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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윗을 초청한 요압 (삼하 12;2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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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을 초청한 요압’.com
“요압이 암몬 자손의 랍바를 쳐서 그 왕성을 점령하매 27요압이 전령을 다윗에게 보내 이르되 내가 랍바 곧 물들의 성읍을 쳐서 점령하였으니 28이제 왕은 그 백성의 남은 군사를 모아 그 성에 맞서 진 치고 이 성읍을 쳐서 점령하소서 내가 이 성읍을 점령하면 이 성읍이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을까 두려워하나이다 하니 29다윗이 모든 군사를 모아 랍바로 가서 그 곳을 쳐서 점령하고 30그 왕의 머리에서 보석 박힌 왕관을 가져오니 그 중량이 금 한 달란트라 다윗이 자기의 머리에 쓰니라 다윗이 또 그 성읍에서 노략한 물건을 무수히 내오고 31그 안에 있는 백성들을 끌어내어 톱질과 써레질과 철도끼질과 벽돌구이를 그들에게 하게 하니라 암몬 자손의 모든 성읍을 이같이 하고 다윗과 모든 백성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니라”(삼하12;26-31)

오늘 하나님 주시는 말씀은 삼하 12;26-31절 말씀으로‘다윗을 초청한 요압’이러한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겠습니다. 이 말씀이 선포될 때 왜 요압이 다윗을 초청했는지, 왜 하나님께서 이 이야기를 성경에 기록을 하셨는지 그 이유를 분명하게 깨닫는 은혜가 예배드리는 모든 성도님들 위에 함께 하시길 축원합니다. 한번 따라서 하시길 바랍니다. ‘다윗을 초청한 요압’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올인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린다고 하지만, 이미 하나님께서는 모든 좋은 것을 우리에게로 돌리시고 주시는 분이십니다. 2011년 10월 지금 이 시간 까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모든 좋은 것을 우리에게로 주십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알든지 모르든지, 깨닫든지 못 깨닫든지 현실이고 사실입니다.  이 시간 특별히 사랑하심에 대한 깨달음과 감격이 있는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오늘 성경본문 말씀이 기록된 사무엘서는 사사기의 이야기와 이어지는 성경입니다.  여호수아 이후 사사 시대는 한마디로 재난의 시기였습니다. 약속의 땅에서 이스라엘은 철저히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종교적 부패와 도덕적 타락이 너무 심해서 가나안사람들과 구별이 안 될 정도였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가나안 사람들보다 더 타락한 모습도 있었습니다. 당연히 영적, 정치적 힘도 없어서 가나안 땅 한 귀퉁이에서 소수 집단으로 겨우 연명하고 있었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난 시대였습니다.  

이때에 한 가정이 대를 이어서 민족의 구원을 위해 ‘만군의 여호와’께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 가정이 삼상 1장에 나오는 엘가나의 가정입니다. 엘가나가 누구냐구요? 한나의 남편입니다. 그 아들이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요, 오늘 성경의 제목인 ‘사무엘’입니다. 사무엘은 사사로서 혼란에 빠진 이스라엘을 영적으로 잘 다스렸고, 사울과 다윗, 두 사람에게 안수를 해서 왕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다윗왕의 시대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가나안 땅을 다 점령하는 황금기를 엽니다. 

사무엘은 사사시대와 왕정시대를 연결하는 과도기적인 혼란의 시대에 이스라엘의 영적인 지도자로서 그 사명을 잘 감당한 사람입니다. 삼상 31장 중에서 사무엘의 이야기는 8장에서 끝나지만, 사울왕과 다윗왕은 둘 다 사무엘의 지도와 영적인 영향력아래에서 자란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기에 사울서, 다윗서가 아니라 사무엘서 상하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의 영광을 회복해가는 다윗왕, 또 범죄 한 다윗 왕, 그리고 그 부하인 요압의 이야기입니다.

성도여러분,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습니다.   또한 이 세상에서 가장 추한 것도 사랑입니다. 나를 사랑하고 나 중심으로만 세상을 사는 모습처럼 보기 싫고 추한 것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다윗의 신하인 요압의 아름다운 자기희생의 사랑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합니다.  이 사건이 성경에 기록될 만큼 가치와 의미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면서,  이 말씀이 왜 기록되어졌고 또한 이 사건을 통해서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는가를 귀 기울여서 함께 들어 보시기를 바랍니다.

