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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러므로 합당하게 행하십시오 (엡 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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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합당하게 행하십시오 (엡 4:1-3)

: 1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시는 은혜가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안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자주 파선 사고가 일어나는 어느 해안에 인명 구조대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볼품없이 작았습니다. 건물이라곤 오두막 한 채 뿐이었습니다. 보트도 낡고 작은 것 하나뿐이었습니다. 그러나 헌신적인 몇 명의 회원들이 열정적으로 활동하였습니다. 그들은 자신을 돌보지 않고 밤낮으로 바다에 나가 생명을 구조하였습니다. 작지만 훌륭한 구조대에 의해 많은 생명들이 구조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구조대는 유명해졌습니다.

구조대가 유명해지자 많은 사람들이 후원하기 위하여 모였습니다. 시간과 돈을 제공하였습니다. 새로운 보트들을 구입했습니다. 구조대원들을 훈련시켰습니다. 작은 구조대가 점점 더 커지게 되었습니다. 구조대는 더욱 유명하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흘렀습니다. 구조대에 가입한 어떤 사람들이 너무 볼품없는 시설을 불평하였습니다. 좀 더 편안한 장소가 마련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새로운 건물이 지어졌습니다. 비상용 간이침대는 훌륭한 침대로 갈아치워졌습니다. 좀 더 훌륭한 가구들을 갖다 놓았습니다. 큼직한 식당도 마련되었습니다. 식당은 대원들의 친교를 위한 연회장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습니다. 구조대원들은 바다에 나가는 구조하는 일에 점점 관심을 잃게 되었습니다. 구조대원들은 파티를 즐기는 일에 열중하였습니다. 바다에 뛰어들어 인명을 구조하는 어렵고 위험한 일은 이제 그만두어야 한다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투표를 하였습니다. 결과는 어렵고 위험한 일을 하지 말자는 사람들이 승리하였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인명구조대라는 이름을 사용하지만 전혀 인명 구조를 하지 않는 구조대가 되었습니다. 구조대 건물에서는 파티가 계속되었습니다. 바다에서는 구조를 기다리며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데오도레 위델(Theodore Wedel)이 현대 교회의 실상을 비유로 설명한 것입니다. 이 비유의 요점은 실천이 없는 교회의 모순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이제, 에베소서의 후반부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에베소서의 본론부인 1:3에서 6:20까지의 말씀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전반부는 1:3에서 3:21까지입니다. 그리고 후반부는 4:1에서 6:20까지입니다. 전반부는 교리 즉 믿어야 할 내용입니다. 그리고 후반부는 실천 즉 행하여야 할 내용입니다. 우리는 전반부의 내용 중에서 1장의 말씀을 다루었습니다. 2장과 3장은 다음 기회로 넘기고 4장의 말씀을 들으려고 합니다. 교리에 대한 말씀을 더 살펴보는 것도 유익할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너무 길어지기 때문에 실천에 대한 말씀을 먼저 들으려고 합니다. 교리에 너무 집중하다가 실천을 놓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천에 대한 말씀을 나누다가 언제든지 필요하면 교리를 다시 다룰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교리와 실천 둘 다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실천에 관한 말씀은 권면한다는 말로 시작합니다.
  

I. 권면  

교리에서 실천으로 넘어가면서 사도 바울이 에베소교회에 사용하고 있는 첫 번째 말은 무엇입니까?

1절 전반절 말씀입니다.
: 1a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우리말의 순서와는 달리 헬라어 성경은 ‘권한다’는 말로 시작합니다. 물론 우리말의 순서로는 움직임에 대한 말[=動詞]이 뒤로 가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하지만 본래 말씀이 권한다는 말을 강조한다는 것을 잊어져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그의 자녀가 된 사람들에게 권하는 것입니다. 이 권면은 오늘 본문 말씀뿐만 아니라 에베소서의 후반부 전체를 이끄는 말입니다. 

에베소서 후반부 전체가 우리가 실천해야 할 권면입니다. 여기에서 ‘권하다[parakalevw/파라칼레오]’는 말은 ‘가까이서 부르다’, 즉 ‘초청하다’, ‘훈계하다’, ‘부탁하다’의 뜻입니다. 어떤 면에서 당연히 하여야 할 일을 하라고 명령할 수도 있지만 강압적인 명령이 아닙니다. 이것은 사랑이 듬뿍 담긴 간곡한 부탁입니다.

