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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물가의 여인 (요 4: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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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가의 여인 (요 4:3-14)


찬양대의 귀한 찬양 감사드립니다. 참 아름답게 하시는데 저도 한 곡 부르고 싶은 심정입니다. 제가 부르고 싶은 노래의 곡목은 바로 ‘만남’입니다.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그것은 우리의 바램이었어. 잊기엔 너무나 슬픈 운명이었기에 바랄 수는 없지만 영원을 태우리. 돌아보지 마라. 후회하지 마라. 아 바보 같은 눈물 흘리지 마라 사랑해. 사랑해 너를, 너를 사랑해>가사를 불러 드리지만 이미 여러분 머릿속에서 곡조를 생각하고 계실 것입니다. 

노사연씨의 「만남」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이유는 노래를 듣다보면 첫사랑의 기억, 지금은 달라진 고향의 그 언덕, 어릴 때 뛰놀던 친구들, 그들과의 아름다웠던 사귐들에 대한 기억이 떠올라 우리로 하여금 아련한 옛 추억으로 데려 가기 때문일 것입니다. 인생은 만남이라고 그렇게 이해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은 지금까지 어떤 만남을 가져 오셨습니까?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면 예전에 꿈꾸고 반드시 그렇게 살겠노라 했던 소망하는 자리에 와 있는지, 아니면 내가 원했던 모습은 아닌데 지금 이렇게 되었을까하는 잘못된 만남의 아픔을 갖고 계시지는 않습니까?오늘 사마리아 수가성의 한 여인은 무슨 사연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만남에 대한 갈증이 있는 여인이었습니다. 인생의 갈급함이 있었습니다. 채워지지 않는 인생의 안타까움이 수가성 여인 속에 있었다는 것을 본문을 통해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남편을 무려 다섯 번이나 바꾸어 버렸던 여인이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이런 여인을 보고 능력 있는 여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남자가 얼마나 못났으면 여자한테 다섯 번이나 바뀌는 중에 한 남자가 됐을까 얘기하지만, 어쨌든 한명의 남편과 사는 것도 힘든데 다섯 번이나 바꿀 정도면 그녀 인생에 깊은 갈증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만남을 그토록 사모했던 수가성 여인, 그러나 이제는 사람들과의 만남을 회피하고자 합니다. 

사람들이 가장 나타나지 않는 중동의 정오 뙤약볕 아래 우물에 물을 길으러 갑니다. 그 시간에 물을 길으러 간 데는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더 이상 만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만남에 대한 기대들 속에서 오로지 다가왔던 것들은 깊은 상처와 아픔밖에 없다는 것을 이미 경험한 그녀는, 지금 함께 살고 있는 남편도 그 마음속에는 남편이 아니라고 생각한지 오래였던 외롭고 불행한 여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삶이 송두리째 바뀌어집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도 겪으셨지만, 사람이 변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듭니까? 그래서 좀 주변 사람이 변하면 “이 사람이 이제 죽으려 하나보다” 할 정도로 정말 변화가 힘이 듭니다. 유럽의 호전적인 민족이었던 색슨족은 유럽의 아버지라 불렸던 카롤루스 대제의 정복으로 기독교화 되었습니다. 그들은 개종을 선언하는 세례를 받기로 동의했지만, 한 가지 조건을 달았습니다. ‘세례를 받을 때 오른 팔은 물속에 잠기지 않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세례란 이전 삶과 완전히 단절되어 새로운 삶으로 탄생하는 것임을 알았으나 완전한 변화를 원치 않았던 것입니다. 자신들의 호전성과 정복을 지속하기 위해 오른손은 포기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변화란 그렇게 힘든 것입니다. 깊이 뿌리박힌 습관을 바꾸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해마다 1월이면 담배인삼공사의 매출액이 뚝 떨어집니다. 정초에 ‘담배를 끊겠다.’고 결심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담배인삼공사의 관계자들은 매출액 감소를 조금도 걱정하지 않습니다. 2월이면 다시 매출액이 예년 수준으로 회복되기 때문입니다. 올해도 그런 예상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작심삼일’이라 하는 것 같습니다. 

