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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섬기러 오신 예수님 (막 10:3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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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기러 오신 예수님 (막 10:32-45)

예수님은 역설을 통해 핵심을 가르치셨습니다. 역설은 상반되는 두 가지가 만나 하나의 진리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의 역설적인 가르침이 많이 나옵니다. 예를 들어 “누구든지 자기 생명을 구하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해 자기 생명을 잃는 사람은 구하게 될 것이다”(눅 9:24), “그러나 먼저 된 사람이 나중 되고 나중 된 사람이 먼저 되는 일이 많을 것이다(막 10:31) 등입니다.

사도 바울도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 약한 것들과 모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경 가운데 있으면서도 기뻐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하기 때문입니다”(고후 12:10) 등의 역설을 통해 핵심을 가르쳤습니다.

우리는 신앙의 중심이 되는 진리를 역설을 통해 배웠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역설을 통해 진리를 가르치셨을까요. 그것은 믿음의 본질인 십자가의 사건 자체가 역설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중심에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최근 자주 발생하고 있는 지진, 쓰나미도 근원이 있듯이 진리에도 근원도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여러분, 십자가 사건은 역설입니다. 십자가 사건이 주는 역설을 깨닫지 못하면 성경 전체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날마다 말씀을 읽고 묵상을 한다고 해도 성경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십자가 사건의 역설을 깨닫는 사람만이 성경을 보는 눈이 생기고 말씀을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십자가 사건을 통해 행하신 일은 신비로운 일입니다. 세상의 지혜로는 십자가 사건은 이해할 수 없는 역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십자가사건을 바라봐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십자가 사건은 어리석은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리석은 방법을 통해 놀라운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의 사랑이 만들어 낸 역설입니다. 모든 영광을 받으셔야 할 예수님이 이 세상에 가장 낮고 천한 곳에 오셔서 불의한 자들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사건,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어서 죽음으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신 사건은 놀라운 십자가의 역설입니다. 이 놀라운 역설이 신앙의 중심입니다. 


십자가 사건의 역설 

예수님은 큰 자는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자신이 그렇게 사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마땅히 섬김을 받으셔야 하는 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스스로 낮아져서 죽기까지 우리를 섬겼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올바른 방법으로 섬기지 않으면 하나님을 무시하는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분명히 기억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도와드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힘이 필요한 분이 아닙니다. 스스로 존재하는 분이요, 모든 것을 스스로 행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누군가를 섬기는 척하거나 돕는 척하는 사람을 찾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을 받을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뭔가 부족해서 인간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실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모든 사람에게 생명과 호흡과 다른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행 17:25).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려도 우리가 하나님을 돕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에게 주시는 분이며 우리를 통해 일 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러 오신 분이 아니라 섬기러 오신 분입니다. 
“인자 역시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치를 몸값으로 자기 생명을 내어 주려고 온 것이다”(45절).

이 말씀은 예수님의 좌우명이요, 비전입니다. 또한 복음서 전체의 핵심구절이기도 합니다. 이 구절에서는 예수님이 자발적으로 선택하셨다는 것을 강조하는 의미인 ‘내어 주셨다’는 부분이 가장 중요합니다. 또한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이 붙잡힌 사건 전후에 많이 등장하는 단어가 ‘넘겨졌다’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가룟 유다에 의해 지도자들에게 넘겨졌습니다. 그 이후 지도자들에 의해 빌라도에게 넘겨졌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로마 군병들에게 넘겼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였습니다. 표면적으로 드러난 사건만 보면 예수님은 사람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내가 내 생명을 스스로 내놓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힘이 없어서 사람들에게 넘겨진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일 수 있었던 이유는 예수님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셨기 때문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지 않았다면 그들은 예수님을 결코 십자가에 못 박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 달리셨을까요. 가롯 유다의 탐욕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빌라도가 두려움 때문에 군병들에게 넘긴 것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예수님을 내어 주신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자신의 생명을 바쳐 우리의 죄 값을 치르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예수님이 스스로 십자가에 달리시지 않았더라면 십자가의 사건은 일어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은혜가 만들어낸 역설입니다.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릅니다. 사랑도 위에서 아래로 흐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흘러내릴 때에는 낮고 낮은 십자가에 까지 흐릅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에 달린 강도들에게도 사랑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의 역설입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앞장서서 그리로 향하시자 제자들은 놀랐고 뒤따라가던 사람들도 두려워했습니다. 예수께서는 다시 열두 제자를 따로 불러 놓으시고 앞으로 자신에게 일어날 일을 말씀해 주셨습니다”(32절).

