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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요나의 신앙 (욘 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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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의 신앙 (요나 4:1-4)

성경일독을 하는 중에 현재 선지서를 읽고 있으며 다음 주일이면 구약의 말라기를 읽게 되고 다음 월요일부터는 신약이 시작됩니다.요나서는 소선지서 중에 가장 잘 알려진 책입니다. 요나 선지자 하면 큰 물고기, 박넝쿨, 불순종 등이 떠오릅니다. 요나서가 말하고 싶은 많은 주제들이 있지만 오늘 아침에는 요나의 신앙에 대해 살펴보면서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찾아보고 또 우리의 신앙을 진단해 보기로 합니다.

하나님께서 요나를 불러 앗수르의 큰 성읍 니느웨로 보내시며 40일 후에 임할 심판의 메시지를 외치라 하십니다. 니느웨는 티그리스 강 동쪽에 있는 앗수르의 큰 도시였고 요나의 고향 가드헤벨에서 무려 900KM 떨어진 적국의 심장과 같은 도시였습니다. 요나가 활동하던 시기는 여로보암 2세가 통치하던 시기로 솔로몬이 영토를 확장했던 시대와 비슷하게 회복하여 근동지방에서 가장 강력한 왕국이 되어 번영을 누렸습니다. 이럴 때 큰 나라 앗수르는 이스라엘의 번영을 위협하는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요나 선지자는 하나님의 명령에 즉각 반대 의견을 제시하며 가지 않으려고 합니다. 앗수르가 망하는 것이 이스라엘에게 이득이 되고 조국 평화에 도움이 되는데 차라리 잘 된 일이지 어찌 회개하고 구원을 얻으라는 복음을 전할 수 있느냐 하며 가지 않았습니다. 내 생각에 이번 일은 하나님이 틀렸다고 여기며 납득할 수 없는 명령은 순종하지 못하겠다는 태도입니다. 이게 무슨 신앙입니까? 사람의 논리와 상식에 어긋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일지라도 거절하겠다는 신앙입니다.  

논리적으로 수긍이 가지 않으면 절대 믿지 않겠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이율배반적인 행동을 얼마나 많이 합니까? 논리적으로 명백하게 오류이며, 때로는 분명한 범죄인 줄 알면서도 자기 이익을 따라 악을 선택하는 것이 인간의 죄악된 본성입니다.  나에게 이득이 되면 비논리적이고 비윤리적인 것도 덥썩 받아먹으면서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의 명령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이리 따지고 저리 따지며 거절할 이유를 찾아냅니다.  

‘내 생각에는~’ 하며 하나님의 생각을 판단하고 거절하지 말고 ‘가서 물을 가져다 빈 항아리에 부으라’ ‘이제 떠서 연회장에게 가져다 주라’ ‘요단강으로 들어가라’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의 생각과 다르다’ 하시는 말씀을 믿고 순종해보시기 바랍니다. 오스왈드 챔버스는 ‘영적인 진리를 지적인 논리에 의해 배우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상황 속에서 순종을 통해 배운다’고 했습니다.  내 안에 계신 성령께서 상황을 보는 나의 관점을 바꾸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전에 불가능해 보이던 것이 이제 가능해 보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이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요나는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니느웨와는 정반대 방향인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도망합니다.‘못가겠습니다’ 거절하는 것도 불순종이지만 마지못해 가는 척 하다가 하나님의 눈을 피해 반대 방향으로 달아나는 것은 더 큰 불순종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요나가 탄 배가 큰 풍랑을 만나 거의 깨어지게 만드셨습니다. 요나의 불순종 때문에 함께 배를 타고 가는 승객들과 선원들은 풍랑을 만나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요나와 같은 사람 때문에 그 가정 전체가 풍랑을 만나 흔들리고 사회와 국가라는 배가 출렁거리는 위기를 만납니다. 

