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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를 따라 가려는 자의 자세 (막 10:3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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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따라 가려는 자의 자세 (막 10:35-45)


기독교 사상가이며, 언론가로서 유명한 '멀콤 리치'라는 사람은 그가 쓴 책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실용주의가 이 땅의 기독교인들의 삶에 미친 가장 커다란 영향이 있다면 그것은 오늘의 기독교인들에게서 참된 결단과 헌신을 빼앗아 간 것이다."

저는 이 말이 오늘의 한국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 메시지라고 생각을 합니다.  제 기억으로는 불과 80년대까지만 해도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신앙의 가장 위대한 영웅들은 순교자들이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를 기억해 보아도 교회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설교가 순교자들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가슴을 설레이게 하는 감동이었습니다.  과거에 그리스도인들의 간증이나 어떤 신앙에 대한 고백을 듣게 되면 자주 출현했던 단어들이 이런 단어들이었습니다.
"나는 결심합니다.  결단합니다.  이렇게 각오하겠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이런 단어를 쉽게 들어볼 수가 없습니다.  물론 지금도 천년기념물인 별종의 기독교인들에게는 이러한 고백이 종종 들려올 수가 있습니다만, 그러나 솔직히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에게서 이런 간증을 찾아보기 힘든 시대가 되어졌습니다.

우리는 순교자적 신앙을 이야기한다면 주기철 목사님을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1934년, 일제 치하에서 바야흐로 신사참배의 폭풍이 한국 교회를 휘몰아칠 때, 주기철 목사님은 평양 신학교에 부흥 강사로 초청을 받으셨습니다.  그때 신학교에서 설교하신 주제가 유명한 '일사 각오'라는 설교였습니다.  죽기를 결심한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마다 죽기를 결심해야 된다.  죽으면 산다.  그들에게만 부활의 영광은 약속된다.  그분은 그렇게 일사 각오의 신앙으로 삶을 사셨습니다.  그분이 지었던 노래 가운데 '일사 각오'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기억하시는 분이 계실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어려서부터 자주 들었고, 또 제 스스로도 좋아했던 노래입니다.

"1. 깨어라 성도여 징조를 보라
신랑 예수 구름타고 오시려한다.
환난과 핍박이 날 기다리니
믿음으로 이길 준비 어서 합시다.
후렴 : 깨어라 주 재림 가깝다
주를 위해 살다가 주 위해 죽자.

2. 주님의 이름 위해 옥에 갇히고
갖은 고생 다하다가 죽을지라도
십자가의 큰 은혜 생각할 때에
아직도 내 고생이 부족하도다.

3. 성경과 기도로 무기 삼으니
불타는 나의 소원 일사각오뿐
죽도록 싸우다가 쓰러진 후에
천국에 영광 집에 편히 쉬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순교적 신앙의 회복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뼈저리게 느껴야만 합니다.  그리고 이 시간 우리 모두가 순교적 신앙으로 다시 회복되는 결단이 있어지기를 성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는 도상에서 일어났던 한 사건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본문의 배경을 알려주고 있는 32절의 말씀을 보면 이렇게 시작을 합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 서서 가시는 데 저희가 놀라고 따르는 자들은 두려워하며 따랐다."

