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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저주의 자식 (벧후 2: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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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의 자식 (벧후 2:12-22)


우리에게 지혜를 가르쳐 주는 이야기 중에 이솝 우화가 있습니다. 이 이솝 우화 가운데에 파리와 불나비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배가 고픈 파리가 날아다니다 맛이 있는 꿀을 발견했습니다. 꿀단지의 주변을 돌면서 조심조심 그 꿀을 맛보다가 결국은 조심하는 것을 잊어버리고 깊이 한복판에 뛰어 들어가 그 날개가 젖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힘을 쓰면 쓸수록 그 꿀 속에 더 깊이 파묻혀 갑니다. 그때 불나비가 한 마리 날아와서 “야 이 녀석아. 

음식을 그렇게 탐욕스럽게 먹으면 안 되는 거야. 네가 너무 돼지처럼 먹기를 좋아하니까 그렇게 빠져서 결국 죽지 않니!” 그렇게 비난을 하는 나비 앞에서 파리는 할 말이 없었습니다. 자기 몸이 점점 하강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밤이 되었습니다. 촛불이 켜졌습니다. 이 불나비가 촛불 주변을 빙빙 돕니다. 그 색깔의 아름다움에 취해서 가까이 나갑니다. 더 잘 보려고 가까이 가다가 결국은 타서 죽었습니다. 그때 아직도 죽지 않은 채 있던 파리가 “나보고 바보라고 하더니 저는 더 바보구만. 한 번에 타 죽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탐욕을 좇아 사는 인생, 쾌락을 좇아 사는 인생이 어떻게 스스로 멸망하는가를 가르쳐주는 우화입니다. 성경도 자신을 위해서 사는 인생에게 이러한 무서운 결과가 있다는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4장 1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난 것이 아니냐?”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것도 결국은 자기 욕심에 이끌렸기 때문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보았을 때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하였다”고 했습니다. 결국 이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욕심에 젖어있는 모습입니다. 한 마디로 욕심이 순종하지 못하게 만들고 믿지 못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이 시간 우리는 먼저 쾌락주의로 이끄는 저주의 자식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 노래 가운데 “노세 노세 젊어서 놀아 늙어지면 못 노나니” 하는 노래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젊고 늙고가 없습니다. 아주 노는데 정신들이 없습니다. 한 마디로 미쳐 돌아가는 세상입니다. 예전에는 먹고 사는 일에 바빠 놀 틈이 없었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 힘든 일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일자리만 있어도 좋았습니다. 그래서 하루라도 배고프지 않게 먹을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좋았습니다. 좁은 단칸방에 온 가족이 한 이불을 덮고 자도 좋았습니다. 

그저 바라는 바는 남부럽지 않게 살 수만 있다면 무슨 고생을 해도 좋았습니다. 어떤 집에서는 공부하고 싶다는 자식을 먹고 살기도 힘든데 무슨 공부냐고 하면서 야단하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공부하고 싶다는 형제자매를 위해서 다른 형제자매가 공장을 다니면서 그 학비를 마련하던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누구나 다 공부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공부보다 더 재미있는 것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래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하지 말라는 것들만 찾아서 하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공부보다 컴퓨터 게임이 더 재미있는데요? 휴대폰만 손에 들었다 하면 그 안에 게임을 다운 받아놓고 게임에 정신이 없지 않습니까? 문제는 그 게임들이 우리의 마음을 아주 나쁘게 만드는 그런 게임들이 없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이들만 그러는 것도 아닙니다. 어른들도 나름대로 미쳐 돌아가는 것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출세에 목을 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돈에 목을 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인기에 목을 맵니다. 요즘 연예인이 되려고 준비하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옛날에는 딴따라라고 해서 무시당하기도 했지만 요즘은 연예인들이 요새 말로 대세입니다. 심지어 K-Pop의 열기가 온 세계를 뜨겁게 달구고 있습니다. 그래 K-Pop 가수들의 공연은 자기들 나라에도 와서 해 달라고 여러 나라에서 데모까지 한다고 하지를 않습니까?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게임도 좋고 운동도 좋고 노는 것도 좋고 돈도 좋고 다 좋습니다. 하지만 무엇을 위해서냐 하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즐겁게 세상을 산다고 해도 마지막 우리의 가는 길이 지옥 불 속이라면 그건 비참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가 왜 살아야 하는지 그 목적을 분명히 알아야 하고 우리가 왜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잘못 생각하고 잘못 믿어서 엉뚱한 길로 가다가 망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실 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으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하나님과 사람과 더불어 서로 사랑하며 서로 사귀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을 주고 싶어 하고 또한 받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랑을 주고받는 방법이 서툴러요. 한 마디로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잘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먼저 우리들에게 사랑을 어떻게 하는 것인지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사람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참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사랑은 받기에 앞서서 먼저 주는 것이 복된 것이라는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내가 먼저 준다는 것은 상대방에게 유익하도록 배려한다는 뜻입니다. 단순히 잠깐의 기쁨이 아닌 잠깐의 즐거움이 아닌 두고두고 기쁘고 즐겁도록 만들어주려고 하는 것이 그 출발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거짓된 자들은 먼저 받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먼저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먼저 자기의 목숨을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어주심으로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미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또 달라고만 합니다. 언제 주셨냐고 합니다. 그러면서 서로 네가 먼저 하라고 합니다. 그러다가 그것이 안 되면 자기 마음대로 폭력을 휘두릅니다. 심한 욕을 퍼붓기도 하고 주먹질을 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무기를 들고 폭행을 저지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남들을 향해서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향해서도 그런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나 같은 건 죽어야 마땅해, 나 같은 건 쓰레기야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 아니 그게 누구 말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시는지 우리를 행해서 보배라고 보물이라고 말씀하시는데 누가 그런 나를 쓰레기라고 말할 수 있단 말입니까? 