나와 내 가족, 이웃이 탄 배가 나 때문에 풍랑을 만났으면 그 이유를 즉시 깨닫고 하나님 앞에 항복하고 문제를 해결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배 밑창에 내려가 태평하게 잠을 자던 요나는 선장에게 붙들려 나와 네가 믿는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말을 듣습니다.  제비뽑기에 걸린 요나가 ‘나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고 밝히고 풍랑의 원인을 자백했으면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 고백해야 마땅합니다.  나로 인해 일어난 풍랑을 멈추고 무고한 이 사람들을 살려달라 기도해야 옳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를 용서하시고 바다를 잠잠하게 하시면 그 배에 탔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왕되심을 인정하고 엎드리게 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요나는 그 순간에도 여전히 자기 뜻대로 말하고 행동합니다.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면 하나님의 진노가 가라앉고 바다가 잔잔해질 것이라 했습니다. 내 한 몸 투신하면 모든 것이 덮어지고 상황이 종료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요나는 여전히 하나님께 반항적인 태도로 맞섭니다. 나 죽으면 대적 니느웨도 함께 멸망하겠거니 생각하고 끝까지 하나님의 뜻에 맞서며 나를 바다에 던지라 합니다.  요나가 없으면 니느웨도 망하고 하나님이 하실 일을 못하실까요? 대단히 자기중심적인 신앙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나는 바다와 육지를 만드신 하늘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고 멋지게 고백한 그 믿음이 도대체 무엇일까 의심스럽기만 합니다. 머리로만 아는 신지식이며, 입술로만 고백하는 신앙입니다.  

요나를 바다로 던진 후 하나님은 배에 탄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풍랑을 멈추셨습니다. 요나는 바다에 몸을 던져 풍랑을 만난 배와 승객들을 위기에서 건졌습니다. 이것을 본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제사를 드리고 서원하였습니다. 혹시 사람들이 요나의 영웅적인 행동에 감동하여 그의 죽음을 기리고 기념비를 세우며 요란을 떨 수도 있는 분위기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명을 거역한 요나는 그저 자기 죄를 지고 바다에 던져진 불쌍한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내가 십자가를 지겠노라 나서는 사람들이 간혹 있지만 십자가도 십자가 나름 아닙니까? 그리스도는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죄인들을 위해 대신 죽으심으로 만민의 구원을 이루셨지만, 요나의 투신은 자기 죄 값을 치루는 형벌이었습니다. 

그런데 요나가 바다에 던져진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천지만물과 모든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사람을 제물로 바다에 던지면 잠시 화를 거두는 바다의 용왕 같은 잡스러운 신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의 뜻은 죄인 요나의 생명을 거두는데 있지 않고 그를 니느웨로 다시 보내어 영혼들을 건지시는데 있었습니다. 요나가 죽고 싶어도 제 마음대로 죽을 수 없었던 것은 생명의 주인은 요나가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큰 물고기를 준비해 놓고 요나를 삼켜 3일 밤낮 물고기 배속에서 고통을 경험하게 하신 하나님은 요나로 하여금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 있음을 깨닫고 죽음과 싸우며 간절히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이만하면 요나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순종했어야 합니다.물고기 뱃속에서 눈물 흘리며 하나님께 약속한 것도 있으니 이제는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사명자로 살아야 마땅했습니다.그러나 그를 다시 니느웨로 보내시는 하나님 앞에서 요나는 아직도 변화되지 못한 고집스런 성품을 고스란히 드러냅니다.마지 못해 니느웨로 가기는 갔지만 삼일 동안 다녀야 할 큰 성읍을 고작 하룻길 다니며 건성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고 맙니다.물고기 뱃속에서 눈물 콧물 흘려 기도하며 거듭나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줄 알았는데 아직도 전과 동일합니다.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도 옛사람의 성품을 끝내 버리지 못하여 사소한 일에 벌컥벌컥 화를 낸다든가, 입술에 험한 욕설이나 남을 험담하는 말을 달고 살거나, 겉치레와 사치와 허풍과 거짓말을 일삼고, 다른 사람에 대한 친절한 배려와 희생과 섬김이 따르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야고보 선생님의 말처럼 죽은 믿음입니다.그 믿음이 그를 구원하지 못하고 도리어 그리스도의 이름을 욕되게 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행위가 될 뿐입니다.  