1. 들으라고 권합니다.

우리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귀로 듣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듣고 행동에 옮겨야 합니다. 말씀에는 듣고 믿어야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또한 듣고 실천해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말씀은 듣고 믿어야 할 뿐만 아니라 행하여야 합니다.

유대인이 사는 집의 문 옆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메주자입니다. 메주자는 유대인의 가정에서 화장실을 제외한 대문에서부터 방문에 이르기까지 들어가는 문 꼴의 오른쪽 위에 붙입니다. 

메주자 안에는 가죽위에 신명기의 두 말씀이 쓰여 있습니다. 첫 번째는 신명기 6장 4절에서 9절까지입니다. 이 말씀이 ‘쉐마’라는 것으로 유대교 믿음의 ‘표어’입니다. 이 말씀은 바로 “이스라엘아 들으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내용은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라는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가르치고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듣는다는 것은 곧 실천한다는 말입니다. 듣는다는 것은 행동으로 옮긴다는 말입니다. 믿음은 말씀을 듣는 것이자 실천하는 것입니다. 믿음과 행함은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말씀에는 믿음으로 받아들어야 할 말씀이 있는가 하면 행동으로 반응하여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믿기에 곧바로 행동하여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이라는 말 속에 행동을 포함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영적인 성장을 원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신중하게 들을 줄 아야 합니다. 그래서 믿을 것은 믿어야 합니다. 버릴 것은 버려야 합니다. 하여야 할 것은 하여야 합니다. 기다려야 할 것은 기다려야 합니다. 견뎌야 할 것은 견뎌야 합니다.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마음으로 듣는 것 그 이상, 온 몸으로 들어야 합니다.

유대인들처럼 메주자를 문 곁에 붙이지 않아도 우리는 자신의 마음에 ‘들으라’는 말씀을 새겨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까?

다시, 1절 전반절 말씀입니다.
: 1a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 말씀에서 두 번째 단어는 ‘그러므로’라는 말입니다. 우리말로는 접속사이기 때문에 문장의 처음에 나오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앞에서 말씀을 드린 대로 에베소서는 전반부(1:3-3:21)와 후반부(4:1-6:20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전반부의 교리와 후반부의 실천을 연결하는 접속사가 ‘그러므로’입니다. 이것은 실천적인 교훈이 교리에서 비롯된 것임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입니다.


2. 그러므로 권합니다.

성경이 권면하는 것은 그냥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생각하기에 그렇게 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기 때문에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그러므로’ 이렇게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죄 사함을 받았기 때문에 ‘그러므로’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영원한 기업이 되었으니 ‘그러므로’ 이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스러운 교회가 되었으니 ‘그러므로’ 이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그러므로’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놀라운 능력을 주셨으니 ‘그러므로’ 이렇게 산다는 것입니다. 

신앙에서는 ‘그러므로’가 중요합니다. 이것은 그렇게 살아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를 밝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가 없으면 신앙이 아닙니다. 믿음이 원인이 되어 ‘그러므로’라는 결과가 있어야 합니다. 믿음이라는 원인이 없이 결과를 기대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반대로 결과가 없는 믿음은 온전한 믿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원인이 되어 ‘그러므로’ 예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결과가 우리의 삶에 더욱 넘쳐 나기를 소원합니다.

바울을 통하여 에베소 교회에 하는 권면은 어느 정도입니까?

또, 1절 전반절 말씀입니다.
: 1a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여기에서 바울은 자신의 형편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 ‘주님을 위해서 일하다가 감옥에 갇힌’ 처지입니다. 이것은 복음을 전하다가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던 배경을 반영한 것입니다. 이 시기는 대략 60년에서 62년경이었습니다. 바울은 감옥에 갇힌 상태에서 죽음을 앞에 두고 이 말씀을 합니다. 이것은 이 내용이 얼마나 간절하고 절실한가를 말해 줍니다. 바울의 온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3. 간절하게 권합니다.

