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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청년 정신의 회복 (삼상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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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정신의 회복 (삼상 11:1-6)


[암몬 사람 나하스가 올라와서, 길르앗의 야베스를 포위하였다. 그러자 야베스 사람들이 모두 나하스에게 “우리와 조약을 맺읍시다. 우리가 당신을 섬기겠습니다” 하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암몬 사람 나하스는 “내가 너희의 오른쪽 눈을 모조리 빼겠다. 온 이스라엘을 이같이 모욕하는 조건에서만 너희와 조약을 맺겠다” 하고 대답하였다. 야베스 장로들이 또 그에게 제안하였다. “우리에게 이레 동안만 말미를 주셔서, 우리가 이스라엘 모든 지역으로 전령들을 보내도록 하여 주십시오. 우리를 구하여 줄 사람이 아무도 없으면, 우리가 항복하겠습니다.” 전령들이, 사울이 살고 있는 기브아에 가서 백성에게 그 사실을 알리니, 백성들이 모두 큰소리로 울었다. 마침 사울이 밭에서 소를 몰고 오다가,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백성이 울고 있느냐고 물었다. 사람들은 야베스에서 온 전령들이 한 말을 그에게 일러주었다. 이 말을 듣고 있을 때에, 사울에게 하나님의 영이 세차게 내리니, 그가 무섭게 분노를 터뜨렸다.]

• 군주국으로의 이행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오늘은 감리교회가 청년들의 신앙을 격려하기 위해 제정한 청년주일입니다. ‘청년’하면 모습도 아름답고 의기가 당당하여 허리를 곧게 편 채 대지 위를 뚜벅뚜벅 걸어가는 이들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하지만 우리가 거리에서 만나는 젊은이들의 모습은 좀 다릅니다. 얼굴빛은 창백하고, 어깨는 구부정하고, 만유(漫遊)하듯 느릿느릿 걷는 폼이 영락없이 인생을 다 산 사람들 같습니다. 청년이라는 말이 무색할 지경입니다. 웃자고 하는 소리이니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기 바랍니다. 

요즘 저는 이 시대가 젊은이들의 푸른 날을 박탈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청년들을 먹고 사는 문제에 온통 집중하게 만드는 세상은 잘못된 세상입니다. 청년정신은 길들여지기를 거부하는 것이고, 불의한 일에 저항하고 변혁을 향해 내달리는 데 있습니다. 의기義氣가 없다면 젊음도 없습니다. 그러나 젊음은 서툽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넘어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하다가 절망감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절망하는 사람만이 희망도 가질 수 있습니다. 

절망이 두려워 아무 시도조차 하지 않는 사람은 이미 죽은 사람입니다. 젊은이들을 사로잡고 있는 인생의 무게를 모르지 않습니다. 치솟는 등록금, 좁아지는 취업의 문, 연애와 결혼의 지연…. 많은 문제가 그들의 미래를 어둡게 만듭니다. 그럴수록 새로운 세상을 꿈꾸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세상을 열기 위해 분투해야 합니다.

저는 오늘 이스라엘이 부족국가에서 군주국으로 이행하는 시기에 벌어졌던 한 사건을 톺아보며 오늘 우리에게 요구되는 바가 무엇인지를 가늠해보려 합니다. 이스라엘은 아주 오랫동안 평등공동체의 이상을 추구해왔습니다. 그들이 애굽을 탈출했던 것은 억압과 차별이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가까스로 정착에 성공했지만, 그들의 꿈은 현실 속에서 실현되기 어려웠습니다. 강력한 국가체제를 갖춘 주변 나라들의 침공이 잦아지자 백성들은 강력한 국가를 만들기 위해 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선지자 사무엘을 압박해 왕정국가로 발돋움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왕정국가로의 이행이 그렇게 쉽지는 않았습니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기름을 부었지만 사람들은 그를 왕으로 인정하지도 존중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의 등장을 반기는 이들도 있었지만 노골적으로 조롱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과도기였습니다. 사울은 기름부음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기브아에 있는 자기 집으로 돌아가 이전처럼 농부로 살았습니다. 왕의 권위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어떤 계기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 위기는 곧 기회

마침내 그 기회가 찾아옵니다. 요단강 동편지역에 터를 잡고 살던 암몬이 길르앗 야베스를 침공한 것입니다. 아르논강과 얍복강 사이에 머물고 있던 암몬 왕 나하스는 세력을 강화하고 전리품을 얻기 위해 가장 가까운 도성인 길르앗 야베스 정벌에 나선 것입니다. 그 땅은 므낫세 반 지파의 영토였는데 요단강 동편에 있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연합으로부터 다소 소외된 지역이었습니다. 사태가 위급해지자 길르앗 야베스의 지도자들은 나하스에게 봉신封臣조약을 체결할 용의가 있다고 말합니다.