요나는 단 하룻길을 다니며 40일 후에 임할 심판을 경고하였는데 이상하게도 니느웨 성읍의 온 백성들과 임금까지 그 말씀에 찔림을 받아 금식하며 회개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뜻을 돌이켜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요나가 한 일인가요? 요나의 설교가 대단한 능력이 있어서였습니까? 요나가 니느웨의 회개운동을 직접 보았으면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의 능력을 찬양하며 이번에는 정말로 깨닫고 무릎을 꿇어야 했습니다.  나같이 못된 선지자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은혜는 죄인들을 향해 이렇게 넘치도록 부어지는구나… 그런데 못된 선지자 요나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심히 싫어하여 분노를 마구 드러내며 항의하는 기도를 하였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이 요나의 기도 내용입니다. 

생각해봅시다.  이스라엘은 앗수르보다 더 많이 선하고 의로워서 생명이 보존되고 있습니까? 앗수르의 악독이 가득한 것처럼 여로보암이 다스리던 이스라엘의 죄악 역시 차고 넘쳤습니다. 나라가 번영하고 왕국이 평안할 때 이스라엘은 역사상 가장 악한 죄를 범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지난 주간에 읽은 아모스는 바로 이 시기에 선지자 아모스가 외친 말씀입니다.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이런 죄악을 보시고도 길이 참으며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신 것처럼 니느웨의 회개를 보시고 심판을 연기하신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할까요? 그런데 요나는 불평하며 하나님께 이의를 제기하였습니다.‘내가 이럴 줄 알고 다시스로 도망한 것이 아닙니까?’

지난 주일 설교에서 호세아를 읽으며 ‘여호와를 힘써 알자’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요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선지자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그의 언행은 정반대입니다. 그가 아는 지식으로 하나님을 거역하고 비난하며 제 마음대로 행동한 무례한 선지자일 뿐입니다.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깨달은 지식으로 그 지식과 지혜의 근본이신 하나님을 닮아 거룩한 삶을 힘써야 진정으로 하나님을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다라는 지식적인 고백만으로 우리가 완전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와 오래 참으심과 인애가 크심을 알았다면 나의 죄와 부끄러운 삶을 주님 앞에 내려놓고 죄사함을 받아야 하며, 큰 은혜와 사랑으로 죄사함 받은 나는 그 은혜와 사랑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며 살아야 마땅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닮는 것으로 향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가 추구해야 할 앎의 목적이며 이유입니다.  선지자 요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지식적으로는 바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머리로만 알았고 가슴으로는 느끼지 못하였으며 손과 발은 돌처럼 굳어있었으니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신에 대한 지식일 뿐입니다.  그 지식이 나를 구원하지 못하고, 그 지식만 가지고는 개인의 삶이 변하지 않을 뿐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킬만한 능력도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 자비, 긍휼, 은혜라는 지식을 나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동일하게 적용해야 하나님에 대한 참 지식이 됩니다. 

그런데 요나는 그와 정반대의 행동으로 하나님께 항의하고 있습니다. 나에게 베푸신 그 은혜, 자비, 오래 참으심과 인애를 다른 사람에게 동일하게 베푸시는 것이 싫다고 합니다. 더구나 나와 관계가 좋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리합니다.  나에게는 한 없이 관대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엄격한 율법의 잣대를 들이댑니다.  ‘저 사람들은 절대 안됩니다’ ‘나의 실수는 연약한 인간이 범할 수 있는 일로 적당히 넘기며 언제든지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덮어주셔도 되지만 저 사람의 실수는 천하에 드러내어 정죄하고 매장시켜 죽어 마땅합니다’  ‘저 인간이 잘 되는 꼴을 보느니 차라리 내가 죽는 편이 훨씬 낫습니다’이것이 요나의 심보입니다.  지금 이 말씀이 누구에 대한 이야기라구요? 요나의 이야기입니다. 요, 나의 이야기라는 말씀이지요… 

