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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 제대로 믿어봅시다 (눅 14:2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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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제대로 믿어봅시다 (눅 14:25-35)


근자에 우리 사회에 반기독교 정서가 도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인터넷 반기독교 사이트에 들어가 보면, 기독교에 대한 노골적인 욕설과 불신과 적대감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마치 기독교가 무슨 해충이나 되는 듯 박멸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대중 매체들 특히 공중파 TV나 신문 잡지들에서도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인 보도가 난무하고 있습니다. 일부 목회자들의 비리나 몇몇 교회의 문제들을 집중 보도하면서, 마치 전체 목회자들과 모든 교회가 다 그런 것과 같은 이미지를 확산시켜가고 있습니다.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그대로 좌시할 수만은 없습니다. 반기독교 정서를 부축이고 조장하는 세력의 의도적 음모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우리 자신에 대한 성찰과 반성의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저들의 비판과 공격이 기독교 자체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기보다는 기독교인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들이 문제 삼는 것은 기독교 자체가 아니라 기독교인들의 삶의 행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정직하게 말해서 오늘의 기독교인들의 삶의 모습에 문제가 많습니다. 저를 비롯한 목회자들이 목회자다운 모습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그리스도인다운 모습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를 제대로 믿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차제에 우리 자신을 정직하게 성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회개할 것은 회개해야 하고, 바로잡을 것은 바로잡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제대로 믿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를 제대로 믿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우리 주님의 소중한 교훈입니다. 
우선 본문 25절을 보면 “수많은 무리가 함께 갈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나섰다는 것입니다. 저들이 왜 예수님을 따라 나섰을까요? 
하나는 예수님께서 베푸신 이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적을 본 사람들은 예수님 뒤를 따라 나서면, 자신들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님께서 전하신 놀라운 말씀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당시 종교 지도자들을 질책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예수님 뒤를 따라 나서면, 참된 진리의 말씀을 들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 25절을 보면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따라오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계속 따라 올 것이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 따라올 사람들의 조건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 봐야 할 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따르는 사람들에게 계속 따라올 것인가를 물으셨을까요? 왜 따라오려면 지켜야 할 조건을 말씀하셨을까요? 그저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뒤를 따르면 그 자체로 좋은 것이 아닐까요?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님을 따를 때 두 가지의 응답이 필요하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일차적 응답입니다. 예수를 믿겠느냐는 물음에 대한 응답을 말합니다.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믿고 따르겠다고 응답하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를 따라 나선 수많은 사람들은 일단 이 일차적 응답을 했던 사람들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차적 응답입니다. 예수를 잘 믿겠느냐는 물음에 대한 응답을 말합니다. 예수를 구주로 믿을 뿐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말씀을 배우고, 그 말씀대로 살겠다고 응답하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이 이차적 응답을 요구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교회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모두가 예수를 믿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일단 저들 모두는 일차적 응답은 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차적 응답을 제대로 하지 못한 사람들이 너무도 많아 보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되 제대로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를 잘 믿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이차적 응답은 무엇일까요? 

1. 가족과 자신을 미워하는 것

26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르는 무리들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가족과 자신을 미워하지 않을 사람은 더 이상 나를 따르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글자 그대로만 본다면,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가족들을 미워해야 하고, 또한 자기 자신도 미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말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면 가족들과 자신을 미워해야 할까요? 그러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자니라”는 딤전 5:8 말씀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본문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미워하지”라고 번역된 어휘를 자세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 말은 헬라어 ‘미세이’(Misei)를 번역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적극적으로 ‘미워한다’는 말이 아니라, 소극적으로 ‘덜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가족들을 미워한다는 말은 가족을 예수님보다 덜 사랑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미워한다는 말은 자신을 예수님보다 덜 사랑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선순위가 예수님보다 가족이나 자신이 앞서서는 안 된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마 10:37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고 하면 예수님을 사랑의 대상에서 1순위로 삼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정말 잘 믿으려면, 예수를 가족이나 나 자신,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더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요 21장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 베드로와 대화하시는 이야기가 기록되어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사랑고백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지금까지 베드로에게 일방적인 사랑고백을 해 오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처음 갈릴리 바닷가에서 자신을 만나주셨고, 부족한 자신을 제자로 삼아주셨고, 그리고 십자가 앞에서 주를 부인했던 자신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이 모든 일들을 통해서 주님께서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깊이 깨닫고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주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베드로가 어떻게 대답해야 할 지 무척이나 당황했습니다. 그러면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주님께 자신의 사랑고백을 드렸습니다.

이 사건 후에 베드로는 달라졌습니다. 주님의 보내심을 받아 주를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처음 예수를 믿을 때는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감사하게 됩니다. 일차적인 응답 때는 주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주님 앞으로 나아옵니다. 그러나 이차적인 응답 때는 주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고백이 필요합니다. 그것도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주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이 필요합니다. 

이런 주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고백이 우리를 예수 잘 믿는 사람이 되게 합니다.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주님을 사랑한다는 고백이 예수를 잘 믿게 해 줍니다.

2.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

본문 27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예수님을 계속 따르려면,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질 각오를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무엇을 말할까요? 우선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들은 십자가형을 선고 받은 사람들입니다. 십자가형이란 당시 가장 참혹한 사형 방법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를 지고 간다는 것은 먼저 사형수가 될 각오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합니다.