그리고 계속해서 33절 이하를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주겠고."  그리고 34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지금 자신이 걸어가고 계시는 그 예루살렘에서 무엇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인가를 명확하게 아셨습니다.  아시면서도 그 길을 가셨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따라오는 제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예루살렘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에 대한 결단과 각오가 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  그것을 어떤 한 사건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십자가를 질 각오를 부탁하신 것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는 자는 십자가를 지고 죽을 각오를 하고 따라와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당시의 제자들에게 이런 각오가 필요했다면 오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이 시대의 제자들인 저와 여러분에게도 주님은 동일한 각오와 자세를 부탁하시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좀 제대로 주님을 따라가려면 우리에게 도대체 어떤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을 하십니까?  오늘 본문은 주님을 따라가기를 원하는 우리들에게 몇 가지의 중요한 각오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세속적인 영광을 포기할 각오를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100년 전에 이 땅에 기독교가 처음 들어왔을 때 예수를 믿었던 사람들에게는 두 가지의 중요한 동기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사회 개혁적인 비전을 가지고 기독교를 받아들였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기독교를 믿으면 새로워 질 것이다.  역사도 새로워지고, 사회도 새로워지고, 우리 개인도 새로워 질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소수의 엘리트 계층이 그랬습니다.  반면에 대다수의 민중들은 예수 믿고 구원받기 위해서 믿었습니다.  그것은 성서적인 신앙의 동기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 땅의 사람들에게 예수 믿는 동기는 사회 개혁적인 동기도 아니고, 복음적인 동기도 아닌 다른 동기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제 삼의 동기를 우리는 축복의 동기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기독교의 본질적인 메시지 대신에 이런 메시지가 유행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수 믿어야 복을 받습니다.  예수 믿으면 건강해지고, 예수 믿어야 출세하고, 예수 믿어야 부자가 될 수가 있습니다."라는 메시지가 이 땅에 선포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저는 그것이 실용주의적인 이 시대의 가치관, 물질 중심적인 이 시대의 정신의 한 영향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것은 한국인 특유의 기복 신앙과 외국에서 수입된 예수 믿어야 번영할 수 있다는 소위 '번영의 신학'이 가져다준 결과입니다.  물론 예수 믿으면 축복이 없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저는 예수 믿고 병 고치고, 예수 믿고 인생이 새로워진 사람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예수 믿고 엄청난 물질의 축복을 받았던 사람들도 많이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기독교의 핵심적인 메시지냐? 라고 하는 것은 한 번쯤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만약 예수 믿고 복 받고, 예수 믿고 건강하기 위해서만 예수를 믿는다면 예수를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병이 고쳐지지 않고, 부자가 되지 않고, 출세하지 못했을 때 이런 사람들에게 있어서 예수는 언제든지 떠나갈 수 있는 예수, 버려질 수 있는 예수에 불과한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 당시의 제자들도 처음에는 예수가 메시아다.  이 분을 통해서 우리가 구원을 경험하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다.  이런 사실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예수님의 기적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행하시는 기적을 보면서 마음속에서 이런 기대가 일어났을 것입니다.  저런 기적을 행하시는 분이라면 저분은 우리의 어떤 소원도 만족시켜 주실 수가 있으실 것이다.  그래서 드디어 본문이 시작되는 37절에 보면 두 제자가 주님 앞에 나와 이렇게 요청을 합니다.  본문 37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여짜오되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본문에서는 주의 영광이라는 단어를 제자들이 사용하고 있습니다만, 여기에서 영광이라는 말이 본래 성서적 의미에서 사용된 영광이었다기 보다는 매우 세속적인 차원에서의 영광이었을 것입니다.  언젠가 주님이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좋은 날이 오면….  그러니까 그 당시 제자들이 걸고 있었던 예수님에 대한 기대는 정치적 메시아가 대부분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이 온 나라, 온 세상을 통치할 때 우리 중에 한 사람은 주의 우편에, 또 한 사람은 좌편에 앉게 해 주십시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본문의 내용이 마태복음에도 기록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주님 앞에 이들 두 제자를 위해서 요청한 내용이 다르게 기록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0장 20절에 보면,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여기에 보니까 두 제자가 직접 나와서 말한 것이 아니라 어머니가 그런 요청을 했다고 했습니다.  21절을 보면 더 분명해 집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그러니까 마태복음에 보면 어머니가 요청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치맛바람이 오늘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 옛날 예수님 당시에도 치맛바람이 있었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을 보면 분명히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면 어느 것이 맞습니까?  제자들이 말했습니까?  어머니가 말했습니까?