악한 마귀는 이렇듯 우리의 자존심을 짓밟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을 산산이 부서뜨립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 그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하고 그들의 멸망 가운데서 멸망을 당하며” 한 마디로 말해서 돼지를 왜 키웁니까? 더럽고 냄새나고 힘도 들고 사료 값에 뭐에 뭐에 돈도 많이 드는데 왜 돼지를 키워요? 잡아먹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고 돼지가 고민하는 것 봤습니까? 

마찬가지로 멸망의 길에 서 있는 자들이 거꾸로 교회를 향해서 욕을 합니다. 별별 소리를 다합니다. 교회가 어떻게 뭐하고 정말 귀를 열고 듣기 힘들 없을 정도로 마구잡이 소리를 해댑니다. 그런데 그러한 그들의 모습이 무엇과 같으냐 하면 그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하는 것이랍니다. 이성 없는 짐승 같다는 것입니다. 이성이 없으니 그저 본능대로만 움직이는 것 아니겠습니까? 자기만 유익하면 됩니다. 자기만 좋으면 됩니다. 안 좋은 일에는 그저 나만 아니면 되고 좋은 일에는 그저 나만 되면 되는 그런 이상한 생각에 사로잡혀 살아갑니다. 

“불의의 값으로 불의를 당하며 낮에 즐기고 노는 것을 기쁘게 여기는 자들이니 점과 흠이라 너희와 함께 연회할 때에 그들의 속임수로 즐기고 놀며”
남을 속여 먹습니다. 남을 속여서 자기 배를 채웁니다. 그런데 그래서 잘 사느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결국은 그것 가져다 노름하느라 다 날리고 술독에 빠져서 살고 그저 먹고 마시고 노느라 정신이 없다보니 마치 집 떠난 탕자처럼 어느 날인가 문득 돌아보니 쫄딱 망한 거지꼴이 되어 있더라는 것입니다. 
보세요. 부자가 있습니다. 

날마다 사람들과 함께 잔치를 하며 즐겼습니다. 그 집 문 앞에 있는 거지 나사로를 보면서 나는 저 거지와 같지 않아서 참 감사하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저런 거지를 내 집 문 앞에 있도록 그냥 놔두는 것만 해도 내가 얼마나 사랑이 많은 자인지 모른다고 자부합니다. 맞다고 당신이 너그러우니까 저 거지를 집 앞에 그냥 놔두는 거지 보통 사람 같으면 어림도 없다고 사람들이 맞장구를 칩니다. 하지만 나중 결과가 어떻습니까? 결국 지옥 불 속이 아닙니까? 결국 쫄딱 망한 거지꼴이 아닙니까? 

