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전심으로 여호와께 향하는 자 (대하 16:1-14)

첨부 1


전심으로 여호와께 향하는 자 (대하 16:1-14)


제가 미국에 있을 때에 어느 권사님 댁에 식사 초대를 받아 갔었는데, 그 날의 식탁에는 'LA 갈비구이'를 비롯한 맛있는 음식들이 많이 차려져 있었습니다.
모두들 맛있게 식사를 하고 있는데, 그 집에 있는 강아지가 냄새를 맡고 달려오더니 권사님의 의자 바로 곁에 앉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강아지가 권사님을 향해서 정말 '애처로운 눈빛'을 보내는데, 그 집의 손님인 저까지도 그 눈빛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를 충분히 알 수 있었습니다.
물론 권사님은 더욱 그 강아지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고 결국 갈비구이 한쪽을 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강아지가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저 권사님의 발밑에서 앉아서 권사님을 가만히 '바라보는 것' 그것 하나밖에 없었지만, 그 눈빛 하나만으로도 주인의 마음을 움직이기에는 충분했던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신자가 하나님을 바라볼 때에도 그 하늘 아버지 역시 그 눈빛을 결코 못 본 척 하지 않으시고 반드시 놀라운 사랑과 은총을 베풀어 주고야 마신다는 사실을 증거해 줍니다.
  
분단 왕국 시절에 남조 유다의 왕이었던 아사는 그의 초기 통치 시절에는 국민적인 종교개혁도 일으키고 외적도 물리쳤으며 성전을 정성껏 돌보는 등, 꽤 돋보일 만큼 신앙생활이 좋았던 왕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말기에 와서 그의 신앙은 점점 퇴보하기 시작했으며 끝내는 용두사미(龍頭蛇尾)가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바로 그 아사 왕의 실패한 인생을 두고 그가 '전심으로 여호와를 향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전심으로 여호와께 향하는 자'란 '그 마음이 온전히 하나님께로만 향해 있는 자'를 말함인데, 특히 오늘 본문의 문맥에서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신앙인'이라는 의미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전적으로' 의지한다는 것은 '어느 한 대상만을, 그 어떤 경우에도, 끝까지' 의지한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일에 실패했던 아사 왕의 실족을 거울로 삼아서 실로 '전심으로 여호와께 향하는 신자'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전심으로 여호와께 향하는 자는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다른 그 무엇도 의지하지 않습니다.

1절로 6절에 기록하기를 "1아사 왕 삼십 륙년에 이스라엘 왕 바아사가 유다를 치러 올라와서 라마를 건축하여 사람을 유다 왕 아사에게 왕래하지 못하게 하려 한지라 2아사가 여호와의 전 곳간과 왕궁 곳간의 은금을 취하여 다메섹에 거한 아람 왕 벤하닷에게 보내며 가로되 3내 부친과 당신의 부친 사이에와 같이 나와 당신 사이에 약조하자 내가 당신에게 은금을 보내노니 와서 이스라엘 왕 바아사와 세운 약조를 깨뜨려서 저로 나를 떠나게 하라 하매 4벤하닷이 아사 왕의 말을 듣고 그 군대 장관들을 보내어 이스라엘 두어 성읍을 치되 이욘과 단과 아벨마임과 납달리의 모든 국고성을 쳤더니 5바아사가 듣고 라마 건축하는 일을 파하여 그 공역을 그친지라 6아사 왕이 온 유다 무리를 거느리고 바아사가 라마를 건축하던 돌과 재목을 수운하여다가 게바와 미스바를 건축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아사 왕은 그의 통치 말기에 정치적으로 큰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북조 이스라엘 왕 "바아사"가 남조 유다의 "라마"라는 곳을 공략하여 거기에 요새를 구축하려 했던 것이었습니다. 
이 '라마'란 예루살렘 북쪽으로 8킬로미터 정도 되는 지점으로서 북조 이스라엘 사람들이 남쪽에 있는 유다로 내려올 때에 문호(門戶)에 해당되는 곳이었는데, 바아사는 그곳을 점령함으로써 "사람을 유다 왕 아사에게 왕래하지 못하게 하려" 했습니다.
  