습관이나 삶의 방식을 바꾸려면 뼈를 깎는 아픔이 수반되어야만 합니다. 그런 노력과 희생이 없이는 결코 변화되지 않습니다. 신앙인도 하나님이 잘못됐다고 말씀하시더라도 그것이 내게 큰 이익과 성공을 보장하는 것이라면 그것을 포기하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께 한 번 만 눈 감아 달라고 요구합니다. 마치 온 몸이 물속에 들어가도 오른 팔 만은 물속에 집어넣기를 거부했던 색슨족처럼 말입니다. 이 변화되지 않은 색슨족의 오른팔 때문에 지금까지 유럽에서는 민족 간의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기독교인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이교도들과 전혀 구별이 되지 않는 모습이 지속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에 보면 수가 여인은 정말 주변 사람으로부터 철저하게 거부당한 여인입니다. 여기 6절에 보면 제 6시에 물을 길러 우물가에 나아왔습니다. 이스라엘 시각으로 6시면 낮 12시 정오입니다. 사막지대에선 가장 더운 시각 아무도 우물가에 나오지 않는 시간을 선택한 것입니다. 사람 만나는 것이 부담스럽고 싫었습니다. 그녀는 고립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바로 우리 시대의 삶의 풍경이 아닌가요? 한 아파트에 살아도 옆집에 누가 사는지를 모릅니다. 

이웃집에 사는 사람이 싸늘한 주검으로 몇 달을 지나 시체가 썩어가도 알 수 없는 시대입니다. 이웃이 문을 열지 않는 것은 이해한다 하더라도 스스로도 문을 닫아걸고 이웃을 외면해 버린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립되어 버렸고 우리는 뼈 속까지 스며온 춥고 떨리는 외로움을 당연한 존재의 모습으로 수용하게 된 것입니다. 
  
어찌 그뿐입니까? 엄청난 상처를 가진 인생입니다. 물론 이 세상을 살아가는 그 누구도 상처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인생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 인생이란 정도 이상의 상처를 끌어안고 자기 상처를 치유하지 못한 채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대표적인 특성은 이웃을 믿지 못하고 이웃에 대하여 공격적이라는 것입니다. 지나치게 필요 이상으로 자신에게는 적용하지 못하는 정의감을 이웃들에게 강요하는 사람들도 거의 예외 없이 과거의 상처에 지배당하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이웃들이 평범하게 던지는 말도 순수하게 받지 못하고 다시 거기에 의문부호를 던집니다. 본문에 나타난 이 여인의 모습이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는 요청에 줄 수 있다/ 없다하면 될 것인데 이 여인의 대답을 들어보십시오. 9절입니다.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여기 유대인들에게 멸시 당해온 사마리아인의 역사적 상처가 이 여인의 말에 묻어나고 있지 않습니까? 유대인들은 그들이 혼혈인이 되었다는 사실 하나로 사마리아 땅의 사람들을 사람취급을 안한 것입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놈들의 빵을 먹는 자는 돼지의 살코기를 먹는 것과 꼭 같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돼지를 부정한 동물로 생각하여 절대로 돼지고기를 먹지 않습니다. 그만큼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부정하고 불결한 존재로 생각한 것입니다. 이런 사마리아인으로서의 내면적 상처가 불쑥 튀어 나온 것입니다. 할 수 있으면 예수조차도 피하고 싶었습니다. 나를 제발 괴롭히지만 말고 그냥 버려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마른 인생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예수님과 물 길러온 이 여인과의 대화에서 제일 흥미로운 대화의 역전은 “물 좀 달라”던 예수님이 갑자기 이 여인에게 “네가 내가 누구인줄 알았다면 내게 오히려 물을 달라고 했을 것이고 그러면 나는 네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생수를 네게 주었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이 목마른 인생인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얼마나 목이 말랐으면 남편을 다섯 번이나 바꾸었을까요? 목마른 인생의 특성이 무엇입니까? 한 자리에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애인을 바꾸고, 파트너를 바꾸고, 직업을 바꾸고, 직장을 바꾸고, 종교를 바꾸고 심지어 교회를 바꾸어 봅니다. 그래도 만족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의 인생은 방황입니다. 끝없는 목마름, 타는 목마름으로 허덕이는 인생입니다. 

