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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분노가 일어날 때 (엡 4:2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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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가 일어날 때 (엡 4:26-27) 

사람들에게는 여러 감정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통제하기 어려운 감정이 무엇이냐고 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분노의 감정’ 이라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분노로 인한 거친 말이나 여과되지 않은 내면에서 끓어오르는 감정은 결국 상대방에 대한 적개심과 증오로 번지게 되는데 다툼의 70%는 거친 말투와 분노 때문이라는 연구결과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분노가 무엇입니까? 

분노는 자신을 부당하게 대하는 처사에 대해 느끼는 강렬한 불쾌감으로 그로인해 생긴 감정의 상태가 분노입니다. 

분노에는 사실 예외가 없습니다. 아무리 성인군자라 하더라도 심지어 여러분 앞에 있는 목사도 분노의 감정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성격이 급한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평소 말이 없고 유순해 보이는 사람에게도 분노의 감정은 있습니다. 

무슨 말씀인가 하면 분노는 정도의 문제이지 모든 사람이 다 가지고 있는 감정 가운데 하인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분노가 우리에게 미치는 비참한 결과입니다. 
사실 분노의 감정이 폭발함을 통해 얻는 후유증은 너무나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분노가 일단 폭발하면 겉잡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시간이 지나도 돌이킬 수 없다는 것에 문제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분노는 분노로 그치지 않고 다른 죄를 짓게 만듭니다.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살거나 스스로를 해치거나 다른 사람을 해치는 큰 사건으로 발전할 수도 있습니다. 

얼마전 뉴스에서 어떤 사람이 분노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해 알지도 못하는 초등학생 두명을 따라가 둔기로 때려 중상을 입히고 자신은 세상을 향한 분노의 감정을 유서로 남기고 투신해 죽은 일이 있었습니다.

분노로 인해 집안이 망하고, 사회적으로 큰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숨은 분노이든지 드러난 분노이든지 분노의 감정을 잘 치유하고 조절할 수 있어야 합니다. 
 

존 헌터라는 유명한 의학자는 ‘분노와 수명의 관계’ 를 연구하였는데 오랜 연구 끝에 중대한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가 내린 결론은 ‘분노는 사람의 생명을 빼앗을 수 있는 극약과 같다’ 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 자신의 연구 결과를 발표하던 학술회에서 참석한 의사 가운데 한 사람이 일어나 자신의 논문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퍼부었습니다. 

연구 발표 자리에서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지만, 존 헌터는 그 사람을 보면서 분노를 참을 수 없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고함을 질러대며 그와 맞서 싸우다가 그만 그 자리에 쓰러져 영원히 일어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후에 밝혀진 사망 원인은 다름 아닌 극한 분노의 감정으로 인한 심장혈관의 순환장애였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연구 결과를 자신의 죽음으로 증명한 어이없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더라도 분노의 감정이 얼마나 큰 파괴적인 결과를 낳게 하였는지를 볼 수 있는데 창세기를 보면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인류의 첫 살인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건의 원인은 다름아닌 ‘분노’ 때문이었습니다. 

창4:3-5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가인은 하나님이 동생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자신의 제사는 받지 않는데 분노하여 결국 동생을 죽인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믿음의 사람 모세도 분노를 참지 못해서 동족을 학대하는 애굽인을 죽이고 도망자의 신세가 되어 미디안으로 도망가 그곳에서 40년을 지내야만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물이 없다고 하나님과 모세를 향해 원망하고 불평할 때에 반석을 명하여 물을 내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의 분노의 감정을 실어서 반석을 지팡이로 여러번 쳤습니다. 
그로인해 분노의 마음을 다스리지 못한 모세는 결국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다윗의 때도 그렇습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의 신세를 지고 시글락에 살 때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아말렉 족속이 시글락을 습격했습니다. 
집은 불타고 처자식은 모두 잡혀갔습니다. 

이런 처참한 광경이 일어났을 때, 다윗의 부하들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다윗에게 그 책임을 물어 돌을 들어 치려했습니다. 

얼마나 분노했으면 생사고락을 같이 하면서 다윗을 섬긴 부하들이 다윗에게 돌을 들었겠습니까? 분노는 이렇게 무섭습니다. 

다행히 다윗의 설득으로 돌을 내려놓았기에 망정이지, 만약에 분노의 돌을 다윗에게 던졌다면 모든 것이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을 것입니다.

여러분 이처럼 분노는 일순간에 우리가 쌓아놓은 것을 한순간에 다 무너뜨릴 수 있는 대단히 무서운 것입니다. . 

이것은 영적인 일에 더욱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일단 분노의 감정이 우리안에 생기면 기도가 되지 않습니다. 아마도 기도하는 분들을 잘 아시겠지만 우리가 배고파도 참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잠을 못 자고 피곤해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노의 감정이 자리잡고 있으면 기도할 수 없습니다. 분노는 기도를 막는 원수입니다.
설령 어렵게 기도하더라도, 하나님은 분노의 감정을 가진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으십니다.