‘나를 차라리 죽여주세요’하고 성을 내는 요나에게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하시는데 요나의 답변이(생략되고) 없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장면에서 요나는 곧장 성 밖으로 나가 성읍을 관찰하기 좋은 동쪽편에 초막을 지어 그늘을 만들고 거기 앉아 니느웨 성읍이 어떻게 되는가 보려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박넝쿨을 준비하여 요나의 머리를 가리우게 하시니 그늘이 생겨 훨씬 시원하고 좋았습니다. 풀과 나뭇가지를 가져다 자기 손으로 얼기설기 지어 만든 초막은 얼마가지 못해 말라버리지만 박넝쿨은 완벽한 그늘을 만들어주었습니다. 니느웨 성읍 사람들이 금식하고 회개하는 꼴을 보고 속이 뒤틀린데다 하나님께 열을 내며 기도하다 꾸중만 듣고 속에서 불이 활활 타올라 죽을 지경이었는데 이게 왠 선물인지 기분이 한결 좋아졌습니다. 금방 죽겠다고 화를 내던 사람이 식물 하나 때문에 이제야 살맛이 난다고 마음을 바꾸어 심히 기뻐하였습니다.

옥스포드대학 Christ Church College Cathedral 실내에 들어가자마자 왼쪽 스테인글라스에 요나의 박넝쿨을 묘사한 그림이 있는데 혹시 보신 분들이 있을 겁니다. 거기 있는 박넝쿨은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조롱박처럼 생긴 덩굴식물입니다.  그리고 지난 성지순례 기간 중에 이스라엘에서 본 것은 그보다는 피마자 기름을 짜내는 잎이 넓은 식물이었습니다. 성서 식물학자들은 요나의 박넝쿨은 피마자(아주까리) 오일 나무나 조롱박 덩굴 중에 하나일 것이라 추측합니다. 

이제 요나는 니느웨 성이 망하는 꼴을 보는 것 외에 다른 바램이 없었습니다. 박넝쿨 그늘 아래 앉아 느긋하게 성읍을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요나를 다시 한 번 시험하십니다. 벌레를 준비하여 이튿날 새벽에 씹게 하시니 박넝쿨이 금방 시들어버렸습니다. 거기다 뜨겁고 마른 동풍까지 불어오고 태양은 머리 위에서 내리쪼이니 요나가 더위를 견디지 못하여 기절 직전에 이르렀습니다. 박넝쿨 주셨을 때는 감사기도를 하지 않은 것 같은데 이번에는 금방 불평하며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내가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습니다’  그러고 보면 평소에 작은 일에 감사보다는 언제나 급할 때만 불평과 원망이 가득 담긴 기도를 하는 것이 요나의 신앙입니다. 누구의 신앙이라구요? 요, 나의 신앙입니다.  

자기 뜻에 맞지 않으면 하나님을 향해 성을 냅니다. 예를 들어, 자동차에 문제가 생겨 예상치 않았던 수리비용이 들어가고, 더운 여름날 에어컨이 고장나 더위를 이길 수 없을 때 화가 납니다. 냉장고와 세탁기가 고장이나 불편하고 한 겨울 추위에 보일러가 고장나면 그 즉시 짜증을 내고 툴툴거립니다. 진학문제와 진로문제가 술술 풀리지 않고 계속하여 장애물이 생길 때마다 화가 나고 원망스런 기도가 나옵니다.박넝쿨이 없어지니 당장 불편하다는 거지요.  그런데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추위와 더위, 지진과 홍수와 가뭄, 전쟁과 테러 속에 속절없이 죽어가는데 먼 산 바라보듯 하고 맙니다.  그게 다 자기들 죄때문에 재앙을 당한 것이라는 망언으로 정죄하고 상처난 곳에 소금 뿌리는 말을 합니다.

제 힘으로 얻은 것도 아닌 박넝쿨 하나 때문에 기뻐하던 요나가 제 힘으로 살릴 수도 없고 구원할 수도 없는 니느웨의 12만 생명의 소중함은 안중에도 없고 오직 박넝쿨이 죽은 것으로  분노하며 하나님께 항변합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죽어 마땅하다’누가 감히 다른 이의 생명과 장래의 일에 대하여 판단하고 정죄할 수 있습니까?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 나를 싫어하는 사람은 당연히 고통과 형벌을 받아 마땅하다 결정하는 권리를 누구에게 받았습니까? 