그래도 나만 하니까 그런 거라고 어줍지 않은 말을 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하지만 스스로 속지 마십시오. 나만 하니까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불쌍히 여기시기에 오늘 내가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듯 그렇게 우리를 치신다면 우리 가운데 남아 있을 사람이 과연 누가 있겠습니까?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며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들이니 저주의 자식이라”
세상이 어지럽다 보니 사랑을 하는데도 바르지 못한 사랑을 합니다. 이게 오늘날의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가인의 후손 가운데 라멕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두 아내를 둡니다. 분명 하나님은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가정을 이루라고 했는데도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어떻습니까? 그건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타락이 되어서 온갖 추잡한 글과 그림과 영화가 사방에 가득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즐겨보는 연속극이라는 것도 불륜과 부정이 들어가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입니다. 툭하면 이혼이고 뭐 이혼하는 것을 조금도 어렵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데 우리가 결혼할 때 뭐라고 약속했습니까?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검은 머리 파뿌리가 되도록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서로 사랑하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무엇이 우리를 갈라놓고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서로를 힘들게 만들고 있습니까? 결국은 음심과 탐욕입니다. 

한 마디로 욕심입니다. 내 것이 아닌 것을 내 것으로 가지려고 하니까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런 저주의 자식들이 교회를 좀 먹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본 모습은 저주의 자식이라고 했습니다. 결국 자기도 망하고 자기를 따르는 자도 망하게 하는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쾌락주의는 쉽게 말하면 좀더 재미있고 신나는 것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물론 재미있게 살고 신나게 살고자 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쾌락주의라고 할 때 그것은 그저 쾌락만 위해서 즐거움만을 위해서 살아간다고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쾌락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즐겁게 살아야 하는데 왜 그게 문제가 되느냐 하면 나만 즐거운 것이 아닌 다 함께 즐겁고 다 함께 신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 하나 즐겁자고 다른 사람을 힘들게 하고 불편하게 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한데 자기만을 위해서 남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자기의 유익을 위한 도구로 삼는 자들이 있기에 문제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자기 목숨까지 주셨는데 저주의 자식들은 자기만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희생시킵니다. 다른 사람의 목숨의 벌레만도 못하게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의 인생은 어떻게 되는 상관없습니다. 그게 사회의 독버섯과 같은 존재들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도 그런 존재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단이요 그러기에 저주의 자식입니다. 이들은 자기만을 위해서 속이고 또 속입니다. 결국 마지막에 죽음의 길로 몰고 갑니다. 그런데도 불로 뛰어드는 불나비처럼 죽는 길인지도 모르고 따라가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잠시의 쾌락을 위해 영원한 나라를 잃어버리는 어리석은 사람이 우리 가운데는 한 사람도 없어야 될 줄 압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웃는 자요 진짜 하늘의 즐거움과 기쁨을 이 땅에서부터 누리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내가 서 있는 자리가 어딘지를 바로 분별해야 합니다.
미디안 광야에 유명한 점쟁이 하나가 있었습니다. 우리네 점쟁이들 특히 무당들을 보면 신내림 굿이라고 해서 소위 귀신들려 무당이 되고 점을 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 그들은 나름대로 신당을 차려놓고 날마다 귀신을 위하며 살아갑니다. 사울 왕이 찾아갔던 여자 점쟁이처럼 미디안 광야에 사는 브올의 아들 발람이라고 하는 점쟁이가 있었는데 그에게 발락 왕이 보낸 신하들이 많은 금은보화를 가지고 찾아옵니다. 

와서 하는 말이 “보라 한 민족이 애굽에서 나왔는데 그들이 지면에 덮여서 우리 맞은편에 거주하였고 우리보다 강하니 청하건대 와서 나를 위하여 이 백성을 저주하라 내가 혹 그들을 쳐서 이겨 이 땅에서 몰아내리라 그대가 복을 비는 자는 복을 받고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줄을 내가 앎이니라.” 
한 마디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래 이 점쟁이가 하나님께 묻습니다. “갈까요 말까요?” 하나님이 허락하시겠습니까? 당연히 안 된다고 하시죠. 그래 거절했습니다. 그랬더니 더 많은 금은보화를 싣고 와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해달라고 청합니다. 

다시 하나님께 묻습니다. 당연히 안 되죠. 그래 안 된다고 돌려보냅니다. 그랬더니 더 많은 금은보화를 싣고 와서 다시 부탁을 합니다. 또 다시 묻습니다. 한데 하나님이 허락을 하십니다. 그래 나귀를 타고 그들을 따라갑니다. 한데 나귀가 이상한 행동을 합니다. 자꾸 앞으로 나가지 않고 옆걸음만 합니다. 아무리 앞으로 가게 하려고 해도 안 됩니다. 그래 지팡이로 때렸더니 나귀가 하는 말이 “왜 때려요?” 합니다. 아니 나귀가 말을 해요. “네가 말을 안 듣고 앞으로 나가지 않으니까 때리는 거 아냐? 왜 말을 안 들어? 만약 내가 칼을 가졌다면 너 벌써 죽었어.” “아니 지금까지 내가 말을 안 들은 적이 있었어요?” “아니 없어.” 그런데 하나님이 그의 눈을 밝혀주시는데 보니까 하나님의 사자가 칼을 빼들고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겁니다. 