봉신조약을 맺으면 약소국은 조공을 바쳐야 하고, 또 종주국이 벌이는 전쟁에 참전할 의무를 지게 됩니다. 대단히 불공평하고 굴욕적인 조약인 셈입니다. 하지만 나하스는 길르앗 야베스 장로들의 그런 제안을 거절하면서 더 가혹한 조건을 내세웁니다. 주민들의 오른쪽 눈을 다 빼라는 것이었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그것은 전투력을 빼앗기 위한 조치입니다. 나하스는 길르앗 야베스 주민들의 전투력을 완전히 제거함으로써 후환을 막으려는 것이었습니다. 난감한 상황이었습니다.

성경은 길르앗 야베스 장로들이 나하스에게 말미를 달라며 자기들을 구하여 줄 사람이 있는지 일단 찾아보겠다고 말했다고 하지만, 그건 전투 상황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길르앗 야베스의 지도자들은 아마도 비밀리에 이스라엘 여러 부족에 전령을 보냈을 겁니다. 그들은 동족들에게 자기들이 처해있는 위기상황을 알렸습니다. 사울이 살고 있던 기브아에도 전령들이 당도했습니다. 주민들은 그 기가 막힌 소식을 듣고 큰소리로 울었습니다. 하지만 누구 하나 몸을 떨쳐 일어서지 못합니다. 그 절통한 사연에 함께 아파하기는 하지만 거미줄에 걸린 나비처럼 두려움에 짓눌린 그들은 옴짝달싹도 못합니다.

우리도 이런 경험을 많이 하며 삽니다. 어려운 처지에 빠진 사람을 보고 안타까워하면서도 정작 아무런 일도 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에서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 된 사람을 보고도 모른 체 지나쳤던 제사장과 레위 사람을 비웃지만, 그들은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을 돕지 못하는 것은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이들에게 나와 무관한 이들은 없습니다. 물론 마음에 안 드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그들도 소중히 여기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남의 고통에 참여하고, 연루되고, 함께 나눌 때 참 사람이 됩니다. 참 사람됨의 가장 큰 적은 두려움과 욕심입니다. 그것을 떨쳐버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기브아 주민들은 그저 큰 소리로 울었습니다. 하지만 그 울음은 아무런 변화도 이끌어내지 못합니다.

바로 그 때 사울이 등장합니다. 밭에서 소를 몰고 돌아오던 그는 사람들의 울음소리를 듣습니다. 연유를 묻자 사람들은 전령들이 전한 이야기를 그대로 고합니다. 그 말을 듣고 있을 때 사울에게 하나님의 영이 세차게 임합니다. 그러자 그가 무섭게 분노를 터뜨립니다. 하나님의 영은 사울의 속에서 마치 마그마처럼 폭발하여 그를 일으켜 세웁니다. 하나님의 영은 일으켜 세우는 힘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들어가면 ‘일어서는 사람’이 됩니다. 에스겔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를 이렇게 회상합니다. “'사람아, 일어서라. 내가 너에게 할 말이 있다.' 그가 나에게 이 말씀을 하실 때에, 한 영이 내 속으로 들어와서, 나를 일으켜 세웠습니다.”(겔2:2)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이 임했을 때 사도들은 골방을 박차고 나가 ‘예수가 주님’이라고 외쳤습니다. 그들은 관원들에게 끌려가 매를 맞아도 당당했습니다. 오히려 예수의 이름 때문에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 것을 기뻐했습니다. 요한은 죽임을 당한 하나님의 증인들 이야기 끝에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사흘 반이 지난 뒤에, 하나님에게서 생명의 기운이 나와서 그들 속으로 들어가니, 그들이 제 발로 일어섰습니다.”(계11:11)

• 다스려야 할 화 

세상에 나하스는 많습니다. 반면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힌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세상이 어두운 건 그 때문입니다.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는 “악이 승리하기 위한 조건은 단 한 가지다. 선한 사람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가슴을 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선한 의지가 있는 사람들이 악에 대항해 싸우기를 포기한다면, 악이 승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 선한 뜻을 가슴에 품은 사람들이 끝까지 싸움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악은 발붙일 곳이 없을 겁니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면 마른 뼈들도 일어나 하늘 군대가 됩니다.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힌 사울은 떨쳐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분노했습니다. 사실 분노는 비정상적인 마음의 상태입니다. 그래서 분노는 일어났다가도 곧 사그라지고 맙니다. 그런데 일단 분노에 사로잡히면 물불을 가리지 않게 되고 자기와 주변 사람들에게도 큰 피해를 주기 쉽습니다. 화를 내거나 분노하지 않고도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그럴 수 없는 게 또한 인생입니다. 부당한 대우를 받거나 터무니없는 일을 당할 때면 우리는 분노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상황에 처해도 자기 마음을 잘 살펴 화를 다스리는 사람은 무서운 사람입니다. 인간의 연약함을 잘 아는 에베소서의 저자는 말합니다.

