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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정신 건강을 지키기 위한 씨름 (막 5: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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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 건강을 지키기 위한 씨름 (막 5:1-15)

저는 귀신 내쫓는 사역을 믿습니다. 저도 그런 사역을 경험해 본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 사역의 절반은 병자를 고치는 것이고 귀신을 내쫓는 것이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것을 부인한다면 예수님의 제자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문제는 예수님께서 비중을 두셨던 만큼 귀신들림이나 귀신 내쫓는 사역이 흔하게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 대신 그 당시 사람들이 알지 못했던 또 다른 질고가 인류에게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의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의 시대처럼 귀신들림 현상을 널리 보지 못하고 또 그것을 내쫓는 일도 널리 경험하지 못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 귀신들의 숫자가 줄어들었기 때문인가. 예수님 시대에는 귀신이 더 많았는가. 아니면 오늘날 우리의 능력이 부족해서 그런가. 

그러나 그러한 해석은 불충분하다고 생각됩니다. 귀신이 줄어들었다고 말할 수도 없고 우리의 능력이 부족해서 그렇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더 중요한 이유는 의미의 변화가 일어났다고 봐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 사역의 중요한 부분은 현대인에게 더 이상 의미가 없는 것이 돼 버리고 말 것입니다. 

반대로 성경에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지만 오늘날 현대인의 삶에 간과할 수 없는 문제가 존재하는데 그것은 바로 정신질환의 문제입니다. 정신질환은 오랜 세월동안 제대로 이해받지 못했습니다. 과거 사람들은 정신질환이 귀신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무당에게 데리고 가고 쇠줄로 묶어놓았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거라사인 사람을 쇠줄로 묶어 놓은 것처럼. 이십세기에 들어서야 비로소 정신질환을 하나의 질병으로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더 인간적인 방법으로 치유하는 방법을 개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외적인 요소도 한몫을 하지만 생리적인 요소도 중요한 이유가 된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호르몬과 화학적 이유로도 사람이 정신적인 고통을 겪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입니다. 마치 갱년기 질환이 호르몬 변화로 말미암는 것처럼. 그러다보니까 인간의 현실과 성경의 말씀을 대조해 볼 때 괴리현상이 발생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편으로는 성경이 자주 언급하는 귀신들림 현상이 현대인의 경험 속에서는 제한되어 있는데 또 한편으로는 현대인에게 아주 잦은 정신질환의 문제가 성경에서는 거의 다루어지지 않는 이 괴리현상을 우리가 해결하지 못하면 우리는 성경말씀이 우리에게 더 이상 상관이 없는 문서라고 생각해 버리게 되고 그리고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의존하지 않는 서로 빗나가는 그런 결과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인의 현실에 맞추어서 성경을 다시 읽어봐야 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무리한 해석을 걸러내야 됩니다. 

첫째는 모든 문제의 핵심에 마귀가 있다는 식의 해석입니다. 이게 바로 베레아파의 설명인데 이건 사실이 아닙니다. 이건 사실이 아닌 것뿐만이 아니고 병든 사람에게 약 대신 병을 주는 생각입니다. 정신질환을 앓는 사람에게 이게 귀신 때문이라고 말하게 되면 그 사람은 정신질환을 겪는 것도 괴로운데 이제는 자기 속에 귀신이 있다는 악담까지 듣게 되기 때문에 이것이 문제의 해결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닙니다. 귀신을 내쫓아 주든가 아니면 섣불리 상황을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모든 질병, 모든 정신적인 질환이 마귀로 말미암는다 이런 식의 해석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병자들을 고치실 때 항상 귀신을 내쫓음으로 고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성경말씀을 올바로 이해해서 올바른 분별력을 알지 못하면 사람을 치유하는 게 아니고 더 병들게 만들고 사람을 위로해주지 못하고 더 번민을 안겨다 줄 수도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걸러야 하는 해석은 예수 믿는 사람은 정신질환을 앓으면 안 된다는 주장입니다. 지금까지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다보니까 그리스도인 중에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사람들은 그 사실을 숨기려고 합니다. 이것은 도와주지는 못할망정 더 심화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슨 주장과 비슷하냐면 신앙이 좋은 사람은 병을 앓으면 안 된다는 주장과 비슷합니다. 누가 어디서 이런 생각을 얻었는지 알 수 없지만 이건 전혀 성경적이지도 않고 인간의 경험과도 맞지 않는 괴변, 독선, 고집, 광신에 불과합니다. 

사도바울에게도 육신에 가시가 있었지요. 디모데에게도 위장병이 있었습니다. 신유은사가 있는 사람이라도 본인은 병든 경우가 많아요. 오늘날 세계적인 부흥사인 베니 힌 목사님은 본인이 고혈압과 심장질환을 앓고 있습니다. 남의 병은 고치지만 자신에게 병이 있습니다. 과거 존 윈버 목사님은 완전히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이었어요. 병이 많았습니다. 