암몬자손과 다윗사이에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삼하10;1) “그 후에 암몬 자손의 왕이 죽고 그의 아들 하눈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 암몬자손의 신왕인 하눈이 다윗에게 반역을 합니다. 다윗이 요압과 군대를 보내어 하눈을 치게 하였습니다. 다급하게 된 암몬자손들이 여러나라 용병을 고용하였습니다.  (삼하10;6)“암몬 자손들이 자기들이 다윗에게 미움이 된 줄 알고 암몬 자손들이 사람을 보내 벧르홉 아람 사람과 소바 아람 사람의 보병 이만 명과 마아가 왕과 그의 사람 천 명과 돕 사람 만 이천 명을 고용한지라”  이 고용된 아람용병들(주)과 암몬자손의 군대가 요압의 군사들을 앞뒤로 포위를 하였습니다. 요압도 군대를 둘로 나누어 하나는 자기가 인솔하고 하나는 동생 아비새에게 인솔하게 하여 마침내 쳐서 이깁니다. 이것이 ‘랍바 전투’입니다. 랍바에서 패한 이 사람들이 또 군대를 모았습니다.  

(삼하10;16)“하닷에셀이 사람을 보내 강 건너쪽에 있는 아람 사람을 불러내매 그들이 헬람에 이르니 하닷에셀의 군사령관 소박이 그들을 거느린지라” 하닷에셀은 아람사람으로 소바의 왕입니다. 그는 두번째 전투를 위해 새로운 군대를 ‘헬람’에 모은 것입니다. 그러나 또다시 이스라엘에게 패하고 말았습니다. 

(삼하10;17-18) “어떤 사람이 다윗에게 알리매 그가 온 이스라엘을 모으고 요단을 건너 헬람에 이르매 아람 사람들이 다윗을 향하여 진을 치고 더불어 싸우더니 18아람 사람이 이스라엘 앞에서 도망한지라 다윗이 아람 병거 칠백 대와 마병 사만 명을 죽이고 또 그 군사령관 소박을 치매 거기서 죽으니라” 

이번에는 다윗왕이 직접 나서서 아람 사람들을 쳤습니다. 그렇게 해가 지나고 다시 전쟁을 계속하는데 이제는 다윗이 요압만을 보내고 자기는 예루살렘성에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삼하11;1)“그 해가 돌아와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매 다윗이 요압과 그에게 있는 그의 부하들과 온 이스라엘 군대를 보내니 그들이 암몬 자손을 멸하고 랍바를 에워쌌고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더라” 

암몬과 아람과의 큰 전쟁은 다 끝났고, 승리는 눈앞에 있으니 굳이 자기까지는 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요압을 보내면서 ‘자네가 마무리하게’ 하고 본인은 성에서 쉽니다.     그리고 범죄가 일어납니다. 

(삼하11;2)“저녁때에 다윗이 그의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옥상에서 거닐다가 그 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워 보이는지라”  

성경은 다윗이 저녁에 침상에서 일어났다고  기록합니다.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는데, 그는 완전히 마음을 풀고 있습니다. 마음껏 게으릅니다. 그리고 왕궁 옥상을 거닐다가 밧세바가 목욕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밧세바가 실제로 아름다운 여인인지 아니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저녁에 침상에서 일어난 다윗의 눈에 ‘심히 아름다워 보이는 지라’ 합니다. 영적으로 느슨하고 풀어진 사람의 눈에는 누구라도 아름다워 보였을 것입니다.  사람을 보내서 알아보니 햇 사람 우리야의 아내인 밧세바입니다. 다윗은 밧세바를 불러 간음을 하고, 밧세바는 임신을 합니다. 마침내 다윗은 요압에게 편지를 씁니다.  

(삼하11;14-15)“아침이 되매 다윗이 편지를 써서 우리아의 손에 들려 요압에게 보내니 15그 편지에 써서 이르기를 너희가 우리아를 맹렬한 싸움에 앞세워 두고 너희는 뒤로 물러가서 그로 맞아 죽게 하라 하였더라” 

이렇게 다윗은 간음과 살인죄를 저지릅니다.

