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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받아줌 (롬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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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아줌 (롬 15:1-7) 
 
 
❚다 이유가 있다

목회자도 사람입니다. 목사도 연약한 인간이라는 말입니다. 어렸을 때 교회 화장실에서 담임목사님을 만나고 화들짝 놀란 일이 있습니다. “아니, 목사님이 화장실을 오네?” 그럼요. 목사도 화장실 갑니다. 목사도 밥 먹어야 살고, 화장실 가야 삽니다. 목사도 부부싸움 합니다. 목사도 때론 속상하고 화날 때도 있습니다. 어느 날은 “목사님, 힘내세요!” 하고 보낸 성도의 문자 한 통에 힘을 얻어 하늘을 날아갈 듯 하다가도, 교회 안에서 힘들게 하는 사람 있으면 너무 실망해서 축 쳐지고 잠도 안 오고, 밥도 안 넘어갈 때가 있는 게 목사입니다. 목사도 사람이니까요. 절대 목사가 완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목사도 부족한 면이 있고, 목사도 실수합니다. 목사도 여러분과 똑같이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목회가 참 어려웠습니다. 공부도 많이 하고, 설교도 뛰어나고, 능력도 있는 분인데 이상하게 목회지마다 어렵습니다. 자꾸 장로님들과 부딪히고, 성도들과 갈등이 생깁니다. 가장 힘든 것은 가정문제였습니다. 자꾸 사모님과 부부싸움을 하고 말다툼이 잦아지다가 한 번씩 해서는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을 넘어 사모님에게 폭력을 휘두르기도 했습니다. 

“내가 왜 이러지? 이러면 안 되는데, 안 되는데” 하면서도 자꾸 자기도 모르게 성도들에게 분노를 터뜨리고, 아내에게 폭언과 폭력을 휘두르곤 했습니다. 너무 힘들어 하다가 어느 날 큰 용기를 내서 상담을 받게 되었습니다. 목회자가 누구에게 상담을 받는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남을 상담해주고 남의 문제를 들어주는 일은 익숙하지만 자신이 남에게 찾아가 상담을 받으려면 이만저만 용기를 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데 상담을 하는 도중에 엄청난 일이 벌어집니다. 

“제가 왜 자꾸 성도들에게 화를 내고, 갈등을 일으켜 목회가 어려울까요? 제가 왜 자꾸 사랑하는 아내에게 나도 모르게 폭언을 하고 폭력까지 휘두를까요?” 하고 물으니 상담자가 답은 안 해 주고 “목사님의 상황을 자세히 얘기해 보세요. 목사님 어렸을 때 얘기 좀 해주세요.” 라며 자꾸 말을 시키기만 합니다. 그런데 한참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던 중 목사님은 놀라운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불현 듯 그동안, 아주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불행한 어린 시절이 생각난 것입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술만 먹으면 집에 와서 행패를 부리고 어머니와 자신들을 때리곤 했습니다. 하루도 집안이 편안할 날이 없었습니다. 너무 힘들어 교회를 찾았고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집안이 너무 어려웠지만 이를 악물고 독학으로 공부해서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전도사로 섬기던 교회에서 착하고 아름다운 지금의 아내를 만나 행복한 결혼도 했습니다. 세월이 많이 흘러 자신은 그 어린 시절의 불행한 기억을 까마득히 잊고 살았던 것입니다. 아니, 잊었다기보다는 잊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상담을 하며, 자기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다 보니 깨닫게 된 것입니다. 현재 자신의 모습이 잊고 살았던, 아니 잊고만 싶었던 그 불행한 어린 시절에서 비롯되었음을 말입니다. 폭력적인 아버지와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던 가정, 너무나 불행했던 자신의 어린 시절, 자신은 거기서 탈출하려고 그토록 애를 썼고 탈출한 줄로만 알았는데 지금의 자기 모습이 바로 어린 시절 그토록 혐오하고 미워했던 자기 아버지 모습과 똑같은 것입니다. “나는 절대 저런 아버지, 저런 남편 안 된다” 그토록 다짐했지만 자신도 모르게 폭언과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이 되고, 교인들에게 쉽게 분노하고, 갈등을 풀지 못하는 모습이 되었더라는 것입니다. 