요나는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계획보다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자기 손으로 심지도 아니하고 기르지도 아니한 박넝쿨이 그늘을 만들어 주니 반갑고 소중하게 여겼지만, 그보다 비교할 수 없이 소중한 인간 생명이 하루 아침에 죽임을 당하는 모습을 구경하려고 초막을 짓고 앉아 기다렸습니다. 남의 불행을 나의 행복으로 삼고 남의 피눈물을 나의 오락거리로 삼는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일 수 있습니까?요나의 극단적인 이기주의 신앙입니다.  선지자가 이 정도면 이스라엘 백성은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애국심이나 민족주의, 정의감으로 포장된 생명 경시 사상이 그들에게 가득합니다.  

축구 경기장 관중석에 일본의 지진을 축하한다는 현수막을 내건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심보가 얼마나 잔인합니까? 그렇게 하면 애국자가 됩니까? 일본이 밉고 괘씸하지만 일본이 당하는 재앙을 통쾌하게 여기고 당연히 당할 벌을 받는 것이라 즐거워 하는 사람은 너무 지나쳤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가 일본보다 얼마나 더 선하고 옳다고 인정하실까요? 기독교인이 전체 인구의 사분의 일이나 된다며 교회의 부흥을 자랑하는 대한민국 사회의 불의와 부정과 잔인함과 추악한 죄악의 모습을 보면 토악질이 나오고 부끄럽고 두렵기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자비롭고 오래 참으시며 인애가 크시기 때문에 재앙을 내리지 않고 기다리고 계신다는 생각이 날마다 듭니다.

언제인가부터 한국 교회가 목적 달성을 위해 힘으로 밀어부치는 행동들을 서슴치 않고 합니다.  기독교인 머릿수를 자랑하며 여차하면 물리적인 힘을 내세워 시위하고 분노에 가득 찬 얼굴을 한 목사들이 삭발 시위를 하며 항의합니다. 교회 지도자들이 삭발 시위를 할 때 길바닥에 떨어지는 그들의 머리카락 숫자보다 더 많은 영혼들이 교회와 진리로부터 길바닥으로 떨어져 나가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박넝쿨을 잃고 짜증내며 거기에 목숨을 걸고 투쟁하는 사람이 정말 세상을 향해 보냄을 받은 그리스도인 맞습니까? 선지자 요나의 신앙, 그의 기도, 그의 언행을 보면서 나의 모습을 살피는 시간이 되기 바랍니다.

오늘 성찬식에 참여하며 주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을 깊이 묵상하고 감사하며 떡과 잔을 먹고 마시기 바랍니다. 첫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신 하나님께서 나 같은 죄인을 위해 독생자를 선물로 주심을 감사합시다.  둘째는, 예수께서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자기 몸을 십자가에 제물로 드리심으로 나를 영원한 멸망으로부터 건져주시고 죄 많은 세상에서 나의 의가 아니라 주의 능력으로 살게 하심을 감사합시다.  그리고 주께서 아버지와 하나가 되심같이 주님이 주신 신령한 양식과 음료를 먹고 마시는 우리도 주 안에서 하나가 됨을 감사하며 삽시다.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며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우리 모든 성도들이 주 안에서 서로 하나가 되어 주님이 명령하신 그 사랑을 실천하며 삽시다.나와 내 가족이 소중하고 귀한 것처럼 내 이웃과 그 가정들 또한 하나님께 사랑스럽고 소중한 존재들임을 잊지 맙시다.  그 영혼들이 잘 되고 강건하도록 기도합시다. 세상을 향해 나를 보내시는 주님의 명령에 기쁨으로 순종하며, 나를 통해 더 많은 영혼들이 주님 앞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주님의 마음을 기쁘게 해드리는 한 주간이 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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