지난 4월 세기의 관심을 끈 영국 황재자인 윌리엄 왕자의 결혼식을 보셨을 것입니다. 윌리엄 왕자는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 비의 첫째 아들입니다. 여러분, 다이애나 비를 다 아시죠? 우리 시대의 신데렐라인 비운의 다이애나 비는 어쩌면 목마름 속에 절규하던 여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본래 다이애나는 영국의 스펜서 백작의 셋째 딸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심리학자들은 그녀의 나이 6세 때 어머니가 자녀들을 버리고 돈 많은 사업가를 따라 나설 때부터 그녀의 목마름은 시작되었다고 진단합니다. 

부모에게 버림받은 분노와 상처는 다이애나를 무엇으로도 쉽게 채워지지 않는 목마른 여인이 되게 한 것입니다. 촬스 황태자와 결혼 후 카밀라 파카볼스와의 염문 사건이 터지자 그녀는 다시 버림받은 내면의 고독한 공간을 채우고자 대리 만족에 매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머리 손질에만 5천 4백달러를 썼고 몸매 관리와 의상 구입에만 년간 87만 달러(한화 7억 5천만원)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리고도 채워지지 않는 허전한 마음의 공간을 달래지 못해 5번의 자살기도와 거식증에 시달리며 계속해서 애인을 바꾸었습니다. 여기에서 그녀가 다섯 번이나 자살을 기도한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녀의 절망과 고통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혼한 그녀는 남편의 외도에 보복하듯이, 많은 다른 남성들과 교제를 하며 살았습니다. 그것은 한 여인의 사랑의 갈구였습니다. 자신의 수많은 재물도, 왕세자비라는 명예도, 영국왕실의 권력도 그녀를 정상적인 생활로 만들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영락없는 우리 시대의 사마리아 여인이 아닙니까? 그리고 우리는 그녀의 허무한 종말을 압니다. 그러나 성경에 나타난 우물가 여인의 이야기는 그 종말이 비극이 아닌 해피 엔딩이었습니다. 그 차이가 무엇이었습니까? 도대체 이 우물가 여인이 발견한 인생의 해답은 무엇입니까? 해답은 단순합니다. 예수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자, 예수를 만난 순간 이 우물가 여인에게 어떤 변화가 왔는지를 주목하십시오. 우선 사람들을 피해만 다니던 이 여인이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갔습니다. 지금 이 여인이 얼마나 급한지 잠시도 지체하지 않았습니다. 집에다 자기가 가져온 물동이를 놓아두고 동네로 갈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들고 온 물동이도 버려둔 채 자기가 살고 있는 동네로 뛰어갔습니다. 생수가 되신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렇게도 만나기 싫어하던 동네 사람들에게 가서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에게 한 번 와보라(29절)”하고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한번 와 보십시오. 내가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나의 모든 행적을 알고 있는 이 분을 한번 만나 보십시오.“ 
  