이런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기까지 참 힘들었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물론 제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러면 큰일 나게요? 제가 어떤 책에서 읽은 어느 목회자의 실제 경험담입니다. 다 이유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지금의 끔찍한 모습에는 다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 누구도 몰랐던, 자신조차도 깨닫지 못했던 어린 시절의 깊은 상처와 아픔이 지금의 삶을 짓누르고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믿음이 강한 자와 약한 자

이 목사님만의 이야기가 아닐 것입니다. 우리도 다 아픔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다 크던 작던 마음속에 상처를 지닌 연약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실수도 합니다. 내가 원하던 원치 않던 남을 힘들게 할 때도 있습니다. 나도 모르게 험한 말이 튀어나오고, 이상한 행동을 할 때도 있습니다. 나도 모르게 분노가 폭발해서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들을 마음 아프게 할 때도 있습니다. 심지어 폭력을 휘두르기도 합니다. 나도 내가 왜 이런지 모를 때가 있습니다. 이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나도 모르게 튀어나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다 이렇게 연약한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누가 상처로부터 자유롭고, 누가 완벽한 인격을 가졌습니까? 그런데 믿음이 그것을 가능하게 해줍니다. 주님이 그것을 가능하게 해줍니다. 우리의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싸매고 치료해 주십니다. 주님을 만나서 내 비뚤어진 인격이 바로 잡히고, 상처가 치유됩니다. 

어린 시절의 아픔과 내 가슴 속 깊이 뿌리박은 상처들이 나음을 받습니다. 물론 아무나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 다닌다고 다 그렇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설교 첫머리에 소개한 분은 목사님인데도 상처가 치유 받지 못했습니다. 교회를 오래 다니고, 직분을 가진 분 중에도 그런 치유와 회복의 경험을 하지 못하고 여전히 그 상처에 사로잡혀 사는 분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진정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진정 그분을 통해 삶이 회복되고, 상처가 치유되면 우리는 자유를 얻게 됩니다.

오늘 본문을 봅니다. 1절에 두 종류의 사람이 등장합니다. 어떤 사람들입니까? “믿음이 강한 자”와 “믿음이 약한 자”입니다. 물론 두 종류가 다 교회 다니는 성도들인데 그 중에도 믿음이 강한 자가 있고, 믿음이 약한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도대체 어떤 사람이 믿음이 강한 자고, 어떤 사람이 믿음이 약한 자일까요? 물론 교회 잘 다니고, 열심히 신앙생활 하고, 기도도 잘하고, 봉사도 잘하고, 전도도 잘하는 그런 사람을 우리가 믿음이 강한 사람이라고 하지요. 그러나 여기서 ‘믿음이 강한 자’란 좀 특별한 의미입니다. 

본문 앞서 나오는 14장에서 사도 바울은 믿음에 자유를 얻은 사람들을 언급합니다. 믿음에 자유를 얻은 사람은 먹는 문제나 모든 문제에서 담대합니다. 심지어 우상 제물이라 해도 기도하고 감사함으로 먹으면 그만입니다. 이렇게 주님을 만나 상처나 아픔이 회복되고 치유되고 믿음에 자유를 얻은 사람이 ‘믿음이 강한 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한 번 정의해 봅시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 강한 자’란 예수님을 만나 상처와 문제가 해결되고, 회복을 경험하고, 자유를 얻은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물론 완전한 사람, 완벽한 사람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하지만 회복을 통해 담대해져서 이제 웬만한 시험이나 상처는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그런 사람을 뜻하는 말인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전히 그렇지 못한 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처음 교회 와서 신앙생활 하는 분들도 여기 해당됩니다. 하지만 교회 오래 다녔어도, 신앙생활 오래 해서 직분도 받았지만, 여전히 주님 만나 상처를 치유 받고 회복된 경험이 없는 사람, 지금도 여전히 문제를 안고 사는 사람, 그래서 자유를 얻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남을 참 힘들게 하지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특히 내 가족에게, 아내와 남편, 저녀들에게, 그리고 무엇보다 같은 교회 성도들에게 아픔을 주고 상처도 줍니다. 분노를 참지 못하고 자꾸 갈등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분들을 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저 사람 참 힘든 사람이야.”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저 사람 때문에 내가 힘들지만, 가장 힘든 사람은 바로 그 사람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왜요?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말과 행동들, 자신의 태도 때문에 남도 힘들지만 정작 가장 힘든 건 그 사실을 알면서도 고치지 못하는 나 자신인 것입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사람들을, 이런 믿음이 약한 사람들을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이게 문제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런 믿음이 약한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 내가 믿음이 강한 자가 될 수도 있고 나도 똑같이 믿음이 약한 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솔직히 이런 사람들 많잖아요? 남 힘들게 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멀리 갈 것도 없어요. 우리 집안에도 있을지 모릅니다. 내 남편, 내 아내 이야기일 수도 있어요. 내 부모나 자녀일 수도 있습니다. 직장의 동료나 상사, 부하직원일 수도 있고요 친한 친구일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교회 안에도 이런 분들은 꼭 있습니다. 이런 성도 때문에 상처 받고 마음 상해서 다른 교회 가보세요. 거기도 있습니다. 어디나 다 있어요. 멀리 갈 것도 없다니까요? 바로 지금 내 옆에 앉은 사람이 그런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옆 사람 좀 한 번 보세요. 어떤 사람인가...

