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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과 동행하면 시험될 일이 없다 (빌 1: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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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과 동행하면 시험될 일이 없다 (빌 1:12-18)

성경 말씀 중에 제게 선뜻 아멘이 안되는 말씀 중 하나가 “감당치 못할 시험은 없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고전 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정말인가? 닥친 시련과 문제가 너무 힘들어서 괴로와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오늘 주일만 해도 주차장에서, 엘리베이터 앞에서, 식당에서 얼마나 시험되는 일이 많은가?
정말 하나님은 감당할 시험만 주시는 것인가? 정말 그럴까요?

그 문제에 대하여 오늘 사도 바울이 자신의 간증과 함께 답을 주고 있습니다. 지금 시험 중에 있다고 생각되는 이들은 귀기울여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12절에서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당한 일”이란 표현을 썼는데, 고통스런 일이란 말입니다. 좋은 일이 있을 때 “내가 이런 일을 당했습니다.” 라는 표현을 쓰지 않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이 당한 일은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힌 것입니다. 감옥생활이 지금도 어려운데 당시는 어떠했겠습니까? 게다가 감옥에 갇혔으니 전도하지 못하게 된 것도 너무나 괴로왔을 것입니다. 

빌립보서 3장 7-9절에 말씀했지만 자신의 모든 유익하던 것을 배설물처럼 버리고 이방인 전도에 나선 바울로서는 기가막힌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다가 교회 동역자들 중에 사도 바울을 시기하던 이들이 기회라 여기고 사도 바울을 비난하고 교회의 영적 권위를 차지하려 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배신감이나 실망감으로 너무나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정말 놀라운 말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큰 시험이 왔으나 시험을 이긴 것입니다. 기쁘면 이긴 것 아닙니까?

사도 바울은 어떻게 이런 시험들을 이길 수 있었을까요?
사도 바울과 함께 하신 예수님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1절에서 자신이 감옥에 있다고 말하지 않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고 했고, 본문에서도 두 번이나 “그리스도 안에서” 라고 쓰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과 늘 함께 하시는 예수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모든 상황에 대하여 깨닫게 하시고 이길 힘을 주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히자 많은 사람들이 ‘바울은 이제 전도를 더 하지 못하게 되었어!’ ‘바울은 끝났어!’ 했습니다. 바울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바울은 “도리어”라고 말했습니다. 

12절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내가 갇혔기 때문에 전도를 못하게 될 줄로 알았더니 도리어 전도를 더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하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의 간증은 이렇습니다. 시위대란 황제를 호위하고, 감옥에 갇힌 죄수들을 감시하고, 로마 도성을 경비하는 특수 부대였습니다. 바울이 아무리 전도를 열심히 하더라도 로마 시위대원들에게 전도하기는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시위대 감옥에 갇혔기 때문에 전도를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13절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시위대 군인들 뿐 아닙니다. 바울을 심문하는 검사와 재판관들, 시위대 감옥에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많은 죄수들, 그 중에는 정치범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전도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전에는 다니면서 전도했는데, 이제는 앉아서 전도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로마 지도층 안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오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기독교 박해사를 살펴보면 로마의 여러 황제들이 기독교인들에게 무자비한 박해를 가하다가 갑자기 로마가 기독교 국가가 됩니다. 당시 기독교인 비율이 7퍼센트 정도 밖에 되지 않던 상황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 중에서 제일 큰 역할을 한 것이 “로마 권력층이 예수를 믿었다” 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4장 22절에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로마 교회 교인들의 인사를 전합니다.
빌 4:22 “모든 성도들이(로마교회 교인들) 너희에게(빌립보교회 교인들) 문안하되, 특별히 가이사의 집사람 중 몇이니라”

여기 “가이사의 집사람 중 몇”이라는 말은 황제의 친척들 내지는 로마 황궁에 있던 고관대작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황제의 친척이 믿고, 황제의 어머니와 딸이 믿고, 나중에 황제도 예수를 믿게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과 함께 하신 예수님께서 감옥에 갇힌 사도 바울에게 이 비밀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너무 기뻤고, 걱정하고 있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이 비밀을 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히자 교인들이 전도자로 일어났습니다. 
14절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느니라