그녀는 더 이상 고립된 인생이 아니라 홀연히 연결된 인생을 살기 시작합니다. 그녀는 이제 자신의 상처를 넘어서서 자기 이웃들에게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인생으로 변했습니다. 더 이상 그녀는 목마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영원한 생수를 마신 것입니다. 이제 하나의 매우 중요한 질문만이 남게 됩니다. 도대체 예수는 누구이신가? 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예수가 누구이기에 이 고립되고 상처 나고 목마른 인생을 이렇게 한순간에 바꿀 수 있단 말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본문에 나타난 예수님에 대하여 오늘을 사는 평범한 우리의 이웃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독특한 면모가 있습니다. 우선 그는 이 여인의 모든 것을 알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여인과 대화중에 갑자기 대화의 흐름을 깨시고 이 여인을 당황케 하신 말씀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네 남편을 불러 오라”고. 여인의 대답이 무엇이었습니까?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 18절의 예수님의 이어지는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 되도다” 그렇다면 그는 분명 인간 이상의 분이 아닙니까? 그래서 성경은 예수가 메시아이고 하나님이시라고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로 이 여인의 모든 것을 아시는 그분이 이 여인을 찾아 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이 여인의 만남은 우연히 아니었습니다. 4:4을 읽어 보십시오.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 당시 사마리아 인들을 경멸하던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땅을 피해 다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땅을 반드시 통과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겠는지라”라고 번역된 말은 헬라어로는 ‘데이’인데 이 말은 ‘반드시 해야 한다’는 의지가 담긴 말씀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한 여인을 만나기 위해서 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의도적으로 이 땅에 오셔서 우물가에 먼저 도착하여 이 여인을 기다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6절에 보면 “예수께서 행로에 곤하여" 예수님은 이 한 여인을 만나기 위해 예루살렘에서 이른 아침 출발해서 수가성의 우물가에 도착할 때까지 줄잡아 대 여섯 시간을 뜨거운 햇볕을 받으며 걸어오셨다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예수님께서 대 여섯 시간의 뙤약볕의 사막 길을 걸어 오셨을까요?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세상에 버림받은 이 한 여인을 포기 할 수 없는 사랑의 발걸음입니다. 남편도 그리고 이웃도, 더 나아가 자신도 포기한 이 여인, 마지 못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바로 이 여인을 구원하기 위해 그 뙤약볕도 마다하고 여기까지 걸어 온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번 터치 153 새생명 축제는 우리가 기도하는 태신자들에게도 큰 축복이 되겠지만 이미 예수 믿는 우리 모두에게 더 큰 도전과 생명력을 선사하는 집회가 될 것입니다. 우리의 가슴과 영혼에 복음의 불을 당기는 기폭제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정말 거듭나고 구원받은 자라면, 다른 영혼을 위해 복음을 전하겠다는 열망이 불붙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구원의 감격과 은혜가 곧 복음 전파로 발산되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의 일곱 집사님들부터 시작해서 오늘까지 영혼 구원사역을 위해서 애쓰는 분들은 모두가 한결 같이 그 속에 복음 전파에 대한 불타는 열정을 가진 분들이었습니다. 이처럼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의 모습이 뜨겁고 감격에 차 있을 때 불신자들의 마음도 뜨겁게 달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의 그토록 바라시는 소원은 죄인 된 우리가 구주이신 예수님을 믿어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요 6:40). 이를 위하여 예수님이 우리와 직접 접촉할 수 있는 육신으로 오셨습니다.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이 예수님과 만나야 하고, 터치 153 새생명 축제도 바로 이러한 거룩한 만남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와의 접촉점이 있는 곳에만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오늘 수가성 여인은 주님과의 접촉과 그 결과인 변화입니다. 주님과의 접촉이 없는 곳에는 영혼의 변화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주님과의 접촉이 있어야 구원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태신자가 복음을 들을 수 있도록 교회로 인도하는 것은 너무도 중요합니다. 

지금 물을 길러 온 이 여인에게 뭐라고 말씀을 하십니까?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목말라하며 갈증을 느끼고 있는 수가 여인에게 “너 고독을 고치려면 너와 같이 사는 남자와 대화를 시도해라”, “부부 싸움을 할 때는 어떠한 경우에든지 인내하라”, “선한 일을 몇 가지하면 양심의 가책이 없어진다”라고 상담자처럼 말하시지 않으셨습니다. 13, 14절 말씀을 봉독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아멘. 예수님께서는 ‘나는 생수다, 나를 마셔라. 그리하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 보세요. 이 수가 여인은 몸부림치듯 절규합니다.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라고 말하며 예수님께 바짝 다가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샘을 팝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샘은 파지만 물을 얻지는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재물의 샘을 파고, 어떤 사람은 건강의 샘을 파고, 어떤 사람은 출세의 샘을 파고, 어떤 사람은 진급의 샘을 파고, 어떤 사람은 진학의 샘을 팝니다. 그런데 열심히 샘을 파지만 물을 얻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시기만 하면 세상이 줄 수 없는 해답을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다양하지만, 해답은 하나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인생의 진정한 해답이 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아침! 만일 여러분을 만나시고자 그분이 오늘 여러분을 이곳에 오게 하시고 지금 나를 기다리고 계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나의 모든 것을 아시는 그분 앞에 솔직하시겠습니까? ‘내가 무척 외로웠다고--그동안 인생의 상처로 많이 아팠다고--목말랐다고--고백하시겠습니까? 내게 이제 주님이신 당신이 필요하다고?주께서 나를 구원해 달라’고 그렇게 구하시겠습니까? 바로 지금 이 순간 말입니다. 성경은 “지금이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바로 지금이 구원의 날 이로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지금 당신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요 구주이신 예수님 앞에 오십시오. 지금 오십시오. 지금 결단하십시오. 지금이 여러분의 변화의 기회입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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