우리가 연대적으로 보면 마가복음이 먼저 기록되었습니다.  그래서 마가복음을 원복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마태복음이 나중에 기록이 된 것입니다.  나중에 기록된 것은 먼저 기록된 것을 근거로 그 자료를 보충하려는 의도가 있습니다.  마태가 똑같은 기사를 기록하면서 어머니를 강조한 것은 아마도 이런 의도가 있었을 것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주님 앞에 나와서 세속적인 요청을 한 배경 속에는 어머니가 끼친 영향이었다는 의도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어머니가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의 사촌 동생입니다.  어쩌면 마태는 이 사실을 눈여겨 보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어머니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 자녀들이 얼마나 경건한 방향으로 인생을 사느냐? 아니면 세속적인 동기를 붙들고 인생을 사느냐?  여기에는 어머니의 영향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이 옛날에만 그랬겠습니까?  이런 어머니들이 오늘은 없겠습니까?

가령, 우리가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여러분의 자녀가 성경 공부를 하다가 복음을 깨닫고 정말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엄마, 나 정말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되었어.  나는 예수님이 너무 좋아."  이런 간증을 했다고 하십시다.  물론 좋아하실 겁니다.  교회 나오시는 어머니인데 좋아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다른 학생들은 주일에 학교나 도서관에 공부하러 가는데 이 아들은 주일에 온전히 교회에서 생활하면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심지어 방학이 되면 다른 학생들은 학교 보충수업을 하러 가는데, 이 아들은 수련회를 가고 교회 행사에 열심입니다.  그럴 때에 여러분은 어느 것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솔직히 한 번 대답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물론 예수 믿는 어머니니까 내 아들이 예수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이것이 안 좋을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하고 현실적으로 다른 학생들은 학교나 도서관에 가서 열심히 공부를 해서 성적이 올랐다는 것하고 어느 것이 더 중요한 소식으로 들려오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대부분의 한국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가 무엇입니까?  아이들이 교회에 열심히 나오면 제직이라는 부모님들이 교회 교역자들에게 전화를 한다는 것입니다.  제발 좀 살살 나오게 해달라고.  지금은 일단 대학에 입학해 놓고, 그 다음에 천천히 믿어도 되지 않겠느냐는 겁니다.  우리 목사님은 세상 물정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겁니다.  이것이 어머니들이 가지고 있는 대부분의 생각입니다.

그래서 유수한 대학에 들어가면 나중에 좋은 직업을 갖게 될 것이고, 좋은 명예도 갖게 될 것이고, 그러다 보면 이 땅에서 당당하게 살 것이다.  이것은 나쁜 동기는 아닙니다.  그러나 다분히 그 밑바탕에는 내 아들이 남 못지 않게 이 땅에서 잘 살면 좋겠다.  그것이 영적인 동기보다도 더 강력한 동기가 밑바탕에 깔려 있다는 사실을 누가 부인할 수가 있겠습니까?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저는 예수 믿는 사람들은 사회에서 아무렇게나 살아도 좋다는 이야기는 결코 아닙니다.  저는 훌륭한 기독교 정치가들이, 기독교 사업가들이, 그리고 기독교적 비전을 가진 교육가들이 사회 한 중심에 있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더 나아가서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는 축복을 누려야 한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예수 믿는 동기가 무엇이냐?  지금 동기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동기가 과연 부자 되고, 출세하고, 이것 때문에 믿느냐?  신앙이 이것들을 도와준다는 사실 때문에 믿고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내 신앙의 가장 중요한 동기는 주께서 나를 구원하셨습니다.  나를 구원하시고 변화시켜 주신 그 예수님이 너무 좋습니다.  그것 때문에 여러분은 주님을 따르고 계십니까?  아니면 세속적인 동기 때문에 주님을 따르고 계십니까?  교회 나오면서도 여전히 세속적인 영광에 대한 기대, 그것이 나를 지배하고 있는 가장 강력한 동기라면 내 신앙의 동기는 아직도 순수하지 못한 것입니다.