사도 바울은 이 일이 “주 안에서” 되어졌다고 했습니다. 주님이 하신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고 신기한 일입니까? 전도 문이 막혔다고 걱정할 일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감옥에 갇힌 사도 바울의 마음을 너무나 아프게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도 바울이 투옥된 것을 자신들이 교회 지도력을 차지할 기회라 여기고 사도 바울에 대한 중상모략을 일삼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바울 대신에 내가 나서야지!’ 하며 열심히 전도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15절에 나오는 ‘투기와 분쟁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사람들’, 16절에 나오는 ‘바울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을 생각하여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문제도 예수님께서 해결해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런 사람들 때문에 괴로와할 때, 예수님을 바라보다가 결국 전해지는 것이 그리스도요 복음이라면 괴로와해야 할 일이 아니라 기뻐해야 할 일이 아닌가? 깨달아졌다는 것입니다.

18절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우리는 여기서 사도 바울이 정말 예수님과 동행하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훌륭한 사람이어서 이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본성으로는 이렇게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예수님을 믿는지, 예수님을 아는지, 예수님과 동행하는지는 시험을 당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시기와 질투의 시험을 겪어보아야 그가 정말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인지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인지 드러납니다. 

오래 전 영국 런던에는 세 분의 아주 유명한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한 분은 그리스도 교회의 F. B. 마이어 목사님인데, 책을 무척 많이 쓰신 목사님이었습니다. 또 한 분은 기독교 역사상 제일 설교를 잘 하시는 침례교회 스펄전 목사님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한 분은 웨스트민스터교회의 캠벨 몰간 목사님입니다. 

그런데 이 세 분 중에 몰간 목사님이 잠시 미국에 가서 사역을 하게 된 때가 있었습니다. 몰간 목사님과 친구 사이였던 마이어 목사님은 그 분이 미국에 있는 동안 그를 위해서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다가 몰간 목사님이 런던의 웨스트민스터교회를 담임하게 되었을 때 마이어 목사님은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몰간 목사님이 미국이 있을 때에는 기도하기가 좋았는데 서로 같은 도시에서 일하게 되니까 그를 위해서 기도하지 않게 되더군요.” 

어느 날부터인가 마이어 목사님의 마음에 다른 목사님에 대한 시기심이 자꾸 일어났습니다. ‘나는 스펄전목사님 처럼 설교에 인기를 얻지 못하고 몰간목사님 처럼 권위 있는 목회를 하지도 못 하는구나’라는 마음이 자꾸 생겨 하나님께 기도를 했습니다.“하나님, 저의 마음에서 이 시기와 질투를 없애 주시옵소서.”그러나 아무리 기도를 해도 그 시기심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깊이 기도하는 마이어 목사님에게 하나님의 인자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네 기도를 바꾸어라. 질투를 없애 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그들을 위해서 축복의 기도를 해라.’주님의 음성을 들은 후부터 마이어 목사님은 이렇게 기도를 바꾸었습니다.“하나님, 스펄전 목사님과 그 교회를 축복하여 주옵소서. 캠벨 몰간 목사님과 웨스트민스터 교회를 축복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고 부터 마음에 평안과 기쁨과 자유가 가득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자기가 담임하는 교회의 예배에서 마이어 목사님은 이런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몰간 목사님의 교회를 축복해 주셔서 사람들이 가득 메워지게 해주옵소서. 그래서 들어갈 자리가 없어서 사람들이 남거든 우리 교회에 보내 주시옵소서.”그후부터 이 세 사람은 아주 가까운 친구가 되었고, 세 교회 모두 크게 성장했다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믿으면 시험을 두려워 할 이유가 없습니다. ‘감당치 못할 시험’은 주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작은 시험만 주실 것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시험은 엄청난 것이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걱정할 것이 없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얼마든지 이기게 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는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 순교했습니다. 그런 시험을 당해도 스데반집사는 이겼습니다.

행 7: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어떻게 이런 시험도 이길 수 있습니까? 항상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행 7:55-56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예수님을 믿었다면 이렇게 믿어야 합니다.