그런데 이런 분들을 내가 어떻게 대합니까? 비판합니까? 아니면 품어줍니까? 정죄합니까? 아니면 격려합니까? 그런 사람과 부딪히고 정면대결 합니까? 아니면 그냥 피해버립니까?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그 사람이 자라온 환경, 혹은 지금 겪는 일 모르잖아요? 과거에, 그 사람의 과거를 우리가 잘 모르지만 과거에, 자라면서 가정이 불우했던 사람일 수 있습니다. 너무 가정이 가난하거나 불행한 유년시절을 겪으면 뿌리 깊은 상처가 되어 어른 때도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시거나 부모님의 사랑을 잘 못 받고 자란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폭력적인 부모 밑에서 자라거나 부모님이 헤어진 경우도 있습니다.

또 과거는 그렇다고 치고, 현재에, 지금 현재 이 사람이 웃고 있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듯 내 옆에 앉아있지만 큰 어려움을 당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직장이나 사업이 무너졌을 지도 모릅니다. 경제적인 고통, 가정적인 불행이나 위기를 겪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자녀의 문제, 부부문제, 건강의 문제 등 말 못할 아픔이 있어서, 너무 힘들어서, 너무 스트레스 받아서 말을 험하게 할 수도 있고, 공격적으로 반응할 수도 있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그 사정을 모르기에 “저 사람 너무 하잖아? 왜 저래?” 할 수도 있고 “왜 말을 저렇게 한담? 왜 저런 어처구니없는 행동을 하지?”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분의 아픔과 사정을 모르잖아요? “그럴 수도 있지, 다 이유가 있답니다. 다 그럴만한 사정이 있겠지요.” 이게 맞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처럼

이제 다시 본문으로 돌아갑시다. 본문은 우리에게 다음의 세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 앞서 말한 대로 ‘믿음이 강한 우리’가 ‘약한 자들’을 담당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본문 1~2절을 함께 읽읍시다.

1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2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여기 나오는 ‘믿음이 강한 우리’가 누구라고 했습니까?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이라고 했지요? 예수님 만나 상처가 회복되고 이제 웬만한 시험이나 상처는 견딜 수 있는 그런 담대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했지요? 그런데 이런 믿음이 강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한다고 말씀합니까? ‘믿음이 약한 자’ 즉 영적으로 약한 자들입니다. 초신자는 물론이고 교회를 오래 다녔어도 예수님을 만나 치유되고 회복되는 경험을 아직 못해서 믿음이 약한 사람들입니다. 가정적이나 경제적으로 약한 자나, 인격이나 성품이 약한 자 등이 다 포함되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믿음이 약한 사람을 우리가 어떻게 하라고요? “그들의 약점을 담당하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담당하다’는 말은 헬라어로 ‘짊어지다,’ ‘견디다’는 뜻입니다. 즉 믿음이 강한 사람들이 믿음이 약한 사람들의 약점을 짊어져주고, 잘 견뎌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가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결국 조금은 그래도 믿음이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을 참아주고 견뎌주고 짊어져주다 보면 언젠가 그들도 믿음이 강해지고 변한다는 뜻입니다. 1절에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말라”는 말은 자기 마음대로 하지 말고, 내 주장 펴지 말고, 약한 사람 입장에서 그들을 이해해주고 견뎌주고 짊어져주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2절에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을 잘 견뎌주고 짊어져주면 반드시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게 된다는 말이지요.

둘째, 본문은 예수님의 모범에 대해 말씀합니다. 본문 3~4절을 읽읍시다.

3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4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믿음이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을 견뎌주고 짊어져주어야 하는데 그런 태도의 모범은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것입니다. 3절에 보면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즉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사신 분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약함을 담당하기 위해 갖은 모욕과 수치를 짊어지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짊어짐의 모범입니다.

