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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 21: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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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 21:15-19) 

각 나라와 민족들마다 고유한 문화와 특성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어떤 사학자가 한국인의 사고방식에 대해 말하기를 마치 보자기와 같다고 한 말을 들었습니다.

서양 사람들은 가방 사고를 하는데 한국 사람은 보자기 사고를 한다는 것입니다.
가방과 보자기가 어떤 점에서 다른가 하는 것은 아마 모두가 다 아시지 않습니까?

보자기는 가방에 비해서 크고 작고, 희고 검고를 막론하고 두루 감싸듯이 한국인은 본심을 포장해 가지고 남이 그 속을 감지할 수 없도록 하는 경향이 크다는 말입니다 

쉽게 말하면 자기 속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양에 비해 우리의 가정은 부부 사이나 부모 자식간 감정의 표현이 매우 인색한 것은 이런 문화적이고, 민족성의 배경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서양 사람들을 보면 아무나에게 사랑이라는 말을 얼마나 자연스럽게 잘 사용하는지 모릅니다. 

그에 비해 우리나라 사람들의 정서에는 사랑한다는 말을 입에 담는 것을 쑥스러워 하고 때로는 ‘사랑’ 을 너무 많이 말하면 헤픈 사람처럼 여기기도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세상에서 사랑을 확인하는 질문과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대답을 듣는 자리에서 얼마나 많은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는지 모릅니다.

사랑의 고백 한 마디에 병마를 이기고 일어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에 용기를 얻어서 다시 새 출발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가 하면 슬픔과 낙심에 빠져 있던 사람이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에 웃음과 기쁨을 다시 회복하고 사랑이라는 말에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사랑이라는 말 한마디가 큰 힘을 발휘하는 것처럼 영적인 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 사랑의 고백이 오고 갈 때에 엄청난 일들이 일어납니다.

우리 한번 따라해 보시기 바랍니다. 마음을 열고 “주님 사랑합니다” “주님 너무 너무 사랑합니다” 

내가 아무리 점잖은 사람이라도, 세상에서 아무리 높고 대단한 지위를 가진 사람이라도 우리의 창조자 되신 주님 앞에 엎드려 “주님 사랑합니다” 이 말 한마디를 고백할 때에 놀라운 기적과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원하기는 오늘 말씀을 통해 저와 여러분의 입술에서 “주님 사랑합니다” 라는 아름다운 고백이 언제나 어디서나 있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을 찾아 오셔서 해변가에서 그들과 식사를 마치고 베드로를 향해 사랑스런 눈으로 바라보시면서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이 사람들보다 더 사랑하느냐?”

여기서 한글 성경에서는 ‘이 사람들보다’ 라고 하였지만 원어에서는 사람과 사물을 함께 포함하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보다’ 하는 말을 문자 그대로 이해한다면 이들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아마 베드로와 함께 고기잡이를 하다가 예수님을 만나고 지금 아침 식사를 마친 6명의 제자들을 염두에 두고 ‘너는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라는 질문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한가지 사물로 본다면 ‘네가 이것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는 말로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들’ 이란 무엇일까요?

아마도 갈릴리 바닷가에 매어 놓은 그들의 배나, 잡은 물고기들이나 아니면 사람들이 소유하기 원하고 누리기 원하는 여러 가지 주변의 것들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네가 이런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는 주님의 질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사람인지 물건인지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정말 예수님을 사랑하는지 이것을 확인하시기 위해서 물으신 질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질문을 하였을 때에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그러하외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내 어린양을 먹이라” 하십니다. 

그런데 이것으로 끝난 줄 알았는데, 조금 숨을 돌리고 나서 예수님은 똑같은 질문을 다시 하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 다시 대답합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그러자 주님은 “내 양을 치라” 하십니다.

이제 베드로는 마음을 놓고 예수님의 질문이 다 끝난 줄 알았는데, 예수님께서는 느닷없이 또 한번 베드로에게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질문을 보면서 우리는 ‘아니 무슨 똑같은 질문을 세 번씩이나 하실까’ 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원어를 보면 첫째와 두 번째 질문에서의 사랑과 세 번째 질문에서의 사랑의 단어가 다르게 사용된 것을 볼 수 있는데 중요한 것은 단어보다 베드로가 세 번째 질문을 받자마자 마음에 불안이 생기고 근심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왜 주님께서는 두번 세번 반복해서 나에게 똑같은 질문을 하실까? 나를 믿지 못하시는 것일까?’ 이런 생각에 불안한 마음으로 다시 대답했습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다시 “내 양을 먹이라” 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정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를 세 번씩이나 물으셨을까요?
여기에는 귀한 은혜가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 시간에는 크게 3가지의 이유를 함께 생각해 보기를 원합니다. 

