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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 (욘 1: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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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 (욘 1:11-16) 

요나서는 열두 권의 소선지서 가운데 하나인데 다른 소선지서와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다른 소선지서들은 선지자들이 메시지를 받아 증거한 것입니다. 하지만 요나서는 요나가 어떤 메시지를 증거한 것이 아니라 요나가 겪었던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그 경험을 통해서 간접적인 메시지를 증거하는 것이 요나서의 두드러진 특징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요나서를 황당한 전설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요나의 아버지 이름이 아밋대라고 나와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욘 1:1). 아버지가 있다는 것은 그가 실존했던 인물이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종 가드헤벨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로 하신 말씀과 같이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지경을 회복하되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하였으니” (왕하 14:25). 여로보암 2세 시대에 요나가 이스라엘 국경이 회복될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그대로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열왕기하는 역사가가 기록한 책입니다. 역사가들은 전설이나 신화에 나오는 존재들을 실제 인물로 기록하지 않습니다. 북 이스라엘 예후 왕조에서 가장 번영을 누렸던 여로보암 2세 시대에 약 40년(B.C. 790-750) 동안 요나가 실제로 살아 있었고 실제로 예언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요나가 실제 인물이었다는 것을 확정적으로 증거하셨습니다.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 (눅 11:30).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 (마 12:40). 예수님께서 실제 인물인 것처럼 요나도 실제 인물이고 예수님께서 실제로 사흘 동안 죽은 상태로 계셨던 것처럼 요나가 큰 물고기 뱃속에 밤낮 사흘을 있었던 것도 역사적인 사실이라는 말씀입니다. 
 
요나서는 요나라는 선지자가 겪은 경험을 통해서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해주고 계신가를 살펴보며 읽어야 합니다. 

Ⅰ. 요나의 불순종의 네 가지 특징 

요나는 신앙의 초보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불경건한 불신자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종이고 하나님의 선지자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앗수르의 수도인 니느웨로 가서 말씀을 전하라고 했는데 요나는 욥바에서 배를 타고 다시스로 향했습니다. 이러한 요나의 불순종은 네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요나의 불순종은 애국적인 불순종이었습니다. 요나가 살고 있던 시대는 여로보암 2세가 다스리던 때로 이스라엘이 번영했습니다.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있었고 군사적으로도 강했던 시대입니다. 하지만 당시 선지자였던 요나와 호세아는 그런 번영이 영구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일시적인 번영이고 이스라엘은 조만간 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북방의 앗수르라는 나라가 최강대국으로 부상하면서 이미 아람이라는 나라를 정복했고 조금 있으면 이스라엘을 쳐들어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요나는 앗수르가 잘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전하라고 하신 메시지는 40일이 지나면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는 망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40일이 지나기 전에 회개하면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나는 자기가 40일 동안만 다른 곳으로 도망갔다가 오면 앗수르가 망하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애국적인 동기에서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나는 망하더라도 나라는 살려야겠다고 배를 타고 다시스로 간 것입니다. 배를 타고 일단 지중해에 들어가면 40일 이내로 돌아올 가능성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요나는 자신의 사리사욕 때문이 아니라 애국적인 동기로 불순종했던 것입니다. 
 
둘째, 요나의 불순종은 죄악된 불순종이었습니다. 아무리 애국적인 동기라 해도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은 죄입니다. 사무엘상 15장 22절에서 사무엘은 사울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삼상 15:22). 

요나는 이스라엘만을 생각했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더 컸습니다. 이스라엘뿐만이 아니라 앗수르의 죽어가는 사람들도 살리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던 것입니다. 요나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해하지 못해도 순종해야 마땅한 것이었습니다. 불순종은 그 동기가 아무리 애국적이라도 죄인 것입니다. 
 
셋째, 요나의 불순종은 어리석은 불순종이었습니다. 요나는 바다에 배가 뜨면 하나님이라도 40일 만에 자신을 바다에서 육지로 데리고 올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을 너무 과소평가 한 것입니다. 요나는 바다의 운송수단이 배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바다의 운송수단이 배만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큰 물고기도 운송수단이었습니다. 물고기 뱃속에 갇혀 니느웨로 돌아가게 될 줄은 요나도 미처 몰랐던 것입니다.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시 139:7). 우리가 하나님을 피할 수 있는 곳은 없습니다. 
 
요나의 불순종은 결국 요나의 좁은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었습니다. 요나는 앗수르가 멸망하기를 원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앗수르를 구원하기를 원했습니다. 요나에게 앗수르 사람들은 원수였지만 하나님께는 불쌍히 여길 구원의 대상이었습니다. 요나가 불순종한 것은 하나님의 생각과 여러 부분 어그러져 있었기 때문에 요나는 도망간 선지자가 되었고 불순종한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어떤 동기에서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은 어리석은 죄입니다. 


Ⅱ. 요나의 불순종이 가지고 온 결과 세 가지 

요나의 불순종은 세 가지 결과를 가지고 왔습니다. 