그 하나님의 사자가 말하기를 “나귀가 아니었다면 너는 벌써 내 칼에 죽었어.” 그제야 발람은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하고 엎드렸지만 여전히 돈에 눈이 멀어 있어서 발락의 신하들을 따라갑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하게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니 돈은 받았겠다. 그러니 그들에게 꾀를 하나 알려주는데 여자들을 보내서 이스라엘 남자들과 사귀도록 만들면 자연히 그들이 망하게 될 거라는 겁니다. 
정말 세상에 더러운 것 중의 하나가 돈입니다. 사실은 돈이 더러운 것이 아니라 돈을 더럽게 쓰는 사람 때문에 더러워지는 것이지만 말입니다. 아주 하나같이 돈돈돈 하다가 돌아버리지 않습니까? 발람이 돈에 정신이 팔려서 자기 죽는 줄 모르고 해서는 안 되는 일까지 하다가 결국 전쟁에 휘말려 죽게 되니 그 돈이 다 뭐란 말입니까? 한데 오늘 우리들이 바로 그렇지 않습니까? 

어느 식당에 갔다가 이색적인 방석을 보았습니다. 만 원짜리 돈 모양이 가득하게 인쇄된 방석이었습니다. 처음엔 촌스럽게 왜 돈 문양을 넣었나 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이것이 바로 돈방석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함께 갔던 사람들과 한 바탕 웃었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돈방석에 앉고 싶어 합니다. 어떤 사람은 농담으로 돈벼락이나 맞았으면 좋겠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돈을 벌어야 돼.” “어떻게 해서든지 돈 많이 벌어야 돼!” 하며 애를 씁니다. 아이들에게도 “너 공부 열심히 해서 돈 많이 벌어라. 그것이 사는 길이다!” 하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는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돈은 우리네 삶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돈은 삶의 도구일 뿐이라는 점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돈에 이끌려 그 지배를 받고 사는 듯 보입니다. 돈이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갑니다. 돈이 일을 시키면 군소리 못하고 합니다. 돈 앞에서는 세상의 명예도, 권력도 무릎을 꿇습니다. 심지어 사람들을, 그것도 가족을 죽이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에는 돈으로 살 수 없고, 돈으로 할 수 없는 소중한 것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진짜 귀한 것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입니다.

“돈으로 침대는 살 수 있어도 단잠을 살 수 없습니다. 
돈으로 책은 살 수 있지만, 명석한 두뇌는 살 수 없습니다.
돈으로 음식은 살 수 있지만, 입맛은 살 수 없습니다.
돈으로 아름다운 옷과 액세서리는 살 수 있지만, 훌륭한 인격은 살 수 없습니다.
돈으로 좋은 집은 살 수 있지만, 행복한 가정은 살 수 없습니다.
돈으로 약은 살 수 있지만, 건강은 살 수 없습니다.
돈으로 사치는 할 수 있지만, 교양은 살 수 없습니다.
돈으로 향락은 살 수 있지만, 진정한 행복과 영생은 살 수 없습니다.”

이 밖에도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은 무궁무진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돈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과 돈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돈을 지배하는 능력과 사용할 줄 아는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돈에서 자유로울 때 비로소 행복이 찾아옵니다.
그렇지만 돈에서 자유롭기에는 우리가 가진 것이 너무 부족하다고 생각하지를 않습니까? 아니 사실은 우리가 가진 것에 비해서 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내 능력만큼이 아닌 남들 하는 것만큼 하려고 하기에 더 그렇습니다. 