셋째, 본문은 우리에게 이런 예수님을 본받으라고 말씀합니다. 5~7절을 함께 읽습니다.

5 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6 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7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한 마디로 예수님을 닮으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분처럼 나 자신을 위해, 내 기쁨과 만족을 위하지 말고 약한 자들의 연약함을 담당하고 짊어지라는 것입니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잘 참아야 합니다. 때로는 예수님처럼 수치와 모욕도 당할지 모릅니다. 그래도 그분처럼 하라는 것입니다.

7절에 결론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여기서 ‘받는다’는 말은 헬라어로 프로슬람바노, 즉 ‘받아주다’ ‘데리고 가다’는 뜻입니다. 즉 우리도 예수님처럼 약한 사람을 받아주고, 수용해주고, 안아주고, 데리고 함께 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서로 받아야 합니다. 앞서 1절에 담당하라는 말씀과 연결해 보면 믿음이 강한 우리는 믿음이 약한 자들을 ‘담당하고 받아주어야’ 합니다. 즉 그들의 약점을 담당해서 ‘짊어져주고,’ ‘견뎌주고(참아주고)’ 또한 그들을 받아주어서 ‘수용해주고,’ ‘안아주고,’ ‘데리고 함께 가야’ 합니다. 이것이 연약한 자를 대하는 방법입니다. 우리 주님이 그렇게 하셨으니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왜 하필이면 납니까?

말씀을 맺겠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은 믿음생활 참 열심히 하고 오랫동안 교회를 섬겨서 직분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분의 말투나 행동이 거칩니다. 자꾸 부딪히고 남을 힘들게 합니다. 저에게도 그렇게 힘들게 한 적이 많아서 늘 불만이었습니다. 솔직히 ‘꼴 보기 싫을’ 때도 있었습니다. 저도 사람이니까요. 그런데 알고 보니 그 분의 과거가 참 불행했습니다. 어린 시절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랐습니다. 어릴 때부터 마음 속 깊이 백인 상처가 너무 커서 남과의 관계를 힘들게 한 것입니다. 그 사실을 알고 나자 이제는 그 사람이 ‘미운’ 것이 아니라 ‘불쌍해’ 보입니다.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품기로 했습니다. 이해해주고 견뎌주고 참아주기로 했습니다. 그렇지 않고 비판하고 정죄하고, 그 사람 바꿔보겠다고 붙어 싸우면 그 분의 상처는 치유될 수 없고 오히려 점점 더 깊어지기에, 오직 짊어져주고, 참아주고, 견뎌주고, 품어주는 것만이, 주님이 그렇게 하신 것처럼 해줄 때만이 그분의 아픔과 상처가 치유됨을 알기에 내가 힘들지만 정말정말 어렵지만 그렇게 하기로 했습니다. 그러고 나니 저도 마음이 참 편하더군요. 그러다보면 언젠가 그 사람도 변하지 않겠습니까? 주님이 하시겠지요.

그렇습니다. 혹시 여러분 주변에는 이런 분들이 없습니까? 성격도 모나고 남에게 상처도 많이 줍니다. 참 여러 사람 힘들게 합니다. 참아주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그런 분이 우리 교회 성도일 수도 있고, 내 남편이나 아내, 내 부모 형제, 내 가족일 수도 있고, 내 직장에 혹은 내 이웃에 있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과거의 상처를 아직도 안고 사는 사람, 혹은 지금 현재 말 못할 아픔과 문제를 지고 사는 사람,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남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 그가 바로 지금 내 옆에 앉은 분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사람을, 그 연약한 사람을, 상처 입은 사람을, 그 모난 사람을 우리 교회에, 우리 구역에, 내 옆에 보내주신 하나님의 뜻과 이유를 깨달아야 합니다. “왜 하필이면 허구 많은 교회 중에 우리 교횝니까? 우리 구역입니까? 그 많은 자리 중에 왜 하필 내 옆입니까?”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보고 책임지라는 뜻입니다. “네가 그래도 좀 낫지 않니? 넌 그래도 날 만나서 회복도 되고 치유도 되지 않았니? 너도 물론 완전하지는 않아서 참고 견뎌주기 무척 힘들겠지만, 그래도 네가 믿음이 좀 낫지 않니? 그러니까 네가 짊어져라, 네가 받아줘라, 누가 하겠니? 네가 해야지. 그 사람 다른 교회 가면, 네 옆에 없으면 누가 그 일을 해주겠니?” 하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하나님이 영광(7절) 받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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