요압이 암몬 자손의 성 랍바를 쳐서 취하는 바로 그 시점에 다윗은 밧세바와 범죄를 저지르고, 또 하나님 앞에서 철저히 회개하였으며 그럼으로써 모든 문제가 일단락되었습니다.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와 범죄 한 일이 있은 뒤, 일 년 간의 세월 동안 전쟁이 계속 있었고, 그 전쟁의 결과로 암몬 자손의 수도를 점령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요압이 다윗에게 사자를 보내어 말하기를 "이제 랍바 곧 물들의 성을 취하게 되었습니다."고 합니다.  이 '물들의 성'이라고 하는 말은 여러 가지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견해로는 이 랍바성이 수원지(水源池)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전쟁을 하는 동안 성이 고립되기 때문에 그 전쟁 동안 필요한 양식과 식수가 아주 중요한 문제로 등장합니다. 이 랍바가 물들의 성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 성이 수원지에 세워졌으며 또한 그 수원지와 성을 연결시켜서 수로를 만들어 놓았다는 말입니다.  

요압은, "수원지의 성 랍바의 점령이 바로 눈 앞에 다가왔습니다. 그러니 왕이 직접 나오셔서 친히 군대를 지휘해서 이 성을 취하셔서, 내가 이 성을 점령했다는 말을 듣지 말도록 하시고 이스라엘과 다윗왕이 점령했다는 말을 듣도록 하소서. 이제 왕은 남은 군사를 데리고 나오셔서 이 성을 쳐서 취하시기를 바랍니다." 라고 연락을 합니다. 그래서 다윗이 요압의 말대로 군대를 데리고 나가서 랍바성을 취하는 이야기를 오늘 본문인 26-31절이 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일 년이 넘는 세월 동안 피를 흘리면서 잠을 자지 못하면서 애쓰면서 전쟁을 직접 진두지휘 했던 사람은 요압이었습니다.   그러나 요압은 자기의 노력과 수고의 결과로 얻게 된 영광을 자기에게 돌리지 않고, 자기의 주 되는 왕 다윗에게 모든 명예와 부귀를 돌리고 있습니다.    

사실 성경을 보면 요압이라고 하는 사람은  개인적으로 봐서는 그렇게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가 아닙니다. 후에 요압이 얼마나 비극적으로 죽는가를 보면 그가   어떤 인물인가를 잘 알 수가 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군대장관 이었습니다마는 그의 신앙과 그의 삶은 그렇게 아름답지가 않았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에 하나님께서 이 사건을 기록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그의 이 모습만큼은 기록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요압을 통해서 한 가지 받아야 될 교훈이 있습니다. 요압은 일 년이 넘는 세월 동안 편히 잠자지 못하고 전쟁터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편히 잠자지 못하고 피흘리면서 전쟁을 했던 그 목적은, 바로 자기의 왕 다윗의 영광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요압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다윗을 높이고 자기를 낮춥니다. 요압인들 왜 자기를 주인공으로 만들어서, 개선장군으로 돌아오고 싶은 마음이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요압은 자기를 낮추고 다윗에게로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     

더구나 지금 다윗은 헷사람 우리야의 살인과, 밧세바와의 간음, 그리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의 죽음으로 무척이나 어려운 지경입니다. 특히 요압은 이것을 잘 압니다. 자기가 왕의 편지를 직접 읽어보았고, 우리야를 사지로 배치시켜 죽인 장본인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왕인 다윗이 얼마나 파렴치한 죄를 저질렀는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요압은 압니다. 

그런데도 요압은 다윗을 높입니다.  궁지에 처한 다윗에게 힘을 실어주고 영광을 다윗에게로 돌립니다. 다윗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고마운 신하이겠습니까??!!    서양 속담에 보면 ‘어려울 때 친구가 진정한 친구’ 라고 합니다. 우리야와 밧세바의 사건은 다윗의 삶에서 최악의 범죄 아닙니까?  하나님을 실망시키고, 백성들을 실망시키는 큰일 이었습니다. 이럴 때 요압은 자기를 높이지 아니하고... 다윗을 높였던 것입니다.  요압의 겸손은 이스라엘 나라의 분위기를 바꾸는 겸손이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26절에 보면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고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성경은 분명히 우리에게 헛된 영광을 추구하지 말고 서로 투기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시편 24장 4절에는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에 보면 "육을 위하여 심는 자는 썩어질 것을 구하고 성령으로 심는 자는 영생을 거둔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열심히 사는 데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시 한 번 점검해야 될 것은, 우리의 모든 수고와 노력과 결실이 바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의 영광을 위하여 쓰여 져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금년 한 해 동안도 여러분은 열심히, 부지런히 살아오셨을 것입니다. 아마 잠시도 숨 돌릴 수 없을 정도로 부단히 애쓰면서 열심히 살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간 본문을 통해서 한 가지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내가 무엇을 위해서 애쓰고 수고하고 잠 못자고 열심히 살아 왔는가? 내가 누구를 위해서 한 해를 몸부림치면서 애를 써 왔는가?"  