2007년을 시작으로 한국교회에 [Again 1907] 이란 주제로 연합집회가 많이 열렸습니다. 그 집회를 계기로 하나님께서 우리 한국에 새 부흥을 주실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모여 부르짖고 기도했는데 특별한 역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실망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새 부흥을 일으키고 계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실망하는 것은 1907년 당시와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나기를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1907년 당시에는 한국 교회와 교인들의 신앙적인 뿌리가 약했습니다. 성경적 기반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확신도 없고, 무엇이 죄인 줄도 모르고 살던 시절이었습니다. 그 당시 하나님께서는 한국 교회에 하나님이 살아계심과 십자가 복음의 감격을 부어주셔야 했습니다. 성령이 임하였고. 죄가 깨달아졌고, 공개 회개가 터지고, 속죄의 감격이 임하고, 찬송의 기쁨이 오고, 기도의 능력을 받고, 은사를 체험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전도 문이 열리면서 한국 교회에 큰 부흥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100년이 지난 지금 한국 교회는 당시와 많이 달라졌습니다. 말씀의 기초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든든해졌습니다. 성경공부, 큐티 수준이 세계 최고 수준입니다. 성령 하나님이 이미 임하심도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 부흥을 주실 때, 1907년 처럼 하실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부흥은 십자가 복음을 아는 것과 성령님을 받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눈이 열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알고 친밀히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일이 이미 시작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24 시간 예수님을 바라보며 일기를 쓰는 운동’을 시작하였는데, 우리만 아닙니다. 도처에서 예수님에 대한 갈망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서점에 가 보십시오. 살아계신 예수님에 대한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이런 적이 전에는 없었습니다. 놀라운 부흥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며, 예수님과 동행하면 감당 못할 시험이 없습니다.

지난 남성부흥회를 통하여 교회 안에 놀라운 전도 부흥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갈렙교구 은빛축제는 전도대상자가 에상보다 더 많이 오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일은 처음입니다. 교구마다 전도의 열기가 뜨거워졌습니다. 손현보목사 말씀 중 깊은 인상을 받은 말씀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한 남자가 집에 찾아와서 다짜고짜 목사님의 뺨을 때리더랍니다. 그때 마음 속으로 주님께 물었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그때 주님이 말씀하시더랍니다.‘더 맞아라!’그래서 아무 대항도 하지 않고 맞았답니다. 그리고 그가 하는 말도 순하게 듣고, 잘 대접해 드렸답니다. 그가 나중에 장로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마음에 계신 사람은 시험될 일이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감옥에서 “오 주여, 저를 언제까지 감옥에 두시렵니까?”하며 밤낮 슬퍼하고 울고 소리지르며 “괴롭다. 죽겠다” 하였다면 이런 역사가 일어났겠습니까? 감옥 바깥의 동역자들에 대하여 원망하고 불평하며 “억울하다, 분하다, 슬프다.”하였다면 주님의 역사가 일어났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사도 바울 처럼 살 수는 없을까요?
물론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도 오셨기 때문입니다.

열왕기하 7장에 보면 아람 군대가 엘리사를 죽이려고 도단 성을 포위하였을 때, 엘리사의 종이 기절초풍하며 두려워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 엘리사가 종의 눈을 열어 달라고 기도하여 종의 눈이 열리는데, 하나님의 천사들이 불 말과 불 병거를 타고 둘러 싸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두려움은 다 사라졌습니다.
천사를 보고도 이 정도이면 예수님을 알면 어떻겠습니까?

지난 주 장로수련회, 교회 강단에서 함께 주무셨습니다. 다니엘이 성전에서 자다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수련회 중 또 하나 제게 깊은 감동을 준 것이 있습니다.

장로님들께서 앞으로 교회 안에서 어떤 자리, 어떤 직책에도 연연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한 것입니다. ‘어떤 일을 맡겨도 감사하며 순종하겠습니다. 아무 일을 맡겨 주지 않아도 나 아니면 안되다 하지 않고, 오직 예수님과 교인들을 섬기기로 결단한 것입니다.’ 
예수님 한 분이면 충분한 믿음이 아니면 이런 결단이 되겠습니까? 너무 감사하고 존경스러웠습니다. 

시험거리가 많아서 힘드신 분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약 1: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입니다. 
하나님이 무정하셔서 그러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답은 시험거리를 없애주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오직 주 예수님을 바라보겠습니다! 눈을 열어주소서! 귀를 열어주소서.” “어떤 시험도 넉넉히 이기는 자가 되게 하소서.” 
(유기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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