사형수가 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자기 포기를 말합니다. 그동안 자기가 쌓아온 자신의 명예, 자신의 지위, 자신의 꿈과 비전 이 모든 것을 예수를 위해 다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다음으로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들은 말 그대로 십자가를 지는 사람들입니다. 형장까지 자기가 달릴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다. 이것은 희생과 수고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위해 희생과 헌신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처음 예수를 믿을 때는 예수 때문에 받는 것이 많았습니다. 먼저 죄 사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자녀라는 새로운 신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영생을 받았습니다. 저 천국에서 영원 복락을 누리를 보장을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 주님과 동행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주님을 위해 자신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 희생과 헌신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할 수 있어야 예수를 잘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아프리카에서 선교하시는 선교사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밀림 오지를 선교여행 중에 물살이 센 강을 걸어서 건너게 되었답니다. 그런데 원주민들이 크고 무거운 돌을 머리에 이고 강 한 복판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입니다. 자기도 따라서 크고 무거운 돌을 힘겹게 머리에 이고 따라나섰답니다.
그런데 강 한 복판에 들어서서야 깨달았답니다. 크고 무거운 돌을 이고 있어서 물살에 휩쓸리지 않았다는 것을 말입니다.

한 교우로부터 비슷한 취지의 신앙 간증을 들었습니다. 신앙훈련을 받는 도중 새벽기도의 과제가 있었답니다. 자기는 밤에 늦게 자기 때문에 새벽기도 다녀와서 출근하려면 정말 힘이 많이 들었답니다. 그래서 이것은 자기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십자가였답니다.

그래도 이를 악물고 새벽제단을 쌓았답니다. 2년 정도 지났을 무렵 뜻 밖에 사업에 큰 어려움이 밀려닥쳤답니다. 부도 직전이고 피할 길이 보이지 않더랍니다. 그 때 새벽마다 눈물로 하나님 앞에 기도를 드렸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그 어려운 시기를 잘 견딜 수 있었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의 은혜를 받을 수 있었답니다.

그러면서 새벽기도라는 십자가를 잘 지고 갔기에, 인생의 위기를 잘 극복할 수 있었다고 간증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일은 감당하기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를 잘 지면, 예수를 잘 믿게 됩니다. 어떤 어려움을 당해도 그 어려움을 잘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 어려움 속에서도 믿음을 잘 지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

3. 모든 소유를 버리는 것

본문 33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예수님을 계속 따르려면, 모든 소유를 버릴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버린다는 말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말은 헬라어 원어 “아포타세타이”(aposetai)를 번역한 것입니다. 이 아포타세타이라는 말의 원 뜻은 ‘헤어지다’, ‘작별하다’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소유를 버린다는 말은 자기가 가진 모든 소유에게 작별을 고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소유를 버리라는 말은 예수님을 따르고자 할 때, 실제로 가진 모든 재산을 포기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자기 모든 소유를 버릴 각오를 하라는 말입니다. 소유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는 말입니다. 

어떤 소년이 학교에 지각을 했습니다. 평소 한 번도 지각이나 결석을 하지 않던 학생이었기 때문에 선생님은 소년에게 지각 사유를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소년은 학교에 오는 도중 어떤 아저씨가 동전을 떨어뜨려서 그걸 같이 찾느라고 늦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물론 동전을 같이 찾아드리는 일도 좋지만, 학교에 오는 일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미안하다고 말하고 지각하지 않게 와야 한다고 타일렀습니다. 

그러나 소년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습니다. 선생님은 또다시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소년은 자기가 그 동전을 밟고 서 있었기 때문에 올 수 없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니까 소년은 동전을 떨어뜨린 아저씨가 찾기를 포기하고 갈 때까지 기다려야 했고, 그래서 지각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이 소년처럼 무엇인가를 밟은 채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 무엇인가에 집착하고, 그것에 노예가 되어 살고 있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그것들에 대해 작별을 고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안녕!”하고 인사하고 그 자리를 떠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럴 때 참된 자유를 얻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를 때 예수를 제대로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한 목사님을 만나서 교제를 나눈 일이 있었습니다. 이분은 유언장을 써 가지고 다니셨습니다. 대화 도중에 제게 유언장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유언장을 써 사지고 다니는 이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목회를 오래하다 보니 자기가 교회의 주인인 것처럼 생각이 들더랍니다. 그래서 주님의 사역을 하려기보다는 자기 교회를 부흥시키고 잘 관리하기 위해 사역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더랍니다. 
그래서 유언장을 쓰고 나니 교회에 대해 마음으로 작별을 고할 수 있게 되더랍니다. 내 교회가 아니고, 주님의 교회라는 사실이 깨달아지고 자유롭게 주를 위해 목회를 하게 되더랍니다.

우리가 마음으로 작별을 고하고 살아야 합니다. 언제든지 떠날 준비, 또 언제든지 떠나보낼 준비, 언제든지 내려놓을 준비를 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자유롭게 그것들을 대할 수 있고, 온전히 하나님의 뜻대로 그것들을 대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제대로 예수를 믿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믿는데서 그치면 안 됩니다. 예수를 잘 믿는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를 잘 믿으려면 가족과 자신을 미워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주님을 깊이 사랑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다음으로 십자가를 질 수 있어야 합니다. 희생과 헌신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모든 소유를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소유에 대한 집착을 버릴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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