어쨌든 누가 뭘 한다 싶으면 나도 그걸 해야 됩니다. 누가 뭐 좋은 것은 가지고 있다 하면 나도 그것을 가져야 합니다. 남들이 뭘 배운다 하면 나도 그걸 배우고 싶어 합니다. 내가 그걸 할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더더욱 우리네는 지난 세월 지나오면서 체면 문화가 아주 우리 몸과 생각에 배여 있습니다. 그래서 냉수만 마시고도 이를 쑤셔야 됩니다. 척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짝퉁도 유행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결국 가짜 인생입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이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들이 무시한다고요? 좀 무시를 당한들 어떻습니까? 정작 진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도 여전히 하나님 보다는 사람에 매여 있고 그러다 보니 자연히 돈에 매여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서도 요즘은 좀 힘든 일은 또 안 하려고 합니다. 그저 쉽게 쉽게 돈을 벌려고만 합니다. 한데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누구는 황금 보기를 돌 같이 하라고 했지만 사실 황금이 없으니 그런 말을 하지 황금이 있다면 어찌 황금을 돌 같이 여길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생각을 바꿔보면 모든 것이 다를 수 있습니다. 보석이라는 것 결국 돌덩어리 아닙니까? 조금 더 반짝거린다고 해서 별다를 것이 무엇입니까? 금반지도 그렇습니다. 금반지 끼고 있다고 더 달라 보인답니까? 그거 그냥 무시해버리면 됩니다. 그래 돈이 많으면 더 달라질 것은 또 무엇입니까? 좋은 음식도 하루 이틀 아닙니까? 뭐 비싼 옷이라고 해서 별 다를 것 또 뭐가 있겠습니까? 물론 보기에 좋고 촉감도 좋겠죠. 

그런데 좋은 옷은 또 그러기에 불편한 점도 있지를 않습니까? 망가질까봐 더러워질까봐 함부로 행동도 못합니다. 그래서 돈은 나를 위해서보다 남을 위해서 사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고아와 과부 나그네와 가난한 자 그리고 주의 사자들을 돌아보라고 하는 것이 무엇 때문입니까? 바로 거기에 진짜 행복이 있고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없는 가운데서 나누는 것도 정말 사람을 복되고 덕스럽게 만들지만 내가 나눌 것이 있기 위해서 수고한다고 할 때 그 수고는 결코 우리를 짜증나게 하는 것이 아닌 즐거움으로 가득하게 만들어줍니다. 

발람이 왜 망하고 말았습니까? 돈이 목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하나님이 그 길을 막는데도 그 길로 가기를 고집했습니다. 왜요? 돈에 매였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보다 중요한 것은 돈을 어떻게 벌고 또 어떻게 쓰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돈을 버는 목적도 분명해야 하고 돈을 버는 과정도 옳아야 됩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에 서로에게 유익하도록 되어야 합니다. 성경에 하나님께서 재물 얻을 능을 주신다고 했습니다. 누구에게 재물 얻을 능을 주십니까? 하나님을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돈을 사용하기로 작정하는 사람에게 입니다. 하지만 돈이 있고 난 다음에 그 마음이 변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습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그들은 마치 개가 자기가 먹다가 토해 놓은 것을 다시 집어 먹는 것과 같고 깨끗이 청소해 놓은 우리를 다시 지저분하게 사용하는 돼지와 다를 바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돈에 매여 사는 인생이 아닌 돈을 활용하는 복된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시험에 직면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방법으로 시험을 처리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시험을 물리치려는 노력조차도 하지 않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유혹에 깊이 끌려 들어가기 전에 그만둘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죄악과 함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롬13:14 말씀은 우리들에게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가르치며, 또한 “청년의 정욕을 피하라”고 말씀합니다. 
아래의 예화는 시험을 다루는 두 가지의 길을 보여 주는데. 한 방법은 패배의 길로 인도하고, 다른 방법은 승리의 길로 이끌어 줍니다. 

한 소년이 그의 어머니에게, 친구들과 같이 공을 가지고 놀아도 괜찮은지 물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승낙을 하면서, 놀이터로 가는 도중에 있는 연못에서는 절대로 수영을 하지 말라고 일렀습니다. 그러나 이 소년은 집을 나설 때 만약을 생각하여 수영복을 가지고 갔습니다. 자기 친구들이 연못에서 즐겁게 노는 것을 보았을 때, 이 소년이 무엇을 하였는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수영복을 미리 가지고 감으로써 시험을 초래하였던 것입니다. 

또 다른 한 소년은, “제가 수박밭 근처를 지날 때 입에서 침이 솟는 것은 어떻게 할 수 없지만, 저는 그곳을 외면할 수는 있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는 얼마나 대조적인 태도입니까? 이 소년의 행동은 바울 사도가 젊은 디모데에게 말하고 있는 것을 예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고전 10:13을 보면,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시험이 찾아올 때에 하나님께서는 “피할 길”을 준비하십니다. 그렇지만 피하는 것은 우리들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아무쪼록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기회들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은혜와 사랑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데 활용하며 우리를 멸망의 길로 인도하는 거짓 목자들, 저주의 자식들을 바로 분별하여 날마다 우리의 가진 모든 재물과 기회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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