 비취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입니다. 

혹시 태양이 사라져버려서 우리에게 비취지 않는 일이 있을지라도 혹시 달이 조각 조각나서 없어져 버려 우리에게 비취지 못하는 일이 있을지라도 우리주님이 우리를 향해 비추시는 은혜의 빛만은 비취지 않는 법이 없는 줄로 믿습니다.  
이 사실을 결단코 잊지 마십시오... 

혹시 먹구름 뒤에 태양이 가려지고 달빛이 구름에 가리워지는 일은 있지만 여전히 그 구름들 뒤에는 태양이 달빛이 우리를 향해 비취고 있듯이 우리 주님의 은혜를 우리가 인식하든 못하든 우리 주님의 은혜는 우리에게 비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어려움과 고통과 눈물과 한숨 속에서 우리를 홀로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함께 눈물 흘리며 함께 고통당하며 함께 기도하고 계시는 사랑의 주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주님이 오늘 이 밤도 우리의 모든 눈물과 한숨 속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와 함께 기도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눈물 흘려주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사로는 무덤에 있었고 죽은 지 나흘이 되어서 냄새가 나고 있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그 전혀 가능성 없어 보이는 그 나사로를 향해, 굳게 닫힌 돌문을 향해 돌문을 옮겨놓으라고 말씀하십니다. 39절입니다. 때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마르다는 예수님, 벌써 죽은 지 4일이 되어서 시체 썩는 냄새가 난다니까요.. 하면서 예수님께 따졌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함께 하심을 믿는다고 말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막상 돌을 옮겨 놓으라고 말하는 예수님의 말씀에는 에이 주님, 설마 될까요? 하는 여전히 믿음없는 모습을 내비칩니다. 사실은 이것 때문에 하나님의 기적은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크고 위대한 일을 행하시기 위해 놀라운 기적과 역사를 보여주시기 위해 다 준비하고 이것만 하라고 말씀하는데 우리는 그것을 주저하고 두려워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연약한 믿음의 한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네믿음대로 될 지어다... 모든 일은 우리의 믿음대로 되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 성숙되어서 때가 되면 그 기적은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믿음이 성숙하도록 기도하기 바랍니다. 성숙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도록 기도하기 바랍니다. 그럴 때 기적과 역사는 일어나는 것입니다. 

홍해 앞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진퇴양란의 위기에 처해있던 모세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말씀을 믿고 지팡이를 홍해를 향해 내어밀었습니다. 그때 기적과 역사는 일어났습니다. 
두 눈에 진흙을 붙이고 실로암 못가에 가서 믿음으로 두 눈을 씻었던 소경의 눈이 밝아졌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말로만 믿는다고 했을 때 기적이 일어나는 법이 결코 없었습니다. 믿음은 행함입니다. 말뿐인 믿음은 가짜 믿음이요, 죽은 믿음인 것입니다. 

어느 연립주택에 화재가 났습니다. 아버지가 퇴근을 하는 길에 보니 자기 집에 불이 났습니다. 아버지가 달려와 보니 이미 자기 집이 다 타들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창문으로 초등학교 6학년인 아들이 보였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향해 크게 외쳤습니다. 얘 00야 이 아버지를 믿고 이쪽으로 뛰어내려라.. 아버지가 받을테니..
 여긴 5층인데 아버지가 놓치면 어떻게 해요? 그럼 저는 죽고 말아요.. 
00야 걱정말고 뛰어내려.. 이 아버지가 있쟎니? 
믿음이란 불타고 있는 5층집에서 아버지를 향해 뛰어내릴 수 있는 용기요 결단입니다. 될까를 생각하면 그때부터는 믿음이 아니라 인간의 생각이 작용하게 됩니다. 