왜일까요? 분노할 때 영적인 손과 발에 피가 묻습니다. 원망과 저주가 가득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기도를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분노의 감정을 가지고 드리는 예배를 받지 않으신다고 하였습니다. 

마5:23-24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원수 마귀가 우리를 가장 쉽게 조정할 수 있는 때가 바로 분노의 감정을 가지고 있을 때입니다.
분노의 감정이 가득한 순간 이성과 판단력이 사라지고 원수 마귀는 이 때라고 생각하고 우리 속에 들어와 우리 안에서 왕 노릇합니다. 

여러분 이처럼 분노는 우리의 영적인 생활을 철저하게 무너뜨리고 불안이나 의심이나 악한 생각으로 가득하게 합니다. 

더 심각한 것은 분노가 마음에 가득할 때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을뿐더러 분노의 감정에 따라 행동하게 되니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은 이 분노의 감정을 잘 다스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앞서 우리가 분노에 대한 잘못된 생각은 어떤 것들이 있겠습니까? 

먼저는 분노에 대한 오해가 없어야 합니다. 
간혹 저 사람은 분노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고 하는 사람이나 혹은 나는 분노가 없다고 하시는 분들에게 과연 분노가 없을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분노는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에게 있는 감정의 한 부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실 때 감정을 가진 피조물로 지으셨고, 그로인해 분노라는 감정도 생겼습니다.

따라서 일부러 분노의 감정을 억압하는 것은 오히려 좋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분노의 감정을 표출하지 않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마음에 병에 걸릴 확률이 4배나 높다고 합니다.

불위에 올려 놓은 주전자의 수증기는 배출되어야 합니다. 수증기가 빠지지 않고 계속 압력이 올라가다 보면 언젠가 폭발하게 됩니다.

우리가 흔히 조용한 사람들이 더 무섭다고 하는 뜻이 무엇입니까? 그런 사람이 한번 폭발하면 감당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억압된 분노는 우울증과 자기연민, 의기소침, 헐뜯음, 그리고 비방과 같은 변형된 형태로 폭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분노에 대한 오해는 분노는 무조건 밖으로 드러내는 것이 좋다는 생각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감정 표현에 자유롭습니다. 
화가 나면 말이나 행동이나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버립니다. 

소리를 지르고 던지고 부수고 발로 차고 주변에 남아나는 것이 없습니다. 주먹이 나갑니다. 

왜 이렇게 합니까? 감정을 표출해야 자기가 살겠다는 생각에서 그렇게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남에게 어떤 피해가 생기는지, 분노가 정당한 것인지, 분노가 과연 문제의 해결인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결과가 어떻습니까? 분노한 대가를 혹독하게 치릅니다. 
대개 분노를 밖으로 드러내는 사람은 ‘분노’ 와 ‘분노의 폭발’ 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분노는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노의 폭발은 해서는 안 됩니다. 
불은 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불난 집에 기름을 부을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분노와 분노의 폭발이 어떻게 다릅니까? 
‘분노’ 는 인격적인 표현입니다. 분노할 일이 있으면 분노의 감정이 생기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분노의 폭발’ 은 분노의 감정을 틈타 자기의 부정적인 감정을 쏟아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분노는 대개 분노의 폭발입니다. 

여러분 부부 싸움이 왜 커집니까? 분노입니까? 분노의 폭발 때문입니까? 대개가 분노의 폭발입니다.
우리가 분노를 하면 그 한가지의 것들만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감정이 격해지면 상대방에게 대한 온갖 인신공격과 과거의 일들과 다른 일들을 다 들추어내지 않습니까? 

때로는 자녀들 때문에 분노할 수 있습니다. 부모가 뼈 빠지게 벌어서 학원을 보내고 공부를 시켰더니 엉뚱한 짓만 하고 있다면 부모로서 속이 상하고 분노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기회로 모든 부정적인 감정을 쏟아 낸다면 그것은 분노의 폭발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그리스도인들은 절대 화를 내면 안 된다고 합니다. 더군다나 목사가 화를 내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화를 잘못 내거나 잘못 처리하는 것이 문제이지 잘못된 것과 불합리 한 것에 대한 분노의 감정은 얼마든지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노의 폭발로 인해 죄를 짓거나 마귀에게 틈을 주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이러한 분노의 감정을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먼저 분노의 감정을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분노는 대개 욕구불만에서 오는 것으로 자학적인 분노는 분노를 일으키는 행동이나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거나 가슴을 치거나 통곡하면서 자신을 학대합니다. 

그에 비해 일반적인 분노는 대부분 타학적인 분노로 나타납니다.
‘타학적인 분노’ 는 적극적인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분노의 책임을 전적으로 남에게 돌립니다. 
사람을 때리거나 욕설을 하거나 심지어 남을 공격하여 죽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진 분노가 무엇인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그 다음에 행동을 자제해야 합니다.