첫째, 수치(shame)를 가져왔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가 불신자들에게 망신을 당한 것입니다. 요나가 배를 타고 가는데 풍랑이 일어나고 사람들은 풍랑을 어떻게 해서든지 잔잔케 해보려고 노력합니다. 각자 자기 신께 빌고 배를 가볍게 하기위해 짐을 모두 바다에 던집니다. 그런데 선장이 배 밑으로 내려가 보니까 한 사람이 거기서 잠을 자고 있는 것입니다. “선장이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찜이뇨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니라” (욘 1:6). 

지금 배에 탄 모든 사람들이 살아보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어떻게 혼자서 잠을 자고 있을 수 있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요나는 배 밑에서 잠을 자다가 망신당했습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풍랑이 잠잠해지지 않자 이것은 분명히 초자연적인 원인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제비를 뽑아 누가 불순종해서 그런 것인지 알아보자고 했습니다. 거기서 요나가 딱 걸린 것입니다. 그러자 선원들이 요나에게 물었습니다. “청컨대 이 재앙이 무슨 연고로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고하라” (욘 1:8). 

요나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 하고 자기가 여호와의 낯을 피함인 줄을 그들에게 고하였으므로” (욘 1:9-10). 
그것을 알고 선원들은 요나를 야단칩니다.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욘 1:10). 

얼마나 부끄럽고 망신입니까? 목사가 불신자에게 야단맞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순종은 영광을 가져오지만 불순종은 수치를 가져옵니다. 
 
둘째, 큰 위험(danger)을 불러옵니다. 요나의 불순종으로 선원들도 죽게 되었고 요나도 죽게 되었습니다. 풍랑이 심해져서 배가 뒤집히면 모두가 죽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불순종하면 우리도 위험하고 불신자들도 위험합니다. 목사, 장로, 권사, 집사가 죄를 지어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부정적으로 생각하게 되면 그들은 하나님에게서 점점 멀어지고 지옥에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불순종은 우리뿐만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도 위험하게 하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징계(chastisement)를 가져왔습니다. 바다가 점점 더 흉흉해지니까 선원들이 요나에게 묻습니다.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 (욘 1:11). 그러자 요나가 대답합니다.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인 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 (욘 1:12). 

선원들은 어떻게 산사람을 바다에 던지느냐며 자신들의 기술로 육지에 닿아보려 하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요나를 바다에 던진 줄로 믿습니다. 캄캄하고 풍랑이 이는 바다에 던져질 때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요나는 아마도 거기서 자신의 인생이 끝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 순간이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 (히 10:31). 하나님의 징벌은 무서운 것입니다. 


Ⅲ. 요나를 바다에 던진 것은 누구인가? 

우리가 요나서 1장을 보면서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을 던져야 됩니다. 누가 요나를 바다에 던졌습니까? 요나 1장 15절을 보면 선원들이 요나를 바다에 던졌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요나가 바다에 던져지는 순간 큰 물고기가 하품한 것인지 밥을 먹으려고 한 것인지는 몰라도 입을 벌린 것입니다. 요나는 물고기 입속으로 들어가 뱃속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소화되지 않도록 소화액을 막아주셨습니다. 소화불량에 걸린 물고기는 결국 니느웨 근처에서 요나를 토하게 됩니다. 

참으로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기도하는 내용을 보십시오.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욘 2:3). 

누가 자신을 바닷속에 던졌다고 합니까? 요나 1장 15절에는 분명히 선원들이 던졌다고 나와 있는데 요나는 주님께서 자신을 바닷속에 던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나를 누가 던졌습니까? 선원들이 던졌지만 결국은 하나님께서 던지신 것입니다. 
 
만약 창세기에 나오는 야곱의 열한 번째 아들 요셉에게 요나를 누가 바다에 던졌냐고 물어보면 하나님께서 던지셨다고 할 것입니다. 요셉은 17세에 형들의 미움을 받아 노예로 팔렸지만 30세에 애굽의 총리가 되었고 37세에 형들이 자기 앞에서 무릎을 꿇게 됩니다. 그때 형들에게 자신이 요셉임을 밝히자 형들은 복수를 당할까봐 두려워하자 요셉이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창 45:5). 

노예로 판 것은 형들이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창 50:20). 요셉은 17세에 노예로 팔려가 애굽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종노릇하다가 보디발 아내의 모함으로 감옥에 가게 됩니다. 거기서 13년 동안 고통스러운 세월을 보내게 되는데 그것을 누가 하게 한 것이냐? 하나님께서 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요셉을 총리로 세워 자신의 가족도 살리고 애굽 사람들과 만민을 살리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을 나중에 깨달은 것입니다. 
 
열왕기하 5장을 보면 아람의 군대장관 나아만이 문둥병에 걸립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을 침공했다가 잡아온 계집아이가 빨래를 하면서 이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계집아이는 나아만 장군에게 사마리아에 있는 한 예언자 엘리사를 만나면 나을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자 나아만 장군이 눈이 번쩍 뜨여서 이스라엘을 찾아옵니다. 