주님은 이런 제자들의 요청 앞에 직접적으로 그들의 그런 요청을 지지하거나 격려할 만한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 사랑하는 제자들이 순수하게 주님을 따라오기를 기대하신 것이라면 오늘의 제자들에게도 이런 순수한 동기를 요청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주님이 좋아서 주님을 믿고 주님을 따르는 주의 제자들, 결코 세속적인 영광에 대한 기대가 내 신앙에 가장 중요한 동기가 안되어 있는 사람, 이런 제자를 이 시대는, 그리고 우리 주님은 요구하신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두 번째는, 섬김의 각오를 하라고 요청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들이 걸어야 할 길은 결코 지배의 길이 아니라 섬김의 길이라는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제자가 되어서도 우리 마음속에 있는 지배의 욕심을 극복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지배의 욕구는 인간 존재의 깊은 곳에 뿌리 박고 있는 가장 강렬한 욕구 중에 하나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니체라는 철학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간 존재의 본질은 권력에 대한 의지이다."  권력에 대한 의지, 권력에 대한 파워.  이 강력한 의지가 인간 관계 속에서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가정 생활의 갈등, 부부의 갈등, 고부 관계의 갈등이 왜 생깁니까?  결국 이것 아닙니까?  누가 지배자냐? 누가 다스리느냐?  결국은 그런 갈등입니다.  직장에서의 갈등, 심지어 교회 생활 속에서도 이런 갈등은 얼마든지 우리를 지배할 수 있습니다.  교회 생활에서의 갈등도 사실 한 단어로 말한다면 그것은 지배에 대한 갈등입니다.  저가 나를 지배하려고 한다, 내가 저들을 지배해야 한다.

이 문제에 있어서 저는 한국인이 특별히 더 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 안에 숨어 있는 죄성에다가 플러스 우리 사회가 지녀온 유교 사회의 역기능적 요소 가운데 하나는 끊임없이 모든 것을 계급화하려는 현상입니다.  한국 사람처럼 모든 것을 계급화시키는데 민감한 민족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웃사람과 아랫사람을 나눕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나'라고 하는 단어도 내가 상대하는 대상에 따라서 그 단어는 아주 화려한 변신을 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내가' 그랬다가, 또 상대방이 높다고 생각하면 '제가'로 변합니다.  '나'라는 인칭 대명사가 이렇게 많은 변신을 거듭하는 언어가 있을까?  '짐이 이렇게' 말하는가 하면, 부하의 편에서는 '신이 이렇게'라고 말하기도 하고, 또 '불초소생이'라고 말하다가 상대방 앞에 자기를 가급적 비하시킬 필요가 있을 때는 심지어 '이 졸자가' 이런 말도 쓰지 않습니까?  아주 재미있는 말입니다.  이런 말들이 세계 어디에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주님은 당신을 따라오는 제자들에게서는 이런 계급 의식이 회복되어야 할 필요성을 역설합니다.  그렇다고 아예 자리를 만들지 말아야 합니까?  아닙니다.  공동체가 올바로 유지되려면 자리는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그 자리는 철저하게 섬김의 자리여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결코 지배욕을 충족시킬 수 있는 그런 자리가 아닙니다.  섬김을 위한 자리에 불과하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에 크리스챤 리더십과 세속적인 리더십의 본질적인 차별성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마가복음 10장에 42절 말씀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여기에 보면, 세속적 리더십의 특징들을 상징하는 여러 가지 단어들이 등장합니다.  주관한다, 지배한다, 권세를 부린다.  그러나 그 다음절에 보면 크리스챤 리더십의 차별성을 어떻게 강조하고 있습니까?  43절에 보십시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는 달라야 한다.  너희는 저들과는 다르게 살아야 한다.  그래서 43절과 44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철저하게 섬김의 리더십을 강조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시간 묻습니다.  여러분은 정말로 주님의 제자로 살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섬길 각오를 하십시오.  상대방을 지배하려고 하지 말고 섬기려고 하십시오.  주님은 한 평생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따르기를 원하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이 각오를 요청하십니다.  섬길 각오를 하고 나를 따르라.  자기 충족을 위해서 따라서는 안 된다.  자기를 믿고 자기를 높이고, 그리고 자기 선전을 위해서 따르려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그대들이 걸어야 할 길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섬길 각오.  이것은 지금도 주의 제자들에게 변함없이 요청하는 각오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로,  고난의 각오를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모든 시대의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요구하시는 마지막 각오 중에 하나는 고난받을 각오입니다.  37절에서 야고보와 요한의 요청을 들으셨던 주님께서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본문 38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침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사랑하는 여러분, 제자들이 이렇게 높은 자리를 요청하는 지금 이 순간, 예수님은 무슨 생각을 하시고 있겠습니까?  보십시오.  예수님은 지금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 예수님의 머리를 지배하고 있었던 가장 중요한 생각은 십자가였을 것입니다.  지금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데 느닷없이 제자들이 오른편, 왼편에 앉게 해 달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들을 오른편, 왼편에 앉히려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두 강도 대신 매달리면 됩니다.  오른편, 왼편에 매달리면 됩니다.
"너희가 구하는 것을 너희도 알지 못한다.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그가 마셔야 할 잔은 고난의 잔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의 죽음의 잔이었습니다.  39절은 일종의 예언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렇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결국은 마시게 될 것이다."