우리는 간곡한 부탁을 받을 때 거절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더욱이 숨을 거두기 직전의 유언적인 말이라면 더욱이 신중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불의한 부탁이라면 거절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선한 권면이라면, 더욱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선포되는 것이라면 반드시 들어야 합니다. 

옛날 옛적에 어느 개울가에 엄마 청개구리와 아들 청개구리가 살았어요. 그런데 아들 청개구리는 엄마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어요. 엄마가 “산으로 가거라.”하면 아들 청개구리는 “싫어 난 강으로 갈 거야.”하고 강으로 갔어요. 강으로 가라고 하면 산으로 갔어요. 일어나라고 하면 앉고 앉으라고 하면 누웠어요. 

얼마 후, 엄마가 병이 들었어요. 엄마는 자기가 죽으면 산에 묻히기를 바랐어요. 하지만 아들 청개구리에게 말하면, 거꾸로 강에다 묻을 것이 분명했어요. 그래서 엄마는 아들 청개구리를 앞에다 불러 놓고 이렇게 마지막 유언을 했어요.

“아가, 내가 죽으면 산에다 묻지 말고 강에다 묻어 다오.”

엄마가 죽자 아들 청개구리는 그 동안 엄마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것을 깊이 뉘우치게 되었어요. 그래서 엉엉 울면서 엄마의 마지막 소원은 꼭 그대로 지켜야겠다고 다짐하고 엄마를 강가에다 묻었어요. 그런데 비만 오면 강물이 불어 강가의 무덤이 꼭 떠내려갈 것만 같아요.

“이거 큰일 났네! 개골. 비가 오네! 큰일 났다. 개골. 큰일 났다. 개골. 우리 엄마 무덤이 떠내려가면 어떻게 해. 개골개골.”

우리는 이 청개구리의 바보스러움에서 그래도 한 가지 배울 것이 있습니다. 바로 어머니의 유언에 충실하였다는 것입니다. 비록 어리석지만 어머니의 마지막 말은 지켰습니다.

유언에는 힘이 있습니다. 마지막 말에는 효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서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9-20a)는 말씀에 순종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간곡한 부탁을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더욱이 하나님의 간곡한 말씀을 어찌 뿌리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사도의 간곡한 마음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에베소 교회에 ‘그러므로’ 간곡하게 권면하는 내용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간곡한 말씀으로 들어야 할 내용은 무엇입니까?
  

II. 행함  

‘그러므로’ 어떻게 하여야 할지 그 내용이 이어집니다. 이것은 원인이 있었기에 ‘그러므로’ 그렇게 하여야 할 결과입니다.

1절 후반절 말씀입니다.
: 1b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간곡한 권면의 내용은 그러므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은혜로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그러므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은혜가 원인이라면 그 결과는 우리의 행동입니다. 여기에서 ‘행하다[peripatevw/페리파테오]’는 말은 ‘주위를 걷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여기저기 돌아다닌 것을 가리킵니다. 비유적으로 동료나 숭배자로써 살아가는 것을 가리킵니다. 

1. 행하라고 권합니다.

해바라기가 해를 따라서 도는 것처럼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선한 마음을 따라 선한 행동을 합니다. 그리고 악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악한 마음을 따라 악한 행동을 합니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따라서 행동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의 행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 지, 무엇을 따라가고 있는 지를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요즘 기독교인들 비판하는 말 중에 ‘개념이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개념이 없다는 말은 많은 사람들이 다 그렇다고 생각하는 기본적인 도덕 규칙, 혹은 상식에서 현저하게 어긋나서 자기만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수도 잘 믿고, 신앙생활도 잘하는데 잘못된 태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예수님을 잘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개념, 교리를 배웠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인가 하는 교리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교리를 배웠다고 개념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배워서 아는 것은 개념에 대한 이론입니다. 개념이 없다는 것은 배워서 알고 있을 지라도 알고 있는 데로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행동이 없다는 것을 개념이 없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볼 때 행동하지 않는 것은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교의 심오한 진리를 볼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의 행동을 볼 뿐입니다. 우리에게 진리를 깨달은 믿음이 있다면 스스로는 개념이 있다고 할 만 합니다. 그러나 행동이 없다면 사람들에게는 개념이 없는 것입니다. 개념이 없는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세상과 담을 쌓는 것입니다. 전혀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가 배운 개념을 행동으로 보여 주어야 합니다. 행하라는 권면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어떤 선교사 한 분은 자신이 예수님을 믿게 된 계기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대학 시절 공부에 무척 지치고 힘이 든 어느 날이었답니다. 학교 구내식당 한쪽에서 평소에 존경하던 교수님이 식사 기도를 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평소에 그 교수님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잘 알고 존경하였는데 그분이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그 모습이 매우 평화롭고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때부터 예수님을 믿기로 결심했습니다. 그 교수님이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보여준 것이 놀라운 전도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말싸움을 통해서가 아닙니다. 행동으로 개념을 보여주는 개념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말씀은 그러므로 어떻게 행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까?