오늘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이 질문을 해야 될 것입니다. 누구를 위해서 한 해 동안 그렇게 애를 쓰셨습니까?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노력을 하셨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정말 살아야 될 가치를 깨닫지 못하고 한 해를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승진을 위해서 부단히 노력한 사람도 있을 것이고, 어떤 분들은 조금이라도 물질을 더 모아 보려고 애를 쓴 분도 있을 겁니다.  다 좋습니다.  

그런데 그 노력이 결국 누구를 위한 것이고,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혹시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는 않았는지요?  "육을 위하여 심는 자는 썩어질 것을 구하고 성령으로 심는 자는 영생을 거둔다" 고 하셨는데 혹시 육을 위하여 심지는 않았는지요?  애써왔고 노력해 왔지만 그 모든 노력이 썩어질 것들을 위한 열심이었다면 그 열심은 헛된 열심으로 간주될 것입니다.  열심히 살았지만 우리의 삶이 가치 없는 삶으로 평가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요압이 전쟁터에서 수고한 목적이 자기의 主되는 다윗의 영광을 위함이었던 것처럼, 금년 한 해 동안의 사업장과 직장과 일터에서 애쓰고 노력한 모든 것들이 우리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수고하고 애쓴 것이었다면 그것은 가장 아름다운 수고였고, 또한 보람된 열매입니다. 
 
성도여러분, 여러분들의 사업, 직장, 가정, 남편, 아내, 자식들은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가운데 누려야 될 축복의 일부분이지 그것이 여러분 인생의 목표가 아닙니다. 그것이 가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인생의 참다운 목적은 아닙니다. 우리의 삶이 있다가 반드시 없어질 것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을 위한 삶이 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또한 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삶이라면, 바로 그러한 삶이 축복의 삶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베드로전서 2장에 보면 인생은 나그네라고 했습니다. 욥기 14장에 인생은 그림자와 같다고 했습니다. 시편 90편에서는 인생은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시들어지는 꽃과 같다고 했습니다.  야고보서 4장에서는 인생은 아침에 잠깐 보이다 없어지는 안개와 같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지나온 시간을 되돌아볼 때 ‘어느덧’ 이라고 말합니다.  ‘어느덧 어느덧’ 하면서 벌써 몇 수십 년 지나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새해, 새 기분, 새 소망, 또 멋있게 한 번 시작해 보자." 하고 한 해를 시작하지만,  매년 연말에 지금과 똑같은 얘기를 계속하고 있지 않습니까?  

마태복음 24장에서 주님은 "우리가 생각하지 못할 때에 인자가 다시 오리라."  말씀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생각하지 못할 때에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2장에 보면 ‘어두운 밤이 곧 온다’ 고 그랬습니다.  여러분, 기회는 항상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밤이라도 우리 주님이 부르시면 우리는 가야만 됩니다. 

어느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본가에 갔더니 어머니가 얼굴이 샛노래졌어요. 왜 그러시냐고 여쭈었더니, 밤에 한 숨도 못 주무셨답니다. 하나 밖에 없는 여동생한테서 전화가 왔는데, 몸에 이상이 있어 병원에 가야 된다고 하더라는 겁니다. 그 목사님이 어머니한테 "어머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 녀석 이번에 한 번 크게 혼이 나야 됩니다. 목사 동생이라고 떠벌이면서도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 보면..." 그랬습니다.   그 여동생이 고등학교 다닐 때 폐암이라고 선고 받고 학교를 중단해야 했을 때가 있었어요. 학교를 중단하고 기도원 들어가서 일주일 동안 기도하고 응답 받았어요. 다 나았어요. 암이라 선고 받은 아이가 일주일 만에 산에서 내려 왔어요. 아, 그런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사는 녀석이, 시집가더니 돈독이 올라가지고... 집 장만 한다고 눈에 뵈는 게 없어요.  아버님 회갑이 1월 달인데 추우니까 회갑을 앞당겨 가을에 하자고 그러니까, 여동생이 하는 말이, "아이구 그때 저는 못합니다." 집을 사서 여유가 없다는 거에요. 아, 세상에 돈독이 오르니까 아버님 회갑도 안 해 드리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야, 너 정신 똑바로 차리고 하나님 앞에 바로 서. 은혜 받고 나은 몸이 그렇게 살면 혼나." 하고 일러 주었답니다.     