이것은 북조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 신앙의 자유와 정통을 찾아 남조 유다로 이주해 오는 사람들이 많았던 까닭에 바아사 왕이 그것을 막으려 했음을 가리킵니다.
아사 왕은 바아사가 그처럼 자기 나라 수도의 지척까지 공략해 와서 요새를 쌓자, 그야말로 '목에 걸린 가시처럼' 불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심각한 국가적 위기에 봉착했을 때 아사 왕은 순전히 정치적으로만 그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시도했는데, 그것이 곧 이웃에 있는 이방 족속 "아람"과 손을 잡고 동맹을 맺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북조 이스라엘과 아람은 어떤 '불가침 조약' 비슷한 협정을 맺고 있었는데, 아사 왕은 아람 왕 "벤하닷"을 구슬려서 그로 하여금 북조 이스라엘과의 협정을 파기하고 자기와 새로 동맹을 맺자고 제의했습니다.
그래서 아람이 북조 이스라엘을 공격하게 되면 자연히 자기는 북조 이스라엘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겠다고 계산했던 것입니다.

아사 왕은 그처럼 우상숭배 민족의 도움을 받으려는 외교를 펼쳤을 뿐 아니라 그 협상을 성립시키기 위하여 아람 왕에게 금품까지 제공했는데, 어처구니없게도 그것을 "여호와의 전 곳간과 왕궁 곳간의 은금을 취하여" 조달했다고 했습니다.
앞의 15장 18절에 보면 아사 왕은 전에 "그 부친의 구별한 물건과 자기의 구별한 물건 곧 은과 금과 기명들을 하나님의 전에 드렸다"고 했습니다.
그랬던 그가 지금은 자기가 바쳤던 것뿐 아니라 다른 헌물들까지 몽땅 다 제 마음대로 가져와서 이방 왕에게 뇌물로 바치는 데에 썼던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자기가 헌금을 많이 내면 교회의 예산 집행에 대해서 그만큼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오늘날의 일부 교인들의 심보와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여튼 그처럼 뇌물이 동원된 권모술수는 일단 아사 왕이 의도했던 대로 맞아 떨어졌습니다.
아람 왕이 갑자기 안면 바꾸고 북조 이스라엘의 성읍들을 공격해 오자 바사 왕은 곧 후퇴할 수밖에 없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아사 왕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바아사 왕이 라마의 요새를 건축할 때 쓰던 자재들을 몽땅 거두어서 "게바와 미스바"에 자신의 요새들을 쌓았습니다.
이것들은 각각 예루살렘 북쪽 6킬로미터와 12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성읍들인데, 오늘날 고고학의 발굴에 의하면 이곳 성벽들에서는 '재사용'된 석재와 목재가 포함되어 있다고 합니다.
즉 처음에 바아사 왕이 라마 건축에 사용했던 것을 아사 왕이 다시 자르고 다듬어서 새로운 건축에 사용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이처럼 아사 왕은 하나님보다는 재물에 의지하고, 우상숭배자와의 협정에 의지하고, 튼튼히 쌓은 요새에 의지했습니다.
그런 것들이 지금까지 그를 지키고 인도해 주셨던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보다 어쩐지 훨씬 더 확실하고 믿음직하게 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런 마음이야말로 아사 왕이 '여호와께 전심으로 향하는 신앙'에서 떨어져 나가는 첫걸음이 되고 말았던 것이었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님만을 간절히 바라면서 살다가도 점점 세상살이에 깊이 들어가게 되면 '하나님보다도 더 믿음직해 보이는 것'들이 많아지면서 신앙생활이 퇴보되기 쉬운 것을 알아야 합니다.
돈을 벌고 모으는 재미, 돈의 맛과 힘을 알게 되면 하나님께 헌금을 바치고 더 큰 축복을 기다리는 것보다는 헌금까지 빼돌려서라도 지금 당장 사업에 투자하거나 저금해 놓는 것이 더욱 확실하게 느껴집니다.
  
성도들을 가까이 교제하고 함께 하나님을 찾는 것보다는 불신 친구들이나 불신 거래처 사장들과 좋은 관계를 맺어 두는 것이 세상살이에는 더욱 이롭게 여겨지게 됩니다.
저 멀리 높이 계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보다는 이 땅 위의 잘 지어진 집이나 고급 자동차 같은 것이 내 인생에 더욱 든든한 배경이라고 생각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이야말로 '전심으로 여호와를 향하는 신앙'에서 탈선이 시작되는 아주 위험한 시점인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사람이나 권세나 물질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신앙에서 한걸음도 벗어나지 않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전심으로 여호와를 향하는 자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것이 곧 불신앙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습니다.