홍해야 갈라져라하고 지팡이를 내어 밀었을 때 홍해가 그대로 흐르면 난 백성들앞에서 뭐가 되나?라고 모세가 생각했다면 모세는 절대로 지팡이를 내어밀 수 없었을 것입니다. 될까를 생각하면 그때부터는 믿음이 절대로 역사할 수 없습니다. 믿음은 말씀에 의지하여 돌문을 굴려놓는 것입니다. 썩어서 냄새나는 그 무덤의 문을 굴려놓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불가능하다고 포기하고 주저 앉아있고 예수님께  불평하며 손 놓고 있었다면 죽은 나사로, 썩어 냄새나는 나사로는 영원히 그 무덤 속에 있었을 것입니다. 다시 부활하게 되는 그 부활의 영광을 누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상황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상황이 죽은 나사로처럼 아무 가능성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상황이 앞에는 홍해가 뒤에는 애굽 군사가 쫓아와 꼼짝없이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 것도 못하는 상황일때 일수록 우리에게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아무것도 못할 수 밖에 없기에 우리가 아닌 하나님이 일하실수 있도록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쉽게 감당할 수 있는 상황에서는 하나님이 일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일하실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진퇴양란의 상황, 막다른 골목, 아무 가능성도 없어 보이는 죽은 지 나흘이 된 썩어 냄새나는 무덤 속 나사로와 같은 상황 속에서 하나님은 일하시고 역사하십니다. 
그 불가능의 상황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아무것도 못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르게 되면 그 때는 하나님이 일하실때라는 것을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가 그 절박하고 막막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행하실 수 있음을 믿기 원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인간의 끝이 하나님의 시작입니다. 
한번 따라해봅시다. 인간의 끝이 하나님의 시작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왜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세상 사람들도 우리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다 끝을 경험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죽음을 경험하면서 이 세상의 삶은 끝나게 됩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의 끝은 그냥 끝으로 끝납니다. 그러나 우리의 끝은 하나님 이 시작하시는 구원의 시작이며 천국의 시작이 된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그것을 믿으신다면 우리의 삶에 때로는 이제는 끝이다는 생각이 들 때 역시 이대로 끝나게 하지 않으실 그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으셔야 합니다. 우리가 끝났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하나님이 일하기 시작하시기 때문입니다. 무엇하기만 하면 바로 우리가 그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일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의 썩어서 냄새나는 나사로의 무덤문을 열어놓았던 사람들처럼 여러분의 전혀 가능성 없고 끝났다고 생각되는 문제들까지도 오늘 이 시간 주님 앞에 내어 놓으십시오. 그리고 그 분이 우리를 위해 역사를 시작 하실 수 있도록 그 분이 우리를 위해 기적을 시작 하실것을 믿고 맡기십시오. 그럴 때 하나님의 영광은 나타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지난주 말씀부터 묶어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우리는 요11장의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많은 것들을 새롭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첫째, 주님이 사랑하는 자에게도 질병과 고통과 고난은 주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우리에게는 질병이나 고난이나 어려움조차도 하나님이 우리를 미워하셔서 주신 것이 아니요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기 위한, 우리의 연약한 신앙을 굳건히 하고 성숙케 하기 위한 훈련의 과정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또 다른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지 않기 때문에 주신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주신 축복으로 가는 통로로서의 고통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둘째, 그 고통을 극복해가는 과정 속에서 때로는 우리가 기도하는 기도가 즉각적으로 응답되지 않는 것 역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요, 영광을 나타내기 위한 과정이었습니다. 
세 가지 기도 응답 예스, 노, 웨이트는 모두 하나님이 주신 기도의 응답이며 그러하기에 우리는 세 가지에 모두 감사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지금 당장 예스로 응답해주시지 말할 나위없이 좋지만 노나 웨이트로 응답해주셔도 미리 감사하고 계속 간절히 기도할 때 노나 웨이트 역시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예스로 바뀌게 될 날이 올 줄로 믿습니다. 

셋째, 그때까지 너무 힘들고 어렵다고요? 낙심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힘들고 고통스러운 고난의 과정은 우리 혼자 겪어나가야 할 외로운 싸움이 아니라 주님이 함께 하시고 주님이 함께 눈물 흘리시고 주님이 함께 기도하여 주시는 주님과 함께 하는 과정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하기에 소망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먹구름 뒤에 태양이 여전히 비추어있고 어두운 구름 뒤편에는 여전히 달빛이 우리를 향해 비추고 있는 것처럼 주님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혹시 태양이 사라져버리고 달이 없어져버린다할지라도 우리에게 비취는 주님의 은혜의 빛은 절대 사라지지 않을 줄로 믿습니다.

넷째, 마지막으로 이 힘들고 고통스러운 과정은 결국 우리의 믿음을 통해 예수님께서 종지부를 찍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말로 떠들어대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행동이며 결단입니다. 썩어서 냄새나는 시체가 있는 무덤의 문을 굴려 열어놓는 것이요, 아직도 시퍼렇게 넘실대고 있는 홍해를 향해 믿음의 지팡이를 내어 미는 것이 믿음이요, 두 눈에 진흙을 덕지덕지 바르고 실로암 못가에 가서 그 진흙을 씻어내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 모든 사람이 이제는 끝났다고, 아무런 가능성이 없다고 말하는 그 시간이 바로 하나님이 시작하시는 시간이라는 것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인간의 끝이 하나님의 시작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고 하나님을 믿는 우리이기에 끝이 시작으로 바뀔 수 있음을 믿으며 그 믿음으로 담대히 기도하며 나아갈 수 있는 귀한 믿음의 성도들 될 수 있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