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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물음표가 아닌 느낌표의 신앙 (롬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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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음표가 아닌 느낌표의 신앙 (롬 12:1-2)


사람이 40대 중반 이후에 신체의 각 기능이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병이 있는데 이런 병을 성인병이라고 합니다. 2005년에 대한내과학회는 ‘성인병’이라는 명칭을 ‘생활 습관병’으로 개명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내과학회는 ‘이 질환들은 잘못된 생활 습관의 반복에 의해 발생되는 것이므로 올바른 생활습관을 지녀야한다’는 인식을 고취시키고자 하는 의도라는 것입니다. 성인병 증상은 대체적으로 잘못된 생활 습관으로 서서히 나타나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래서 한 번 발병하면 완치되기가 그리 쉽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성인병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비만이라는 것은 영양분을 과다하게 섭취해서 세포수가 늘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번 늘어난 세포는 좀처럼 줄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비만을 시작으로 하는 여러 가지 성인병을 치료하기 위해 생활 습관을 바꿔야 하는데 생활 습관을 바꾸기가 결코 쉽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성인병을 고치려면 노력을 해서 생활습관을 바꿔야 합니다. 

신앙생활에도 성인병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의 성인병은 교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교만은 모든 영적인 질병의 원인이 됩니다. 내가 예수님을 누구보다도 잘 믿고 있다는 자만심의 영적인 비만은 신앙생활 곳곳에 문제를 만듭니다. 영적인 비만은 자신의 신앙생활이 매우 기름진 것처럼 보여도 안으로는 매우 무기력한 생활입니다. 영적인 비만은 자신만이 아니라 그가 몸담고 있는 교회 공동체가 역동적이고 생동감 있는 교회를 만들어 가는데 걸림돌이 됩니다. 이런 영적인 비만에서 벗어나 건강한 신앙인의 모습으로 변하려면 자신만이 예수님을 잘 믿고 있다는 생각을 바꾸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의 전환이 참으로 어렵습니다. 

제가 오늘 설교의 제목을 ‘물음표가 아닌 느낌표의 신앙’이라고 붙였습니다. 영적으로 병이 들어 건강하지 못한 신앙인이 많이 사용하는 표현은 ‘왜’ 라는 물음표입니다. ‘왜 하필이면 나입니까?’ ‘왜 그 일을 해야 합니까?’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왜 참아야 합니까? 왜 사랑해야 합니까’ ‘왜’ 라는 질문은 생활에 있어서 유익한 면도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왜’라는 질문에는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내용과 자세를 기본적으로 담고 있기도 합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부정적인 의미의 ‘왜’라는 질문은 신앙생활의 성인병의 원인이 됩니다. 

성경에서 부정적인 ‘왜’라는 질문을 하나님께 가장 많이 한 사람이 누구일 것 같습니까? 저는 요나서에 나오는 선지자 요나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니느웨에 가서 회개하지 않으면 곧 멸망하게 된다고 전하게 하셨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그러한 명령이 싫었습니다. 니느웨는 이스라엘을 가장 괴롭히고 있는 앗수르 제국의 수도입니다. 요나는 도리어 니느웨가 멸망하기를 바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니느웨의 사람들에게 회개하여 구원을 받으라고 말씀하시니 요나는 싫은 것입니다. 

요나는 하나님께 계속해서 ‘왜’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왜 내가 가야 합니까?’ ‘왜 니느웨가 멸망하도록 내버려 두시지 않습니까?’ ‘왜 저들이 회개하기를 기다리십니까?’ 요나는 끊임없이 하나님께 ‘왜’를 외치며 불평과 원망을 쏟아 놓습니다. 하나님의 꾸중과 설득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지막까지 ‘왜’를 외치며 불만을 쏟아 놓습니다. 요나서 마지막 장에서까지 요나는 하나님께 불평하며 ‘왜’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탈출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가는 과정에서 ‘왜 물이 없느냐? 왜 야채와 고기가 없느냐? 왜 우리를 이곳으로 데리고 나와 고생을 시키느냐?’고 시작부터 끝까지 불평과 원망을 합니다. 가데스 바네아에서는 10명의 정탐꾼이 가나안 땅을 40일 동안 정탐을 한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고를 할 때 ‘왜’라는 부정적인 보고였습니다. 

그들의 ‘왜’라는 부정적이고, 원망과 불평의 보고는 이스라엘 백성 모두에게 부정적인 신앙의 전염을 일으켰습니다. 희망을 가지고 노래하며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40년 동안 사건 사건 속에서 ‘왜’라는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질문을 던지며 불평하고 원망하는 가운데 그 불평과 원망이 생활의 습관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결국 가나안 땅을 밟지 못하고 광야에서 멸망하고 맙니다. 

고린도교회는 예루살렘 교회가 어렵고, 사도 바울과 순회 선교사들이 재정적으로 어렵다는 이야기를 듣고 ‘왜 우리에게 그들을 도와야 하느냐?’ ‘왜 자꾸 일을 만드느냐?’고 원망과 불평을 합니다. 서로 높아지는 곳에만 관심을 갖습니다. 초대교회에서 가장 문제가 많은 교회입니다.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신앙의 표현으로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에게서 하나님의 힘과 영광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머무는 가정, 그런 사람들이 중심이 되는 공동체는 절대로 하나님의 생명력을 만들 수가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에서부터 시작되는 죄의 시작은 ‘왜 그것을 먹으면 안 돼?’라는 부정의 질문에서부터 시작되어 개인과 가정과 공동체가 무너졌습니다. 하나님은 ‘왜’라는 물음표의 신앙에 익숙한 사람을 통해 역사하지 않으시고, 또한 그들을 축복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들어 쓰시며 축복하시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은 ‘왜’라는 말이 아닌 ‘어떻게’라는 단어를 즐겨 쓰는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 ‘어떻게 할까요?’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부름 앞에 ‘왜’라는 말보다 ‘어떻게’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저는 이것을 물음표가 아닌 느낌표를 가지고 사는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이사야서를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타락을 말씀하시며 탄식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회개하게 해야 하는데 내가 누구를 보낼까? 우리 우리를 위하여 갈까?’ 라고 선지자 이사야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이사야는‘하나님, 왜 저에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라고 뒷걸음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응답합니다. 이사야의 응답은 ‘제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 일을 할 수 있을까요?’라는 말입니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입니다. 