이런 억지에서 어떤 주장이 나오느냐면 신앙이 좋은 사람은 병원에 가지 말고 약을 의존하지 말고 오직 기도와 믿음으로 고쳐야 된다는 억지와도 비슷한 것입니다. 크리스천 사이언스가 이런 주장을 하고 근본주의에도 이런 주장을 하는 교회가 있습니다마는 이것은 우스운 것을 떠나서 아주 위험한 발상입니다. 범죄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최근 미국 오리건 주의 어느 젊은 부부가 아이가 호흡곤란을 일으켰는데 병원에 데려가지 않고 앰뷸런스를 부르지 않고 하나님이 고쳐주실 것이라고 기도만 하다가 아기가 죽어서 입건된 일이 있었어요. 문제는 그 어머니는 앰뷸런스를 부르고 싶었지만 남편의 독선 때문에 하지 못했다는 사실이에요. 그 남편의 독선. 기도해야 된다, 기도로 나아야 된다, 병원을 의존하면 안 된다는 독선 때문에 어머니는 자기 아이가 죽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십일 세기에도 이런 일이 발생하는데 이런 일은 하나님에게 전혀 영광되지 않고 오히려 많은 사람들에게 이 시대에 예수님을 믿는 것이 저런 것이라면 나는 예수 믿지 않겠다, 신앙에 대해서 실망하고 신앙인의 고집에 대하여 환멸을 느끼는 결과를 얻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만일 누가 예수 믿는 사람은 감기 걸리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고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우습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은 정신적인 질환이 있으면 안 된다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누구는 원해서 앓습니까. 살다보면 생기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도. 

오늘 본문을 보면 거라사인의 귀신들린 사람이 자기 이름이 군대라고 말했습니다.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많다는 말을 썼습니다. 사람의 몸을 병들게 하는 원인이 많은 것처럼 사람의 정신이 아프게 하는 원인도 많습니다.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저는 정신과 의사가 아니기 때문에 의학적인 것을 여러분에게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현대 도시인 중에 어떤 형태든 간에 정신적인 질환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진다는 사실입니다. 우울증에서부터 정신분열증, 강박, 망상, 게다가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사람들까지 포함하면 아마 놀라울 정도의 통계가 될 것으로 봅니다. 최근에 신문에 보니까 우리나라 아동의 10가 우울증을 앓고 있다는 통계가 있던데 아동이 10라면 성인은 훨씬 더 많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단순하게 말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군대라는 말이 우리가 많다는 뜻이었던 것처럼 사람의 마음을 병들게 하는 원인도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한 해석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스트레스 때문이다, 맞는 말이에요. 그러나 스트레스 없는 사람 나와 보세요. 현대인의 삶에 스트레스라는 것은 배제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트레스가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생각해야지 스트레스만 탓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사랑만 주면 된다는 생각인데 사랑이 필요하지요. 그렇지만 사랑만 해준다고 해서 질고가 낫는 것은 아니에요. 아픈 사람을 사랑해봤자 여전히 아픕니다. 외로운 사람을 사랑한다고 외로움의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닙니다. 왜냐하면 외로움은 실존적인 것이기 때문에. 사람이 약해서 그렇다. 요즘 사람들이 약해져서 그렇다. 

맞는 얘기에요. 몸이 약하니까 병드는 것처럼 마음이 약하니까 병이 들겠지요. 그러나 이것도 역시 마치 사람이 잘못해서 병드는 것처럼 사람을 탓하는 것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약하지 않은 사람 어디 있습니까. 약하지 않은 사람, 강한 사람, 바늘로 찔러도 피한방울 안 나는 사람, 이런 사람은 정신질환을 앓지는 않겠지만 그 대신 굉장히 악한 사람일 것입니다. 사람이 약하다는 말은 여리다는 뜻이고 착하다는 뜻입니다. 착하기 때문에 그만큼 인생의 아픔을 겪을 때 그것이 질병으로 발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기도하는 사람은 정신질환을 앓으면 안 된다는 주장입니다. 너무 그러지 마세요. 기도를 해 주던가. 모든 사람이 슈퍼맨이 되어야 된다는 식의 발상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다만 한 가지 힌트를 얻을 수는 있습니다. 이 귀신이 예수님께 뭐라고 부탁했느냐면 10절에 ‘이 지방에서 내어 보내지 마시기를 간절히 구하더니’ 거라사인 지방이 어때서 이 지방에서 내어보내지 말라고 부탁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사람이 어디에 사느냐에 따라서 정신건강에 차이가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현대인들은 다 도시에 삽니다. 다 도시인입니다. 도시가 주는 편안함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도시가 주는 스트레스가 만만치 않습니다. 