이 구절에서 중요한 단어는 ‘앞장섰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예루살렘을 향해 가실 때 그들보다 앞장 서셨습니다. 물론 다른 곳으로 가실 때도 앞장을 서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모습이 여느 때와는 다르다는 것을 제자들은 느끼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에 제자들은 놀라고 두려워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을 빼앗아 갈 십자가가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발걸음에도 흔들림 없이 단호했습니다. 예수님에게 예루살렘은 환영의 장소가 아니라 고난과 죽음의 장소였습니다. 그런데도 그 곳을 향해 가는 길에도 예수님은 기쁨의 노래를 부르며 십자가를 향해 가셨습니다. 그 발걸음이 너무 진지하고 단호했기 때문에 제자들은 두려웠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미 두 번이나 수난을 예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두 번이나 예수님이 수난을 당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제자들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계속해서 서로 자신의 위치를 놓고 다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수난의 예고 

“우리는 지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인자는 배반당해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넘겨질 것이다. 그들은 인자를 죽이기로 결정하고 이방 사람들에게 넘겨줄 것이고 이방 사람들은 인자를 조롱하고 침을 뱉고 채찍으로 때린 뒤 죽일 것이다. 그러나 3일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32~33절).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세 번째로 자신이 겪을 수난을 예고했습니다. 예수님은 수난에 대해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이방인들, 로마인들에게 조롱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고 채찍질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날 것이다”라는 말씀을 보면 얼마나 구체적이고 상세합니까. 예수님은 로마 군병들이 자신을 채찍으로 치고 침을 뱉을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로마 군병들은 자신의 혈기로, 자기 육신의 악함으로 침을 뱉었지만 예수님은 침 뱉는 모습 하나까지도 미리 알고 계셨습니다.

문제는 예수님은 자신이 겪을 수난에 대해 제자들에게 상세하게 이야기했지만 그 말씀을 들은 제자들의 태도에는 아무런 변함이 없었습니다. 한결같이 자신들의 위치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세 번씩이나 반복해서 자신이 겪을 고난과 죽음, 부활에 대해 말씀하셨지만 그들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의 위치를 세워달라고 노골적으로 요구를 했습니다. 이런 제자들을 보는 예수님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영적 무지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을 보면서 무척 안타까우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문제는 그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의 영적 무지함의 문제입니다.
 

하늘의 법칙 적용 

여러분, 이 세상에는 두 가지의 중력이 있습니다. 하나는 지구의 중심에서 끌어다는 중력입니다. 어느 누구도 이 중력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둥근 지구에서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중력 때문입니다. 우리는 중력이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다른 하나는 마음속에서 우리를 끌어 다니는 이기심이라는 중력입니다. 이것 또한 벗어나기 힘든 중력입니다. 성령의 능력이 아니고는 벗어나기 힘듭니다. 우리가 섬기고 희생하며 산다고 하지만 그 이면에는 이기심이 숨어있습니다. 봉사와 충성 속에도 이기심이 숨어있습니다. 이 이기심이라는 중력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성령의 능력이 아니고는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중력의 법칙을 벗어날 수 있는 다른 법칙을 적용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그 무거운 비행기가 떨어지지 않고 하늘을 날 수 있도록 공기의 저항을 줄이고, 떠오르게 하는 힘을 통해 비행할 수 있는 중력과는 다른 법칙을 적용하면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기심이라는 중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다른 영적 법칙을 적용해야 합니다. 세상의 법칙을 따라 살면 우리는 자신의 위치를 놓고 다투는 제자들처럼 이기심이라는 중력에 휩쓸려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영적법칙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처럼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의 법칙을 따라 자기를 내어놓는 삶을 사셨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예수님처럼 다른 영적 법칙을 적용하지 않는다면 우리도 고난의 길을 가는 예수님 옆에서 끊임없이 자기 생각만을 했던 제자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여러분, 영적 무지함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성령님께 간구하십시오. 이기심이라는 중력의 법칙에 사로잡힌 인생이 아니라 십자가의 법칙을 적용하는 인생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합니다. 