그런데 엘리사를 찾아가지 않고 요람 왕을 찾아간 것입니다. 그러자 요람 왕이 옷을 찢으면서 자신이 신도 아닌데 어떻게 문둥병을 고쳐주겠냐며 이것은 분명 시비를 걸어 쳐들어오려고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엘리사가 종 게하시를 보내서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씻으면 나을 것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러자 나아만 장군은 당연히 마중 나와서 안수도 해주고 대접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엘리사는 나오지도 않고 종 하나가 나와서 요단강에서 일곱 번 씻으라고 하니까 나아만이 화가 난 것입니다. 

사람이 교만하면 화를 잘 냅니다. 자기가 아주 높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남들이 높은 사람으로 대접하지 않으면 화를 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나아만은 문둥병 환자로 왔지 장군으로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씻으라는 엘리사의 말에 화를 내니까 종들이 어려운 일을 하라고 해도 해야 될 상황에 요단강에 일곱 번 들어가는 것을 왜 못하냐고 말하였습니다. 이 말을 듣고 나아만 장군이 요단강을 일곱 번 들어갔다 나오자 문둥병이 완전히 낫고 그 살이 어린아이의 살처럼 되었습니다. 

그러자 나아만이 아람에 있는 신들은 다 가짜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진짜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을 믿는 구원받은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나아만의 계집종에게 요나를 누가 바다에 던졌는지 물어본다면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자신을 잡아온 것이 나아만 장군인 줄 알았더니 하나님께서 나를 이곳에 오게 하셔서 결국 나아만 장군을 구원받게 하셨습니다. 요나를 던지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결론 

우리는 요나의 경험을 통해서 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는지도 물어봐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로마 병정이 못 박았다고 그러고 또 어떤 사람들은 유대인들이 못 박았다고 합니다. 감상적인 사람들은 자신이 못 박았다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께서 못 박았다고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사 53:6).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사 53:10).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택하신 자들을 하나도 남김 없이 다 구원하시고자 그런 고난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 삶 가운데는 우리의 어리석은 불순종으로 인해 초래되는 망신과 위험과 징계가 많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저는 나이가 육십이 되어도 어리석은 짓을 했다고 생각할 때가 참 많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불순종으로 초래되는 위험과 망신과 징계가 많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 성도들에게 형벌을 내리지 않으십니다. 형벌은 불신자들에게 내리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에게는 징계를 내리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께서 징계를 내리시고 수치와 위험이 임하면 사람들은 자책을 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신에게 고통을 준 사람을 원망합니다. 하지만 자책하지도 마시고 원망하지도 마십시오. 왜냐하면, 궁극적으로 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불순종으로 인하여 내 삶에 고통이 왔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허물과 죄악도 모두 선으로 바꾸시고 우리의 고난이 도리어 다른 사람의 구원이 되는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분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요나가 불순종하여 물고기 뱃속에서 삼 일 삼 야를 있다가 니느웨에 토해졌을 때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요나는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에 가서 전하고 싶지 않았지만 할 수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욘 3:4). 이것을 영어로 하면 여덟 글자이고 히브리어로 하면 다섯 글자입니다. 요나는 가장 짧은 설교로 큰 부흥을 본 사람입니다. 다섯 글자의 설교를 통해서 니느웨 사람들이 왕부터 시작해서 짐슴까지 모두가 베옷을 입고 금식하며 회개하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께서는 니느웨를 구원하셨습니다. 요나는 불순종하여 고난을 받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바꾸어 앗수르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고후 4:8-9) 우리는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고 거꾸러뜨림을 당해서 우리는 망하지 않습니다. 우리 삶에는 고난이 많습니다.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 불티가 위로 날음 같으니라” (욥 5:7). 

그러나 죄로 인한 고난이 와도 낙심하지 않을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고난을 바꾸어 선을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 8:28). 

제가 찬송가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곡은 “나의 갈 길 다가도록”입니다. 이 노래를 만든 사람은 페니 크로스비(Fanny J. Crosby)입니다. 그녀는 세상에 태어난지 6주 만에 의사의 실수로 시력을 영구히 잃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1915년 95세로 생을 마감하는데 95년 동안 살면서 비록 눈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의 영혼은 하나님을 얼마나 사모했는지 찬송 9000편을 만들었습니다. 

그녀가 시각 장애인이 된 것으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구원받았습니까? 제가 처음 예수님을 믿고 28세에 새벽기도를 나가게 된 것은 새벽기도 시간이 되면 동네 감리교회에서 카세트테이프에다 확성기를 연결해 찬송가를 틀었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일어나 새벽기도를 갔는데 그때 들은 “나의 갈 길 다가도록”이란 찬송이 얼마나 은혜가 됐는지 모릅니다. 동서남북 모두 막혀서 답답해도 위는 항상 열려 있습니다. 위에서 도움을 주시고 우리의 악을 선으로 바꿔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낙심하거나 답답해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위대한 승리를 경험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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