7절로 10절에 기록하기를 "7때에 선견자 하나니가 유다 왕 아사에게 나아와서 이르되 왕이 아람 왕을 의지하고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지 아니한 고로 아람 왕의 군대가 왕의 손에서 벗어났나이다 8구스 사람과 룹 사람의 군대가 크지 아니하며 말과 병거가 심히 많지 아니하더이까 그러나 왕이 여호와를 의지한 고로 여호와께서 왕의 손에 붙이셨나이다 9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이 일은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은즉 이 후부터는 왕에게 전쟁이 있으리이다 하매 10아사가 노하여 선견자를 옥에 가두었으니 이는 그 말에 크게 노하였음이며 그 때에 아사가 또 몇 백성을 학대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아사 왕의 신앙생활에 아주 위태로운 내리막길이 시작되는 것을 본 "선견자 하나니"는 즉시 그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는 단도직입적으로 "왕이 아람 왕을 의지하고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지 아니한" 것은 곧 죄라고 신랄하게 책망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아람 왕의 군대가 왕의 손에서 벗어나게" 되었다고 했는데, 이것은 원래 하나님께서는 바아사 왕과 동맹 관계에 있던 아람 왕을 아사 왕의 손에 붙이시려고 했었는데 이제는 오히려 아람 왕을 살려 두어서 아사 왕의 유다를 괴롭히게 만드실 것이라는 뜻이었습니다. 

하나니 선지자가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아사 왕이 이전에는 그렇지 않았었습니다.
옛날 "구스 사람과 룹 사람의 군대" 즉 "말과 병거가 심히 많은" 강력한 적군과 전쟁을 하게 되었을 때에 그는 첫 순간부터 오직 "여호와를 의지하는" 마음만으로 나아갔습니다.
여기서 '의지하다'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기대다'라는 의미입니다.
즉 당시의 아사 왕은 모든 것을 아예 하나님께 완전히 다 내맡기고 의지하는 기도를 올리면서 전쟁에 나갔으며,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그 원수를 "(아사) 왕의 손에 붙여" 주시는 승리를 거두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오직 '하나님께만 기대고 그의 품에 안겨서 모든 것을 의지하는' 그 멋진 신앙 자세를 완전히 망각했던 것이었습니다.

아사 왕은 아마 그것이 자기가 선택할 수 있는 권리라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것은 꼭 신앙의 필수요소가 아니라,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종목이라고 여겨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사실 세상 사회에서는 윗사람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있지만 도움을 청하지 않는다고 해서 나쁘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같은 사람에게 계속 의지하면서 도움을 바라는 것은 독립심이 없는 못난 인물이라고 비난받을 일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사람들 사이에서는 '남을 의지하지 않는 것'이 결코 '죄'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아사 왕은 하나님을 바로 그런 식으로 생각했던 것이었지만 그것은 크나큰 오산이었습니다.
하나니 선지자가 여기서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것은 바로 '온 땅을 두루 감찰하시면서 전심으로 당신을 찾는 자에게 반드시 능력을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을 무시하는 죄가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사 왕에게 앞으로 계속 "전쟁"을 당하게 되는 큰 벌을 내리실 정도로 중한 죄였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사 왕은 끝내 그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는 자기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던 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에게 그렇게 책망하는 선지자를 옥에 가두고 말았던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필요할 때에만 의지하고 자기 혼자 해도 될 만하면 의지하지 않아도 되는 '선택사양'의 대상이 결코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내게 도움이 될 만할 때만 부르고 하나님보다 내게 더 도움이 될 만한 것이 보일 때면 부르지 않아도 되는 분이 결코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마치 무슨 '품팔이 일꾼'처럼 부리려 하는, 지극히 교만한 자세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 어떤 경우에라도 우리의 마음이 오직 하나님 쪽만을 바라보고 있지 않으면 그것은 곧 '전능하신 하나님'을 얕보는 자세입니다. 
그 어떤 곳에서라도 우리가 만일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기댈 줄 모른다면 그것은 '항상 일곱 개의 눈으로 감찰하시면서 당신을 바라보는 성도를 찾기만 하시면 즉시 도와주려 하시는 하나님'을 무시하는, 정말 건방지기 짝이 없는 신성모독죄가 될 수밖에 없음을 똑똑히 깨달아야 합니다.
신자라 하는 사람이 항상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하며 또한 반드시 의지해야만 하는 것을 잊어버린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잊는 불신앙이요 '하나님께서 성도의 보호자요 구원주가 되심'을 잊는 지극히 망령된 죄가 아닐 수 없다는 사실을 한순간도 잊지 않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전심으로 여호와를 향하는 자는 자기 생명을 두고도 마지막까지 하나님께만 의지합니다.