모세는 가데스 바네아에서 12명의 정탐꾼을 가나안 땅으로 보냈습니다. 40일 동안 가나안 땅을 정탐한 12명의 정탐꾼 중에 10명의 정탐꾼이 ‘왜’를 외치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부정적인 신앙의 쓴 뿌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똑같은 상황 가운데서 ‘어떻게’를 외치며 믿음의 모습을 보입니다. 광야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려운 상황마다 ‘왜’을 외치며 불평과 원망을 합니다. 그러나 갈렙과 여호수아는 장애물 앞에서 ‘어뗳게’를 외치며 적극적인 믿음으로 극복해 나갑니다. 

‘왜’라는 물음표 신앙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약속에 땅에 아무도 들어가지 못합니다. 반면에 ‘어떻게’라는 느낌표의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 땅에 들어갑니다. 여호수아는 가나안 땅을 점령한 후에 세겜 땅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아 놓고 하나님 안에서 느낌표의 신앙을 가지고 살아온 자신에게 역사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며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느낌표의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설 것을 촉구합니다.   

고린도교회가 ‘왜’라는 물음표를 던지는 교회였다면 빌립보교회는 ‘어떻게’라는 느낌표를 던진 교회였습니다. 예루살렘교회와 사역자들이 어렵다는데 우리 교회가 어떻게 하면 도울 수 있을까?를 말하며 인색하지 않게, 힘에 넘치도록 헌금을 모아 도왔습니다. 

‘왜’라는 물음표 신앙의 사람들의 대체적으로 보면 사안마다 ‘안 된다. 못 한다. 힘들다’라고 말합니다. 헌신하는 일에 손과 발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입은 쉬지 않고 이래애 하고 저래야 한다고 말하며 끝없이 불평과 원망을 합니다. 하나님께 헌신을 해야 하는 것은 누구보다도 잘 압니다. 그러나 이런 저런 핑계를 댑니다. 이래서 못하고 저래서 못한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물음표의 부정적인 신앙을 그럴듯하게 포장하여 다른 사람들까지도 물음표의 부정적인 신앙으로 만들어 갑니다.

‘어떻게’라는 느낌표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된다. 할 수 있다’라는 말을 잘합니다. 헌신해야 하는 일 앞에서 입으로 말하는 것 보다 손과 발로 헌신하며 섬깁니다. 원망과 불평 보다는 감사와 기쁨입니다. 헌신하지 못하는 핑계를 말하기보다 해야 할 이유를 먼저 찾습니다. 그들의 느낌표의 신앙을 다른 사람에게 신앙의 힘이 되고 ‘아 저렇게까지 섬기는 것이구나’하는 섬김의 감동을 줍니다. 

텔레비전을 보다가 가수 오디션을 하는 프로그램을 보았습니다. 가수가 되기 원하는 지망생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심사위원의 자리에 앉아 있던 그룹 부활의 리더인 김태원씨가 가수 지망생을 향해 ‘노래를 부를 때 한 소절 한 소절에 느낌표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당신의 노래에는 시작부터 끝까지 느낌표가 하나도 없습니다’라고 혹평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평가를 들으면서 순간적으로 제 가슴에 울컥하고 올라오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래, 가수가 노래를 부르면서 한 소절 한 소절에 집중해서 느낌표를 찍으며 노래를 해야 청중들에게 감동을 주는구나. 서 목사, 너의 신앙의 삶에는 느낌표가 살아 있는 신앙이니? 너희 목회에 순간순간 느낌표가 있는 목회를 하고 있니’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설교를 할 때 하나님의 살아 있는 느낌표가 있는 설교를 전하고 있니? 찬송을 부를 때 한 소절 한 소절에 “아멘”이 고백되는 느낌표가 있니? 기도를 할 때 “아멘 아멘”으로 화답이 있는 느낌표가 있는 기도를 드리고 있니? 하는 질문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온 맘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찬양을 부르면서 한 소절 한 소절에 ‘아멘’의 느낌표가 있는 찬양을 부르고 계십니까? 말씀을 전하는 저도, 말씀을 듣는 여러분도, 대표 기도를 하는 분도, 함께 기도에 동참하는 우리 모두가 ‘아멘’으로 응답하는 느낌표가 있습니까? 다른 사람에게 핑계 될 것이 아니라 내 마음과 자세에 그런 느낌표가 있는 고백이 있습니다.  

우리 신앙의 삶은 어떻습니까? ‘왜’라는 물음표가 많은 신앙입니까? ‘어떻게’라는 느낌표가 많은 신앙입니까? 오늘 본문은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와 삶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거룩한 산 제사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즉 ‘왜’라는 물음표의 신앙이 아닌 ‘어떻게’라는 느낌표의 신앙이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신앙인의 느낌표의 고백적인 단어는 ‘아멘’입니다. 아멘에는 감사와 순종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예배와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과 동행하면서 ‘아멘’이 살아 있기를 소망합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예배이고 거룩한 산 제물입니다. 느낌표의 아멘은 우리의 삶을 힘차게 만들고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의 삶에 충만하게 임하는 통로가 될 것입니다. 느낌표가 살아 있는 신앙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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