먼저 주님께서 세 번씩이나 질문하신 것은 베드로를 영적으로 치유하시기 위함이셨습니다.

얼마전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과 유월절 만찬을 마친 다음에 새 계명에 대해서 말씀하신 일이 있었습니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그럴 때 베드로는 굉장히 우쭐했습니다.

요13장을 보면 베드로는 ‘나는 형제도 사랑하고 이웃도 사랑하고 누구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한다’ 고 자부하였습니다. 

그래서 요13:37 말씀에 보면 베드로는 자신만만해서 “주여, 내가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라고 합니다.

이 말을 바꾸어 말하면 ‘주님, 나는 내 목숨보다 주님을 더 사랑합니다’ 하는 말과 같습니다. 그만큼 자신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

그러나 막상 주를 위해 목숨을 던져야 하는 위기를 만나자 그의 자신감은 모래성처럼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세 번이나 예수님 모른다고 부인하고, 심지어 저주하면서 자기 혼자 살아남기 위해서 줄행랑을 쳤던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그 후 베드로가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그는 배신자였으며 스스로에게 얼마나 실망하고 부끄러운 사람으로 생각했겠습니까?

더욱이 그는 지금 영과 육이 지칠 대로 지쳐 있는데 자기가 부인하던 예수께서 부활하셔서 지금 자기 앞에 와 계십니다. 

그리고 아직도 못 박힌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는 손으로 고기를 구워 “배고픈데 먹어라” “이것도 먹어라.” 하시면서 자기들을 위해 섬기고 있는 주님이 눈앞에 계신 상황입니다.

차라리 예수님께서 자신을 보고 “이런 못난 놈 같으니라고” 하고 책망하고 망신을 주든지 꾸중을 하셨더라면 마음이라도 편하겠는데 전혀 지난 일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하시지 아니하고, “배고픈데 먹어라. 추운데 불 옆에 오라.” 이러면서 자기를 위해 주니 우리식으로 표현하면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베드로가 제대로 먹을 수나 있었겠습니까?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음식을 먹기 위해 피운 숯불은 마치 예수님께서 잡히실 때에 자신을 숨기고 무리들의 틈에서 불을 쬐던 자신의 비굴한 모습과 교차되면서 그날의 기억을 더욱 생생하게 하였을 것입니다.

그 상황에 세 번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고 물으시는 예수님의 질문은 마치 자신이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했던 아픈 기억을 떠올리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질문을 받고 속으로 얼마나 울었겠습니까? 
여러분 그렇습니다. 분명 베드로는 그때까지 영적으로 병든 사람이었습니다. 

그전에 있던 믿음도, 자신감도, 긍지도, 용기도 부서져 남아있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병들고 무기력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베드로를 향해 예수님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고 물으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와 같이 세번이나 반복해서 물으신 이유는 베드로의 과거를 추궁하기 위해서가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그럼에도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얼마나 사랑하고 계시는가를 전하기 위한 질문이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묻는 질문은 사실 묻는 사람이 먼저 사랑할 때에 할 수 있는 질문입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자주 확인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무엇입니까? ‘날 정말 사랑하느냐?’ 고 묻는다면 그 전제는 자신이 사랑하기 때문에 남편에게도 그 사랑을 확인하고 싶어서 하는 질문이지 않습니까?

사랑은 먼저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사랑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보고 자신을 사랑하느냐고 묻는다면 그 사랑은 이기적인 사랑입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를 너무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베드로야,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의도는 ‘나는 여전히 너를 너무나 사랑하고 있다는 것’ 이었습니다.

이 질문을 세 번이나 동일하게 받으면서 베드로의 심령에는 예수님의 강한 사랑이 만져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비록 자신은 예수님을 냉정하게 버렸지만 예수님은 계속해서 자기를 사랑하고 계신다는 것을 가슴 아프게 실감하는 순간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부모와 자식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에게 가장 좋은 교육은 어떤 환경이 아니라 ‘우리 부모님은 변함없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확신’ 입니다. 이것만 자녀들이 가지고 있다면 결코 잘못된 길로 가지 아니할 것이며 건강한 사고와 인격을 가지고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 사랑에 터치되자 베드로는 어색하고 부끄럽지만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이 아시나이다” 하고 대답하였던 것입니다.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면서 입었던 깊은 내면의 상처는 치유되고 그는 다시 사명을 회복하게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여러분 이처럼 사랑은 사람을 치유합니다. 사랑은 잘못된 관계를 회복시켜 줍니다.
이 순간 베드로가 얼마나 완전하게 치유를 받았는지 베드로의 남은 사역을 보면 참으로 놀랍습니다.