11절 이하 14절까지의 말씀에 "11아사의 시종 행적은 유다와 이스라엘 열왕기에 기록되니라 12아사가 왕이 된 지 삼십구 년에 그 발이 병들어 심히 중하나 병이 있을 때에 저가 여호와께 구하지 아니하고 의원들에게 구하였더라 13아사가 위에 있은 지 사십일 년에 죽어 그 열조와 함께 자매 14다윗성에 자기를 위하여 파 두었던 묘실에 무리가 장사하되 그 시체를 법대로 만든 각양 향재료를 가득히 채운 상에 두고 또 위하여 많이 분향하였더라"고 기록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이 점점 약해지고 있던 아사 왕은 이제 그의 생명 자체가 꺼져가는 시점을 맞이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그의 인생 마지막 그 결정적인 순간에 실로 비극적인 일, 최악의 일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바로 "(아사 왕이) 그 발이 병들어 심히 중하나 병이 있을 때 저가 여호와께 구하지 아니하고 의원들에게 구하였더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발에 병이 생겼다'는 것이 어떤 상태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심장이나 뇌는 아니니 그리 '치명적인 발병'이라고는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또한 무슨 병에 걸렸든지 간에 '의사의 치료를 받았다'는 것 자체가 잘못된 행위는 물론 아닙니다.
오히려 의술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사람의 병을 고쳐 주시는 대표적인 방법인 것입니다.

문제는 그가 "여호와께(는) 구하지 아니하고" 오로지 "의원들에게(만) 구하였다"는 사실에 있었습니다.
즉 의사의 손을 빌더라도 자신의 생명 그 자체는 오직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탁했어야 했는데 아사 왕은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그의 마음이 이제는 '완전히 하나님을 떠나 버렸다'는 사실에 대한 명백한 증거였고, 그것이야말로 진짜 '치명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13절에는 아사 왕이 결국 죽고 말았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가 죽은 후에 자기 생전에 미리 "파 두었던 묘실"에 "각양 향재료를 가득히 채운 상(침대)"에 눕혀서 온 백성들이 "많이 분향"하는 가운데 그야말로 성대한 장례식을 치르게 되었지만 그것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아사 왕의 인생 종지부는 '그가 마지막 순간까지도 여호와를 찾지 아니했다'는 사실만으로 마침표가 찍히고 말았던 것이었습니다. 

참 얼마나 안타깝고 쓸쓸한 인생의 끝이었겠습니까?
그가 살아 있을 동안에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했던 때가 많이 있었습니다.
오직 여호와께 전심으로 향하면서 자기 어머니까지 폐위시키면서 우상을 타파하고, 유다 군대보다 몇 배나 더 강력한 적군을 물리치기도 했으며, 성전을 중수하고 정성을 다해 섬겼던 때까지도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사 왕은 자신의 인생 말년에 그처럼 젊었을 때 가졌던 '하나님 의지의 믿음'이 점점 약해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 순간, 가장 중요한 순간, 자기 생명을 두고 이제는 진짜로 하나님만을 붙들어야 했었을 바로 그 결정적인 순간에 그만 하나님을 놓치고 말았던 것이었습니다.

사람의 생명이야말로 정말이지 하나님만이 도우실 수 있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사실 다른 일들은 사람이 사람을 웬만큼 도와줄 수 있는 것들이 꽤 많습니다.
친구에게 돈을 빌려 줄 수도 있고 급우에게 공부를 가르쳐 줄 수도 있으며 이웃집의 이삿짐을 날라줄 수도 있고 자녀에게 카운슬링을 해 줄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처럼 서로 도와주고 도움을 받기도 하는 사람이라도 '생사가 걸린 문제'가 닥치게 되면 그야말로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전심으로 향하는 신앙'을 지키는 성도는 바로 그때야말로 그처럼 하나님만을 철저하게 의지하는 신앙을 가장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는 최고의 기회나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모든 불신 권력자들, 부자들, 현자들도 두 손 번쩍 들 수밖에 없는 이 생명 문제에 부딪힐 때에도 우리 신자에게는 '생명의 창조주요 구원주'이신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금세뿐 아니라 내세의 생명까지 그야말로 마음 턱 놓고 맡길 수 있는 전능자를 우리 신자들은 '의지'할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우리 예수님께서 바로 생명 문제를 확실히 책임져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 그 주님의 약속을 믿고 의지하는 신자는 육신이 죽을 때에도 이처럼 평안한 것입니다.
사람 사이에서는 죽음을 두고서는 그 누구도 어찌할 수 없는데 우리 신자는 죽음을 두고서도 이처럼 확신을 가지고 의지할 수 있으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요 축복입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이 이 세상에서 먹고 사는 문제만을 두고 의지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결코 안 됩니다.
'전심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자'는 그 무엇보다도 '자기 생명'을 두고 하나님을 의지할 줄 알아야 합니다.
  