무슨 말입니까?  고난은 피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제자의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제자의 길을 걷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고난은 피할 수 없습니다.  섬김은 고난을 요청합니다.  고난 없이 어떻게 섬길 수가 있습니까?  땀흘리는 작업이 없이, 우리의 옷소매에 흙이 묻혀지지 않고 어떻게 우리가 섬길 수가 있습니까?  진지한 섬김을 구하는 사람들에게 고난은 피할 수가 없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고난만 당하고 끝납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고난 후에 얻을 영광을 주님께서 본문에서도 암시하십니다.  40절을 다같이 읽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내가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준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주님이 그것을 결정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너희들이 최선을 다해 섬겼다면, 그리고 고난까지 받았다면 그것은 당신들의 섬김과 당신들이 받았던 고난에 따라서 당연히 하나님께서 보상하시는 그 날에 그 상급을, 그 영광을 얻을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신앙의 선배들의 생애를 살펴보면 그들이 고난을 이길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에너지는 고난 저편에 주님께서 예비하신 영광이 있었습니다.  그 영광이 지금 당장 내게 오지 않아도 상관이 없습니다.  고난의 저편에서 내 눈물, 내 희생, 내 섬김, 내 순수함의 동기를 아시는 주님이 계신다면 그분이 하늘의 영광으로 나를 축복하실 것입니다.  장차 올 그 영광에 대한 바라봄이 오늘의 고난을 극복할 수 있는 에너지가 되었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영광이 고난을 받을 수 있는 조건부의 고난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주님은 구체적으로 그 영광을 설명하시지는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은 고난 저편의 영광을 분명히 약속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우리가 잘 아는 로마서 8장 18절에 보면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이 말씀을 제일 좋아했던 분이 주기철 목사님이셨다고 합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  그 분이 순교를 향해서 걸어가셨던 그 걸음의 열정은 바로 그 영광에 대한 바라봄에 있었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이 마지막 순교 직전에 감옥에서 한 번 풀려납니다.  이것은 일본 경찰의 시험이었습니다.  이 정도로 모진 고난을 받았으면 저도 생각이 달라지지 않았겠느냐?  그래서 한 번 내 보냈습니다.  엉망진창이 된 몸으로 감옥에서 풀려났던 그 순간, 주기철 목사님은 자신을 기다리던 교회로 직행했습니다.  온 교우들이 사랑하는 목사님을 만났을 때, 그리고 일본 경찰대 3개, 경찰대 소속의 고등계 형사들이 자리를 메우고 감시하는 그 자리에서 주기철 목사님이 이 땅에서 남긴 마지막 설교의 제목은 다섯 가지 종류의 기도였습니다.

지금 이 순간 나는 다섯 가지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로,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옵소서.  그 분은 그분 앞에 다가오는 죽음을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하옵소서.  두 번째 제목은, 장기간의 고난을 견디게 하옵소서.  그는 돌아가 다시 고난과 투쟁할 각오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장기간의 고난을 견디게 하옵소서.  짧은 고난은 내가 어쩌다 견딜 수가 있겠지만, 장기간이 되면 나도 주님을 부인할까 두렵습니다.  장기간의 고난을 견디게 하옵소서.  세 번째로, 나의 노모와 처자와 나의 사랑하는 교우들을 주님이 돌봐 주십시오.  그리고 네 번째, 의에 살고 의에 죽게 하옵소서.  마지막 다섯 번째로, 내 영혼을 주께 부탁하나이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 돌아올 수 없는 그 길로 걸어가셨습니다.