억압은 나쁘지만 자제는 좋은 것입니다. 억압과 자제는 전혀 다르다고 할 수 있는데 억압은 분노 자체를 누르는 것이지만, 자제는 원인과 해결책을 찾을 때까지 모든 행동을 유보하는 것입니다.

부부싸움을 너무 심하게 하는 어떤 부부가 상담을 위해 정신과 의사를 찾아갔습니다.

의사가 자초지종을 듣고는 큰 통에 든 물약을 처방해 주면서 “만약 화가 치솟거든 이 물약을 한 숟가락씩 꼭 드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반드시 1분 동안 머금은 후에 삼켜야 합니다. 그러면 큰 효과를 볼 것입니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부부는 집으로 돌아오자 마자 대판 싸우다가 의사의 처방대로 물약을 입에 머금고 1분을 기다리고 삼켰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조금 지나니 마음이 가라앉는 것이었습니다.

얼마 후에 약이 떨어지자 부부가 다시 의사를 찾아가 약을 더 처방해 줄 것을 요청하자 의사가 이렇게 대답하였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 물약은 그냥 설탕물입니다.” 부부가 약효를 본 것은 그 약 때문이 아니라 설탕물을 먹고 1분을 기다리는 동안 분노를 삭였기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세 번째로 분노를 표현하되 상대방이 아닌 나 중심으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무슨 말씀인가 하면 정당한 분노를 옳은 방법으로 표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이 메시지 대화법’ 에서는 부모가 자녀에 대한 일방적인 분노의 표현에 대해 예를 들어 설명하는데 무조건 아이의 잘못에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4단계를 따라 1단계에서는 아이의 행동이나 상황을 비난없이 객관적으로 설명하고 2단계에서는 아이의 행동에 따른 구체적인 결과를 알려주고 3단계에서는 그로인한 엄마의 감정이나 반응을 표현하고 4단계에는 엄마가 원하는 바를 강압적이지 않게 구체적으로 전달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를 들어 아이가 집안을 어질러 놓으면 엄마들은 얼마나 화가납니까? 

그래서 흔히 엄마들은 “내가 너 때문에 못살아”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4단계에 적용하면 ‘방금 방 청소를 했는데 네가 금세 다시 어질러놓으니까(아이의 행동) 다시 청소를 해야 해서(행동에 따른 결과) 엄마가 기운이 쏙 빠져(엄마의 감정). 장난감은 이제 그만 꺼내자(행동 제안).’ 예를 들면 이런식입니다. 

이것은 성인들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나 전달법’ 으로 자신의 정당한 감정을 전달하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무슨 말씀인가 하면 분노를 미움이나 원한이나 복수심으로 표현하여 죄로 발전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네번째 분노의 원인을 바로 찾아야 합니다. 

무엇이 나를 분노하게 하고 있습니까? 분노의 원인은 여러 가지 일 수 있습니다.
오해가 분노를 일으키기도 하지만 때로는 분노가 오래전부터 학습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화를 낼 상황이 아닌데 화를 낸다든지, 작은 일에 큰 화를 낸다면 분노는 오래전부터 학습된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분노를 찾아야 합니다. 
어떤 분은 배가 자주 아파서 이유를 알아보니 육체적인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상처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 자신을 버린 남편에 대한 분노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부모에게 버림을 받았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부당한 상처를 입은 경우에도 나타납니다. 
심지어 분노의 원인은 태중에 있을 때 받은 영향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합니다.
산모의 분노가 태중에 있는 아이가 어른이 되어서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합니다.
육체의 병과 마음의 병은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오래된 분노는 몸과 마음을 병들게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성령께서 내 속에 숨은 분노를 찾아주시도록 기도하기 바랍니다.
이것이 우리가 건강할 수 있는 비결이며 우리가 분노로 인해 죄를 짓지 아니하는 길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마지막으로 분노를 해결하기 위해선 용서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나의 분노를 그치게 하는 것은 상대방이 아닌 나 자신입니다. 
다행히 상대방이 용서를 구하면 좋겠지만 대개의 경우는 그렇지 않습니다. 
죄 지은 사람이 더 당당하고 잘삽니다. 이것이 죄 많은 이 세상입니다. 
천국이 완전히 임하기 전에는 이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용서하지 않음으로 인해 잃어버리는 손해는 나의 책임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용서할 만한 환경이 되지 않아도 용서하는 것이 내가 사는 길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결국 용서할 수 있는가, 없는가 이것은 얼마나 십자가의 은혜에 붙들려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십자가를 붙잡으면 나를 분노케 한 사람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스데반은 돌아 맞아 죽으면서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 고 기도하였습니다.
요셉을 보더라도 자신을 노예로 판 형들을 용서했습니다. 
형들을 단순히 사랑해서 용서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깨달았기에 용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아직 내 마음에 분노가 있습니까? 
분노는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여러 좋은 것들을 가로 막는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 하셨습니다. 

원하기는 우리 안에 모든 분노의 감정들을 잘 다스려서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범죄할 기회를 주지 아니하고 주님께서 주시는 풍성한 은혜를 마음껏 누리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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