사도행전에서나 베드로전후서를 보면 베드로가 다시 자신의 과거를 가지고 더 이상 씨름하거나 부끄러워하고 괴로워한 흔적이 전혀 없습니다. 

그는 과거의 모든 실패와 상처를 완전히 씻음 받고 거기에서 자유함을 받은 사람으로 인생을 살았던 것입니다. 

무엇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였습니까? 
바로 예수님의 사랑이 그를 치유했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그의 사랑의 마음이 그를 일으켰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할렐루야!

 
오늘 저와 여러분 가운데서도 이와 같이 주님의 치유를 받아야 할 분들이 분명 많이 계실 것입니다.

베드로처럼 세상에 나가서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면서 살다가 죄스러움과 부끄러움의 마음을 가지고 이 자리에 나오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세상의 것에 눈이 어두워서 하나님의 말씀은 뒷전에 두고 죄와 타협하면서 한번 인생을 멋지게 살아보겠다고 하다가 남는 것 하나 없이 빈 손 들고 이 자리에 나와 앉아 있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찬송을 불러도 마음이 예전 같지 않고, 말씀을 듣고 보아도 그 말씀이 마음에 닿지 않습니다. 생각은 온통 사방으로 흩어져 돌아다니고 예배를 마치고 나가면 아마 마음은 여전히 공허합니다.

그런 사람은 베드로와 같이 영적으로 병이 들어 있는 상태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지금 당장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주님의 사랑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세상의 것과 세상의 사랑을 추구하면서 헛된 것에 미쳐서 내 젊음 바치고, 헛된 것에 쫓겨서 정신없이 살다가 입은 상처와 아픔은 세상의 사랑을 가지고는 절대 치유할 수 없습니다. 

오직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의 그 사랑만이 나를 치유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와 같이 치유 받기를 원하시는 분들은 성령께서 우리의 귀를 열어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는 주님의 음성을 모두가 듣기를 원합니다.

들으면 내가 깨어납니다. 
그 말속에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느냐?’ 하는 주님의 음성이 담겨 있습니다. 

그 사랑에 터치되는 심령마다 어떤 상처를 입었던지, 어떤 죄책감을 가지고 씨름하던지, 어떤 실패를 맛보았던지 어떤 고통을 가지고 있든지 간에 상관없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일으켜 세워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귀를 기울여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하기를 원합니다.
“주님을 진실로 사랑합니다.” “주님을 부끄럽지만 최고로 사랑합니다.” 

이러한 고백이 있을 때에 우리의 상처가 치유되고 다시금 사명을 회복하는 은혜가 임하게 될 것입니다. 

 
두 번째로 왜 예수님께서는 왜 세 번씩이나 베드로에게 사랑의 고백을 요구했을까?

베드로의 사도직을 회복하기 위해서입니다.

베드로는 사도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사도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부름 받은 사람입니다. ' 그런데 오늘 이 자리에서는 주님이 ‘내 양을 치라. 내 어린양을 먹이라.’ 하는 사도직의 또 다른 한 면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한평생 두 가지 일을 해야 했습니다. 
하나는 잃어버린 영혼을 찾는 것이며 전도하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주님 앞으로 돌아온 사람들을 목자가 양을 돌보듯이 돌보고 먹이고 인도해야 되는 사역이었습니다.

이 영광스러운 사역을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양들을 맡기려고 할 때에 아무나 맡길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조건을 딱 하나 걸습니다. 바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자기 양을 맡깁니다.

왜냐하면 그 일이 힘들기 때문에. 주인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주인의 양을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과 직분이 있다면 사람이나 환경을 보지 말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감당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끝까지 감당할 수 있으며 온전히 감당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주님께서 세 번씩이나 베드로에게 물으신 이유는 그가 장차 영광스러운 죽음을 준비할 수 있도록 이렇게 물으신 것입니다. 

사랑은 진정한 헌신을 가능하게 합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님이 아십니다” 하고 세번이나 고백하니까 주님께서는 대단히 엄숙하고 진지한 예언을 하십니다. 

베드로의 장래를 놓고 예언하는 것입니다. 18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 가리라.’

이것은 베드로의 순교를 예언하는 것이라고 19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 말씀대로 그의 말년에 십자가를 지고 순교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어떻게 그 고통스러운 십자가를 질 수 있었습니까? 
그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누구나 가고 싶지 않은 길이었지만, 주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길이라면 십자가도 베드로는 기꺼이 감당하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베드로에게 물으셨던 주님께서 오늘 저와 여러분들에게도 동일하게 물으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질문에 내가 지금 있는 자리에서,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에서, 지금의 나의 상태에서 우리 모두 자신 있게 그 사랑을 고백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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