“화를 내더라도, 죄를 짓는 데까지 이르지 않도록 하십시오. 해가 지도록 노여움을 품고 있지 마십시오. 악마에게 틈을 주지 마십시오.”(엡4:26-27)

바람이 불면 물결이 일어나는 것처럼 우리가 세상에 있는 한 화 혹은 분노가 일어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 분노에 사로잡혀 죄를 짓지는 말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노여움을 흘려보내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해가 지도록 노여움을 품으면 반드시 악마가 다가옵니다. 악마는 우리 속의 노여움을 증폭시킵니다. 

프랑스에서 플럼빌리지Plumvillage라는 명상센터를 운영하고 있는 베트남의 승려 틱낫한(Thich Nhat Hahn)은 화가 풀리면 인생도 풀린다면서 화를 다스리는 데 필요한 몇 가지 조언을 해주고 있습니다. ‘화가 날수록 말을 삼가라’, ‘화가 났을 때는 남의 탓을 하지 말라’, ‘혼자서 화를 풀기가 어렵다면 친구에게 도움을 청하라’, ‘화를 참으면 병이 된다. 애써 태연한 척하지 마라’, ‘상대방이 가진 나쁜 씨앗보다 좋은 씨앗을 보라’, ‘각자의 모자람을 스스로 인정하라.’ 한번 곱씹어 보십시오.

• 거룩한 분노

하지만 화를 내야 할 때에도 화를 내지 못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을 당하고, 인간의 존엄성이 유린되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이 망가지고 있는데도 분노하지 않는다면 그는 바보이거나 비겁자입니다. 나약한 사람일수록 루쉰이 말했던 ‘정신 승리법’을 잘 사용합니다. 남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서도 시정을 요구하기보다는 그 사람보다 자기가 더 착한 것을 자랑한다든지, 매를 맞으면서도 나는 적어도 폭력을 사용하는 사람은 아니라는 식으로 자기를 정당화하는 것은 비겁이지 관용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힌 사울은 걷잡을 수 없는 분노에 사로잡혔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일러 ‘거룩한 분노’라고 말합니다. ‘거룩하다 holy’는 단어는 ‘전체의’ 혹은 ‘흠 없는’이라는 뜻의 ‘whole’과 어원이 같습니다. 거룩한 것은 나뉨이 없는 것입니다. 인간은 언제 거룩합니까? 하나님의 마음과 온전한 일치를 이루었을 때입니다. ‘거룩한 분노’는 당신의 자녀들이 겪는 고통과 슬픔 때문에 분노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에 사로잡힌 상태입니다. 사울은 길르앗 야베스 주민들의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탄식소리를 들었고, 하나님의 눈물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안락한 삶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섭니다. 

그는 겨릿소 두 마리를 잡아서 여러 토막으로 자른 다음에 그것을 전령들에게 나누어 주고, 이스라엘 모든 지역으로 가서 말을 전하라고 지시합니다. “누구든지 사울과 사무엘을 따라나서지 않으면, 그 집의 소들도 이런 꼴을 당할 것이다.” 비장한 결의요 선언입니다. 사울의 거룩한 분노는 사람들에게 신적인 두려움을 안겨 주었습니다. 각지에서 사람들이 일어나 사울을 뒤따랐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암몬 군대를 물리치고 주민들을 구했습니다. 이 일을 통해 사울은 왕으로서의 탁월한 지도력을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농부로서의 삶에 만족하던 사울을 일으켜 세워 불의에 맞서 싸우는 투사로 만들었습니다. 나는 오늘의 젊은이들에게도 하나님의 영이 내리기를 기도합니다. 평면적인 현실에 붙박인 채 더 큰 세상을 보지 못하는 젊은이들을 일으켜 세워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인간의 욕망과 두려움 속에 똬리를 튼 채 제 배를 채워가는 사탄을 몰아낼 힘이 저들 내면에서부터 솟아나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세상을 떠난 후 고아처럼 남게 될 제자들을 격려하며 그들에게 정신을 단단히 차리라며 이렇게 말합니다. 

“몸을 죽일지라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이를 두려워하지 말고, 영혼도 몸도 둘 다 지옥에 던져서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마태10:28)

마땅히 두려워하여야 할 분을 두려워할 때 우리 삶은 든든해집니다. 저는 이 땅의 젊은이들이 처한 현실을 일거에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드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정신이 무너지지 않는 한 결코 패배자가 되지는 않을 거라고는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많은 일꾼을 필요로 하십니다. 

세상의 어떤 일도 우리 신앙과 무관한 일은 없습니다. 스스로를 훈련하고 또 가다듬어 주님께 바치십시오. 청년 정신은 일어서는 것입니다. 천근만근의 무게가 어깨에 얹혀도 기어코 일어나 하나님의 뜻에 동참하기 위해 애쓸 때 주님은 우리의 등불이 되어주실 것입니다. 세상이 잘못되었거든 새로운 세상을 상상하십시오. 그리고 그 세상을 보고 싶거든 지금 울면서라도 씨를 뿌리십시오.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의 싸움은 이미 이긴 싸움입니다. 이 교회에 그리고 한국 교회에 정신의 심지가 바로 박히고, 허리를 꼿꼿이 세운 주의 일꾼들이 많아지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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