“그러자 세베대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께 다가와 말했습니다. ‘선생님, 저희의 소원을 들어주시기 원합니다.’예수께서 물으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 주었으면 좋겠느냐?’ 그들이 대답했습니다. ‘주께서 영광의 자리에 앉으실 때 저희 중 하나는 오른편에, 하나는 왼편에 앉게 해 주십시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지금 무엇을 구하고 있는지 알고 있느냐?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시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겠느냐?’ 그들이 대답했습니다. ‘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도 정말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시고 내가 받는 세례를 받을 것이다. 그렇지만 내 오른편이나 왼편에 앉는 것은 내가 정해 주는 것이 아니다. 그 자리는 미리 정해 놓은 사람들에게 돌아갈 것이다’”(35~40절).

예수님은 야고보와 요한의 요구가 어리석고 교만하기 짝이 없는 요청임에도 불구하고 야단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제자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인내하셨습니다. 이 모습을 보면 예수님의 인내심이 얼마나 깊은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제자들의 끊임없는 어리석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오래 참으시고 인내하시면서 제자들을 품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잔과 세례

예수님은 계속해서 자신을 높이려는 제자들에게 놀라운 교훈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열망 그 자체를 부정하거나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권위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권위는 선한 것입니다. 그러나 권위를 가지려고 우상화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즉, 권위를 가지면 복을 받는 것이요, 갖지 못하면 저주를 받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시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이 말씀을 아마도 잔은 축배의 잔으로, 세례는 높은 지위에 오르기 전에 받는 정결 예식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잔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의 잔이었습니다. 그 잔은 저주의 잔이었습니다. 모든 인간이 당할 저주의 잔을 예수님은 ‘잔’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아버지여,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고 기도하셨던 것이 바로 그 진노의 잔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세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례란 단지 잔을 마시는 정도가 아니라 죽음에 완전히 잠기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의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할 수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너희의 말 대로 될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결국 이 말씀대로 야고보는 가장 먼저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잔과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요한도 가장 오래 살았지만 그 역시 순교했습니다.
 

으뜸은 모든 사람의 종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으뜸이 되려면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두 번째 수난 예고 때 교훈하신 말씀과 동일합니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의 종이 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첫째,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사람이 아니라 청지기 의식을 가진 사람입니다. 모든 권위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가 어느 위치에 있든지 권위에 대한 청지기 의식이 있는 사람만이 진정한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둘째, 자신에게 주어진 힘으로 다른 사람을 힘 있게 하는 사람입니다. 만나면 힘이 나는 사람이 있고 힘이 빠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될 것입니까. 예수님은 만나는 사람마다 힘을 북돋아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의 뜻에 따라 행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문제는 이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겼습니다. 누가 더 힘이 있는 사람인가, 누가 더 권력을 가지고 있는가에 집중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러한 질문 때문에 한국 교회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권위를 자신의 권위라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권위는 하나님의 권위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어떤 위치에 있든지 나에게 주어진 위치는 권력의 자리가 아니라 권위의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권위는 하나님의 권위가 되어야 합니다. 선교지에 가보면 원주민들을 섬긴다고 하면서 때로는 군림하는 선교사들이 있습니다. 권위자로서 그들을 세우고 힘 있게 하고 북돋아 주는 것이 아니라 왕처럼 군림하는 모습을 볼 때 마음이 아픕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을 만나든지 그들을 힘 있게 하는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십자가의 역설대로 사십시오 

셋째, 모든 사람을 대할 때 주님을 대하듯 하는 사람입니다. 예배소서 5장 21절에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서로 복종하십시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이 가장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인간관계를 통해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주님을 대하듯 섬기십시오. 때로 보기 싫은 사람도 있고, 불편한 관계에 놓이는 사람들도 있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들도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그 사람 안에도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는 것을 인정해야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십자가의 역설 속에서 살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역설대로 사셨기 때문에 우리도 십자가의 역설을 따라 살아야합니다. 만약 우리가 십자가의 역설대로 살지 않는다면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역설 속에서 사는 것이 행복이라는 것을 기억해야합니다. 십자가의 역설이 주는 행복이 여러분의 삶과 교회에 가득하길 축원합니다. (이재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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