즉 죽기 직전이야말로 정말 하나님을 최고로 의지해야 할 때인 것입니다.
평생토록 주님을 의지하면서 살았다 해도 죽을 때에 우리의 생명주를 의지하지 않으면 속된 말로 '말짱 헛일'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숨이 거두어지기 직전, 자신의 마지막 맥박이 멈추기 직전에 '내 영혼을 주님의 손의 의탁합니다.'라고 끝까지 의지할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다윗은 "여호와의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 보나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의지하였사오니"(시 25:1-2상)라는 찬양을 올렸습니다.
아마 다윗만큼 '하나님 외에는 의지할 대상이 없는' 고독과 위험을 오랫동안 통과한 사람도 없었고 그래서 또한 그만큼 '어떤 경우에도 오직 하나님만 의지함으로써' 수많은 기적의 구원을 체험했던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 다윗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향해 바라보는 삶'은 곧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신앙'과 직결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9절 상반절)라고 했습니다.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눈은 당신만을 의지하고 다른 데로 한 눈 팔지 않는 신자를 결코 놓치시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죽을 줄 알고 자기의 '전심'을 오로지 당신께만 '향하는' 성도에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능력'을 다 동원하여 그 생명을 반드시 구원해 주실 뿐 아니라 끝내 영생에 이르게 하고야 마십니다.
동물도 주인만을 바라보면 그 주인의 사랑을 받게 되어 있는 법인데, 하물며 당신만 바라보는 자녀에게 하늘 아버지께서 어떻게 인애와 자비를 베풀어 주지 않으실 수가 있겠습니까?

1914년에 탐험대장 새클턴은 27명의 대원을 이끌고 인듀어런스호라는 범선을 타고 남극탐험을 떠났다가 얼음 속에 배가 갇혀서 꼼짝 못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6개월 후에 그들은 작은 보트를 끌고서 인근의 '코끼리 섬'에까지는 무사히 도착했지만 여전히 구조될 가망은 없었습니다.
  
그때 새클턴 대장은 지원하는 5명의 대원들과 함께 길이 6미터밖에 안 되는 작은 보트에 몸을 싣고 거친 대양을 가로질러 1,300킬로미터 건너편에 있는 '사우스조지아'로 가서 구조요청을 하기로 결단을 내리고는, 나머지 대원들에게 반드시 돌아오겠다고 약속을 하고 떠났습니다.
그 남은 21명의 대원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오직 자기 대장을 믿고 기다리는 것뿐이었는데, 그들은 약 1년 후에 약속대로 다시 돌아온 새클턴 대장에 의하여 전원 구조되었습니다.
자기네가 구조되기 위해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은 오직 새클턴 대장뿐임을 알았고, 아무리 상황이 악화되어도 그럴수록 자기네 대장이 반드시 돌아올 것이라는 믿음을 굳게 지켰으며, 또한 아무리 기약 없는 세월이 흘러가도 끝까지 대장만을 기다렸던 결과 그런 기적적인 구원을 받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기독신자가 의지해야 할 대상은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그처럼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불신앙하면 그야말로 아무 소망이 없게 됩니다.
그리고 끝까지 의지하고 기다린 자에게는 반드시 구원이 임하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 어떤 악조건이나 절망적 상황에서도 그저 '전심(全心)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바라보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의지할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할 줄 모르는 것이 곧 죄인 줄을 알고, 죽을 때까지도 오직 하나님만 의지함으로써, 그 하늘 아버지께서 반드시 베풀어 주시는 금세의 구원과 내세의 영생을 꼭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