이 목사님 말씀이 사람은 자꾸 미룬다는 것입니다.  "이거 하고 난 다음에 봅시다. 저가 마치고 봅시다. 집 장만하고 난 다음에 봅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한 번 치시면 가는 것 아닙니까? 사람이 뭐 별거 있습니까? 치면 가는 거지. 가고 나면 집 장만한 것 누구 것 되겠어요? 그래서 미련한 일이라는 겁니다.  남의 얘기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가 무엇 때문에 사는가? 누굴 위해서 사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요압처럼 사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쉽게쉽게 그냥그냥’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에게로 영광을 돌리지 않고 자기가 섬기는 다윗 왕에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그냥, 바로 되는 일은 아닙니다. ‘경건의 훈련’이 되어야 가능합니다.  평소에는 그냥 자기 마음대로, 육체를 따라 살다가 결정적일 때 갑자기 경건하게 되지 않습니다.  경건의 훈련은 평소에 되어있어야 합니다. 

성도여러분, 우리의 마음에는 의자가 있습니다.  하루 24시간, 한 달 30일 그 의자에 누가 주인으로 앉아 있습니까? 예수님 믿는 우리들이지만 평소에는 내가 앉아 있습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입니다. 이것이 자아충만입니다. 내가 의자에 앉아 있으면... 내 인생은 내꺼고, 예수님을 믿어도 내 인생은 주인은 여전히 나 자신이며,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은 손님입니다. 이것이 옳습니까? 귀신들린 사람은 기도하면 귀신이 쫒겨 나갑니다. 그러나 자아충만은 스스로 내려오지 않는 이상은 누가 쫒아 낼 수가 없습니다.  

성도여러분, 우리는 성령충만해야 합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엡5;18) 성령충만은 선택이 아니라 명령입니다. 저는 하루에도 여러 번 의자의 주인자리를 바꾸는 일을 합니다. “아 또 내가 앉아 있구나. 주님 주님이 앉으세요. 나는 내려옵니다. 다 주님에게 맡깁니다. 주님이 나를 다스려 주세요”  내가 주인자리를 예수님에게 드리는 것, 예수님이 시키는 대로 순종을 하겠다고 하는 것이 성령충만이요, 예수충만입니다.  의자의 주인자리를 바꾸는 일을 하루에도 여러 번 하면서 점점 순종하는 생활이 습관이 됩니다. 경건의 연습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요압은 평소에도 자기가 신하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전쟁을 치르고 승리를 눈앞에 둔 그 순간에 그는 자기의 주인을 기억하였습니다.  여러분들도 평소에, 일상 생활중에 여러분의 주인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사업에서 성공하는 바로 그 순간에,  인생에 있어 성공이다 싶은 순간에도 주님을 앞에 내세울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이 하나님의 복을 받고 모든 일이 잘 되어 나갈 때에도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리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베드로처럼 3번이나 주님을 저주하면 부인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自信滿滿했습니다. “다 버릴지라도 나는 주님을 떠나지 않습니다.”
자신만만은 말 그대로 내가 주인입니다. 베드로는 주여 나는 연약합니다. 나를 강하게 해 주십시오 라고 기도해야 했습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금년도 이제까지 정말 애를 쓰셨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 수고와 애씀이 우리 주님의 영광을 위한 수고와 애씀이 되기를 바랍니다.  갑자기 주님 오셔서, 그 앞에 부끄럽게 서게 되는 일이 없도록 평소에 경건의 연습을 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오늘 요압의 충성스러운 모습, 주인에게로 영광을 돌리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 보시기에 나의 모습이 어떠했는가? 반성하고 새로운 각오를 가지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수고와 애씀이 언제나 주님의 영광을 위한 수고와 애씀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A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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