다시, 1절 후반절 말씀입니다.
: 1b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그러므로 행하여야 할 방법은 ‘합당하게’입니다. 


2. 합당하게 행하여야 합니다.

여기에서 ‘합당하게[ajxivw"/악시오스]’는 ‘무게를 달다’는 말에서 유래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무게를 다는 저울은 천칭, 흔히 접시저울입니다. 가운데에 줏대를 세우고 가로장을 걸치는데, 양쪽 끝에 똑같은 저울판을 달고, 한쪽에 달 물건을, 다른 쪽에 추를 놓아 평평하게 하여 물건의 무게를 다는 것입니다. 양쪽이 평평하게 되어야 무게가 맞는 것입니다. 그래서 합당하다는 것은 ‘적당히’, ‘어울리듯이’ ‘대등한’, ‘같은 가치의’를 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행동하는 사람은 그 ‘그러므로’에 어울리는 행동을 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에 적당한 행동을 하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는 우리에게 걸맞은 행동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것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행동해야 합니다. 그래야 개념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동 맞은편에 올려놓아야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무엇에 걸맞은 행동을 해야 합니까?

또 1절 후반절 말씀입니다.
: 1b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기에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행동 기준은 부르심입니다. 이 부르심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자녀로 불러주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부르심[kalevw/칼레오]’이라는 말은 앞에서 ‘권하다[parakalevw/파라칼레오]’는 말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권하다’는 말이 바로 ‘가까이 부르다’는 말이었습니다. 가까이 불러 간곡하게 부탁하는 것이 권면입니다. 그런데 이 부르심이라는 말은 ‘교회’[ejkklhsiva/엑클레시아]라는 말과 또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교회라는 말은 ‘어디에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세상에서 예수님으로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부르심으로 받은 사람들이고,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권면을 받아야 합니다. 권면은 부르심을 받은 사람답게 행동을 하라는 것입니다. 


3. 부르심에 합당해야 합니다.

잔치에 초대를 받은 사람은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답게 행동하여야 합니다. 손님이 주인처럼 행세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법정에 출두한 사람은 법정에 출두한 사람답게 행동하여야 합니다. 뻔뻔스럽게 행동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이 세상에 나그네로 초대받은 사람은 나그네답게 살아야 합니다. 천년만년 살 것처럼 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답게 행동하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응답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부름과 응답이 평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이것은 믿음과 행함이 평형을 이루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하는 사건 중에 하나는 청와대의 수석비서관이 걸맞지 않은 행동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대통령을 보좌하는 비서관으로 부름을 받은 사람은 대통령을 보좌하는 사람답게 행동하여야 합니다. 자신의 자리를 이용하여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것은 대통령의 참모답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선택하심을 받아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부르심을 받았습니다(엡 1:4). 거룩하고 흠이 없게 행동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게 부르심을 받았습니다(엡 1:5).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이 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엡 1:12).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성령의 도장을 받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엡 1:13) 우리는 성령 받은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다움이 바로 우리에게 있기를 소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오늘 예배 배경 그림이 거꾸로 뒤집혀 있어서 불편하셨던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눈이 피곤한 정도가 아니라 마음이 무척 불편하셨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늘에 뿌리를 두고 땅을 향하여 가지를 뻗어야 한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몇 주간 계속해서 거꾸로 선 나무를 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거꾸로 선 것이 아니라 하늘에 뿌리는 두었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에 걸맞은 행동, 하나님의 자녀에게 합당한 행동에 대한 말씀을 들을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답게 살아가려는 여러분에게 성령님께서 능력으로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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