우리가 이런 분의 생애를 보고 들으며 느끼는 것은 정말로 초인적인 사람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실은 그분은 절대로 초인적인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강한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 분은 마음이 약하셨고, 두려워하셨고, 그리고 정이 많으신 분이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길을 갈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아내의 기도, 그리고 교우들의 기도, 무엇보다 하나님이 도와주신 것입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이 아니었다면 그 분은 그 길을 갈 수가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주기철 목사님이 걸어가셨던 그 일사각오의 길을 걸어 갈 수가 있겠습니까?  솔직히 우리의 힘으로 불가능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이 도와주시면 우리도 그 길을 갈 수가 있다고 믿습니다.  어떤 고난도 견딜 수가 있다고 믿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세속적인 영광을 구했던 두 제자도 변합니다.  어떻게 변합니까?  그들의 마지막을 아십니까?  주의 오른편에, 왼편에 앉기를 구했던 두 제자의 마지막을 아십니까?  한 제자 야고보는 열 두 제자 가운데서 최초의 순교자가 됩니다.  헤롯 아그립바 1세에 의해서 그는 참수형을 당합니다.  칼이 그의 목을 떨구는 순간, 그는 피를 뿌리면서 예수, 사랑하는 예수, 마지막 예수님을 외치면서 그의 생명을 순교의 재단에 바칩니다.

또 한 명의 제자, 요한은 12제자 가운데서 제일 오래 삽니다.  아주 대조적인 두 제자입니다.  95세를 넘기며 살았습니다.  밧모섬에서 기도하다가 하늘의 감동 속에 요한 계시록을 기록했던 요한, 그리고 마지막 에베소 교회를 돌보면서 최후까지 교회를 지켰던 요한입니다.  한 사람은 일찌감치 세상을 떠나갔습니다.  또 한 사람은 끝까지 남아 살아있는 순교자로 교회를 지켰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얼마나 오래 사느냐?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두 제자의 생애를 지켜보면서 느끼는 것은 이것입니다.  얼마나 영광스럽게 우리의 생애가 결산될 수 있느냐?  후회 없이 죽을 수가 있느냐?  각자가 걸어가는 삶의 길은 다르지만 하나님이 나에게 맡겨주신 선교의 성취를 위해서 후회 없이 살다가 영광스럽게 삶의 길을 끝마칠 수가 있겠습니까?

오늘 이 말씀이 어쩌면 부담 없이 신앙생활을 하기를 원하는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너무 부담이 되는 설교일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의 교인들을 보면서 마음속에 이런 느낌이 듭니다.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신앙이 너무나 피상적이지 않는가?  적당히 즐기고, 적당히 다니는 ….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신앙 앞에서 좀더 진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길이고 진리고 생명이고 구원이고 그 분이 구주시라면 아직도 사랑하는 예수님을 모르는 이웃들에게 진지하게 한 번 나누어 보십시오.  그것 때문에 받을 핍박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가정의 평화라는 명목 하에 쉽게 타협하고 신앙의 자리를 접어두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취할 태도는 아닙니다.  필요하다면 핍박받을 각오를 하십시오.  그리고 여전히 가족들을 뜨겁게 사랑하십시오.

내가 핍박해도 나를 사랑하는 우리들의 삶의 태도를 통해서 오히려 그들은 주님 앞에 나올 수 있는 변화가 가능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쉽게 타협하고, 쉽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서 감동 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십자가를 질 각오를 한 사람, 그리고 그 대가를 지불할 각오를 한 사람들에 의해서 사람들은 감동을 받습니다.

그럴 때 사람들은 우리의 이야기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이런 간증만이, 이런 삶만이 우리의 가정을 바꿀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런 삶만이 우리의 민족과 사회를 바꿀 수 있다고 믿습니다.  주님의 메시지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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