과거 인류가 농촌에서 살 때는 오늘날처럼 정신적인 질병이 많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땅을 일구며 일하고 해 뜨면 일어나고 해가 지면 자고 또 애기가 생기는 대로 갖고 세상 돌아가는 것에 대해서 별로 관심을 갖지 않고 자기 삶에 충실하고 자기 몸으로 일하고 그때에는 불면증도 없고 위장병도 없어요. 강박증도 없어요. 인생이 좀 지루하고 느릴 뿐이지요. 덜 풍족했겠지만 그러나 원래 인류는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십세기가 되면서 놀랍게 빨라졌습니다. 하지만 늘 그렇게 빠르게만 살아야 되는 것은 아닙니다. 시속 100㎞로도 부족해서 앞에 가는 차에게 빵빵 하면서 가는 분들, 어디를 그렇게 서둘러 가는지. 어차피 갔다가 다시 돌아와야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개개인을 탓할 수는 없지만 오늘날 우리가 사는 방식을 탓할 수는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방식에 문제가 있습니다. 물질문명은 정신적인 소외감과 불안감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극심한 경쟁, 미래에 대한 불안, 이것이 우리의 마음을 병들게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남이 우리를 괴롭히는 게 아니고 우리가 우리 자신을 괴롭힙니다. 이 거라사인의 귀신들린 사람이 돌로 제 몸을 상하게 하고 있었던 것처럼 우리가 우리 자신을 괴롭혀요. 자녀를 괴롭히는 건 부모에요. 부모가 자녀를 괴롭히고 또 내가 내 자신을 괴롭힙니다. 그래서 소화가 되지 않고 잠을 못 이루고 불안하고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귀신의 목적은 인간이 스스로를 무너뜨리게 하는 것입니다. 반인간적 파괴적 생명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정신과 의사요 저자였던 칼 융이 말하기를 마귀가 인간의 영혼을 공격할 때 인간의 영혼을 보호해주는 것이 두 종류가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인간의 영혼 주변에 그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를 에워싸서 그를 지켜주는 것, 둘째는 영혼 내면에 마귀보다 더 강한 존재가 있어서 마귀를 물리치는 것, 이 두 가지 밖에는 길이 없다고 봤는데 이것은 상당히 기독교적인 관점입니다. 우리는 둘 다 필요합니다. 

첫째는 교회와 사랑의 필요성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교회 또 우리 주변에 우리를 사랑하고 위하는 사람들이 많이 필요합니다. 사람은 혼자서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에요. 가정이 있어야 되고 교회가 있어야 되고 사람은 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서로 문자도 주고받고 밥도 같이 먹고 같이 운동도 하고 놀기도 하고 농담도 하고 같이 대화하고 같이 기도하는 것이 절대적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이것이 필요합니다. 가장 위험한 영혼은 어떤 영혼이냐. 혼자 있는 영혼입니다. 

만일 여러분의 자녀가 유학을 가서 혼자 있는 것 같으면 빨리 가서 데려 오세요. 애 교육시키려다 병들게 만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무실에 독방을 만들지 말고 터서 차라리 칸막이를 만들면 자기 프라이버시도 보존이 되고 공동체 의식도 느낄 수가 있지요. 식사 시간에 누가 혼자 식사하는 것 같으면 같이 가세요. 같이 데리고 가세요. 사람은 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둘째로 그보다 더 필요한 것은 우리 마음속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능력으로 거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빈집의 위험에 대해서 말씀하셨어요. 귀신이 사람을 떠나간 후에 물 없는 곳을 다니다가 갈 길을 얻지 못하여 다시 돌아와 보니 집이 비어있고 소제가 돼 있어서 자기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빈 집이란 예수님이 거하지 않는 빈 영혼의 위험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빈 집은 위험합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예수님이 거하셔서 성령의 충만함을 구하고 소리를 내서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입으로 고백하고 성령 충만을 구하고 우리 안을 하나님의 생명으로 채워야 어둠의 권세가 우리 안에 쳐들어오려고 하지 않습니다.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물질적인 풍요는 인간을 정신적으로 더 괴롭게 만들었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과거로 돌아야가 되느냐. 그럴 수는 없습니다.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후에 먹기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현실을 기정사실화하고 여기에서 생존하는 법을 배워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조금씩 아픕니다. 아프지 않으면 사람이 아닙니다. ‘아프기 때문에 젊은 것이다’라는 책이 있는 것처럼 아프기 때문에 사람이에요.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건강한 자는 의원이 필요 없고 병든 자라야 필요하다’ 여전히 예수님은 우리를 고치십니다. 예수께서 거라사인의 한 사람을 고쳐주시기 위하여 배를 타고 건너 가셨던 것처럼 예수님은 먼 길을 거쳐서 우리를 도우러 오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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